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67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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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명백하게, 누군가한테 살인을 당했다.
사나운 눈보라의 속삭임이 성 전체를 휘감는 가운데,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신들과 사용인이 모두 1층 홀에 모였다.
“에머슨 필. 도나 말라. 케니 필리스. 세 사람이 맞나.”
“예. 각각 잡역부, 세탁 담당, 주방보조입니다.”
“….사인은?”
“에머슨 필의 경우 단검에 의한 출혈. 본성 하인용 뒷문 앞입니다. 도나 말라는 동사. 여자 사용인 숙소와 본성 사이에서 발견됐으며 케니 필리스, 이 자는….”
“계속하게, 세드릭 경.”
“….케니 필리스의 시신은 발견 당시, 사인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음. 알머스, 보테르. 잠시 이쪽으로. 가주님, 다소 불경한 사체이나 이건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판단에 주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세드릭 경은 어머니 옆에 있는 우리 남매의 눈치를 살펴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덩치가 좋은 하인 둘을 불러 천으로 덮인 사체를 가렸다. 아버지가 그 앞에 다가가자 조심스레 천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케, 케니…. 우웁! 우웨에엑!
“이건….”
세드릭이 간과한 게 있다면, 마부 보테르는 그런 광경에 전혀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리는 사이 보테르가 구역질을 하며 허리를 숙였고, 덕분에 어머니 옆에 있던 내 눈에도 그 시체의 모습이 보였다.
몇 달 전, 아버지와 가을 사냥을 같이 나간 적이 있었다. 하인들과 개들이 사슴을 몰고, 어설픈 활 솜씨에 코앞까지 다가온 사슴도 맞추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그날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사슴이었다. 핏발이 오른 커다란 눈망울. 나무 거치대에 매달린 네 다리. 항상 환하게 웃던 하인의 날카로운 단검이 사슴의 배를 쭉 가르고, 쏟아지는 피와 내장.
놀라서 말도 못 하는 나와 그걸 보고 또 환하게 웃는 기사들. 아버지들.
필리스의 얼어붙은 시신은 그 사슴을 떠올리게 했다.
와락!
“어, 어머니?”
“쉬이이. 우리는 인제 그만 들어가자꾸나. 아버지와 기사들이 알아서 해결하실 테니.”
“하지만….”
“얼른!”
어머니의 엄격한 손길에 우리 남매에게 그 아침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 명의 죽음. 세 구의 시신. 여전히 눈보라는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으며, 기사들은 그 어떠한 들어온 흔적도, 나간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우리 사용인, 혹은 기사들 중에…. 누군가 저들을 죽였어.’
1층에 모여있던 익숙한 얼굴들 중,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텔드마이어 가를 가득 채운 실체 없는 불안감이, 공포와 불신이라는 모습으로 복도를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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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안전한 곳에 두려고 하셨어. 우리는 각자의 방 대신 어머니 방에서 같이 머무르게 되었고, 기사들이 항상 그 문 앞을 지키게 되었지.”
“사, 살인범을 경계한 건가요?”
“….슬프게도, 그날 아침 이후로 살인범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어졌단다.”
알드리치는 작게 떨고 있는 루실라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며 로켓 속의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하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거든. 죽은 세 사람 모두 기침병을 앓고 있었다. 에머슨은 바로 전날 침을 마구 튀기며 기침한다고 하녀장과 사소한 다툼이 있었고, 도나는 같은 숙소의 사용인들에게 자기 손수건 빨래하는 게 성가시다고 말했지. 케니는 원래 폐가 좀 안 좋은 사람이었어. 다들 기침을 하긴 했지만 열도, 특별한 증상도 없이 건강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미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된 거야.”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십수 년을 함께 해온 가문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데 필요한 것은 반나절의 시간. 그리고 침묵을 견디지 못해 나눈 대화 몇 마디가 전부였다.
‘기침병이 더 퍼지기 전에 증상이 있는 사람을 모두 죽여 없애려고 한 거래.’
‘….도련님, 최근에 기침을 많이 하시지 않으셨어?’
‘저주를 받은 거야. 오랫동안 신전과 으르렁거리며 모욕해온 대가를 이제 치르고 있는 거라고!’
‘메, 메이나 씨!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당신 쓰러진 도련님 옆에 매일같이 붙어있었잖아! 하, 한 걸음만 더 옆에 오면 찌르겠어요!’
‘미, 미나! 보르테 씨! 왜, 왜 이러셔요! 안돼, 날 혼자 두지 마! 제발! 이 문 좀 열어줘요! 제발!!!’
‘….이봐, 버트. 너 비상용 창고 열쇠 가지고 있지? 무기랑 식량 될만한 것을 챙겨와야겠어. 이미 다른 놈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고. 미친놈들이 우리 침대에 불을 지르거나, 기사들이 목을 자르러 오면 칼 한 자루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냐. 아무도 믿지 마. 아무도!’
‘미나! 명령이다! 무기를 버리고 네 방으로 들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우, 웃기지 마! 그 저주 걸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이런 아둔한…. 전염병 같은 것은 없어!’
‘이미 그것 때문에 수십 명이 죽었는데! 없어도 이젠 있는 거야! ….여기서 하루도 걸리지 않는 곳에 내 고향이 있어. 나, 난 돌아갈 거야. 여기서, 이 창고에 있는 음식만 먹으면서 봄까지만 버티면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꼭 나를 죽이겠다면 당신들도 함께야! 어디 먹을 것 하나 없이 봄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고!’
‘부, 불이야! 식량창고에 불이 났다!’
‘기사가 기침병에 걸린 미나를 산채로 불태웠다!’
‘백작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 하고 있어!!!’
하인들은 서로 친한 이들끼리 성 곳곳에 흩어졌고, 곧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죽이기 시작했다.
‘커억! 서머슨 경…. 왜?’
‘미안합니다, 단장님. 이미 텔드마이어 가문은 끝났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모두 죽이고 불태우는 것. 성에 발생한 전염병과 갑작스러운 눈보라로 고립된 성! 그게 의미하는 것을 이젠 명확히 알아버렸다! 이 빌어먹을 성안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쉰 자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우는 것! 신이 이 빌어먹을 사태를 여기에서 끝내기 위해 성을 고립시킨 거야! 사명이다! 기사로서, 인간으로서! 이 끔찍한 전염병이 마을까지 퍼지게 두지 않겠다!’
기사들의 신념은 오염되고, 더렵혀져 그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4일. 겨우 4일이었다. 첫 세 사람을 죽인 범인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났고, 피 냄새는 사람들을 궁지로, 광기로 내몰았다.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던 이의 눈에 부지깽이를 박아넣고, 같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검을 나눴으며, 곳곳이 불타고 메케한 연기가 성을 가득 채웠다.
“불에 타는 사람의 비명, 칼에 찔린 하녀의 단말마, 정신을 놔버리고 알 수 없는 기도를 중얼거리며 제 몸을 그어대는 소리까지…. 네리아와 나는 어머니의 방에 숨어 온종일 떨고만 있었어.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문들은 빈틈없이 단단히 얼어붙었고, 매캐한 연기는 성 안을 가득 채워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지. 모두가 미쳐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첫 살인 이후로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도 하나둘 사라져가기 시작했지.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던 기사의 목을 세드릭 경이 치는 것으로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지켜줄 방어선은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그웍. 귀신 늙은이. 묻고 싶은 게 있다.”
시린 불꽃처럼 마차 안을 채우는 알드리치의 이야기 도중, 노툼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귀신 스승, 어린아이다. 어미와 방에만 있었다. 눈으로 본 것 같은 생생한 이야기.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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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kass : 와, 씨바. 숨도 못 쉬고 듣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방에만 있던 애가 저런 바깥 사정을 어떻게 다 알고 있었냐.
– 노루Drug해요 : 어어…. 춥다아아…. 너, 너무 추워서 그런데, 자기…. 오늘 같이 잘까? 추워서 그래, 추워서…. 안 잡아먹으니까…. 절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 Jokass : 옘병. 이따 보자.
띠링-!
[Player ‘Jokass’ 님이 대화방에서 나가셨습니다.]– 노루Drug해요 : 에이씨. 또 잡으러 가야 하네. 사람 피곤하게.
띠링-!
[Player ‘노루Drug해요’ 님이 대화방에서 나가셨습니다.]– takealook : 잘들 논다 아주.
– 흥안만두 : 그래서, 진짜 알드리치는 저걸 어떻게 다 안거임?
– 스피드 웨건 : 들어보죠. 마침 노툼이 질문을 잘 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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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덜컹.
어둑한 밤을 달리는 마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먼지처럼 일어나는 기억에 물을 뿌리듯 술을 털어 넣은 알드리치는 붉어진 얼굴을 노툼에게 돌렸다.
“그래. 아주 잘 맞췄군. 그냥 어린아이였다면 그 일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또 전해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르륵. 스승, 흑마법사다. 혹시…. 스승이 그 모든 일의 원흉인가?”
노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알드리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지만, 살짝 엇나갔다. 노툼. 나는 그 일련의 사건들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원흉은 아니었지. 굳이 따지자면, 가장 중요한 산 제물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우움. 그럼, 어떻게?”
“….꿈이었네. 꿈. 에머슨이 죽기 전날의 꿈처럼,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한 열병에 드러누운 내 머릿속에 연기가 자욱한 성의 모습이 하나씩 스쳐 갔지. 유모 메이나가 골방에 갇혀 하인들 손에 산채로 태워지는 모습. 친절한 마구간 관리인이 알몸으로 말 등에 묶여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그걸 낄낄거리며 보고 있는 사람들. 미쳐가는 사용인들. 미쳐가는 기사들! 미쳐가는 아버지까지! 그 모든 장면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어. 깰 수 없는 악몽이 어린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네. 그리고. 마침내 악몽의 마지막. 세드릭 경이 문 앞에서 죽은 기사를 난도질하는 광경을 끝으로,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지.”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깨어난 알드리치는 자욱한 연기와 비명 소리. 굳게 잠긴 문고리를 마구 두들기는 소리에 절망했다. 그 소리는 그가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악몽이 현실로 나왔음을 의미했으니까.
꿈의 마지막 장면. 동료 기사를 난도질한 세드릭이 그들이 있는 방문을 보며 섬뜩하게 웃는 장면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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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백작 부인.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세드릭 경. 물러나세요.”
“….”
똑똑똑똑.
“레이디 마레. 접니다. 기사 세드릭 베이시스. 당신이 소녀였던 시절부터 보필했으며, 항상 당신의 뒤에서 당신을 지킨. 기사 세드릭이란 말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날도 꼭 이랬지요. 가문에 변고가 생기고, 어찌할 줄 몰라하는 당신을 업은 제가 필사적으로 불타는 성을 빠져나와….”
“분명 경고했어요, 세드릭 베이시스! 텔드마이어 가의 안주인으로서 명합니다. 당장 문에서 떨어지세요!”
“…..”
어머니의 성난 음성에 세드릭의 말이 멈추고, 문 앞까지 다가온 기사의 발걸음이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드는 소리도.
콰드득!
“꺄아아악!”
이가 잔뜩 나간 데다 피와 기름이 찌든 검은 문을 베는 게 아니라 부숴버렸고, 부서진 문 사이로 장갑 낀 기사의 손이 들어와 쉽사리 문을 열어버렸다.
온통 피에 점철된 그는 어머니에게서 네리아로. 그리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드릭 경….”
“백작부인. 아니, 마레. 그거 아십니까. 그 언덕에서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때부터. 내 기사로서 모든 것은 물론. 내 마음마저 당신을 위해 바쳤다는 것. 그날도 꼭 오늘 같았습니다. 반역에 휘말린 가문이 불타오르고, 이미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 맹세한 나는 그 불구덩이 속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었지요. 이렇게 당신이 살아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여. 두 아이를 가진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참으로 기껍습니다.”
어머니, 나, 네리아를 부르며 차례로 검 끝을 가져다 대는 세드릭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실, 기껍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됐습니다. 이렇게나 모든 게 명확한데.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하면 안 됐을지를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게 후회가 되는군요.”
철컥. 철컥.
세드릭의 걸음마다 갑옷이 울리고, 갑옷 사이로 흥건한 피가 새어 나왔다. 그 선명한 살의를 읽어낸 어머니는 두 아이의 앞을 가로막고 뒷걸음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알드리치. 네리아를 데리고 아버지께 가거라.”
“어머….니?”
“당장!”
화르르륵!
“큭, 크으으윽!”
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 남매 앞을 막아선 어머니는 맨손으로 뜨거운 화로를 들어 세드릭 경에게 들이부었고, 불타는 숯과 재를 뒤집어쓴 세드릭이 주춤하는 사이 어머니의 손이 우악스럽게 내 등을 밀었다.
“어, 엄마!”
알드리치와 네리아는 얼굴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세드릭과 문 앞을 가로막은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흉한 얼굴이 되어 어머니를 노려보는 기사.
어머니의 결연한 얼굴.
그의 손에 쥐어진, 동생의 작은 손.
어머니는 아버지의 서재와 반대편,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엄만 괜찮아. 세드릭은 날 쫓아올 테니, 너희는 아버지께 가는 거야. 알았지? 1층 마구간. 마구간 짚더미 안에 숨어있으면 엄마가 찾으러 갈게. 이제 가!”
어머니의 갈라진 목소리에 알드리치는 연기가 자욱한 복도로 내달렸다.
뒤에서 성난 기사의 고함소리와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지만. 동생을 안아 든 알드리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때 아름다웠던 복도에는 메케한 연기와 살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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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연기를 들이쉴 때마다 복도가 촛농처럼 흘러내렸다 돌아오는 것 같았고, 아버지의 서재로 가는 짧은 복도가 지평선까지 쭉 늘어난 것 같았다.
‘꿈. 모두 꿈에서 봤던 장면이야.’
어머니의 비명과 늘어나는 복도. 복도를 가득 채우며 해일처럼 쏟아져나오는 핏물의 환영. 무수한 명화가 있던 자리에 벽과 하나가 된 듯 삼켜진 기괴한 팔과 다리들.
알드리치는 깜박거리는 의식 속에 꿈과 현실을 겹쳐보고 있었다. 꿈은, 이제 현실과 발을 맞춰 나아가고 있었다.
“도련,님? 이 시간에 나와 계시면 몹쓸, 빌어먹을, 쓸모없는 아이가-!”
‘왼쪽으로 피해야 해.’
콰아앙!
피부가 녹아내린 미나가 피로 흥건한 식칼을 들고 나타나면, 그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떨어질 것이다. 칼날이 어깨에 스쳤지만, 미나는 커다란 샹들리에에 정수리부터 꿰뚫렸다.
땡그렁, 땡, 땡그렁!
그녀의 찌그러진 하녀종이 계단을 구르며 세 번을 울 때쯤.
“오오오…. 도련님? 아가씨이이?”
괴물 같은 모습으로, 온 몸에 노란 수포가 가득한 마부가 나타나 그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후흐흐흐…. 저런, 도련님. 온 사방에 나뭇조각과 깨진 파편이 잔뜩인데 그런 얇은 슬리퍼론 안 되지요. 단단하고 안전한 편자를 박아 드리면 훨씬 좋을 겁니다. 다각다각다각다각, 겨우 발에 대못 여덟 개만 박을 뿐이야…. 흐흐흐흐…. 흐으으으!”
서걱!
그 노란 수포가 터지며 안에서 기어 나온 작은 거미들이 그의 발목을 타고 무릎까지 올라올 때쯤.
“무사했구나.”
“아, 아버지!”
“아빠!”
그래. 정확히 이 자리에서, 아버지가 나타나서 마부의 목을 베어버리셨다.
이 지옥도가 환상인지, 현실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가자꾸나.”
“어디로요?”
“성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통로가 있지.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진 곳이야. 눈 때문에 출구는 막혀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모두가 서로 죽여댄 끝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피 묻은 가운에 검을 닦아낸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드리치는 바로 따라가지 않고, 그 모습에 잠시 멈칫거렸다.
눈. 아버지의 눈이 이상했다. 순간 두 눈동자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밖으로 벌어진 홍채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마구 눈 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환영이 보였던 것이다.
“꼭…. 지하로 가야만 하나요?”
“그럼. 여기서 죽을 생각이냐? 너도 미쳐 죽을 생각이라면 네리아라도 넘기거라. 가문의 대를 끊을 수는 없으니.”
“아, 아니에요.”
알드리치는 그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열 때문이다. 열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것뿐이야. 우리 성에는 살더미로 이루어진 복도도 없고, 눈이 여덟 개 달린 하녀도 없고, 창자처럼 뒤틀린 원형 계단도 없어. 열 때문에, 연기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덜컹!
마구간 안쪽, 깊숙한 곳. 아버지가 들어낸 판자 아래의 돌계단으로 내려가며 알드리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와 네리아 둘이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끝도 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너무나도 불길하고 무서웠지만, 알드리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 하나 없는 지하 통로를 아버지는 발 한 번 헛디디지 않고 잘 내려가셨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오거라. 다치지 않게. 그래, 티끌만큼 손상되지 않게. 좋아. 다 왔구나. ”
“아버지? 여긴…. 통로가 아니잖아요?”
“아니, 통로다. 밖이 아닌 안으로. 이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지.”
자연암으로 만들어진 빛 한점 없는 방. 그 돌로 된 벽의 가운데, 은은하게 붉은 빛을 흘리는 석제 구조물이 있었다.
황홀한 듯 두 팔을 벌려 작은 석실을 소개한 아버지는, 귀족다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대로 알드리치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었다.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손길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산책하듯, 과일을 집어 먹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푸욱!
“커윽! 허으으으….”
“쉬이이. 그래, 많이 아프단다. 불꽃처럼 뜨겁고, 겨울처럼 서늘하지. 금방 지나갈 거란다. 금방이야.”
[제단]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스치는 순간 달군 꼬챙이가 배를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아팠고, 뭘 하려 해도 다리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오, 오빠! 오빠아아아! 아아악!”
“쉬이이. 네리아. 조용히 해야지. 아직 예절을 더 열심히 배워야겠구나. 귀한 자리에서는 몸도, 마음도 정갈하게. 나비가 날갯짓하듯, 사뿐하게.”
네리아가 울부짖는 소리와 석재 구조물이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드리치는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머릿속 환영이 음울한 빛이 가득한 방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쳐버린 아버지가 네리아를 제단에 눕히고, 머리카락 같은 밧줄을 본 네리아가 죽기 살기로 저항하자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 연약한 배를 때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그리고….
“….엄마?”
음울하고 흐릿한 영상 속. 돌로 된 방의 입구에 비친 실루엣에 알드리치는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서걱!
툭. 데구르르….
“멍청한 것. 상하게 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아무 전조도 없이 아버지의 머리가 떨어졌다.
찰팍. 찰팍. 찰팍.
“엄….마?”
상처 하나 없는, 맨발의 어머니가 다가와 쓰러진 그를 안아 들었다. 그 걸음걸이를 따라 핏물이 차오르고, 회색 석벽 위로 징그러운 살점과 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 아들. 엄마 말 잘 들었네? 아버지도 만나고. 동생도 마구간까지 잘 데려오고.”
틀림없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두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그의 환영은, 전혀 다른 것을 비추고 있었다.
“어머. 역시 내 아들이구나. 눈이 좋은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보이니’? 알드리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환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알드리치는, 그 숨결마다 찢어진 영혼을 집어삼키는 백골로 이루어진 탑 같은 존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그 눈을 마주한 어미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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