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3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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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어두운 단칸방, 침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쉴새 없이 울리는 알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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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liard74 : 시바! 와, 시바! 시발! 개! 씹! 와!
– 토론토론토론토 : 이제 내 앞에서 랭커놈들 놀면서 돈번다고 하는놈 있으면 아가리 찢어버릴 거임. 3년만에 참치 통조림 처음 먹었을 때도 이 정도 충족감은 없었다.
– siuox2000 : 박교수의 플레이에는 감동이 있다.
– kirin : 메이크 엠파이어 그뤠잇 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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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방 : 47-19(발전기를 위한 살덩어리 모임)]뚝…. 뚝….
금이 간 화면 속으로 들어갈 듯, 깡마른 두 손으로 화면을 붙잡은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어둑한 방을 비추는 화면 한 켠에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대화방 하나와, 무너진 황성의 알현실에서 재가 된 황제의 깃발을 받아드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 professor. 본명은 박교수.
그 남자는 희망이라곤 없는 이 세계에서 그의 유일한 빛이자, 우상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빠져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멸망 이전에는 시니컬한 금융계 회사원이었으며, 멸망 이후에는 별다른 기술 없이 하루하루 GG 앵벌이로 살아가던 하층민에 불과했으니까.
그에게 있어 황무지는 폭력이었고, 돔은 그 폭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쥐어짜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었다. 돔이 미웠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랭커는 돈으로 환심을 사는 부르주아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소가 가득한, 패널티 플레이만 골라보곤 했다.
돈이 없어 타인의 광대가 되는 이들.
현실보다 다섯 배는 느린 시간이 다섯 배의 노동시간으로, 나무를 베고 광석을 캐는 그처럼 GG가 또 다른 현실로, 고통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만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씁쓸한 위안이라도 됐으니까.
띠링-! 띠링-! 띠링-!
하지만, 박교수라는 인물은 어떤가.
오래된 이야기 속, 우유 통에 빠진 생쥐 두 마리처럼.
그가 우울한 한숨 섞인 위안 속에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했을 때, 인간 박교수는 그와 똑같이 앞이 막막한 상황에서 헤엄치고, 허우적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포기한 생쥐가 가라앉을 때, 발버둥 치던 생쥐는 끝내 우유가 치즈가 될 때까지 뒤섞어 통 밖으로 살아나갔다.
“흐끅, 흐으윽….”
지금, 살아서 밖으로 나간 저 생쥐를 보라. 황무지의 그 어떤 사람도, 부자에서 가난뱅이까지, 지도자에서 범죄자까지 그 노고를 부정할 수 없는 저 위업을. 월계관 위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부끼는 저 존경 담긴 활자의 세례를.
태어나서 누군가를 존경하게 될 줄 몰랐다. 막연한 위인전 속 평면의 사진이 아닌, 그와 같은 세대에 살아 숨 쉬는, 그보다 어린 남자를.
바스락-
남자는 오늘 낮, 허름한 옷의 사람들이 나눠주던 재생지로 만든 전단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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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ant YOU! 오라! 광명교단 – 황무지 교구로!]스스로가 무력하다 여겨지십니까?
이대로면 됐다,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다, 그리 여기십니까?
그런 당신을 위한 보금자리가 여기 – 있습니다!
보금자리이되, 안식처가 아닌 곳!
아직 남아있는 삶을 무가치하게 넘기지 않기 위한, 생존자들의 터전!
살아라! 살아가리라! 아직 붙어있는 내 목숨이 그 삶을 증명한다!
(구) ‘박교수님찬양해팬클럽’이 많은 이들의 성원에 힘입어, 돔에 정식으로 등재된 종교 단체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신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봉하는 것은 지금껏 살아남은 그 자신!
그 험난한 길을 손수 해쳐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등대, 인간 박교수님!
예, 사이비 맞습니다! 우린 한 인간을, 그 삶과 사상을 존경해서 모였다!
혹여 우리와 같은 생각이라면. 아직 스스로가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그러길 바란다면!
지금 바로, 메시지 하십쇼!
[매주 수요일 난민 D 섹터 정기 모임] [가벼운 오찬(밥 없으면 차만 마심) 및 물물 교환] [사지 멀쩡한 남성은 높은 확률로 BDSM 입단 테스트 가능] [매우 희박한 확률로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님 방문] [벡스님 정기 방문]문의 : ‘로하람의몽키스패너’ 개인 메시지.
후원 : ‘로하람의삼각자’ 개인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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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듯, 종교라기보단 팬클럽에 가까운 모임.
하지만 본 적도 없는 사람들임에도 친숙한 마음이 들었다. 요령도 없고, 집단 생활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라도. 그래서 변종 화합물 마약을 공공연히 거래하는 E급 난민 구역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이 사람들이라면….
….타닥.
남자의 손이, 천천히 전단지의 ID를 타이핑했다. 소심한 남자의 얼굴에 긴장이, 반가움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 특유의 즐거움이 떠오를 무렵.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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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치명적인 에러. 외부 송출을 중단합니다.] [경고. 치명적인 에러. 외부 송출을 중단합니다.]– 토론토론토론토 : 뭔데 시바.
– blliard74 : 야, 나 방송꺼짐. 설마 전기세 체납해서 그런가?
– 고리미 : 나도 그런데? 난 돔 안에 살고있어서 그럴일 없는데?
– 토론토론토론토 : 뭐여!
– 고리미 : 우우! 방송 돌려줘라! 여기서 끊다니!
– blliard74 : 돌려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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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구역 대화방]========
– Jokass : 갑자기 꺼짐.
– 흥안만두 : 돌려줘…. 방송도 없으면…. 여긴 너무 외로워….
– 간장게이바 : 핫라인으로 물어봤는데, 송출쪽 문제 아니라는데.
– takealook : 그럼 뭔데.
– 간장게이바 : 몰라. 행정부에서도 모른대. 그냥 갑자기, 게임이 끊겼다고.
– 노루Drug해요 : ???
– Jokass : ???
– 간장게이바 : 에이씨. 벡스형 또 탈주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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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대화방] [47-19 대화방] [대화방 : 전너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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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경고. 치명적인 에러. 외부 송출을 중단합니다.]모든 방송 시청자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와 함께, 교수를 비추던 모든 방송이 사라졌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교수님이!”
팔락!
남자도 들고 있던 전단지를 집어 던지며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그 어디에도, 교수의 방송을 보고 있다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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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어이, 얘들아! 뭐하냐!
– professor : 뭐하냐고! 이거 깃발, 누구 주면 좋을 것 같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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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깃발. 그것도 제국의 다음 대 황가를 상징할, 아무 문양도 없이 검게 그을린 흑기(黑旗).
황제는 생의 마지막 자유를 제국민의 안위와 마녀를 엿 먹이는 데 사용하며 시원하게 흙으로 돌아가셨고, 남은 권한을 모두 내게 넘겼다.
사실상 황제의 전권 대리인이라 이거지. 마녀만 조지고, 새로운 제국을 선포하기만 하면 이 넓은 제국의 1등 개국공신 당선이라, 이 말이다.
문제는 이 난리 통에 누굴 새 황제로 추대하느냐. 그게 문제라 고민하다 대화방에 물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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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여보세요? 조카스? 노루? 다나? 게이야!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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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개인 메시지도 먹통.
대화방도 먹통.
깃발 받는 순간에 치직- 하는 노이즈 같은 게 들리긴 했는데, 아마 그때 뭐가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다.
“뭐지…. 설마 밖에 렙터라도 쳐들어왔나. 테러범이 행정부에 침투해서 막 건물이 반파되고, 재수 없게 지금 내가 쓰는 접속기가 당해서 연결이 끊어졌다거나?”
[글쎄. 딱히 현실 쪽 몸뚱이에 진동 같은 건 안 느껴졌는데.]“….써보니까 현실 쪽 변종 육체도 겁나 예민하던데. 그럼 폭발이나 테러도 아니고. 진짜 버근가?”
갑자기 외부와 단절된 상황. 아무리 나라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분히 알아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쿵- 콰드드득!
마녀가 탐내던 황제의 힘이 소멸했다. 이 말인즉, 저주화의 생장을 막고 있던 황제의 힘 대부분도 같이 사라졌다는 뜻.
수도 전역에 피어난 말라붙은 저주화가 미친 듯이 자라나고, 일부는 건물 기둥만 한 가시넝쿨을 뽑아 올리며 수도에 그 거대한 꽃잎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희생제의 저주는 깨졌겠지?”
[네 머릿속 지식에 따르면. ‘저주는 위력에 상관없이 맨 투 맨. 대상, 촉매, 시전으로 발현한다.’ 촉매는 보다시피 만개. 시전은 100년 묵은 마녀. 그런데 대상이자 핵인 황제가 증발해버렸으니 국가 단위 대규모 저주도 완성되지 못하고 사라졌겠지.]“50여 년에 걸친 빌드업이 마지막에 엎어졌다라…. 저렇게 길길이 날뛸 만하군.”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저 멀리, 수도 한쪽에서 울리는 비명소리. 한눈에 봐도 저주화가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것이 마녀가 저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 황제의 선출.
갑자기 끊긴 접속기.
꼭지가 돌아버린 마녀.
[….어떻게 할 거야?]교수는 대답 없는 대화방과 빈 깃발, 그의 발치를 향해 줄기를 뻗는 저주화를 차례로 바라보다 대답했다.
“여기 와서 배운 게 있지.”
[뭔데.]“가끔은, 생각이 많아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 말이야.”
어차피 접속기 문제는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것. 제외.
새 황제가 먼저냐, 마녀가 먼저냐 하는 것인데…..
건국에는 신화가 따른다. 그 정통성의 계승을 위해서라도 새 황제가 마녀 조지는데 한몫 거들어주면 스무스하게 제국의 이양이 이루어지겠지만, 당장 마녀님이 52년짜리 프로젝트 망친 놈 얼굴 좀 보자고 날뛰고 있으니….
“….우리 메탈죠 씨의 방법을 좀 참고해 볼까.”
[….응?]교수는, 발을 돌려 이제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황제에게 돌아갔다.
화려하지만 벌써 수백 년은 지난 듯 낡아버린 망토와 의복. 그 사이에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장식.
둥글넓적한 황족의 인장.
“….이쪽에 끌어들인 것도 아저씨니까, 마지막까지 가이드 좀 해주시지요.”
팅-!
‘크하하하! 코인 토스다! 행운의 여신에게 올인이다!’
순간, 기름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추억에 히죽거리던 교수가 황제의 인장을 엄지로 튕겼다.
앞면. 사자 얼굴이면 새 황제부터.
뒤. 뭔지 모를 복잡한 마법 음각이면 마녀부터.
휙- 휘릭- 휙- 휙-
쩌거억-!
허공에서 돌던 인장이 바닥에 닿는 순간, 교수의 손바닥이 인장을 내리눌렀다.
그 힘에, 재가 된 황제 앞에 박혀버린 인장.
교수는 단단한 돌바닥에 상감되어버린 인장을 보며, 황제의 옷을 입은 잿더미를 향해 히죽 웃어주었다.
“….그쪽이 정해준 겁니다. 잘못되면 내 탓하기 없어요?”
방향이 정해졌으니, 이젠 움직일 뿐이다.
교수는 체력은 회복됐지만, 여전히 폭풍에 날아간 한쪽 팔은 복구하지 못한 채 황성을 뒤로하고 달려나갔다.
무너진 황성의 중심에 덩그러니 박힌, 황제의 인장.
뒷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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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악!”
그 시간, 마찬가지로 수도 올 암페리아, 황성 인근.
“오지 말걸, 오지 말걸! 리스크 옵션 따위, 거들떠보지도 말걸!”
루실라는 생에 처음으로, 이성 대신 감성을 따라 움직인 것을 백마흔두 번째 후회하는 중이었다.
성벽을 넘어올 때까지는 좋았다. 곳곳에서 굉음과 비명이 들렸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위협이 없었고, 거대한 절벽 사이에 자리 잡은 돌 골렘의 다리는 누가 먼저 지나갔는지 수없이 많은 기사들의 시체로 길이 뚫려 있었으니까.
‘이건…. 2황자의 인장인데? 기사들도 한쪽은 근위기사, 다른 쪽은 2황자의 기사…. 2황자 세력이 무리수를 뒀구나! 황제를 직접 공략해서 어거지로 황위를 받아낼 생각이야!’
저 멀리, 정문 쪽에서 폭음과 폭풍이 몰아치는 것을 보니 용사님은 정문으로 간 모양. 그녀는 황성의 동문에 있었으니 열심히 뛰어가면 합류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투가 아니다! 여기에, 여기 뭔가가 있어! 크고, 반짝이는 황금의 산! 그런 느낌이 들어!’
대신 그녀는 그대로 기사들의 시체를 넘어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
쿠구구구-
콰앙!
쿵!
“와아아아아앙! 단 한번의 실패로 끝이라니! 인생 파산이라니이이이! 용사님! 노툼! 알드리치! 누가 좀 도와줘요!!!”
지금,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황성 한가운데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돌덩이와 기둥을 피해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미 성 내부에 환상처럼 자리 잡은 옛 도시, 그 허름한 흙길을 따라 한참 안으로 들어온 지 오래.
그녀를 마구 충동질하던 신비한 인도도, 황금의 기운도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한 지금. 그녀는 갈 곳을 잃고 마구 뛰어다닐 뿐이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루실라가 ‘내 전설은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는구나!’ 같은 생각을 떠올릴 무렵.
와르르르!
“하악, 흐아- 지, 지하실? 지하실! 로 하람 엘 사미아 테네브리아 다 카르자 아미스시여! 누가 됐든 저를 지켜봐주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아나가면 꼭 헌금할게요!!!”
무너지는 건물 속, 신기루처럼 나타난 지하로 향하는 문에 루실라는 5대 선신의 이름을 외치며 몸을 던졌다.
덜컥.
“….어?”
덜컥 덜컥!
“자, 잠겼어?”
아무리 밀고 잡아당겨도 꿈쩍도 안 하는 문.
안간힘을 쓰는 루실라의 머리 위에, 통째로 부러진 첨탑 하나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덜컥, 덜컥덜컥덜컥덜컥!
“제발, 제발!!!!”
사방을 뒤덮은 그림자에 루실라가 절망적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길 무렵.
“비키세요!”
서걱!
어디선가 나타난 인영이 두터운 나무 문을 베어 넘기며 루실라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간발의 차이로 뛰어드는 두 사람과, 쏟아지는 파편.
쿠구우웅-!
안으로 굴러들어와 머리를 감싸고 있던 루실라는 굉음이 잦아들자 그녀를 구한 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가득한 지하실에, 청량한 숲공기 같은 향기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루실라는 푸른 머리칼의 엘프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 이드라시이이일~! 나 구해주러 왔구나!!! 여긴, 여긴 어떻게 왔어?”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루실라. 분명 성하도시의 위장 결계 안에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 달라 부탁했던 것 같은데요.”
“히끅!”
“제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왔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루실라야 말로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실례되지만, 현장에서는 무능한 당신이 올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닌데.”
“음….”
평소의 침착한 모습과 달리 엄한 목소리에 루실라는 망설였다. 그녀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하지? 알 수 없는 확신? 황금의 인도? 상인의 감?
그냥 아무거나 둘러대기엔, 지금 이 순간에도 희미하게나마 남은 그 끌림이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전처럼 강한 끌림은 아니지만, 꽤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래, 상단과 함께 움직일 무렵, 교수라는 인간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끌림. 상인으로서 귀한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의 감각.
“이곳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교수를 쫓아 왔는데 갑자기 그가 사라지고, 환상 같은 도시에 홀로 남게 되지 않나. 분명 저 혼자 있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루실라 당신의 비명이 들리지 않나. 제국의 수도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탁탁탁-
“쉬이, 이드라실, 잠깐만. 아무래도 여기인 것 같아.”
“….설명이 필요합니다.”
“내가 여기 와야 했던 이유. 여기 같다구.”
숨을 돌리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어른거리는 실루엣.
낡을 대로 낡았지만, 지금 그 상태로도 고가에 거래될 만큼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물건들.
“여기는…. 창고? 아얏! 으…. 무기고인가?”
루실라는 손끝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인상을 쓰며 나아갔다.
한눈에 봐도 수백 년은 이 상태로 방치된 무구들이었으나, 여전히 손만 슬쩍 대어도 살을 베어낼 만큼 충분히 예리했다.
이 창고를 가득 채운 무구들이 전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얘기.
그리고 그 가운데, 마침내 상인으로서 루실라의 감각을 그토록 자극했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다른 먼지투성이 무구들과 함께 덩그러니 놓여,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검.
혼자 들기 버거울 만큼 무겁고, 크며, 사자머리 장식이 인상적인 대형 곡도.
“이, 이거야….”
“루실라?”
“이게, 이게 날 불렀다고, 이드라실! 역사책에서만 봤던 물건! 초대 황제, 사자왕 아그단 1세와 함께 제국의 하늘을 열었으며, 그와 같은 운명을 부여받은 사자검, 라이오넬! 시, 실물 같아. 예식용 복제가 아니라, 제국에서도 그 향방을 알 수 없었던 실물 같다고!”
검으로서 초대 황제와 운명을 나누었으며, 그 개천(開天)의 운명을 다하자 홀연히 사라진 황제의 검.
라이오넬.
초대 황제인 아그단 1세 이후로 그 누구도 찾지 못했으며, 사용하지 못해 황제와 그 마지막 운명을 함께했다 전해지는 전설의 검이, 지금 이 신기루 같은 도시 지하에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래전 개국의 역사를 함께했던 수많은 무구. 그들과 함께 잠들어있던 하늘을 여는 검. 사자검 라이오넬이.
“….으으, 으으으으! 리스크!”
덥썩!
예민한 이드라실은 감히 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가운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루실라가 눈을 딱 감고 그 손잡이를 잡아들었다.
딱히 빛을 뿜거나,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 모습.
하지만 루실라 같은 작은 체구의 아가씨가 그 거검을 들어 올렸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안 무겁네? 역시 비싼 물건은 다른 건가?”
“그건…. 검을 넘어 오래된 정령과 비슷한 존재에 가깝습니다만….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몰라! 애초에 이 녀석이 나를 불렀다고! 확실해! 그리고 라이오넬의 전승에 아무나 만질 수 없다는 이야기는 없었어! 아그단 1세도 필요할 땐 부하들이나 다른 사람 빌려줬다고 전해지고!”
“하지만….”
“에이잇, 그게 아니면 뭐 어때! 지금 눈앞에 있는 물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유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라구! 그 전설 속 드래곤 하트랑 바꿀까 말까 한 물건이 있는데, 상인으로서 물건이 비싸다고 그 기세에 압도되어선 손도 안 대고 넘어갈 수야 없잖아!”
“으으음….”
전혀 그런 얘기가 아니었지만, 이미 검집째 라이오넬을 들어 올린 루실라가 드레스 밑단을 찢어 허리에 거검을 동여매고 있었기에 이드라실은 말을 줄였다.
“가자, 이드라실!”
“가자니. 어디로 말입니까.”
“당연히 이걸 제값에 구해줄 구매자를 찾아서지! 당장 제국은 마녀의 손에 콩가루가 되어가는 와중이고, 황제를 상징하는 황성은 무슨 일인지 와르르 무너졌어! 그런 가운데 이 사자검은 그야말로 정통의 상징! 계승의 증거!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야말로 수요가 폭증하는 물건이지!”
“그러니까, 누구에게 간단 말입니까.”
“어…. 음…. 얘가 찾지 않을까? 전설이니까!”
우우웅-
이드라실이 슬슬 루실라마저 미친 게 아닌가 한숨을 내쉬던 찰나, 검이 그 물음에 대답하듯 울렸다.
“이, 이쪽이래! 대충, 그런 느낌이 들어!”
“….후우우.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엘프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음? 뭐라구?”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죠.”
이상한 표정이 된 이드라실이 ‘체념’이 무엇인지 배워나가는 가운데.
덜컥!
무너진 황성의 잔해 속에서, 물의 정령이 들어 올린 바위틈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수도를 향해 빠져나왔다.
보랏빛 재가 몰아치는 하늘과 저주화에 뒤덮인 땅이 세를 넓혀가는 가운데.
….우우웅.
[검가, 슈왈츠 가문. 검의 무덤.]“가주님! 거, 검이! ‘돌아오지 않는 가주의 검’이….!”
“….밤공기가 심상치 않다 여겼거늘. 오래된 맹세의 날이 오늘이었구나. 아이들을 깨워라. 채비를 해야 하니.”
[오래전 멸망한 영지. 사형장.]쿠우웅!
“이 도끼는…. 이런. 제국이여, 아직도 이 노구에게, 시킬 일이 남았는가….? 흘흘흘…. 어디, 뼈만 남은 몸으로도, 이게 휘둘러지는지 한번 볼까.”
[숲. 달빛이 담긴 연못.]“나림. 이건….”
“동요하지 말거라. 마무리되지 못한 일은 언제고 찾아오는 법이니. 화살이 왔으니, 활만 챙기면 되겠구나.”
[글렌 공작가]“무토! 무토 어디 있느냐!”
“여, 여기 있….습니다! 새벽이라 잠깐, 아주 잠깐만 눈을 붙였던-”
“헛소리하지 말고 대서고에 가서 그걸 챙겨오너라!”
“그거요? 그거라면….”
“그거 말이다 이놈아! 가장 오래된, 낡아 빠져서 버리지도 못하는 법전!”
[폭풍의 언덕. 방랑 마법사의 고향.]“….이건 또 무슨 재수 없는 바람인지. 어이, 지금 안자는 놈이…. 아, 네가 있었구나.”
“예. 이 새벽에 무슨 일이십니까.”
“가서 바람 한 줌 끌어 모아두거라. 수도에 좀 들러야겠으니.”
“수도…. 말입니까?”
“그래. 다 흩어진 지 오래된 바람이지만, 그래도 이 자리의 주인께서 한때 황제와 호형호제하던 분이었으니 어쩌겠느냐. 세입자인 우리가 갚아야지.”
우웅-
우우웅-
동, 서, 남, 북.
공작가에서 이름 없는 헛간까지.
황제의 사멸과 함께 흩어진 제국의 힘.
아직 마녀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것. 순수하게 황제와 그 개인 사이에 맹약으로 묶여있던 힘.
제국이라는 틀에, 황제의 이름으로 한데 묶여있던 그 힘은 제국 곳곳으로 퍼져 제 모습을, 제 자리를 되찾아 갔다.
우웅-
우우웅-
“어휴! 얘! 네가 귀중품인 건 알겠는데, 지금은 이렇게 들고 가는 수밖에 없어! 좀 조용히 좀 해봐!”
“….루실. 검은 말을 모릅니다만.”
“으으음…. 전설의 검쯤 되면 사람 말 정도는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우우우웅-
루실라의 투덜거림 사이로. 그녀의 허리에 매달린 사자검은, 그 흩어진 빛을 인도하듯 끊임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수도로. 제국이 시작한 곳이자, 끝을 맞이한 곳으로.
그리고, 다시 시작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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