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7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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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아아아….』
안개가 흩어지며 드러난 마녀의 본체. 그 몸을 이룬 시체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며 교수는 숨을 골랐다.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전력을 담은 공격. 일격에 죽일 순 없더라도 최소한 치명적인 상처 정도는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아아, 아아아아…. 어째서….』
하지만. 그 무수한 시체로 이루어진 거체에 종탑만 한 구멍이 뚫렸음에도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저 신음은.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한탄과 분노가 섞인 탄식이었다.
『어째서…. 이해해주지 못하는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녀의 선택과 관련된 의문을 공유하고자 했는데. 반복되는 화두와, 선택의 교차를 통해 보여주고자 그렇게 애를 썼는데.
『너에게도. 나처럼 신의 뜻에 묶여 세상을 배회할 성자인, 그대에게도 나와 같은 가르침을 베풀고자 했다.』
그 뜻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총명했음에도, 빛의 이름을 짊어진 성자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유력한 황족들 중 누구를 선택할까 하는 일반적인 고민. 돈과 권력, 그저 세속적일 뿐인 고민으로 시작하여.
저주화의 개화 이후에는 그 인간 오셀로를 통해. 신앙이란 작은 속삭임 한 조각으로도 손바닥 뒤집듯 엎어질 수 있음을 증명하며, 그 사상이란 쉬이 감염되는 것임을.
황제의 힘과 강대한 마녀의 힘, 그 사이에서 귀족을 설득해 사람들을 황제의 편으로 돌아서게 한 성자의 선택 끝에, 옳은 것이 분명한 선택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를 죽게 한 선택이 되었음을. 위에서 내려보는 자는 옳은 선택이 아니라 희생이 더 적은 옳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과거. 역사에서 잊혀진 전장을 통해 신들에게도 경중을 나누는 저울추가, 더 나은 선을 위해 무언가를 버리는 불완전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는데.
『네가 정녕 신의 뜻을 대리한다면…. 너 또한, 그 목소리에 삶 전부를 바친 자라면.』
후둑…. 철퍽.
『나를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 그 모두를 사랑하게 태어났으나, 제 손으로 누군가를 품 안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그 모순에 허덕임을. 난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 응어리는…. 그래. 오래전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돌아섰음에도, 아직까지 내 안에 남아있었지. ‘왜,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하셨나요. 나의 빛이여,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왜. 왜….’ 그건,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수는 점점 강하게 울리는 마녀의 목소리에 주변을 살피며 힘을 끌어모았다.
“….그래서, 성하도시에서부터 여기까지. 내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나?”
『최소한…. 너의 답을 통해 로 하람의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후두둑, 후두두둑….
충격이 적지 않은 듯, 마녀의 몸에서 저주에 문드러진 시체가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수천의 눈과 수만의 팔이 달린 살더미 거체는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쓰러지며, 끝내 무너지는 듯했으나.
그 몸집이 줄어들수록, 흘러나오는 저주의 힘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기를 거듭했다.
‘황제가 덜어냈다고는 해도, 신의 힘과 신의 자격을 일부나마 동시에 쥔 존재. 한방에 골로 보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허물을 벗듯, 무너지는 시체 더미 속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빛.
괴물과 같은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여전히 흉물스러운 것이 모여 만들어졌지만, 분명히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원령과 저주가 수없이 겹쳐진 그 육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신성이 담기지 않았음에도 터무니없이 강한, 수십 년을 쌓아온 그녀의 저주와 육체를 동시에 허물 정도로 강맹한 일격. 그것이 빛의 성자라는 이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의문의 대답과도 같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버려진 자들을 위한 별이 되겠노라.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스스로 그 자리가 되어서라도 그 품에 모두를 그러안겠노라 다짐했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마지막 미련이,
『….라투라.』
더는 빛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기에 100년의 고뇌로 이어진 마지막 의문의 답이 참으로 덧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이게 그 대답이겠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저 올곧게 나아가는 빛처럼. 그분은 여전히…. 변치 않으셨구나.』
그 웃음과 함께, 마지막 미련이 흩어졌다.
뼈와 혈관으로 만들어진 드레스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성녀.
눈을 가린 천은 성녀가 그 앞을 보는 데 있어 속세의 잣대를 벗어나, 신의 빛을 따름을 상징하니.
그녀의 손가락이 눈을 향하고.
마침내, 그 피와 얼룩에 물든 그 오래된 천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도 대답을 드려야겠지. 그 목소리마저 닿지 않는 딸에게 이렇게 사람까지 보내주시고, 직접…. 확인시켜 주셨으니.』
떨어진 천이 바스러지고, 마침내. 긴 세월 끝에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마리아는 필멸자의 마지막 미련을 벗어던지며 불멸의 신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지만 분명한 신의 조각, 성녀.
그 주인이 돼야 했을 필멸의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그저 힘만이 허상처럼 부유하며 제국을 번영케 하던 황제의 힘. 주인 없는 신성.
파편과 반쪽짜리 힘이 만나 온전한 형태를 이룬 그 신은 문드러진 사체와 원령을 기워 붙인 그 본질과 똑 닮아있었다.
[우우우우우우-]저주화의 탑. 망자가 피워낸 꽃의 탑이 그 탄생을 경배하듯 울음소리로 탑을 흔들었다.
탑이 요동치듯 수도 전역의 저주받은 이들이 모두 경탄을 담아 그 자리에 무릎 꿇었으며. 그 소망처럼 하늘을 향해 걸어 나아가듯, 망자의 팔로 이루어진 경배의 계단을 딛고 마녀가 그 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세상의 얼룩이 아닌, 세상 그 자체를 이루는 규칙이 됨을 세계에 공언하는 음성.
『나, 성녀로 태어나. 수백의 삶을 거듭하며 태어난 바를 온전히 수행하고, 그 기쁨에 살았으나.』
꽃으로 이루어진 탑은 끝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수도를 뒤덮은 안개를 뚫고, 구름을 뚫고, 망자의 몸으로 이루어진 그 실체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듯, 끝없이.
『사명과 애정. 세상의 끝까지 그 빛을 뻗어 끝없는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 나를 이루는 두 가지 본질 중 단 하나만을 선택할지니.』
위로, 더 위로. 별에 닿을 듯 끝없이 하늘로 향하던 탑이 마침내 생장을 멈추고, 순식간에 수도 전역에 그림자를 드리울 거대한 꽃을 피워내고, 또 말라비틀어지며.
그 끝에, 망자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계단을 밟아 올라간 마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사라라락-
허상처럼, 저주와 안개로 이루어진 거대한 열매를 맺었다.
달을 가리고, 별을 가리고. 밤길을 비추는 모든 빛을 흡수할 만큼 거대한 구체로.
『….이제, 내가 그들의 어미라. 선의와 악의,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그 모두를 내 품 안에 그러안을지니. 나, 성녀가 아닌 메아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상을 부수는 흉성이 되어, 그들 모두와 하나가 될 것이다. 더는 그 누구도. 세계의 이름 앞에 버려지지 않으리라.』
그녀의 손에 스러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 무(無)로 돌아갈 그들의 안식처, 흉성으로.
성녀로 태어나, 마녀로 거듭난 끝에, 스스로 신이 된 자.
메아 – 마리아.
“….예행연습치곤 과한 느낌인데.”
졸지에 신을 상대하게 된 교수로서는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찰팍.
[알드리치.] [시간이 필요하네. 눈에는 보이지만, 다가갈 수가 없어. 그 실체를 둘러싼 영혼이 너무나도 많아. 이럴 수가. 저주받은 자들을 애정으로 결속시키다니. 어찌, 이다지도 모욕적일 수가….] [….오트만.] [노툼과 나만으로는 역부족이야! 자네가 크게 흔들었을 때 탑의 핵으로 보이는 것을 모조리 잡아 뜯었지만 눈 한번 깜짝일 사이에 새로운 핵이 자리 잡았네! 어림잡아도 자네가 아까와 같은 충격으로 마녀의 영혼까지 뒤흔드는 일을 세 번은 반복해야 해!]“….세 번이라…. 말이 쉽지.”
교수는 보랏빛 광채에 둘러싸인 마녀와 하늘을 뒤덮은 붉은 흉성을 바라보았다.
깊게 뿌리내린 저주화의 탑은 그 뿌리를 뻗어 수도 전역의 피와 사체, 저주를 흡수하고.
흡수한 것들은 저주화의 열매를 틔워내며, 그 열매는 터져 보랏빛 안개를 뿜어낸다.
하늘을 향하는 다리처럼 날아드는 저주의 안개는 흉성에 닿아, 그 빛과 크기를. 아직 허상과 실체의 경계에 있는 그것에 더욱 생기를 더한다.
마녀의 실체. 타락한 성녀이자, 버림받은 이를 위해 변절한 성녀. 그녀가 최종적으로 다가가고자 한 모습.
흉성, 메아 마리아.
“….판타지 아포칼립스에 아마겟돈이 웬 말이냐.”
점점 선명해지며 수도에 조금씩 다가오는 붉은 별에, 교수는 그의 사고를 쥐어 짜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마지막 근육 한 올까지 끌어낸 최선의 일격.
심지어 에데오르나의 팔이라는 도핑까지 사용해 일궈낸 일격이 몇 번은 더 필요하다는 아군.
[….그렇게 하면. 탑의 핵을 이루는 저주화를 모두 뜯어낼 수 있겠습니까?] [현상 유지….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네.]“에라이.”
심지어 그렇게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결과가 호미로 물을 틀어막는 정도에 불과하단다.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으로 저걸 막아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쐐기는 준비되었다. 알드리치와 넬. 오트만과 노툼. 중요한 것은, 그 쐐기를 박아넣을 틈을 벌리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에는 답이 없지만, 딱 하나 기대할 만한 것이 남아있다면.
“황제. 스스로 말하길 제국의 과거도, 미래도 읽을 수 있기에 전지(全知)하며, 그로 인해 나태에 빠졌다고 하는 자.”
그는 스스로 그 존재의 소멸을 택하여 마녀의 저주가 완성되는 것을, 제국의 모든 신위가 마녀에게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권능에 가까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마녀의 대척점에 있는 황제가 사라지는 순간 마녀의 힘이 온전히 수도를 뒤덮을 것임을. 마녀가 지금까지 흡수한 힘만으로도 신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음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황제는, 왜 그런 방식의 죽음을 택한 것인가.
뭔가 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 이뤄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게임을 하다 보면 그런 퀘스트도 있었다. 플레이어가 무슨 수를 써도 해결되지 않고, 그 시선 밖에서 해결 방법이 차례로 플레이어를 향해 다가오는 그런 퀘스트가.
지금은, 황제의 안배가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예상하자면…. 이드라실.
‘진짜 미친 것처럼 죽자고 나 따라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안 보였어. 황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스토커 엘프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을 눈치채자, 작은 의심이 약간의 확신으로 변했다.
내 시야 밖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투란에서는 샬롯이, 폭풍의 언덕에서는 아스트라드가. 하우누만은 보르카가 그 각각의 이야기에 주연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 대사건의 스포트라이트는 나 하나만을 비추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현상 유지. 오트만이 말한 것처럼, 최전방에 있는 우리 팀이 그 준비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말이지!’
철퍽. 푸스슥…. 철퍽!
마녀가 벗어 던진 허물. 100년에 걸쳐 모아온 시체와 허물, 어찌 보면 그녀가 가장 오랫동안 품에 안고 지내온, 뒤틀린 애정을 한몸에 담은 시체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창과 칼에 몸이 꿰뚫린 기사들.
몸이 반쯤 짓이겨진 병사부터 머리가 없는 이들까지.
녹아내린 피부가 갑옷처럼 단단히 엮인 이들이, 보랏빛 안광을 흉흉하게 발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 중 하나가 낯이 익었다.
형편없이 일그러졌지만, 오히려 그 일그러진 얼굴이 익숙해 알아볼 수 있는 얼굴.
“란데일…. 경이었나.”
“그런…. 이름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지….”
란데일을 필두로, 성녀와 같은 전장에 버려진 셀 수 없이 많은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민간인들.
성녀가 가장 먼저 거둬들인 이들은 그녀와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가장 깊은 곳까지 저주의 힘이 담긴 고위 언데드가 되어 있었다.
“잠자코…. 지켜보았느니…. 역겨운 빛의 사도와 성녀님이 만나는 것이 불쾌했으나, 그 또한 그분의 오랜 염원이기에…. 우리를 위해 안식에서 벗어난 그분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네놈을 위해 길을 열고, 맞이했노라….”
음울하게 울리는 언데드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언데드가 가지는 산자를 향한 원색적인 증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기 넘치는 목소리라 봐도 좋을 분노.
언데드와 어울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과 자아가 담긴 목소리.
비틀거리듯, 허나 확고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저주의 기사들은 한 몸인 것처럼 그들의 말을 공유했다.
“빛을… 등진… 기사가 되었으나…. 그 서원에 한 점 부끄럼 없으니.”
“약자를…”
“동료를…”
“세상에 버려진 나의 형제들을 위해….”
“라투라.”
“라투라…. 메아 – 마리아.”
촤아악!
푸확!
뚜두둑, 팍!
란데일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것을 신호로. 부정한 자를 위한 기도를 읊던 이들이 교수를 향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라투라.”
교수는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주먹을 마주 뻗으며, 그들과 같은 기도를 입에 담았다.
광명의 이름을 담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예의였다.
붉은 흉성이 떠오른 수도의 밤.
마녀의 탑 안에, 저주와 폭력이 한데 뭉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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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읏-!”
밤 하늘을 향해 던져올린 번개처럼, 이글거리는 빛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광선. 그 뒤를 따르는 무시무시한 파공성에 루실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여파에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힘의 유동. 그녀가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다는 뜻이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루실라의 팔에 거친 손가락이 닿았다.
거무튀튀한 로브를 입은 두 인영 중 하나. 키가 큰 쪽의 남자였다.
“괜찮ㄴ…소.”
“아윽, 읏…. 안…. 괜찮은 것 같네요. 이드라실, 너는?”
“괜찮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움직일 단계는 지났으니. 딱히 큰 손실은 아닙니다.”
이드라실은 귀에서 흐르는 피를 슬쩍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기운. 저 이글거리는 빛은 생소하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힘이었다.
“교수. 분명 그분의 힘일 테지요.”
“….저렇게 무식하고 요란한 힘은, 분명 용사님밖에 없지.”
빛의 기둥처럼 하늘을 향해 쏘아진 빛이 사라지고, 그 여파로 수도를 뒤덮은 안개가 옅어진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짙은 안개가 쏟아지며 보기만 해도 불길한 적색 달이 떠오르는 모습에 루실라는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이 없어.’
원인도, 추측의 근거도 없는 확신. 상인의 감에 가까운 것이 그녀의 심장을 방망이질 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도 이 저주와 마법이 몰아치는 도시에서 사자검이 가지는 엄청난 위치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드라실이 자신은 절대로 그걸 들 수 없다고 확신하는 부분에서, 이 검이 단순한 우연으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바보 같고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믿는 멍청한 귀족 영애 같았지만, 당장 눈앞에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꽃나무의 탑과 하늘을 가리는 붉은 달이 뜨고, 수도 전체가 미쳐 날뛰는데 현실 감각 따위 알게 뭔가.
그렇다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 날 보고 휘두르라는 개소리는 아니겠지.’
그녀는 상인이며, 평생 그 사실에 한 치의 의심조차 품어본 적이 없었다.
상인의 손을 찾아온 칼이라면 그 뜻이 들고 휘두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정말 이상한 생각이겠지만.
그 황금빛 기운이 속삭이던 것처럼, 전설과 전설이 휘몰아치는 이 수도에서, 정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상인이 하는 일. 이곳에서 저곳으로. 물류와 재화가 있어야 할 곳으로 옮기는, 세상의 피와 같은 존재. 만약, 정말 어떠한 운명의 인도로 저 전설적인 검이 그녀의 손을 찾아왔다면.
아마, 그녀는 운반자로 선택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내가 휘두를 수는 없지만.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이를 찾기만 한다면. 분명 저 끔찍한 곳의 한 가운데에서 분투하고 있을 일행에게, 분명 중요한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그녀의 심장 박동을 따라 울리는 희미한 이끌림을 따라. 그와 같이 울리는 검명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올 암페리아에서 성하도시로 이어지는 수도의 외곽, 작은 개구멍 같은 뒷문.
두터운 로브로 전신을 가린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곳까지.
“받아요. 이 검은 명백히 당신을 찾고 있어요.”
“….”
얼굴도. 이름도. 로브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밤의 그늘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해. 이 사람이 맞아.’
기묘한 감각도, 상인으로서 루실라의 눈도 이 사람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허름한 로브. 더러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로브야.’
‘작은 로브 쪽은 걸을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금속 특유의 쨍한 마찰음이 아니라 소리가 먹는 것을 보니 무른 금속이 복잡하게 얽힌 종류, 아마 금 장식품이겠지.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잔뜩 지고 나온 패물.’
‘방금 내 팔을 잡았을 때. 괜찮….나? 괜찮….느냐 였을까? 반사적인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하대가 나올 뻔했어. 딱 봐도 귀족처럼 차려입은 나한테,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사람.’
그래, 분명히 이 사람이다.
루실라는 아예 허리에 묶은 검을 풀어 천에 감싸인 그것을 통째로 내밀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거절한다.”
돌아온 것은, 처음 만나자마자 그가 그랬던 것과 같은 거절이었다.
“지금 당신이랑 실랑이할 시간 같은 게 있어 보이세요? 운명이잖아요. 잡아보지 않아도, 이게 당신한테 끌리고 있다는 걸 그쪽도 느끼고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러므로, 거절한다는 것이다. 운명 따위에 휘둘리는 것에는 이미 진절머리가 났어. 나는, 이제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것이다.”
“하, 하지만….!”
루실라의 간청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하도시로 향하는 뒷문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남자.
언뜻 붉은 하늘에 비친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검이 스쳤으나, 그는 잊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더는 운명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의 검은 패했고, 그와 함께 기나긴 운명의 주박이 풀렸을 때 분명히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성이 아닌 그 이름으로 증명될 삶을 살겠다고.
“….먼저 가시죠, 어머니. 이제 이곳에 저희 삶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작은 로브를 입은 이는, 남자의 재촉에 후드 안에 담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자 갈기처럼 뻗친 머리칼. 황금을 녹여낸 듯한 눈. 굳은 입매와, 지친 눈빛.
황자, 가이낙스는 그를 찾아온 운명을 거부하고 수도의 밖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으며.
“이제 어떡하죠, 루실라?”
“….따라가야지.”
“따라가서?”
“….팔아야지! 살 때까지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강매한다!”
아까보다 더 심하게 울기 시작한 사자검을 등에 멘 루실라는 가이낙스의 뒤를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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