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68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22)
****
알드리치는 어머니가 좋았다.
그 부드러운 품에 안기는 순간이 좋았다.
잠자리에 머리맡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고,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옅은 녹색이 섞인 그 눈동자에 사랑이 담기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담겨있었다. 다만, 지금껏 그가 보지 못했던 무수한 눈동자에 다른 것이 담겨있었을 뿐.
그 어머니의 눈동자 뒤에 도사린 수많은 시선. 개미 알 같이 바글거리는 그 안구들은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나친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흑마법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이 깨어져 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단다. 엄마가 보여준 꿈이 마음에 들었니? 첫 걸음마를 언제 뗐을까? 역시 메이나가 산채로 타들어 가며 죽었을 때? 아버지가 동생을 때리고, 네 가슴에 칼을 쑤셔 넣었을 때?”
“….”
“어머. 설마…. 지금이니?”
알드리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절망이 자신이었음을, 일그러진 그 어미였음을 깨달은 어머니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흘러넘쳤으니까.
어머니는 그 뒤틀린 애정을 담뿍 담아 알드리치를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애정 어린 포옹에, 가슴에 박힌 검이 그의 등을 뚫고 나왔다.
“꺼헉, 끅, 꺼허어어….”
“알드리치. 사랑하는 내 아들. 많이 힘들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엄마를 이해해줄 수 있겠니?”
천만에. 알드리치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어머니에게 되려 묻고 싶었다. 왜. 왜 당신은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는가. 왜 내게 이런 것들이 보이는가. 이 피웅덩이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행복해 보이며, 네리아는 왜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는가.
그 눈동자를 마주한 어머니는 다 이해한다는 듯 따듯하게 웃으며 그의 뒷목을 감쌌다.
“이번엔 정말 잘해보려 했단다. 너희 아버지, 데이빗은 정말 괜찮은 남자였거든. 강단 있으면서도 자상하고. 역모에 얽힌 가문의 딸이라는, 자칫 텔드마이어 가문까지 휘말릴 수 있는 흠을 가진 여자를 선택할 만큼 로맨틱한 사람이기도 했어. 아, 생긴 것도 물론 내 취향이었지.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내 이전 가문에 엮인 혐의가 풀리고 상속받은 유산도 모두 텔드마이어 가문으로 가져왔단다? 영지 구석구석까지 도로가 깔리고 커다란 상단이 들어서던 것 기억하니? 네가 참 좋아라 했는데.”
날카로운 고통이 희미해져 가던 의식을 몰아세웠다. 고통이 쓰러져가던 의식을 끝으로 몰아넣었고,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알드리치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왜, 왜요 엄마. 도대체 왜….”
“….그러게. 왜일까. 이곳에 오기 전에 그렇게나 많이 죽였으니 20년은 너끈히 버틸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가 몰라. 70년 전에 그 고생을 하고 이제는 정말 조용히 살겠다고 했는데. 최대한 조심조심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많이….?”
“그래. 아주 많이. 이 몸의 주인은 대단히 큰 가문의 딸이었거든. 우리 영지보다 훨씬 넓고, 사람도 두 배는 더 많았지.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아, 그들은 정말 아름다웠단다.”
마레는 그날을 떠올리듯, 황홀한 눈으로 알드리치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알드리치. 사람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법이야.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숨이 막히면 크게 숨을 들이쉬어야 하지.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단다. 엄마는….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만들어졌을 뿐이란다. 엄만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 아버지도 사랑하고, 이 영지도. 영지 주민들도 다 사랑해. 진심이란다? 그저…. 그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어. 호수를, 강물을, 이 세상의 모든 바다를 마셔 없앤다 해도 채워지지 않을 거대한 갈증이.”
“그래서, 이젠 참지 않으려고. 너와 네리아 덕분에 그럴만한 이유도, 능력도 이젠 갖추게 됐거든?”
행복한 표정으로 의식을 잃은 네리아의 볼을 쓰다듬는 모습. 그 모습이 머리맡에서 그의 얼굴을 쓸어주던 어머니와 겹쳐 보여서 알드리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너는….”
당신은 누구인가. 나의 착하고, 아름답고, 따듯한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가. 그녀는 어디로 가고 내가 모르는 당신이 나의 어머니를 자처하고 있는가.
딱.
어머니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알드리치의 이마를 튕겼다.
“어머. 그럼 안 되지. 도피라니. 겨우 생각한 도피처가 ‘착한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죽고, 다른 이로 대체되었다.’ 라니. 엄마는 슬프구나, 알드리치. 마법사라면 눈앞에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지?”
뻥 뚫린 가슴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며 제단을 향해 흘러들었다. 살점과 시체가 들끓는 석실을 가로지른 어머니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네리아의 이마에서 배꼽까지, 붉은 실선을 그었다.
“9개월간 너희를 품어 세상의 빛을 선사한 마레 텔드마이어. 아벨라디스 령의 언덕을 뛰어놀던 건강한 소녀, 마레 아벨라디스. 작은 마을, 파나톨의 성녀라 추앙받던 여인, 마에이라. 메나스. 마일라….. 비슷한 이름의 여인이 수십 명은 더 있었단다. 다들 아름답고, 가녀리고, 비극적인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자들이었지. 그리고…. 70년 전. 분노한 빛의 맹아들의 손에 살해당한 마녀. 메아-마리아와, 한때 빛의 성녀라 추앙받던 그 부질없는 이름까지. 모두 나란다. 내가 너희 엄마가 아닌 게 아니야. 그저 너희 엄마인 마레가 ‘나’에 속해있는 것뿐이지.”
메아-마리아. 어머니의 모습을 한 그것이 이름을 밝히는 순간, 석실을 감싼 살 더미 속 입들이 경의에 찬 신음을 흘리며 그 발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 잡아먹으며 아귀다툼을 벌인 그것은 어느새 붉고 가느다란 지팡이로 변해 어머니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이 네리아의 이마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마…. 제발….”
“우리 딸, 우리 아들. 엄마를 닮아 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하는 남자의 목. 배 아파 낳은 혈육의 피. 흑마법사의 영혼. 그리고 영성을 타고난 네리아. 이제 준비가 끝났구나.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랬다간 교단 놈들이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어머니의 손이 알드리치의 눈물을 닦고, 그대로 그의 눈 아래를 길게 내리그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피부가 찢겨나가며 피눈물이 흘렀다.
“널 사랑했단다. 알드리치. 내 아들.”
작별. 그것은 알드리치의 쓸모가 다했음을 알리는 고별이었으며, 네리아를 대상으로 한 어떤 불길한 것의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쩌걱.
제단이 갈라지며 피로 이루어진 문자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이 네리아의 몸에 달라붙으며 네리아의 입에서, 작고 새하얀 무언가가 끌려 나왔다.
네리아였다. 네리아 텔드마이어. 그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연약한 소녀의 영혼.
‘안돼.’
천 개의 눈을 가진 지팡이가 그 영혼을 탐욕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알드리치는 볼 수 있었다. 네리아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동생이 영원에 가까운 고통을 받으며 저들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될 것을.
『——-!』
영혼의 소리 없는 비명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집요한 시선이 영혼을 박피하듯 겉에서부터 분해하고, 그 안에 음산한 검은 빛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물들어간다. 타락하고, 끝내 그들의 일부가 되어간다.
알드리치는 그 몸부림치는 영혼이 그를 향해 간절히 손을 뻗는 것을 보았다.
『살려줘. 살려줘 오빠. 제발.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그러지 마.’
젖먹던 힘까지 짜올렸지만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팔을 뻗었다. 손톱만큼이라도, 모래 한 알 만큼이라도 더. 앞으로. 앞으로.
스르륵.
그리고, 희미해진 생과 사의 경계 속에. 재능을 타고난 소년의 영혼이 무거운 육신을 벗어나 그 필사적인 의지에 따라 손을 뻗었다.
“….어머?”
마녀는 그녀의 가장 값진 보상에 그녀도 모르는 사이 닿은 손가락를 보고 말았다. 의식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작은 영혼.
흑마법사의 영혼이 깨진 그릇이라면 악령은 그 산산조각 나 떨어져나온 영혼의 파편이다. 그렇기에, 흑마법사는 그 깨진 틈 사이를 강력한 악령, 혹은 원혼과 계약하여 메꾸는 것으로 완성된다.
모든 흑마법사가 태초에 발하는 주문.
두 영혼의 꼬리를 엮어, 하나로 뒤섞는 계약.
마녀의 핏줄을 타고나 태생적으로 영력이 강한 두 남매.
이제 막 깨어져 나간 알드리치의 영혼. 그리고, 마녀의 주술에 끌려 나온 네리아의 원혼.
그녀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어떠한 거부반응도 없이 네리아의 영혼이 알드리치에게 섞여든 뒤였다.
“….그렇게 버릇없는 아이로 키우진 않았는데.”
마녀는 언짢았다.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준비되었고, 딱히 영성이 뛰어난 어린아이의 영혼이 꼭 저들만 있는 것도,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둘을 따로 보관해두고 싶었거든.”
알드리치에게 말한 것처럼 그들의 향한 어머니로서의 사랑도 진심이었으니까.
카아악!
마녀의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쓰러진 알드리치의 몸에서 나온 검은 형체가 그것을 막아 세웠다.
“….몇 년 정도 더 지켜보며 제대로 된 흑마법사로 키우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겠는걸.”
마녀의 저주와 네리아의 악령이 충돌하며 석실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 일었다. 이제는 악령이 된 네리아의 영혼이 짓쳐들어오는 살점의 벽을 마구 찢고 잡아 뜯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때 죽은 자의 군주라 불리는 자의 손에 직접 타락을 흘려 받았으며,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마녀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알드리치도, 네리아도. 한때 빛의 성녀였던 마녀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으드득!
“어째서…. 벌써 눈치를! 결계는 완벽했을 텐데!”
둘을 감싼 살더미를 느긋하게 감상하던 마녀가 별안간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지팡이를 드는 순간.
“기도하고 단련하니, 그 정신은 불굴이라!”
콰아앙!
폭음과 함께 거대한 대검이 천장을 부수고 뼈로 만들어진 방패에 박혔다.
“용기 교단…. 살인 사제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같잖은 재주로 이곳을!”
“제국의 기사들은 서임과 함께 의례적으로 용기 교단에 세례를 받지. 단 하나! 그 죽음이 부정한 것에 의해 이루어졌을 경우 그 목숨으로 경종을 울리기 위해! 나이트 세드릭의 의기! 본 교단의 종을 울렸다!”
쿠웅! 쿵! 쿵! 콰지지직!
그 말이 신호였는지, 거대한 쇠말뚝이 차례로 천장을 뚫고 석실 곳곳에 박혀 들어왔다.
– 강인한 정신은 불굴이라!! –
– 육체를 내리쳐 정신을 다듬으니!! –
철그럭.
“그것이- 나의 기도로다.”
여타 신성과 같은 밝은 빛은 없었지만, 그 축문에 깃든 힘이 검 끝에 사나운 파동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 라투라!!!! –
“라투라.”
“감히, 광증을 종교로 포장한 허신의 장난감들이-!!!!”
“라투라아아아아!!! 데 카아아아아!!!!”
거대한 힘을 담은 대검과 마녀의 저주가 충돌했다.
알드리치는, 네리아의 영혼이 그의 품 안에 잠든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
.
알드리치가 조용히 술을 홀짝이는 소리가 마차 안의 침묵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게 끝이야. 그 뒤로 마무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넬도 보지 못했지. 하지만 소문은 들을 수 있었어. 마녀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교단에 잡혀 왔거든.”
성기사들은 이미 전염병이 퍼진 도시를 뚫고 들어온 참이었다. 치유의 권능이 부족한 그들은 백방으로 지원요청을 보내는 한편 어떻게든 저주와 뒤섞인 병증을 완화하고자 애썼지만.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시의 우물에, 흙에, 그들이 먹는 빵과 가축에 파고들어 때만 기다리던 오래된 저주는 그리 쉽사리 해주(解呪)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지부진한 해주와 정신 나간 속도로 퍼져 나가는 병증. 결국, 용기 교단은 재앙이 도시 밖으로 나가기 전에 도시를 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고향. 텔드마이어 영지는 지금도 공석이야. 주인 없는 노른자위 땅이다 보니 부랑자나 범죄자, 화전민들이 제법 모여들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동시에 심심하면 그곳에서 인신 공양이나 저조 숭배 같은 죄목의 이단이 잡혔다는 소문도 들었지. 타락한 성녀. 메아 마리아의 힘은 그것이 자취를 감추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게야.”
“타락한 성녀라면….”
“자네와도 관계가 있겠지. 70년 전 광명 교단은 성녀를 잃었어. 그들의 손으로 타락한 성녀를 철저히 죽이고 정화했다고는 하지만. 봉인에 문제가 있었는지, 정에 휩쓸린 자가 있었는지. 타락한 성녀, 지금은 마녀가 된 그것은 버젓이 살아 그 악행을 이어가고 있었지. 신분을 바꿔가며 대규모 희생제를 치르는 것을 보니 70년 전 광명의 손에 죽을 뻔하며 잃은 힘을 복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
덜그럭!
알드리치의 손에서 술 그릇이 떨어졌다. 취한 줄 알았지만, 그의 손이 뭔가 붙잡고 있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루실라의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노쇠한 손 위에 얹어졌다.
“알드리치….”
“….마녀의 자식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었어. 용기의 성기사들의 강력한 힘을 봤으니까. 평생 그들의 감시하에, 신전에 갇혀있으면 두 번 다시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지. 어린 사제가 함박웃음과 함께 가져다준 그 소식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흑마법사로 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수도원에 갇힌 죄인처럼. 영원히 그 안에서 기도와 수행을 하루 일과로 삼으며, 그 긴 세월 동안 음지를 떠돌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소식만 아니었다면.
=========
‘좋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 좋은 소식이랄 게…. 있나요?’
‘네! 동생분, 네리아 텔드마이어 양이 정신을 차렸다더라고요!’
‘….안돼.’
‘네? 아, 다른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 교단의 사제님들이 확인하셨는데, 조금 충격을 받은 것 말고는 어떤 흑마법이나 저주의 징후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안돼, 안돼!!! 날 여기서 꺼내줘. 제발! 그 여자가 우릴 찾아올 거야!’
‘아, 알드리치! 진정하세요! 당신은 진한 흑마력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난폭한 행동은 광증의 전조로….’
‘돌려받아야 해. 아니야, 도망쳐야 해! 돌려줘! 벗어나! 그 여자, 그 여자가 다시….! 으아아아아!’
‘혀, 형제님! 흑마법사가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형제님!!!!’
=========
“네리아…. 당신 여동생이 정신을 차렸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어머니, 그 마녀겠지. 네리아는 나와 함께 있으니까. 지금껏 쭉 그런 방법을 써온 모양이야.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를 희생제를 통해 흡수하고. 꼬리가 밟힐 수밖에 없는 옛 몸은 버리고 적합한 새 몸을 찾아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넬의 힘으로 신전을 탈출했을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네리아가 가문의 유산과 함께 변방의 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것이었어.”
교수는 알드리치의 떨리는 손에서,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의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알드리치는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흑마법사로서, 영술사로서 현세와 내세를 지켜보고, 그렇기에 운명과 필연을 믿는다네. 내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는 것도 그 때문이야.
살아남은 타락한 광명의 성녀. 메아 마리아.
그녀와 같은 일을 당할 뻔한자비의 성녀를 구출한 광명의 성자.
그리고, 그 핏줄을 이은 흑마법사 남매와 자네가 지금 같은 마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지. 이게 정말 우연인 것 같나? 응?”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교묘하고, 잘 들어맞았으니까.
‘70년 전의 타락한 성녀. 그녀가 살아남아 다시 힘을 회복하고 있다.’
‘그 엄청난 희생제를 벌이고, 백 년 가까이 쌓인 저주와 흑마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 귀족가에 입양되었다. 같은 일을 벌일 생각이야. 어쩌면, 이미 일을 벌이고 다른 신분으로 거듭났을 수도 있지.’
‘….보르카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사건의 규모 자체가 다르다.’
2월드, 그 악몽 같은 저주와 부패의 진군에 선두를 달렸던 타락한 성녀.
그녀가 살아남아 힘을 키우고, 지금 이렇게 플레이어 앞에 개별 히스토리와 함께 등장했다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추측을 가능케 했다.
———
– 스피드 웨건 : ….신중해야 해. 어쩌면 엘프 지원군 문제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어.
– takealook : 동의함. 2월드 때 교단 내부 문제라고, 래빗을 배제하고 지들끼리 처리하더니 이게 이렇게 넘어오네. 이래서 큰 사건은 무조건 플레이어가 개입해야 한다니까.
– takealook : 생각 잘해라. 너 3월드로 겜 끝낼 생각 아니면 4월드 생각도 해야지. 저거 2월드때 래빗이 처리하지 못해서 이월된 빚이거든? 아마 ‘업보’라는 이름의 복리 이자가 무지막지하게 붙어서 넘어왔을 텐데…. 흐지부지 넘기고 그냥 엔딩보면 개작살난다.
– Jokass : 존나 행복하게 클리어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음 월드 넘어갔는데 [3년 후] 이러면서 전부 폐허가 되어 있수도 있다는 뜻이지.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뮤트 수비전으로 국력 죄다 소비하고 골골대고 있을 때 멸망전 또 치를 수도 있다고. 천류제 4월드보다 더 지옥이 될 수도 있음.
– takealook : 천류제 4월드는 뭐 희생제고 뭐시고 하기도 전에 여왕 목따이고 폭주한 뮤트 웨이브에 민간인이 거의 다 죽었으니까.
– 남바쓰리 : 언데드 머리만 바글바글한 초원보단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 더 낫죠. 암요.
———
월드에서 월드로 이어지는 것은 영웅의 계보뿐만이 아니다. 살려낸 영웅이 가문을 이루고 그 가르침이 다음 월드로 전해지는 것처럼, 살아남은 악당은 그 의지와 힘을 키워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심지어 그게 본인. 같은 영혼으로 여러 생을 전전하는 성녀의 특성을 이어받아, 타인의 몸을 갈취하여 반복된 희생제로 엄청난 힘을 쌓은 타락한 성녀라면.
그런 놈이 충분한 힘을 키우고도 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무한으로 스택을 쌓다가 플레이어가 모습을 감춘 월드와 월드 사이, 공백 기간에 딱! 모습을 드러내면….
‘다음 멸망 스타트다. 타락한 성녀, 메아-마리아 의 이름으로 멸망이 시작될 수도 있는 거야!’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추측에 내가 눈알을 마구 굴리고 있자 알드리치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눈치챈 모양이군. 그래, 그녀는 아직도 제국에 버젓이 살아있어. 교수 네놈과 같이 다니며 간을 좀 키운 덕분에, 확인 정도는 할 담력을 길렀지. 폭풍의 언덕에서 편지를 보냈네.”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드리치의 표정이 안 좋은 것에서 그 편지가 잘 날아갔다는 결과가 보였으니까.
“이 제국 어딘가에, 마녀가 살아 숨 쉬고 있네. 도시 몇 개 분량의 생목숨을 희생시켜 그 힘으로 응축한 거대한 악이. 52년 전에 백작가를 홀로 집어삼킨 놈이야. 그저 본능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괴물. 더 큰 힘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탐하겠지. 맞춰보게. 백작가를 집어삼키고 힘을 불렸으니 다음은 더 큰 먹이를 찾아야겠군. 하지만 후작, 공작가가 의문스럽게 소멸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어. 그럼 둘 중 하나겠지? 마침내 마녀가 포기했거나, 아니면….”
“…52년 치 허기를 채워줄 거대한 먹이를 집어삼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거나.”
“그래, 수도야. 제국의 수도. 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 우리가 가는 곳에 마녀가 있다네.”
탁.
알드리치의 로켓이 닫히고, 동생 네리아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말문도 닫혀버렸다.
야심한 밤. 누군가는 공포로, 누군가는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는 가운데.
타는 속을 알 길 없는 마차는 꾸준히 수도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