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5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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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리치가 말해준 마녀의 영역을 해제하는 법.
그것은, 어찌보면 3형 변종을 상대하는 그것과 흡사했다.
‘흑마법사란 영혼의 갈라진 틈, 그 틈을 타고 새어나오는 변질된 마나를 이용하는 이들이지. 마냥 새어나오면 생명이 다하여 죽게 되니 흑마법사는 무엇이 되었든 가능한 것으로 그 틈을 막아두었다네. 나 같은 경우에는 네리아의 악령으로 막았으며, 아예 영혼 전체를 함에 넣어 그 균열과 분리시킨 이도. 혹은 영혼 자체를 변질시켜 그 형태를 바꾼 이도 있지.’
‘중요한 것은, 아무리 숨겨도 흑마법사의 내면에 그 균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흑마법사의 약점이며, 숙명이지.’
‘그것을 찾아내 어떻게든 손상을 입히는 것. 그게 우리의 목표일세. 이렇게 영역을 구축하고, 다른 환경까지 투사했다는 것은 이곳이 그녀의 내면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야.’
‘물리적 상해를 입히건, 정신적 상해를 입히건. 그녀를 흔들게. 그리하여 그것이 드러나면 나와 넬이 붙잡을 테니.’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상대의 의지를 꺾어 빈틈을 만들어내라는 얘기.
확실히, 이 저주화의 탑 내부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처럼 보이긴 했다.
“전쟁터라….”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군. 그러고 보니 용사를 하기 전에는 용병 일을 했다고 했나?”
“예, 뭐. 그것 때문에 익숙한 건 아닙니다만.”
내게 있어 전쟁터, 하면 떠오르는 것은 눈에 익은 광경보다 코로 느껴지는 냄새였다.
눈앞에 보이는 전쟁터는 막사에 들어가거나 눈을 감으면 잠시나마 보이지 않았지만, 코를 찌르는 그 냄새는 그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까지는 계속 따라왔으니까.
그냥 피 냄새라 하긴 애매하고…. 신선한 것과 부패한 것. 내장에서 쏟아진 악취와 고기 타는 냄새가 섞인 것.
거기에 화약 냄새와 레이저 블레이드 주변의 오존 냄새를 첨가하면 바깥의 전장이고, 그게 없으면 이 동네 전장 이라는게 차이일 뿐. 먼저 얘기한 요소들은 전장 근처에만 가도 느낄 수 있는 냄새였다.
그런 면에 있어, 마녀의 영역 내에 펼쳐진 전장은 베테랑인 내게 있어서도 꽤나 낯선 느낌이었다.
부패. 오직 삭을대로 삭은 시체만 가득한 전장.
순간 전장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된 전장을 형상화 한 것인가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저 부패한 피에서 아직 더운 김이 올라올 정도였다.
죽은 자의 무릎이 땅에 닿기도 전에 썩어들어가는 전장. 망자의 죽음마저 모독하는 대지. 부패한 사체와 온기라니.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 까.
“이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수도의 모습은-”
“아니지. 너희가 발을 붙인 곳은 아주 오래전. 너희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자의 전장이며, 한때 나의 전장이었던 곳이니.”
부패한 시체가 뒤엉킨 언덕. 그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알드리치와 교수는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저주에 걸린 기사도, 시체더미 괴물도 없이 홀로 모습을 드러낸 마녀.
“눈이 아릴만큼 오랜만이구나, 내 아들 알드리치. 그리고, 네리아?”
“….이제 그따위 말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긴 했지, 마녀.”
“매정해라. 나는 너희를 정말 사랑했는데. 어미로서도, 마녀로서도.”
1황녀의 모습으로 시체 언덕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그 악취와 배경에도 일견 기품있으며,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으나.
식은 땀에 젖은 머리칼과 바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숨길 수 없는 악의가 그 모든 것을 흉측하게 뒤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너. 빛의 성자. 신의 일부가 아니지만, 그 손에 쥐어진 도구된 자. 로 하람의 손길이 닿은…. 그의 또 다른 대리인.”
말투도, 표정도. 모두 차분해 보였지만.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자라나기 시작한 사체의 군집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부패한 촉수 위에 자라나고, 스러지길 반복하는 무수한 얼굴들.
분노, 수치, 슬픔, 애정, 체념, 부정, 그리고…. 깨달음.
마녀의 들끓는 감정을 형상화하듯 변하고, 또 뒤섞이며 자라난 그것들은 거대한 곤충의 다리처럼 자라나, 그 마디 마디에 보랏빛 불꽃을 피워올리며 마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빛의 인도라…. 음, 만나자마자 그 역겨운 신성을 피워 올리지 않은 것은 칭찬해줄게. 성자, 여기가 어디인지, 혹시 맞춰 볼 수 있겠니?”
“….전쟁터. 그것도 지독한 저주가 내린.”
마녀가 말하길, 한때 세상을 멸망시킬뻔 했던 자의 전장. 그 말과 마녀의 정체를 토대로 유추하면, 이곳이 어디를 형상화 했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언데드 군주. ‘침묵 너머의 시선’이 강림한 전장이군.”
그리고, 장절한 패전 끝에 한때 성녀였던 메아-마리아가 언데드 군주의 손에 사로잡힌 곳이기도 한 전장이다.
짝짝짝짝!
“잘했어! 요즘 광명 교단에서는 그때의 일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그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해맑은 얼굴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빛의 교단에 있어 가장 뼈 아픈 실패. 동부 3국과 서부의 제국. 이 대륙의 인간 전체를 상대하여 그들 모두를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난민들에게 집단 패닉을 일으킬 정도의 재앙. 군주, 침묵 너머의 시선. 이 언덕은, 이미 다 끝난 전장에 강림한 그와 내가 만났던 곳이야.”
푸욱-!
쿠르르르르르르-!
그녀의 말과 함께 사체의 다리 하나가 언덕을 푹 찌르고, 마치 종양이 터지듯 언덕을 이룬 사체들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들썩이는 죽은 대지와, 그 갈라진 틈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기운. 저주. 그리고, 흐릿해지는 시야.
순식간에 자라난 사체의 벽이 알드리치와 내 사이를 가르며 고치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매개없는 저주! 환각이다! 교수, 정신 똑바로 차리게! 지금부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전부-”
“쉬이이. 괜찮아. 저항해도 된단다. 사실, 그저 보여주고 싶을 뿐이거든.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뀌니까.”
마녀는 지치고 힘에 겨운 목소리로, 마치 꿈꾸듯, 시체의 악취 속에서 속삭였다.
“그저, 맹인의 행복을 앗아갈 뿐이란다.”
사체의 파도에 휩쓸린 알드리치가 멀어져가고, 내 위로 달려드는 썩은 살점들이 마침내 완벽한 고치가 되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을 내게 선사했다.
[….부수고 나가? 지금이야?]‘아니. 가라앉는다.’
이 수도의 전장에 처음 왔을 때부터 느낀 것.
마녀가, 황제의 의지에 이끌려온 내게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
상대의 행위가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그것을 막아서는데 있어 핵심이다.
타락한 빛의 성녀가 몇십 년 만에 나타난 빛의 성자에게 그렇게나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것을 알아야 마녀의 내면을 부수고, 그 핵을 끄집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봐주지.’
교수는, 밤처럼 다가오는 어둠에 순응하여 눈을 감았다.
돌에 묶인 시체처럼 그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이들 듯, 한없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지듯, 아련하게.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챙!
채애앵!
“앞으로! 우리의 생을 등불삼아, 앞으로오오!”
그가 있는 곳은 마녀의 영역과 비슷하게 생긴 전장이었다.
부패한 사체가 아닌, 생생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넘치는 곳.
출전한 전원이 사망했기에, 패전이라는 두 글자 외에는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한 역사의 그늘.
2월드, 제국령 화이트 달라스 방어선.
빛의 성녀 메아 마리아의 마지막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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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 하악, 하악, 광명이시여, 나의 주, 나의 빛이시여….!”
화아악!
성스러운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가 태양처럼 빛나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언데드들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고통스러운 비명도, 단말마도 없이.
영웅시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죽어가는 언데드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저 모래성을 허물 듯, 바스러질 뿐. 그렇기에 절반만 소란스러운 전장. 귀에 들려오는 비명은 모두 아군의 죽음을 의미하기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곳.
‘여긴…. 틀렸어.’
마리아는 순식간에 빈자리를 채우는 언데드의 물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시작될 때는 오직 신앙심과 기도문 밖에 모르던 그녀였으나, 거듭된 전장은 그녀에게도 전세를 읽는 눈을 선사했다.
벌써 사흘 밤낮을 싸웠으며, 아군은 언데드가 점령한 평원을 한 걸음도 밀어내지 못했다. 도리어, 후퇴를 거듭한 끝에 후미의 사제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든 피난민들 속에서 치료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없다. 적의 군세는 건재했으며, 오히려 각국에서 몰려온 기사의 시체를 일으켜 더욱 강성해져 있었다.
채애앵!
절망에 빠진 그녀를 깨운 것은, 이가 다 빠진 검을 쳐내는 성기사의 목소리였다.
“성녀님, 성녀님!”
“아…. 란데일 형제님.”
성기사 란데일. 그 타고난 육체 덕분에 성기사로 교육받았으나, 그 속내는 사제에 더 가까운 순박한 사람.
“새벽의 기사단은 어쩌고 이곳에….”
“형제들은…. 모두 빛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후퇴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물러나, 다음 아침을 기약하셔야 한단 말입니다!”
잘려나간 갑옷 너머로 새파랗게 시독(屍毒)에 중독된 어깨를 내비치는 성기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성기사의 말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그래, 이미 패배한 전장이다. 후퇴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힘겹게 버티던 그들이 제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빠져나가면. 여기있는 사람들은?
그녀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생명의 기운에 입술을 깨물었다.
인근 영지에서 닥치는 대로 몰려온 피난민들. 이미 달라서 영지의 뒷골목에서 시장까지, 중심가에서 영주성까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자리에 피난민들이 도망쳐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도 다친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을 만났기에 알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아낙, 농부, 아이들. 밭 갈고, 푸념하며, 식전 기도 한 줄 정도만 알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녀와 성기사들이 모두 떠나는 순간, 새카맣게 몰려든 피난민들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갈 수 없어요.”
“성녀님!”
“만민을 비추는 빛의 조각으로서, 그분을 대리하는 성녀로서 누군가를 선택할 권리 따위는 제게 주어지지 않았어요!”
더러는 밤이 찾아오고, 한 치 앞도 모를 어둠에 등불이 사그라드는 일도 있지만.
그것이 두렵다 하여 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어요. 란데일 형제는 다른 기사님들과 함께 피난민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주세요. 제일 가까이에 있는 페이샨 영지는 천혜의 요새인 만큼 피난민 모두를 수용하고, 언데드 군세를 막아내기에 충분 할거에요.”
“마리아 성녀님, 하지만 당신은….!”
“명령입니다! 물론 나의 위치도, 중요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요. 아직 앞에서 버티고 계신 형제님들이 있으니, 필요한 만큼만 시간을 벌고 그분들과 함께 빠져나가겠습니다. 가세요, 제 뜻에 빛이 닿아있음을 잊지 마세요 란데일 형제. 태양으로, 달로, 별빛으로. 그분은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십니다. 제게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주셨다면, 이 또한 광명의 뜻입니다.”
“….라투라. 부디, 빛께서 당신을 보살피길.”
“라투라, 로 하람.”
결국, 그녀의 굳은 의지를 꺾지 못한 란데일이 홀로 피난민들이 있는 성을 향하고, 성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성기사들이 분투하는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때? 지워진 역사 속, 성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은?』
“….멍청해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군.”
그런 그녀의 몸에서, 영혼처럼 스며나온 또 다른 성녀. 마녀의 물음에 나는 솔직한 감상 그대로를 말해줬다.
바보같고, 멍청하며, 책임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선택이다. 사람인 이상 전장의 참혹함 속에서 완전히 이성적일 순 없지만, 완전하진 않아도 그 일부는 언제나 냉정한 계산을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성녀는 교단의 가장 큰 상징이며 겁에 질린 병사, 민간인들의 사기를 책임지는 핵심 지휘관. 앞으로 나서 그들을 보호하는 책임감보다, 죽어간 그들의 목숨을 짊어질 책임감 또한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성의 학문이 아니지.’
맹목. 사고를 배제한 순수한 믿음의 결정. 눈앞의 현상조차 부정하는 그 강한 믿음이야 말로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니. 애초에 마리아의 행동에 선택지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후후후. 하나 더. 나는 죽어도 괜찮은 몸이니까, 기억을 잃겠지만 그 사명만은 간직한 채 다시 태어나게 될테니까 이렇게 헌신하는 게 맞다,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저렇게 멍청하게 버티다가 언데드 군주에게 사로잡혀 마녀가 된 건가? 겨우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마녀는, 성녀의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의 선택은 옳았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성녀라는 존재, 신의 조각이 가지는 힘은 대단했으니까. 나와 형제들은 바쳐 시간을 끄는데 성공했고, 아직 되돌아갈 힘도, 여력도 남아 있었으니까. 모두가 살아갈 수 있었어.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거야.』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이 세상이 잘못되어 있었으니까.』
사라락.
마녀의 손짓과 함께 과거의 전장이 흐려졌다,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더 높게 쌓인 시체.
더 많은 뼛가루와 상처.
힘에 겹지만, 마침내 해냈다는 얼굴의 성녀와 성기사들.
이제 피난민들의 대피가 끝났다는 소식만 기다리는 그들에게, 먼저 성으로 떠났던 란데일 경의 말발굽 소리는 끝을 알수없던 어둠 끝에 새벽이 찾아왔다는 소식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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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서, 성녀님, 성녀님, 성녀님….”
“말을 멈추세요, 타이라 자매! 치료를, 어떻게든 퇴각이 가능할 만큼은 치료를….”
“저희는, 저희는 그분의 뜻에…. 부족하지 않았겠지요? 저 많은 이들의 빛을, 지켜낸 것이….”
“자매님….”
체력도, 성력도 바닥난 상황. 마리아는 갑옷과 몸이 통째로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타이라 자매의 머리를 안고, 빛이 꺼져가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예…. 그럼요. 다들, 무사히 빠져나갔답니다.”
“아아아, 라투라. 그들의 앞날에, 나의 별빛이 닿기를….”
마지막 기원과 함께 완전히 떠나가버린 영혼. 마리아는 그녀의 두 눈을 감겨준 다음,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나, 둘, 셋, 넷…. 스무 명. 단련된 몸과 신앙으로 무장한 성기사, 인류를 위해 그 깃발을 드높이던 셀 수 없이 많던 병사와 기사들이, 이제 다치고 우그러진 갑옷을 입은 스무명으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을 헤아리던 성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그것이 떨어지기 전에 소매로 훔쳐내었다. 슬프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선택한 길이기에.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이 끝내 언데드의 군세를 밀어냈으며, 인근 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 전부를 살려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언데드 무리가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저 정도 거리면 그녀와 남은 성기사들이 몸을 빼기 충분한 상황.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저 멀리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지쳐 쓰러질 것 같던 기사들의 얼굴에도 한 줄기 희망이 스쳤다.
“란데일 형제입니다, 성녀님.”
“피난민들이 모두 대피한 모양입니다. 저희도 이제 뒤로 물러나지요.”
“네…. 가요, 여러분. 살아줘서 고마워요. 앞서 간 형제님들도, 분명….”
모두를 살렸으나, 그것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렀기에. 기뻐할 수도 없는 그녀를 성기사들이 부축하며 말을 끌고온 란데일을 향해 나아갔다.
“란데일…. 형제님?”
성녀는 너무 지쳐 반쯤 감긴 눈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왜일까. 많은 형제를, 의기 넘치는 기사를 보냈지만, 그 수백배에 달하는 사람을 살렸는데. 어째서 란데일 형제님이 저렇게 울며,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오고 있을까.
살아남은 기사와 성기사들에게도 성녀와 같은 의문이 떠오를 무렵. 타고온 말 뒤에 말 한 마리를 더 끌고온 란데일은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울분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남은 이들은, 남은 이들은 이게 전부입니까?”
“그렇소. 나머지는 전부 별을 향한 여정을….”
“….제기랄, 광명이여….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째서, 어째서!!!”
“란데일 형제! 진정하세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언데드들이 더 포위망을 좁히기 전에, 아직 저들의 전선이 얇을 때 그 귀퉁이라도 정면을 뚫어야 합니다! 성녀님만이라도, 성녀님 만이라도 이곳에서 빠져 나가셔야 해요! 성녀님, 어서 이리로!”
“아윽, 란데일 형제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지, 윽, 말씀을….!”
성기사 란데일은 우악스럽게 성녀를 말 위로 잡아 올리며 외쳤다.
“다리가….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달라스 영지 인근의 모든 다리도, 배도 사라졌단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언데드 군단과의 최전선은 이곳 달라스이며, 그 어떤 언데드도 이곳을 빠져나간 적이 없소! 하물며 강을 건너는 다리는 그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성벽만큼 튼튼하게 만들며, 따로 수비 병력도 배치해뒀을 터인데! 그 다리가 건너가지도 못할 만큼 부서졌다니!”
으드득!
분루를 삼키던 성기사는,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세찬 강물에 몸을 던지던 피란민들을 떠올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 어떤 언데드도, 흑마법의 기운도 없었소! 다리를 끊은 것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이오!”
“아….”
성녀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기에. 거친 전장을 뚫고 나갈 정도로 힘이 남아있는 말이 란데일 경의 눈앞에 나타난 것과, 저 멀리 느껴지는 빛의 인도, 그야말로 로 하람의 뜻이 분명한 탈출로가 느껴졌기에.
성녀는, 그 뜻을 헤아리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버렸구나.’
마녀의 환상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교수가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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