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70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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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인들의 도시. 언뜻 이름만 들어서는 뭐하는 곳인지 짐작이 안 되는 곳이지만, 일단 도시인 만큼 있을 건 다 있었다.
시장.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다….?”
“그럼요. 공식 수도 올 암페리아, 성하도시, 그리고 사용인 도시. 사실상 소도시 4~5개 규모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장이 사용인 도시 하나에 몰려있는 거니까 마찬가지니까요.”
가로지르는 데만 6시간이 걸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시장.
대장간.
“헛소리하지 말게.”
“저 시력 좋습니다. 저거 대장간이라고 쓰여있는 거 맞는뎁쇼.”
“헛소리하지 말라니까! 저게 보석상이지 어딜 봐서 대장간이야! 저, 저 공마석 무더기는 또 뭐고!”
“맞아요, 대장간. 처마에 깃발 올려놓은 거 보이죠? 자기네 대장간이 이 가문의 물건을 작업 중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공마석의 재발견 이후 공마석 장신구는 마법적 암시, 사소한 저주에 대한 호신용 액세서리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중이거든요. 제국 전역에서 주문이 들어오니 저렇게 성행할 수밖에요.”
집채만 한 용광로 옆에 금괴와 공마석 더미를 그냥 막 쌓아두고 쓰는 정신 나간 대장간.
거주지역.
“대단한 건축 양식이로군요. 질서 있게 늘어선 큰 건물 사이에 작은 집들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드라실, 저거 마차야.”
“….죄송합니다. 아직 단어의 뜻에 익숙하지 않아서. 마차는 인간형 생물을 수송하기 위한 말이 끄는 작은 상자가 아니었군요.”
“네가 틀린 게 아니라 이 동네가 상식 밖인 거다.”
“허어어…. 제법 마법적인 기운도 느껴지거늘….”
차체에 경량화 마법과 마구에 근력 보조 마법이 걸린 집채만 한 마차와, 마차보다 저렴해 보이는 건물이 질서 있게 늘어선 거주구역.
이게 무슨 느낌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 그거였다. 영화에 보면 백만장자들이 차고에 슈퍼카 쫘-악 진열해 놓은 거. 그런 부자들 창고를 쫙 모아놓고 벽을 터놓으면 이런 동네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신사분들, 표저엉?”
“흐, 흠! 벼, 별것도 아니네! 그, 그렇죠?”
“그렇….지! 드넓은 바다의 광활함에 비하면- 쿨럭!”
이미 우리 일행의 마차 위에도 아에드란 가문의 깃발이 올라간 상태. 충고를 잊고 입을 헤 벌린 나와 오트만의 귀에 루실라의 따끔한 일침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여기서 정비를 하고 수도로 올라가야 한다고. 사치는 귀족의 기본 소양이에요. 단순히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게 아니라, 가문이 ‘실용 외 소비’에 어느 정도 돈을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있는지 만천하에 알리는 행위라고요.”
“어우, 동네 구경하다 체하겠네. 그래서 이렇게 화려한 거야? 하인들 사는 동네마저?”
“주인이 금실로 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데 그 수발을 드는 하녀가 넝마를 입고 있으면 보기 그렇잖아요? 귀족 개인의 사치 수준과 그 아랫사람의 차이가 많이 나면 ‘아, 저 귀족은 있어 보이려고 영혼까지 끌어다 썼구나! 드레스는 볼만하지만, 저 드레스 때문에 집에서는 감자나 삶아 먹겠구나!’ 같은 인상을 주기 십상이거든요. 사용인들의 수준에도 신경 써야죠.”
순간 초고가의 중화기를 잔뜩 사두고 허름한 지하 볼링장에 살던 폭파광 누구누구가 생각났지만, 교수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수도 생활에 아등바등 매달리는 귀족처럼 보일 것이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그래서 저렇게 좋은 집을 지어 가문의 깃발을 달아놓고 가문의 마차를 줄지어 세워 놓은 거예요. 수도로 들어가는 귀족들은 전부 사용인 도시를 지나게 되니까.”
“돈지랄이 그냥 지랄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지랄이라니….”
과연 제국의 수도답다고 해야 하나. 사치의 스케일이 달랐다. 무슨 비싼 캐릭터 스킨 사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 사치를 넘어 사용인들의 수준까지 비교하다니.
“덧붙여 말하자면 성하도시, 사용인 도시에 가문의 저택 두 채를 가지고 있는 게 수도 사교계 입문의 최소 조건이에요. 그중에서도 저택의 수준이 평균 이하라고 소문이 나면 한 명씩 찾아와서 은연중에 수도를 떠나라고 종용하구요. ‘혹여 수도 생활이 힘에 부치거든 도와주지. 내 그 정도 푼돈은 있으니.’ 라든가. ‘나는 제 수준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이들이 한심한 것을 떠나 동정하게 된다네. 아, 물론 천것들 이야기야.’ 라거나.”
워메. 문장 빡쎈 것 보소.
“그게 어떻게 ‘은연중에 종용’이냐. 대패로 면상을 갈아버리는 거지.”
“대충 이 정도가 수도 사교계 공방의 인사치레라는 거에요. 그냥 알아 두시라구요.”
루실라도 일행 중 귀족 사교계와 수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게 본인이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사용인 도시를 지나가는 중 쉴새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상식적인 선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기본 중의 기본! 아이 참, 이런 건 말로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한다….”
물론, 들으면 들을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내용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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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마케라 가문의 별채를 찾아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긴 여정에 노고가 쌓이셨을 텐데, 짐은 여기 맡기시고 우선 방으로 드시지요. 따듯한 목욕물과 간단한 요깃거리. 인당 사용인 세 명이 기본으로 주어집니다.”
루실라는 먼지투성이 마차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며 일행을 여관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관도 각 지역의 특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부 국가 여관은 발효주를 잘하고, 제국 여관은 증류주를 잘하고. 방만 빌려주는 여관부터 마법사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관까지.
나름 떠돌이 생활에 적응하며 온갖 여관을 겪다 보니 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싼 동네의 여관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맞이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고마워요. 음….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죠?”
“저는 이 저택의 집사, 길입니다. 집사, 또는 길이라고들 부르시더군요. 호칭은 편한 데로 하시면 됩니다.”
귀족 특유의 끝이 말리는 발음을 정확히 구사하며 일행을 환대하는 멋들어진 집사.
딸랑딸랑!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교수님. 앞으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교수님을 보필할 에밀리, 올리비아, 이슬라입니다.”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어…. 그래. 잘 부탁-”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불러주시길.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마다치 않겠습니다.”
“-쿨럭!”
당장 옷만 바꿔 입히면 귀족 영애라고 해도 믿을 만큼 미색이 뛰어나고 다방면….으로 숙련된 것처럼 보이는 메이드들.
똑똑똑.
“실례. 루실라님께서 교수님이 다소 많은 양의 편지를 받을 예정이라 하시어. 이곳에 3일 이상 머무르실 계획이라면 전용 편지 관리인을 소개받으시는 게 어떠실까 합니다. 전문 집사 아카데미에서 수료 받았으며, 손님의 개인사를 발설하지 않는 마법 계약까지 맺은 확실한 사람이지요.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따로 단기 계약을 위한 계약서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어…. 예. 부탁드립니다. 아, 계약서 말고. 그…. 아무튼.”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속에나 나올법한 귀족 생활. 부족하지도, 너무 과하지도 않은 태도는 의심 많은 나조차도 편안하게 만들었고, 섬세한 서비스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내가 제대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수도에 걸맞는 화려한 여관이야 기대했지. 그런데 이건 체급이 다르잖아, 체급이. 신생아도 지금 우리보단 덜 보살핌 받겠다고.
너무나도 편안한, 상식적인 이해의 선을 넘은 대접에 혹시나 해서 후다닥 밖에 나가서 보고 왔다.
[INN]이상하다. 분명 제대로 붙어있는데. 동네 여관처럼 [당나귀 발굽] 이니 [물부리 여관] 이니 하는 이름은 없지만, 호객행위 따위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지 커다란 가문 깃발 옆에 아주 조그마하게, 멋들어진 필체로 INN 세 글자가 쓰여 있긴 했지만. 여관 맞는데.
“허어….”
여관 구석에서 익숙한 탄식 소리가 들려서 보니 오트만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여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왜 나와계십니까?”
“자네는 왜 나왔나?”
“그…. 여기가 여관이 맞나, 싶어서 확인하려고요.”
“으으음….”
살짝 안도하는 얼굴이, 자기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기이할 만큼 대접이 훌륭해. 내가 보들레르 가문에 살 때 우리 가문 하인들한테도 이렇게 살뜰하게 보살핌받은 적은 없었네.”
뒤에서 온기가 느껴져 돌아보니 어느새 따라붙은 메이드 둘이 어깨에 걸칠 것과 들고 다니는 작은 화로를 들고 따라붙어 있었다. 따로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추운 겨울 날씨에 맞춰 준비해둔 것.
오트만에게 물어보니 그쪽은 더했단다. 수계 마법사라는 것을 전해 듣자마자 차려둔 음식을 모두 치우고 온갖 해산물이 가득한 상을 차려왔으며, 받아놓은 목욕물도 모두 버린 뒤 각기 다른 지역에서 구해온 세 종류의 물을 선보이며 선택하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가 다 이해한다 쳐도, 도저히 이해 못 할 것은 이 모든 게 공짜라는 것일세.”
심지어 지금 제일 위험한 지역인 북부의 만년빙이 녹은 물도 있다는 말에 기겁하며 뛰쳐나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가 진짜 여관인가, 아니면 빚을 잔뜩 지워서 사람 팔아먹은 이상한 곳인가 하며.
“공짜라…. 전부 다 말입니까?”
“그래.”
“숙박비, 서비스, 마차 보관부터 식비까지?”
“거기에 마차 대절부터 전용 하인, 원한다면 마케라 가문 본가에서 일하는 미용, 보석, 의상, 기타 전문가들까지 소개받을 수 있다고 하는군. 이게 말이 되는가?”
“….과연. 그 정도면 공짜일 수밖에 없겠는데요.”
분에 넘칠 정도의 대접. 그것도 대접받는 사람이 단 한치의 부담도 느끼지 않게 제공하는 숙련된 사용인들.
저건 1, 2년 훈련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최소 10년, 하녀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를 이어 한 가문에 봉사하며 어려서부터 주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게 삶이 되어야 가능한 일.
거기에 땅 한 조각이 수도 사교계를 위한 티켓이나 다름없는 곳이 사용인 도시인데, 그 비싼 땅에 이렇게 큰 저택을 세워서 여관업을 하는 것을 보니 대충 감이 왔다.
“이 큰 도시에 여관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니. 돈 벌려고 하는 여관이 아니라, 이 여관 운영 자체가 하나의 권리였던 겁니다. 전에 루실라가 말했잖아요. 성문 경비를 몇몇 가문만 돌아가며 하는데, 덕분에 그 가문들은 이득을 많이 본다고. 여기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이 여관 자체가 마케라 가문의 권리였던 거라고요.”
“이 끝내주는 무료 숙박 시설이…. 권리라?”
“예. 여길 여관이 아니라 마케라 가문의 별채라고 생각해보시죠.”
내 말을 곰곰이 씹어보던 오트만은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돈을 받는 손님이 아니라 가문의 손님으로 보는군!”
“예. 가문의 손님을 훌륭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 가문의 명예니까요.”
올 암페리아는 물론, 그 성하도시까지 전부 귀족 저택으로 가득 찬 도시.
당연한 얘기지만 제국의 수도인 만큼 찾아오는 상인도 많고, 귀족들의 의뢰나 기타 여러 가지 일로 수도를 찾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귀족의 의뢰 등으로 찾아왔다면 그 귀족의 손님일 테니 그쪽 저택에 머물게 되겠지만. 당장 소규모 상단만 해도 사람이 20명이 넘는데 그 많은 사람을 다 저택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품위도 없고.
그래서 상단주가 귀족 저택에 초대되고 남은 19명은 이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 마케라 가문의 여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우선 마케라 가문에 대한 수도 방문자들의 인식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겠죠. 당장 저만 해도 이 정도 사용인을 키워낼 수 있는 가문이라면 같이 일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으으음. 그렇지. 그 가문의 집사를 보면 가문 전체가 보인다 했으니. 확실히 마케라 가문이 어중이떠중이는 아닐 것으로 보이는군.”
“그리고, 수도를 찾은 거의 모든 비 귀족 인구가 거쳐 가는 곳이라면. 당연히 그들이 여기에 왜 왔는지, 누구의 일로 찾아왔는지- 같은 귀한 정보가 솔솔 새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음식도, 술도, 온갖 서비스도. 마음을 녹여내는 최고의 서비스에 취한 사람들은 입이 가벼워지는 법.
심지어 그들의 관리할 수장은 귀족 저택에 초대받아 옆에 없으니 가벼워진 입을 채울 자물쇠조차 없는 것이다.
“흐으음….”
하녀가 들고 온 화로에 오트만이 손을 쬐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은밀하게 그의 귀를 파고든 물방울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그건 대단한 권리로군.] [큰 정보야 당연히 얻을 수 없겠지만. 작은 정보들을 폭넓게 모아서 조합하면 그 윤곽 정도는 쉽게 드러나니까요. 마케라 가문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지 싶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걸 이들 앞에서 얘기해도 되는 건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하녀들도 모두 마케라 가문의 눈과 귀인데.]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음?] [우리가 이 서비스 뒤의 목적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길 골랐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내비치는 거예요. 저들이 마케라 가문의 눈과 귀라면, 지금 육성으로 나눈 대화는 마케라 가문으로, 귀족 사교계로 퍼져 나갈 테니까.]말없이 불 쬐는 척을 하던 오트만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을 내 쪽으로 돌렸다.
[굳이…. 왜?] [지금 수도 정치계는 살얼음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그것도 그냥 살얼음이 아니라 밑에 지뢰가 잔뜩 깔린 살얼음판이다. 발이 푹 빠지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3대가 멸족할 무시무시한 지뢰가 잔뜩 깔린 귀족 정치의 배틀 필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무수한 가능성을 떠안아야 하는 귀족의 전쟁터가 아닌가.
[그런 위태로운 살얼음판에서 두껍고, 튼튼한 얼음을 골라 딛으려면 선택을 해야 하는 법이지요. 만년빙 같은 1황자, 1황녀, 3황자라거나. 조금 불안해도 아직 자리가 많이 남은, 뜯어먹을 파이가 큰 다른 약소 황족들이라거나. 뭐가 됐든 선택을 해야 당장 발밑이 꺼질 걱정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황위 계승권…. 확실히. 지금 수도 정치계는 그것을 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으으음- 이 묘한 뻐근함. 팽팽 돌아가는 머리의 지끈거림.
교수는 요 몇 달 써먹지 않아 잠자고 있던 ‘정치 뇌’ 가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히죽거렸다.
마케라 가문의 여관은 표면적으로는 제국 유일의 여관이고,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공짜 숙소가 마케라 가문의 정보 창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속내가 마케라 가문의 손님용 별채이며, 정보 창구라고 한들 표면적으로 이곳은 ‘여관’ 이다.
온갖 초대장을 마다하고, 심지어 마케라 가문의 눈과 귀가 붙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여관’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녀들이 다 듣게 말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
[….우리가 아직 어떤 황족도 선택하지 않았음을. 따라서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린다는 것을 방금 하녀들의 귀를 통해 공표한 겁니다. 대충 제국 수도 사교계, 황위 쟁탈전에 출사표를 던진 거라고 하면 되려나. 아직 어디로 갈지 안 정했으니 빨리 와서 어필해봐라, 뭐 이런 뜻을 내비친 것이죠.]당장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수도에 방문한 당일에 찾아오면 ‘우리가 당신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고, 그건 귀족 품위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니까. 아마 다음날 점심 해가 넘어갈 즈음에 각 가문에서 보낸 사용인들의 마차가 우르르 달려오겠지. 광명의 미라클 성자에 텔드랏 구혼녀면 충분히 한 세력에 보탬이 될 만한 사람들이니까.
[….가만 생각하니 괘씸하네. 루실라 녀석. 분명 이거 알면서도 얘기 안 해줬을걸요. 마케라 가문이나 기타 등등 복잡한 사정 같은 거.]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수도 정세를 잘 알고 있는데 왜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줬을까?] [워밍업이나 해두라는 뜻이겠죠. 앞으로 수도 정치계의 진창 속으로 걸어 들어갈 건데. 잔뜩 겁먹은 병아리 새끼처럼 우르르 몰려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아요. 파티에서도 그렇고 어느 정도 각개 전투를 하게 될 테니 수도 정치의 매운맛을 좀 피부로 느끼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쳐주는 거랑,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게 다르거든요. 뒤통수의 얼얼함이 뇌를 깨운달까. 뭐, 머리 풀기 딱 좋은 정도였네요.]어려운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와 같은 묘한 두통과 상쾌함.
황무지 개인 생존자 시절의 감각에 교수는 기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하긴, 그 시절에는 매일 매일이 긴급 생존 대책회의였는데. 요즘 들어 너무 풀어지긴 했지.
“으으으으- 추운데 그만 들어갑시다. 아, 망토랑 화로 고마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따로 남기실 말은 있으신가요?”
그 의심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조심스레 말끝을 흐리는 하녀.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 손가락을 딱! 튕겼다.
“우선 중도파가 남아있으면 그쪽 사람들 먼저 보고 싶은데. 됩니까?”
“….그 정도 사견을 나눌 만큼의 가르침은 받지 못하여. 뜻은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밥은 따로 모여서 먹게 좀 차려주시고.”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에 차려진 것은 보관이 쉬운 주전부리일 뿐입니다.”
여관으로 들어온 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하녀들.
문득 그 발걸음이 감각이 예민한 그조차 집중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임을 깨달은 교수는 파면 팔수록 뭐가 튀어나오는 이곳 생리에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상에. 집사 아카데미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 곳이냐.
‘내가 몸이 너무 좋아졌나 봐. 머리 쓰는 게 낯설다.’
[원래 설득에 혀로는 10시간, 주먹으론 1초라고들 하니까. 최근 네 행보를 보면 뇌가 굳을만하지.]‘그래….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초심으로. 이번 수도에서의 일은 아무도 안 패고 끝내보자고.’
[정말?]‘그래, 정말. 죄다 고위귀족인데 괜히 긁어서 적대할 필요는 없잖아?’
[흠…. 뭐, 잘 해보라고. 나는 그쪽에는 영 젬병이니까.]하이드와 짤막한 대화를 마친 교수는 하녀들이 받아놓은 따듯한 물에 머리까지 푹 담갔다. 온갖 음모가 가득하지만, 어쨌든 ‘귀족 체면상’ 내일까지는 자유시간이니까.
어차피 복잡해질 거, 당장의 여유를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신진대사가 활발한 그의 몸에서 때가 가죽을 벗기듯 떨어져나왔고, ‘시중’을 거절한 덕분에 조용히 뒤에 시립 해있던 하녀들이 성자의 청결 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마구 떠올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당장은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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