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2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36)
****
“황제의 힘은 휘둘러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니.”
사락. 사라락.
장엄한 알현실 창문으로 황금의 노을이 흘러들어오고, 그 사이로 가시넝쿨 같은 것의 그림자가 자라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마녀의 저주화.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듯 끊임없이 자라나고, 바스라지기를 반복하는 그것들은 마녀의 심상이 실체화된 것처럼 보였다.
말을 고르듯. 혹은 무수한 해답 사이에서 필요한 것을 뽑아내듯 침묵을 고수하던 황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국의 끝에서 중심까지. 제국의 반을 질러왔구나. 네가 본 제국은 어떻더냐.”
내가 본 제국. 교수는 변경백 영지에서 이곳까지, 여정 중에 만난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변경백 영지의 비질렌 가문, 뮤트에게 이미 몸을 빼앗겼다고는 하나 그 아들의 목을 단칼에 쳐내던 가주, 알레시오 비질렌.
폭풍의 언덕에서 만난 수많은 바람 마법사들. 딱딱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마법사, 아스트라드와 그 스승 가우만.
황제의 명령 한마디에 무보수로 달려 나온 기사들. 세상을 주유하며 신민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방랑 기사단, 인근 가문의 예비 기사단, 하나같이 잉여 인력임에도 기도가 범상치 않았으며, 아직 기사로서 낭만을, 기사도를 따르는 기사들.
하우누만.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속국이며, 제국의 문화와 초원의 문화가 골고루 섞인 이종족, 초원 부족의 도시.
“….평화롭지 않던가.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질적이지만, 그 모든 것이 제국이란 이름 하에 끈끈하게 연결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지.”
“….예.”
“그래…. 평화롭지. 바로 옆 영지에선 영지 경비대의 절반 이상이 뮤트라는 몬스터 종족에게 감염되어 창을 거꾸로 들었으며, 100년을 이어온 바람 마법사의 고향도 그 괴물들 손에 반파되었고. 블루라인, 북부와 인접한 영지 대부분에서 크고 작은 전투, 뮤테이션 블러드의 침공이 진행되고 있음이 알려졌는데도, 제국민의 일상은 평화로웠던 지난날과 다를 것 없이, 평화롭구나. 어리석을 노릇이로고.”
황제의 입에서 나온 사실. 그것은 교수가 이 제국이라는 국가에 의심을 갖게 된 시발점이었다. 동부, 비질렌 영지는 교수 그 자신이 막지 않았으면 뮤트와 블루라인 언데드의 침공으로 멸망했을 것이다. 편지 마법이 있으니 소식이 느린 것도 아니건만. 바로 옆 영지조차 그 위기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제국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차분한 대응은 훌륭하다. 혼란이 퍼져나가면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거처를 옮기며, 여러 가지 재화의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 그것은 곧 제국 전체의 약화로 이어지니, 혼란이 군사적 충돌이 있는 곳에만 국한되고 나머지는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제국 전체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인 것이다.
‘RTS게임에서 전투 유닛이 다 죽어 나간다고 해도 일꾼 유닛은 생산에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나?’
“그것이 제국이니라. 그들은 제국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갈 뿐. 그 자연스러움이, 뿌리 깊게 박힌 제국에 대한 숭배와 일체화되어 그렇게 행동할 뿐이니라.”
“….그래. 여기까지는 알고 있구나. 눈과 귀가 밝으며, 앞과 뒤를 유추할 수 있는 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자아, 성자여. 넌 제국의 반을 가로질러 이곳에 왔으며, 그간 많은 제국민을 만나고, 제국에 대한 소문 또한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무엇으로 칭하는지 기억하느냐?”
‘제국민, 또는 그 소문이 황제를 무엇으로 칭하냐고?’
교수는 그간 여정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황제. 황제에 대한 이야기. 뭘 들었지? 황제가 제국이며 제국이 황제다? 황제에 대한 숭배? 그것 말고 또 다른 게 있었나?
“있었지.”
내가 미처 대답을 떠올리기도 전에, 황제의 황금빛 눈이 내 속에서 답을 퍼올렸다.
“있었고말고. 말하는 이조차 생각지 못했으며, 듣는이는 흘려듣게 만들어진 사소한 이야기. 나를 그 어버이라, 스승이라, 처형자라 여기는 신민들의 입에서,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된 숭배의 틈 사이에 스며든 작은 가시. 떠올려보거라. 내가, 무엇으로 알려졌느냐?”
그 황금빛 광채 속에, 교수의 기억이 여정을 거슬러 올라갔다. 황제. 황제. 사자의 제국. 사자….
“게으른…. 사자?”
[역시 게으른 사자의 제국이란 이름답게…..] [게으른 사자에게 축복을!]그래. 분명히 있었다. 루실라의 입에서도, 지나가던 제국민의 입에서도. 제국 밖에서나 제국 안에서나, 그들이 제국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황제에게, 제국의 이름 앞에 감히 그런 불경한 이름을 붙였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름.
게으른 사자의 제국.
“제국 밖의 이들도. 제국 안의 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실제로 나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며 내 말 한마디에 불구덩이에 뛰어들 이들조차. 이 나를 ‘게으른 사자’라 부름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느니라.”
“….어째서?”
“그것이 제국의 황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기에. 황제가 된 자, 그 왕관을 짊어질지니. 설령 그 무게에 목이 부러진다 한들 그것이 제국의 황제라. 나는 위대한 제국의 황제. 칼레시악스 틸 아그단 9세이며 제국의 주인일지니. 그 땅 위의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조차 모두 나에게 속해있으며, 이는 그 땅을 밟는 모든 이를 아우르는 전지(全知)의 반신을 이르는 말이라.”
“그리고, 필멸의 영혼은 그 신위를 버틸 수 없으니. 대가를 치러야 함이 당연한 것.”
교수는 볼 수 있었다. 지금 말하는 중에도, 황제의 눈에서 사그라드는 생기를. 그 스스로, 황제의 입으로 질문에 대답할 것을 공표했기에 대답이 이어지고 있으나, 이미 그 전에 그것을 얘기한, 스스로의 의지는 황금빛 빛무리 속에 사그라들었다는 것을.
“전지. 모든 것을 아는 것. 한낱 필멸자의 영혼은 그것을 버틸 수 없기에 저주에 가까운 무료함, 나태에 빠지는 것. 그것이 이 제국의 황제에게 주어지는 짐이지. 제국의 일부인 모든 신민들의 가슴속에, 당연하듯 심어진 지식. 황제란 나태한 것. 그렇기에 그들은, 나를 게으른 사자라 부르는 것이다.”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의 우렁찬 목소리에서, 늙고 왜소한 노인의 목소리로. 타오르는 횃불에서 꺼질 듯 일렁이는 잔불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그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듯 하였다.
****
스스로가 저주에 가까운 나태함에 빠졌다 말하는 황제. 그 모습이 사뭇 숨에 차 보였으나 교수는 그를 직시하는 눈에서 긴장을 놓지 않았다.
비록 그의 몸은 힘에 부쳐 보였으나, 그 주변을 아우르는 황금빛 기운은 여전히 건재했으니까.
제국이 곧 황제라면,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는 황제 또한 스러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태. 그것은 이 칼레시악스 틸 아그단 9세라는 인간이 ‘칼레시악스’와 ‘아그단 9세’ 로 나뉘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제국의 그 어떠한 것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에 끝없이 나태한 빈 껍데기가 되지. 그렇게 칼레시악스는 사라지고 그 껍데기 속에 황제 아그단 9세만이 남게 되는 것. 그것이 이 제국의 황제, 목이 부러진 황제에게 내려지는 저주다.”
황제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 가까스로 살아남은 타락한 성녀가, 이 제국에 자리 잡았음을.
그녀가 작은 농가의 일원이 되어 그들 모두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마을을, 도시를, 영지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에 반응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또한, 제국이 받아들인 것. 끌어들인 것이기에.
제국의 모든 것이 제국 스스로의 번영을 위해 끌어들인 것이며, 그것을 아는 황제는 아무것도 할 필요도, 사고할 필요도 없기에 끝없이 나태해진다. 황제는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상징물과 같은 것이다.
타악!
황제의 왕홀이 바닥을 찍고, 장엄한 알현실은 다시 허름하고 어둑한 성채로 바뀌었다. 교수가 이곳, 황성의 입구를 넘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 그 말라붙은 저주화도 뒤덮인 허름한 도시.
“이 모습을 보아라. 낡고 닳아버린 과거의 왕국. 아직 이 나라가 제국이라 불리기 전, 다른 나라 사이에 끼어 매일같이 약탈당하기를 반복하던 약소국. ‘발틴 왕국’의 수도 올 암페리아의 모습이니라. 내 너에게 묻겠노라. 제국의 수도, 그 심장부에 이런 낡고 허름한 도시가 있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황제의 질문과 함께 성채의 벽이 터져나가며 언덕 아래 도시의 정경이 훤히 드러났다.
분명 허름했지만, 한때 전투로 단련되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도시. 깎아지른 절벽은 언덕 위의 도시를 천혜의 요새로 만들었으며, 곳곳에 날카롭게 깎은 목책이 빠짐없이 자리 잡은 데다 석재 저택부터 초가집에 가까운 움막까지 나무창과 활, 화살이 구비되지 않은 집이 없었다.
과거의 모습. 제국에서, 저택과 마당은 그 주인을 나타내는 것.
“제국은…. 이렇게 성장했음에도, 아직 그 시절을 망령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제국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초대 황제의 의지, 그 위대한 영웅이 사로잡은 모든 사람의 의지가 합일한 것. 그것이 몸집을 불린 것에 불과했다는 말이었다.
“제국이 황제이고. 황제가 제국이나. 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제국의 의지와 권능은 황제라는 개인의 의지를 의식 깊숙한 곳으로 밀어내 버렸으며. 그 결과 초대 황제의 위대한 의지, 500년 전 낡은 망령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스스로 제국이고자 하는 제국이 완성되고 말았지.”
너무 부강해진 제국. 제국은 끝없는 팽창 끝에 동으로는 거대한 산맥, 서로는 울창한 엘프숲에 닿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그 영토만큼 수많은 백성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너무 커져버렸지. 영토도, 그 위의 신민들도.”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바란다.
그 수로 새기 힘들 정도의 제국민, 제국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이들의 의지가 하나로 어우러져 태평성대를 외치는 그 목소리가 마침내 초대 황제의 의지. 제국을 하나로 묶은 그 오래된 영웅의 기상을 뛰어넘을 정도가 되었으며, 현실에 맞춰 그것을 조정해야 할 황제는 나태의 저주 속에 자아를 잃은 인형, ‘황제’라는 힘의 수용체에 가까운 상태이니.
제국은 그 벌어진 틈을 고쳐내지 못하고 끝없이 자라났으며, 그것이 제국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귀족들도, 제국의 군부도. 모두가 알고 있다. 산맥 너머 동부 3국에 일어나는 변란이 단순히 동부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그들이 무너지면, 거기 있던 모든 것을 잡아먹은 뮤트라는 세력이 이 제국에 손을 뻗을 것임을. 하지만 보아라. 알고 있으나, 사고는 행동에 닿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저 태평하길 원하는 제국민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그 마음 때문에. 이웃 영지가 불타더라도 자신의 작은 밭이 기름지면 그걸로 족한 어리석은 이들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에! 제국은 하나이기에 그 거대한 어리석음이 제국을 하나로 움직이게 되고 말았느니라!”
제국은 병들었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시기에 가장 피해 없는, 안전하고 수동적인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그것이 오래전, 수도 하나밖에 남지 않아 단 한번의 패배조차 용납할 수 없던 왕국 발틴이 살아남은 방식이었으니까.
그리고, 제국은 스스로 부강해지는 의지 집합체에 가까운 곳이기에. 스스로가 병들었음을 인지한 제국의 의지는 그것을 고쳐내고자 한다.
“마녀는 돌처럼 굳어가는 제국에게 있어 분명한 변화이니라. 피와 살점이 넘치는 끔찍함이지만, 제국이라는 거대한 생물에게 그 선과 악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 제국은 수술이 필요했고, 그녀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의지가 보기에 제법 괜찮은 칼이었으니.”
병든 제국을 위한 충격. 스스로를 고치기 위해 암덩어리를 받아들인 제국. 그 사이에서 마녀는 세를 키우고, 뱀처럼 파고들어, 마침내 황제의 곁으로.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도착했다.
허나 500년 전 의지가 움직이는 제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마녀가 애초부터 그 거대한 의지 집합체와 같은 제국의 정체를 읽어내고 있었으며 그것에 눈독을 들였다는 것이다.
마녀는 제국의 흐름을 타고 뱀처럼 파고들었으며, 거대한 몸집만큼 둔중한 제국이 눈치채기도 전에….
황제의 힘을, 그 일부를 강탈했다.
“마녀가…. 황제에게만 주어지는 그 힘을, 제국 그 자체를 강탈했단 말입니까?”
“애초에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힘 따위가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황제는 살아있는 상징물일 뿐. 제국의 힘은 그저 제국 전체에 존재하는 것뿐이니라. 마녀는 내게, 이곳에, 제국 전역에 저주를 심었으며, 내가 쇠약해진 틈에 저주로 그 틈을 벌려 제국의 신위, 스스로 존재하기에 그 주인이 없는 신위의 일부를 손에 넣었지.”
스륵-
황제가 그를 덮은 화려한 의복의 끈을 풀어 보였다. 앞섶이 열리고 드러난 황제의 상체. 노쇠한 나이에도 강건했던 육체의 흔적이 남아있는 단단한 그의 몸에, 깊이 뿌리내린 저주화가 그 반신을 뒤덮고 생생하게 자라나 있었다.
제국의 가장 뼈아픈 실패를 토로하는 황제는, 역설적이게도 즐거워 보였다.
“후흐흐흐…. 제국은, 마녀의 역량을 가늠하지 못하여 그 심장의 일부를 내어주었지. 마녀는, 그 손에 들어온 힘을 휘두르기 위해, 제국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마저 손에 넣기 위해 움직였으며, 지금…. 너와 내가 마주하고 이리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리석어. 참으로 어리석다! 이 제국도, 제국의 모든 신민들도! 마녀도, 그리고 눈앞의 너조차! 이 나의 눈에는 참으로 어리석어 우스울 지경이구나! 후하하하! 흐하하하하하!”
황제는 웃고 있었다. 저주화의 뿌리가 파고든 반신. 그쪽 얼굴 반은 여전히 나태와 무료에 찌든 인형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머지 반쪽 얼굴은 참을 수 없는 희열과 광기를 불태우며 낡은 성채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마녀가 황제에게서 ‘제국’의 절반을 빼앗아 갔음이라! 이는, 거대한 힘에 억눌려 잠들어있던 이 ‘인간 칼레시악스’가 깨어나 활동할 자리가 생겼음을 의미하며! 마침내 거대한 하나에 짓눌려 합일하지 못하던 ‘황제’와 ‘제국’이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게 되었음을 의미하니! 그 비루한 타락자의 술수가 제 목을 조르게 됐음이라! 어찌 우습지 않겠느냐! 제국은, 실로 그 모든 행사가 제국을 위함이라! 으하하하! 후하하하하!!!”
‘그래서였군. 안 그래도 황제가 그렇게 저주라 불릴 만큼의 나태와 황제 스스로가 없음을 강조했으나, 어떻게 이렇게 자기 의지를 피력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황제는 ‘제국’이라는 힘의 집합체를 위한 수용체에 불과했으니. 황위 계승은 낡아버린 전구를 갈아 끼우듯, 새로운 황제를 갈아 끼우는 행위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황제는 분명히 자기 의지로 나와 대화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 이유가 드러났다.
마녀의 저주가 파고든 틈. 그 틈으로 새어나간 황제의 힘.
자아를 억누르던 거대한 제국의 의지가 빠져나가며, 그 안에 갇혀 있던 수형자가, 황제의 이름으로 잠들어있던 칼레시악스라는 인물의 의지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아아아. 마치, 악몽과 같구나. 성자여, 이 늙은 몸을 보아라. 제위에 오를 때에는 세상을 호령하며, 바위를 깨부수던 강건한 몸이었으나. 눈을 떠보니 늙을 대로 늙어 그마저도 저주에 당한 몸이라. 이것이, 이 황제라는 자리가 저주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진즉에 알았다면 그토록 치열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을 것을.”
황제, 칼레시악스는 생명이 꺼져가는 그의 몸이 우습다는 듯, 킬킬거리며 내게 눈을 돌렸다. 여전히 그 목소리는 늙었으나, 그 말투는 늙은 황제가 아니라 이제 막 제위에 오른 30대 칼레시악스의 말투에 가까웠다.
“긴 이야기였으니 이제 답을 주마. 마녀가 어떻게 황제의 힘을 다루는가. 그야 마녀가 황족의 몸을 얻었기 때문이다. 황위 쟁탈전은 거대한 제국에 흩어진 그 모든 힘이, 계승을 위해 수도로 모여드는 시기. 그 불안정함이야말로 그 힘을 강탈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이지. 마녀가 거기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병들고 고장 난 제국의 힘이 그 마녀를 이 제국의 병마를 도려내기 위한, 지나치게 많아진 제국민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마녀는…. 2황자의 모친, 테레누아 황비가 맞습니까?”
“….어리석구나.”
따악-!
황제의 왕홀이 다시 한번 바닥을 찍고, 다시 한번 주변의 광경이 변화했다.
‘현실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신성에 가깝던 황제의 힘으로 꾸며진 ‘정원’이 아니라, 이 장소가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황성임을.
거대하고, 웅장하며, 피로 얼룩진 알현실.
저주 속에 황제를 지키기 위해 서로 죽여댄 근위 기사들의 시체와, 황족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시체가 황제의 발밑에 쓰러져있는 곳.
황족, 그중에서도 황후, 황비만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은 시체를 발끝으로 굴리며, 황제는 황금빛이 사라진 한쪽 눈을 번뜩였다.
“어리석고 야심 넘치는 여인이며, 온갖 수단으로 그 아들을 황제의 위에 올리고자 했던 여인이지. 혼란을 틈타 나를 암살하기 위해 2황자와 그 버러지들을 대리고 황성에 침입했더구나. 황족에게는 황족을 위한 통로가 따로 있으니. 사갈 같은 여인은 맞으나, 마녀는 아니지.”
“그럼….”
“생각하거라, 의문을 품는 자야. 내 너를 선택하여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바로 그 끝없는 의문 때문이니. 테레누아가 아니라면 마녀는 누구겠느냐.”
황제의 힘. 일부만 흡수했으며, 이 진실의 뒷면에서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서도 그 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
표면적인 황제의 자리. 황위 쟁탈전. 황족.
제국 전역에 저주화를 퍼트릴 수 있는 지위.
도로를 만든다면, 사전에 그것을 기획할 수 있는 자.
제국 대부분의 행정관, 공사에 필수로 포함되는 마법사, 법무관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자.
“….1황녀. 그녀가, 마녀였군.”
“이미 제국 실무를 움직이는 대부분을 그 손아귀에 넣었고, 나머지는 저주로 움직이는. 1황자가 침몰한 이상 겉으로도, 물밑으로도 제위에 가장 가까운 것이 그녀지. 심지어 저주로 얽어맨 것이기는 하나, 황제의 힘까지 상당수 가지고 있으니, 이미 제국은 그녀를 황제로 여기며 그 주변을 정리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후둑. 후두둑. 후두두둑.
황제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황성의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내 스스로가 제국의 황위를 증오한들, 여전히 나는 제국의 황제이니. 제국의 모든 신민이 아비규환 속에 제 살을 깎아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볼 수 없음이라. 하여, 제국의 황제. 칼레시악스 틸 아그단 9세로서. 온전히 이 제국의 적법한 황위를 물려받고 그 이지를 상실하지 않은 황제로서 첫 명령이다, 성자여.”
쿠르르르-
쿵! 쿠궁!
스스로 무너지듯, 그 기반에서부터 스러지기 시작하는 황성 안에서. 황제는 그 왕홀을 들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새 제국을 열어라. 적법한 다음 대 황제, 마녀를 주살하고. 새로운 황조를 세워 마침내 제국이 5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났음을, 새 제국으로 다시금 천년의 역사를 이룩할 것을 알릴지어다!”
쿠우웅!
마침내 수도와 황성을 나누던 벽이 무너지고. 황제와 무릎 꿇은 교수 앞에 화마와 혼돈으로 가득 찬 수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후둑. 후두두둑.
무너지는 황성. 그 모습처럼 황제의 육신도 바스러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국과 한 몸인 황제. 그 황제가 제국의 종언을 고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리하여. 제국은…. 살아 남으리라. 살아남을지어다, 제국이여. 그것이, 반 천년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자처하는. 이 칼레시악스 틸 아그단 9세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명이니. 사자의 제국은 저물고, 새로운 황조가 탄생하리라. 500년 전, 초대 황제의 망령에서 벗어난. 새로운 황조가.”
황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울릴 때마다.
그 어절, 낱말 하나에 담긴 의미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스며든 말은 힘이 되어 바람으로, 먼지로. 금빛 힘의 가닥으로 제국의 끝을 향해 퍼졌다.
그 힘에 제국을 상징하는 황성이 무너지고, 첨단에 걸린 사자의 깃발이 스스로 불타 스러졌다.
제국을 부수고, 그리하여 제국을 탄생시킨다.
‘제국의 일부는 마녀의 손에. 그 나머지는 황제의 몸에 남아있다.’
황제는 아직 그에게 남은 제국의 힘을 이용하여 제국을 저물게 했다.
힘의 계승이 아닌, 소멸.
황제는, 이대로 가면 마녀의 손에 들어갈 그 나머지 힘을 제국과 함께 사라지게 한 것이다.
“그대, 성자여. 초대 황제 이후 제국의 힘과 의지, 그 둘이 합일된 진짜 황제를 알현한 유일한 자여. 네 스스로가 황제가 되길 거부했으니, 너는 그 손으로 사자의 제국이 저물었음을 알리는 신호수가 되고, 새 황조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기수가 될지어다.”
화르륵!
무너져가는 황성의 잔해 속에서, 스스로 타오른 깃발이 떨어져 내리더니 무릎 꿇은 교수의 앞으로 떨어졌다.
“황제를 거부한 자에게, 새 황제를 선택하게 하노라…. 발틴의 이름에, 제국이란 이름이 붙을 때 그랬듯. 태초의 황제가 임명될 때 그랬듯이….”
황제는 마르고 부서져 가는 몸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반쯤 불에 탄 천 조각에 황제의 왕홀이 깃대가 되어 묶이고. 그것으로, 그 소명을 다한 마지막 황제의 몸이 재가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제국 전역에 저주화가 퍼져있을 때부터 황제가 평범한 상태가 아닐 것임은 짐작했다.
황제가 제국이라면, 제국을 삼키려는 마녀 입장에서 황제는 반드시 그 저주에 물들여야 할 대상이니까. 황제는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이라 예상했다.
왕홀을 깃대로, 불에 반쯤 탄 사자의 깃발을 그 바탕으로.
아직 검게 그을어 아무런 문양도 없는 깃발을, 교수는 받아들었다.
그 순간, 부서진 황제의 잿더미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황금의 기운이, 허공으로 완전이 흩어짐과 동시에,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멀리, 수도 어딘가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펴졌다.
황제의 마지막 선물. 절대로 완성될 수 없는, 목표 잃은 마녀의 저주. 제국 모든 백성에게 심어진 명령. 전 제국을 휘감은 희생제, 저주의 말뚝을 타고 흐르는 사멸의 저주를 끊어낸 한마디.
[살아남으라.]아마 저 비명은, 완전히 손에 넣었다 생각한 제국이 그 손아귀 사이로 흩어져 내림에 분노한 마녀의 비명이리라.
“….제국에 빌붙어서 손이나 한번 잡아달라고 하려 왔는데.”
정작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 새 제국의 출발점이라니.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제국의 심장부터 콩가루가 되면, 다음 월드는 안 봐도 뻔하겠지.”
교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그 깃발을 들어 아공간 속에 집어넣으며 겨우 걸어다닐 만큼 회복된 몸을 일으켰다.
더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 성벽처럼 커다란 가시넝쿨과 저주화가 도시를 부수며 자라나는 곳.
마녀가 있는 곳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