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1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35)
****
휘우우웅-
[장관인데. 과연 제국이라고 해야하나.]“제국이라도 이건…. 이정도 규모는 대체….”
가까이서 본 황성은 더욱 거대하고 웅장했으며, 마법사로서의 감각이 황성을 둘러싼 모든 건물, 벽, 아치, 첨탑이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의 대마법과 주술로 뒤덮여 있다 말하고 있었다.
교수는, 수도 올 암페리아와 황성을 나누는 거대한 해자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 끝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넓은 균열.
교수는 뒤쪽 집에 붙어있던 기름 등을 하나 뽑아, 그대로 절벽 안으로 던져넣었다.
휘우우우우우우우-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안들리는데?”
[빛도 사라졌어. 꺼진게 아니라, 어디 빨려들어 간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지는군. 이건 절대 인공 해자 같은게 아냐. 원래 이런 곳에 성을 지은거다. 땅을 저정도 팔 수 있으면 그정도 위로 쌓아 올릴 수도 있다는 뜻인데, 불이 사라진 지점까지만 계산해도 아파트 두채는 들어갈 높이라고]“수도 한가운데 이런 구조를? 초대 황제의 취향인가?”
나름 전략이나 전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건데, 이건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인 방어 구조물이었다. 이미 수백명의 기사들이 오러를 난사해도 살짝 무너질까 말까 한 대단한 성벽이 있는데. 그 성벽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은 황성 앞에 이런 빠지면 시체도 못건질 절벽을? 여차하면 후퇴해서 항전할 수 있는 성벽이라면 모를까.
“큰 지진이라도 있었나?”
[그정도가 제일 합리적인 추측이겠지.]사건의 전말이야 어떻게되든, 중요한 것은 어디 재난 영화에나 나올법한 거대한 균열이 나와 황성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황자와의 전투에서 재생력은 바닥이 났으며.
무리하게 뛰어다닌 끝에 연골과 관절이 박살나고.
한계까지 쥐어짠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진 내 앞에 말이다.
“….너비가 대충 400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뛰어서 건널 수 있을까?”
[평상시였다면 물구나무 선 상태로도 가능했겠지. 지금 상태로는, 운이 좋다면 제법 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끝에 지면에서 1km 정도 아래 절벽에 매달릴 수는 있겠군. 팔 갈아먹고 재생도 멈춘 상태로 거기서 기어올라올 수 있다면, 해봐. 안말려. 날카롭게 부러진 팔뼈를 피켈삼아 찍어 올라오면 되겠네.]“으으으으음…..”
하이드의 신랄한 음성에 교수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방금 깨달은 오러는 어디 숨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몸은 만신창이에 재생력도, 체력도 바닥났다.
이상할 만큼 주변이 조용해서 망정이지, 성벽 아래에서처럼 눈 뒤집어진 기사들이 달려들었으면 꼼짝없이 미래고 뭐고 다 태워서 한판 붙어야 했을 상황.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방황하던 중, 교수의 예리한 눈빛에 절벽 끄트머리의 단면이 들어왔다.
세월이 흘러 그 끝이 닳았다 한들, 사람의 손길이 아니면 결코 저런 모습이 될 수 없는 매끈하고 직선적인 모습.
“….아예 전부 다 자연 절벽은 아닌 것 같은데.”
교수의 손이 그 끝을 더듬어갔다. 단순한 가공과 마법적 가공을 위한 상감이 더해진 곳. 근처에 세워진 가옥과 마법적으로 연계된 형태. 그 흐름의 중심을 따라가다 보면….
“여긴가?”
드륵.
교수의 손이 절벽 사이의 마력이 집중된 부분을 훑던 중 묘하게 파인 부분에 닿았다. 복잡한 형태의 음각. 엄지 손가락 두 개 만한 크기.
순간, 교수의 뇌리에 황후가 건네준 사자머리 장식이 스쳤다.
그 장식은 절벽의 돌출부, 마력이 집중된 그 홈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쿠우우우우우-
[오. 뭔가 됐는데?]“생각해보니까 당연한거지. 해자가 있으면 도개교가 있어야 하는데. 황성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바람 마법사를 대리고 다니며 날아다닐 수는 없잖아? 황제가 체통없이 막 날아다닐 수도 없는거고. 어떤 식으로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리가 있을거라 생각했지. 이 절벽 사이를 이어줄 다리가….”
쿠우웅…. 쿠우웅….
“어…. 다리…. 가….?”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쿠구우우웅! 그그그극…. 구우우우….
쿵.
교수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황후의 장식에 반응한 두 절벽 사이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라도 지나갈 수 있을법한 거대한 석재 다리가 만들어졌다.
“….야, 나 방금. 저 정도면 황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조금 예상 밖이라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다리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 사이로 거대한 석상들이 차례로 걸어나와 그 거대한 손으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일까.
“도대체 저게 뭘 위한거냐.”
[이제 25년 산 놈이 1년 6개월 산 나한테 묻지마.]“니가 어떻게 1년 6개월이야.”
[이쪽 시간이랑, 저쪽 시간 대충 섞으면 그쯤 돼.]몸이 지쳐서 그런가. 저런 상식 밖의 일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겉부분이 세월의 풍파에 조금 바스러졌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만들어진 다리를 보니 기능에 문제는 없는 모습. 경배를 올리듯 두손을 올려받쳐 다리를 만든 골렘들의 등에는 저마다 검과 창, 도끼 같은 무시무시한 통짜 금속 무기들이 들려있었다. 황가의 인장이 있으면 이렇게 다리를 만들어 올리지만, 침입자에겐 저 무시무시한 거병을 휘두르는 방어 체계의 일종으로 보였다.
쿠우웅-!
다리가 완성되고, 황궁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마침내 제국의 심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사삭.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만개한, 그러나 사막에 핀 그것과 같이 바싹 말라붙은 저주화.
마르다 못해 탄화되다시피한 저주화는 잔 바람에도 부스러져 휘날리고 있었다. 옅은 보라색이 섞인 잿빛 바람이 그 안에 몰아치고 있었으며.
과연 제국이다, 라는 기분이 절로 들게 하던 거대하고 마법으로 둘러싸인 벽. 마침내 그 내부를 드러는 황성 안은….
“이게…. 제국의 황성, 황제가 머무는 곳이라고?”
….텅 비어있었다.
아니, 비어있다는 표현은 좀 과한 것이리라. 황제의 지위에 어울리는 장식도, 융단도, 거대한 홀과 장엄한 기둥하나 없었지만. 뭔가 안에 가득 들어있기는 했다.
거대한 황궁의 벽에 둘러싸인, 도시보다는 작고 마을보다는 큰 규모의 가호(家戶).
수도 올 암페리아는커녕 사용인 도시보다 초라한 흙길. 작지만 옹골찬 목책. 그리고, 제국, 그 거대한 힘의 심장이라 부를 수 있는 곳. 황성의 중심.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성채가, 그 황성 안 작은 도시의 중심에서 휘황한 황금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예를 갖추라. 방문자여. 그대는 제국의 유구한 역사속, 그 모든 주인께서 다니던 길에 발을 들였으니.”
제 눈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체력 부족으로 눈이 흐릿해졌다 싶어 거인의 다리를 지나가던 교수의 귀에 거친 목소리가 들어왔다.
철컥. 철그럭. 철컥.
이제는 귀에 익은 기사의 플레이트 메일 소리. 그 사이에 섞인, 여러 금속이 부딪쳐 바스라지는 소리.
늙은 기사였다. 그 잔잔한 자색 폭풍을 뚫고 나온 것은.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새었으며, 갑옷은 낡고 녹슬어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한아름 가득 낡은 검과 창, 할버드, 방패, 도끼등 수많은 낡아빠진 무구를 안고 나온 노기사.
“나의 검…. 나의 오러…. 내 모든 기억과 삶을 걸고, 오직 나의 주인. 황제 폐하를 지키기로 서원하였나니….!”
콰득!
“가문없는 기사, 갈라하드. 위대하신 폐하의 종이자, 하인이었으며. 그분을 위한 근위기사단의 말석이자 현 기사단장으로서. 폐하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노라.”
카가가강!
한때 각기 다른 기사의 애병이었던 녹슨 무기들이 땅에 박히고.
그의 상징, 지금은 피와 녹으로 문드러진 거검을 두 손에 잡은 기사의 칼끝이 교수를 향했다.
“이 앞으로 한 발짝도. 그분의 명령없이는 그 누구도! 근위 기사의 이름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
기사의 선언. 그것은 그 맹세와 오러를 엮어, 성문과 다리에 내려앉는 스스로를 향한 언령이자 주박이었다.
황제의 힘과 마녀의 저주가 가장 짙은 곳, 황궁. 그 거대한 힘의 폭풍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끝내 홀로 남은 기사는 이미 그의 손으로 불명예를 끝낸 동료 기사들과 같이 이지를 상실한지 오래였으나.
그의 검. 그의 오러.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박아넣은 서원은 선명하게 살아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교수는 이미 한계에 달한 몸과, 늙은 근위기사의 칼 끝에 일렁이는 응축된 오러를 비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제국 그 자체나 다름없던 황제의 힘을 다루던 1황자를 꺾으니, 이제 미쳐버린 근위기사단장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기사단장이라…. 다른 길로 올걸.”
[되돌아갈까? 황궁으로 통하는 길이 이거 하나밖에 없을리는 없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아니. 이미 늦었어. 저 기사, 지금 상태로 도망친다고 따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교수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붉은 오러를 흩날리는 늙은 기사의 모습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당장 쓸 수 있는 물건은 둘.
그중 하나. 덜 위험하고, 더 좋은 것.
교수가 꺼내든 것은 작은 유리병안에 담긴. 소용돌이 치는 바람조각이었다.
한번밖에 쓰지 못하는, 귀한 유니크 소모 아이템. 심지어 그 중에서도 귀하다고 소문난 전투용 소모품.
폭풍의 언덕에서 받은 보상중 하나.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뮤트와 최후의 대전쟁때 사용하기 위해 아껴놓은 물건이었지만.
“….괴물이군.”
늙은 기사의 오러를 본 순간, 쓰지 않고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낙스의 오러가 장엄했다면, 이쪽은 흉험하다.
도대체 무엇을 갈고닦고, 어떤 삶을 살아야 저런 오러가 완성되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응축된 살기.
그 기사의 검으로 정련된 살기를 본 순간, 교수는 아껴왔던 비장의 수단, [한줌의 폭풍]을 꺼내들었다.
….까득!
그리고, 오른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후우우웅.
깨진 유리조각 사이로 작은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 작은 바람에 이끌려, 늙은 기사의 수염을 흩날리던 바람이 한 조각. 거대한 골렘의 먼지와 뛰놀던 바람이 또 한 조각.
음울한 도시의 골목을 휩쓸던 바람이, 깊은 계곡의 울음과 같은 바람들이 하나 둘. 그 작은 바람으로 모여들어.
쿠후우우우- 콰아아아아!
그 바람의 주인에게 허가를 받은 자. 교수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줌의 폭풍이라더니…. 정말 주먹 안에 폭풍을 쥐고 있는 느낌이군.”
[감당할 수 있겠어? 지금 상태로 그만한 힘을 휘둘렀다간….]“싹 날아가겠지. 운 좋으면 팔꿈치. 운 나쁘면 어깨뼈가 통째로 뽑혀 나갈지도. 하지만…. 그정도가 안되고서는, 저 기사를 문 앞에서 치울 수 없을 걸.”
재생력은 이미 바닥. 작은 생채기나 타박상이라면 몰라도, 어깨가 날아가는 정도의 중상은 당장 회복할 수 없다.
아이템과 몸을 끌어다 쓰는 전투. 교수가 계산한 그의 전투력은 이번 전투까지가 마지막이다. 이 이후는, 황제의 힘이 아직 건제하기를. 그 사이 트러블은 일행들이 잘 막아주길 비는 수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건…. 당장 눈앞의 문제는 해결이 가능하다는 소리겠지!”
꾸드드득!
손아귀가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교수의 주먹위로, 바위와 나무를 뽑아올리는 거대한 폭풍 전체가 내려앉았다. 그 휘몰아치는 바람에 살 가죽이 갈라져 폭풍 속으로 빨려나갈 지경이었지만.
교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자세를 잡았다.
“….예의상 말한다, 기사 갈라하드! 당신네 황제 폐하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했으니까, 거기서 안비키면 강제로 치워서라도 황제를 보러 갈거다!”
“….기사는 명령에 따를 뿐!”
“역시 씨알도 안먹히는군.”
나름 기사에게 예의를 갖춘 교수는, 바닥에 붙을 듯 자세를 낮추고 폭풍이 담긴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이지만, 이번에 적을 공격하는 것은 그의 힘이 아니니.
남은 힘은 그저 손에 담긴 폭풍이 나아갈 방향을 위한 것.
끄드드득-
활 시위를 당기듯, 상대를 향해 뻗은 왼팔과 그 반대로 한계까지 당겨지는 오른 팔.
그에 대항하듯, 고요하게 하늘을 향해. 정련된 붉은 오러와 함께 검끝을 위로 향하는 노기사.
훅-
재가 섞인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리는 것이 신호였다.
붉은 오러가 담긴 검격과, 폭풍의 힘을 담은 용권풍이 마주했다.
절벽이 요동치고, 마법과 축복, 주술로 보호받는 황성에 금이 갈 정도로 거대한 파공음이 검기와 폭풍을 휘감아 오른 끝에.
“….왕이시여. 황제가 된 나의 왕이시여…. 이 갈라하드, 마침내 모든 것을 바쳤나이다….”
콰아아아아아!
성벽을 넘어 성안까지 치달아 오르는 폭풍속에, 늙은 기사의 잔불같은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쿨럭, 우웨엑!”
그 모든 충격을 발한 대가로 팔을 잃고, 속이 진탕이 된 남자의 발이.
콰득!
성문을. 황족들에게 조차 미지의 공간으로 남은 황궁의 문을 넘어, 내원으로 향했다.
****
절뚝, 절뚝.
바스락, 바스스스…. 파삭!
“제기랄.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안되는데….”
엉겨붙은 핏덩이 사이로 보랏빛 재가 달라붙었다.
길에도, 담장에도, 지붕에도, 낡은 물레방아에도.
황성이라는 껍데기에 감춰진 작은 도시. 진짜 황제의 도시는 낡고, 허름했으며, 그 하나하나가 빼곡하게 마녀의 저주화에 뒤덮여 있었다.
바싹 말라붙은 저주화는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라졌으며, 눈앞을 흐리는 보랏빛 운무는 그 저주화의 재가 뭉쳐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힘의 소모가…. 예상 이상이었어…. 전부 다….”
마스터 나이트 수십을 상대하며 돌파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기에 1황자 가이낙스라는 강적이 추가되었다.
한줌의 폭풍으로 힘을 아껴 길을 열으려 했으나, 그 힘이 예상을 한참 웃돌 정도라 그 포대가 된 것 만으로도 어깨가 떨어져나가고,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그 결과.
교수는, 이 아무것도 없는 작고 허름한 땅의 언덕을 기다시피 오르고 있었다.
물론, 회복 수단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강대한 힘. 한줌의 폭풍 만큼, 어쩌면 그것을 훨씬 웃돌 정도로 강하고, 또 위험한 힘. 바닥난 체력에 가물거리는 시야가 그의 갈증을 부추겼으나.
“아직 아니야. 아직…. 걷는 것 정도는….”
털썩.
이를 악문 교수는, 저주화가 피고 말라붙기를 반복하는 조용한 도시를 힘겹게 올랐다.
딱, 딱…. 딱.
그리고 마침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언덕의 정상. 황궁의 벽에 둘러싸인 이 비밀스러운 도시, 마을과 같은 것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집.
나무로된 초라한 문과 사자모양 문고리를 마주한 순간, 교수는 쓰러지듯 그 문에 기대어 문고리를 두드렸다.
….끼이익-
털푸덕.
열려있었는지,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열리는 문. 황제가 머무는 곳이라기엔 초라함을 넘어 괴리감이 들 정도로 단촐한 공간.
“고개를 들어. 가문과 이름을 밝혀라.”
그곳에. 산적의 산채와도 같음에도, 그 의자 하나만큼은 제국의 황제에 어울리는 휘황한 빛을 뿜어내는 곳에.
환상처럼, 그가 있었다.
제국의 황제.
이 모든 일의 근원.
제국 만민의 어버이이자, 스승이자, 처형자.
“나 아그단 9세. 칼레시악스 틸 아그단의 이름으로. 감히 제발로 황제의 거처에 찾아온 자의. 얼굴을 보고자 함이니.”
늙고, 노쇠했으나, 선명하고 굵은 음성.
그 목소리에 담긴 힘은, 교수가 저도 모르게 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게 만든 힘은 분명 이 제국의 주무르는 황제의 힘이 분명했다.
늙고 말랐음에도 기골이 장대한 황제의 모습을 보고있으면 그 전성기의 모습이 어떠했을지가 분명히 떠올랐다. 1황자, 가이낙스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강건하고 단호한 모습이었겠지.
“예까지 오느라 애썼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지. 그대는 성자이며, 용사이며, 마법사이자 기사이며, 용병이었으나. 이곳에 온 이유는 그 무엇과도 연관이 없으니.”
달칵.
황제의 마른 손아귀가 휘황한 왕홀을 움켜쥐고. 나른한 눈이 반개하는 순간, 그 황금빛 눈안에 담긴 광채가 교수의 눈을 직시하였다.
“그래, 황손도, 귀족도 아닌이여. 내 너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 그리 할수 있다 말하면. 어찌 하겠느냐.”
화아아악-!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모여들어 낮게 가라앉는 황금빛 줄기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은 그것은 황제의 왕홀이 내 머리위에 닿는 순간, 망토처럼 내 몸을 감싸기 위해 기다리는 듯 했다.
교수는,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황제의 눈동자를 한참동안 바라본 뒤. 말라붙은 입술을 열어 그 답을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거절이라…. 이 드넓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가는 모든 신민의 생사여탈권. 그것을 넘어 그 삶 자체를 내것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을…. 거절하겠다?”
“….송구하오나, 사슬에 묶인 신 보다는 자유로운 방랑자를 선호하기에.”
“신이라. 사슬에 묶인 신이라…. 후, 후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황제의 면전에서 황위를 거절하는, 그 본질에 대한 모독에 황제의 눈이 이채를 띄고, 굳게 다문 입매가 벌어지며 커다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마을을, 황성 전체를 울릴 듯 퍼져나갔다. 그 앞에 엎드린 교수는 그 거대한 힘의 파장에 숨을 헐떡이며 귀를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황제!’
의심할 여지없는 황제 본인. 처음 볼품없는 모습에 가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방금 그 힘의 여파로 그런 의심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거….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로다. 신이라, 구속당한 신이라….그래.”
따악!
웃음을 멈춘 황제가 왕홀을 들어 바닥을 찍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낡고 허름한 성채에서 그야말로 황제에게 어울리는 장엄한 알현실로 바뀌었다.
“묻고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의문. 감히 황제를 독대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호기심의 충족이라. 그래…. 보이는 구나. 궁금한 것이 많아. 허나, 네게 주어진 기회는 하나 뿐이다.”
“하나…. 말씀이십니까?”
“그래. 예, 아니오가 아닌 그 안에 얽힌 이야기, 그 뿌리까지 모두 포함한 깊은 대답 하나.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지금 네 안에는, 세가지 질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니.”
‘….셋? 내가?’
황제의 말에 머리에 쥐가 나도록 궁리를 했지만, 내가 떠올렸다는 질문 세개가 뭔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걸 황제가 어떻게 알아. 저거 순 사기꾼 아니야?]‘….아닐거야. 저자는 황제고, 여긴 제국의 심장인 황궁이야. 제국의 힘이 가장 강하게 휘몰아치는 곳. 내가 이 위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나조차 그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겠지.’
황제의 투명한 눈동자가 마치 내 속을 읽어내는 듯 했다. 흔들리지 말자. 읽으라면 읽으라지. 중요한 것은 질문. 이 순간, 제국에 휘몰아치는 사건을 종결짓기 위한 필요한 지식. 퍼즐의 사라진 한 조각.
“….마녀. 어째서, 마녀가 황제에게만 허락된 힘을 주무르는 겁니까.”
셋 중 하나. 마침내 선택된 질문에, 감정없는 황제의 입가에 다시한번 미소가 걸렸다.
“….어리석은지고.”
그리고, 그의 입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