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8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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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래도 선명한 것들은 분명 있었다.
정말 필요한 것만 가르치고 자유롭게 풀어둔 덕분에 어렸을 적에는 배다른 형제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아버지, 그분의 얼굴을 공식 석상에서 보게 됐을 때 그 금빛 기운이 어린 얼굴이 정말 신처럼 보였다는 것.
가볍게 탈이 난 줄 알았던 내가 몸져누워, 용기 교단의 사제들이 어머님의 궁으로 부랴부랴 달려왔던 것.
그래, 이거다. 일곱 살. 죽을 듯 끓어 올랐던 열병. 갑자기 이런 옛날 생각이 든 것은 아마 그날의 기억 때문이겠지.
긴 잠에서 깬 듯, 그러나 결코 숙면이 아닌, 약과 환각에 취해 사경을 헤맨 끝에 간신히 눈을 뜬 기분이니까.
황자, 가이낙스는 황족에게만 알려진 비밀 통로의 문을 열며 치를 떨었다.
그를 죽일뻔했던 그 열병은 제국을 움직이는 힘이 어린 아이의 몸을 파고들며 생기는 반작용이었고.
황족의 교육이 여유로웠던 것은 딱히 가르치지 않아도 그들이 제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나기 때문이었으며.
아버지의 얼굴이 신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얼굴이, 신전의 석상처럼 아무 감정도 없었기 때문이었기에.
마침내 제국과 황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가이낙스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다.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황족이 아닌 가이낙스의 이름으로. 그 누구도 그와 어머니를 모르는 곳에 틀어박혀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흠…. 황자님? 황족 전용 통로를 사용하시면서 하는 얘기라 설득력이 부족한 것 알죠?”
뚜벅… 뚜벅…
탁 탁 탁 탁-
“좋아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니까. 화려한 황족의 삶이 알고 보면 500년짜리 망령의 꼭두각시 쇼였다, 이 정도면 진절머리가 날 만해요. 이해한다구요, 저도. 정말 이해한다니까요? 손수건에 눈물 찍어냈던 거 보여드려요?”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탁탁탁탁탁탁
“아이, 정말! 강요 안 할게요, 안 한다니까! 어차피 뒤에 계시는 어머님도 데려가야 하는데 빨리 간다고 될 일이에요, 이게? 황자님, 아니 황족 때려치웠다니까 이제 평민이지? 어이, 평민 가이낙스! 텔드랏 유수의 귀족 루실라 아에드란이 귀족으로서 명한다! 당장 멈추고, 내 명을 받들어라!”
….빠직!
“어때요, 가이낙스님이 내려놓은 건 그런 거라니까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 애초에 세상에는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비극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뒷골목 근처에만 가도 사람이 사는 공기가 달라요, 공기가! 나가면 어떻게 사시게. 황후님이 가져온 패물? 어디에 팔아야 제값이 나오는지는 알아요? 저게 얼마짜리인지는 알고? 당장 수도에서 나가는 순간 귀신같이 알고 몰려온 도적 떼의 피로 한바탕 목욕해야 하는 건 아시죠? 우린 다 알아요. 흐으으음~ 황금 냄새. 누렇고 반짝이는 것들은 이쪽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거든요.”
“….아에드란 양.”
….후우우우.
그래. 새 삶이다. 황족으로서 그와 동떨어진 새 삶.
그렇기 때문에, 가이낙스는 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증 나는 작은 귀족 영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통로를 걷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윽박질러 쫓아낸다? 이제 그에게 그런 권리는 없다. 황족으로서 이름을 버렸으니.
그녀가 말한 대로, 이제 평민이니 알아 모신다? ….싫다. 바로 몇 시간 전에 검사로서 오러가 부러졌는데, 인간 가이낙스로서 자존감마저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루실라 아에드란. 소문의 ‘텔드랏의 구혼자’로 알려진 여자이며, 무슨 할 말이 저렇게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려대는 이상한 여자.
웃기지도 않는 전설이었지만, 저 여자가 길거리 노점의 싸구려 단검처럼 휘두르는 물건을 보면 마냥 헛소문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빛깔 고운 것 좀 보세요. 아에드란의 황금 상단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름 소양이 있어서 확신하는데, 이 푸른 듯 은은하게 도는 색은 파엘라디움을 섞은 강철에서만 나는 색깔이에요.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고. 기품있으면서도 야성 넘치는 이상적인 금속! 하지만 인간은 물론 드워프 중에서도 제대로 다룬 역사가 없어 만들어진 모든 파엘라디움 합금 무구가 실패작이라 불리는 그 금속 말이죠.”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실패작처럼 보이지는 않죠? 심지어 그렇게 말을 안 들어서 ‘고집쟁이 금속’이라 불리는 파엘라디움 합금강에 뭘 새겼네요? 와, 마법 상감은 커다란 공방에서 구리나 금 같이 무른 금속에 새기는 것도 힘든데 이걸 파엘라디움 합금강에 새겼네! 가이낙스님은 검사시잖아요. 제국의 전설이니, 초대 황제의 검 라이오넬이니 하는 이름을 다 떠나서 이런 걸 보면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잡아보고 싶지 않아요?”
듣고 있으면 정신이 쏙 빠질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미사여구와 칭찬. 적어도, 훌륭한 검이라는 것만큼은 가이낙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에드란 영애가 저렇게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그것을 만난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을 정도로 강한 끌림을 느꼈으니까.
사자검 라이오넬. 제국의 의지에 의해 그가 배운 검술의 시초가 된 검이자, 검사의 영혼을 형상화한다는 그의 오러 또한, 저것의 모습을 했기에.
위대한 운명을 이끄는 여인, 그 전설의 손에 들려, 그의 앞으로 찾아온 전설의 검.
그래서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황족의 이름을 벗어던지자마자 찾아온 저 검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제국의 부름처럼 느껴졌으니까.
“….몇 번을 말해도 소용 없을 거요, 아에드란 영애. 나는 그것이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워서 그러니.”
그래, 두렵다. 작은 자존감이 여러 가지 거창한 이유를 떠올렸으나, 가이낙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솔직한 그의 내면, 그 소탈한 마음이었다.
두렵다. 황제가 되기는커녕, 저 물건에 손끝이 닿는 것조차 두렵다.
저 검은 그 이름, 사자검 라이오넬이라는 이름의 상징처럼 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니까.
만약 제국의 힘이 그를 원해서 찾아왔다면, 그 손에 닿는 순간 다시 한번 제국이라는 운명의 격랑 속으로 그를 끌어들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에드란 영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1황자 가이낙스겠지. 30대 중반. 패왕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스스로도 훌륭한 기사라 알려진 자.”
“예에에….”
“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그렇지 않소. 그 모든 것은 제국의 인도에 이끌려 만들어진 1황자의 모습일 뿐. 눈을 뜬 지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열병에 걸려 쓰러지기 전 황궁의 정원에서 넘어져 울던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지. 1황자 가이낙스의 검은 부러졌고, 황자의 힘은 흩어졌으니 내가 그 검을 든다 하여도 기적이 일어날 일은 없으리라 장담하오. 그러니, 이제 그만 다른 사람을 찾아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나도 알지. 황자의 이름이 없으면 나는 그저 몸만 큰 어린아이와 다름없다는 것을. 영애 말대로 황금을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먹어야 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또한 좋다. 길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 본디 ‘삶’이란 것이니까. 이 나이를 먹은 다음에야 ‘길을 잃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생소하고 고통스럽기야 하겠으나. 그 또한 다들 감내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
긴 잠에서 깨어나, 무언가 깨달은 듯 확신에 찬 가이낙스의 목소리.
루실라는 하대와 반 존대가 섞인 어색한 황자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과거의 1황자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우우웅-
두 사람의 침묵 사이로 사자검의 울음이 들렸지만 가이낙스는 그 강한 이끌림에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이, 기껏해야 검집이나 될 사람이 아닌, 검을 휘두를 진짜 주인이. 내가 아니다. 내가….’
뚜벅. 뚜벅….. 덜컥.
길고 좁았던 통로의 끝이 보였다.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올 암페리아, 제국의 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잠긴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는 그의 손이 다급해졌다. 이제 이 문만 지나면. 마침내 그에게도 삶이라는 것이 찾아오리라. 제국의 꼭두각시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 가이낙스로서의 삶이.
밖이 환한 것을 보니 성하도시의 환락가일 것이다. 늦은 밤, 파티의 흥분을 해소하지 못한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살롱 거리. 눈을 피하기 좋은 곳이다.
마차를 빌려 어머니와 함께 제국을 빠져나가자. 식량. 그래. 병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건량 같은 것을 사둬야겠지. 식수도 챙겨야 할 것이다. 할 일이 많았다. 저 집요한 귀족 영애와 엘프는 여기서 단호하게 떼어내고, 이제 그의 삶을 찾아갈 것이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어두운 통로에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래, 삶이다. 황성을 벗어나, 제국의 손에서 벗어난 삶.
“황자님….”
이 빛이야말로 그 삶의 효시를 알리는-
화르르륵-
“아아아악!”
“제국이여, 제국이여 영원하라!”
“모두가 하나되어 영원의 별로 나아가리라! 제국 또한 그 일부가 되어, 영원히 빛을 뿌리게 되리라!”
끼이이이익…. 쿵.
낡고 무거운 비밀 통로의 문이 완전히 열리고, 황자는 그 눈앞에 드러난 성하도시의 광경에 얼어붙고 말았다.
온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거리도, 광장도, 귀족들의 아름다운 저택도.
통로가 이어진 곳은 환락가가 아니었다. 그가 환락가의 불빛이라 생각한 것은 불타는 성하도시의 빛이었으며, 그 화마에 뒤덮인 도시 속에서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녹아내리는 피부를 삼키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 저 붉은 달을 향해.
그들 사이로 처형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쁜 듯 녹아내린 피부를 드러낸 이들 사이로, 낡아 빠진 검과 도끼를 든 이들이 수확하듯, 그 목을 하나씩. 썩은 통나무를 베어내듯.
찰칵!
저도 모르게 부러진 칼을 뽑아 드는 그의 손길을 막아서는 작은 손이 있었다.
“가이낙스님.”
“….아에드란 영애.”
“그리 결심이 굳으셨다면, 저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습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 성자님과 저희 일행이 뚫고 들어온 길이 있어요. 화마가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가이낙스님이 가시려던 방향보다는 더 안전하리라 생각해요.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수도에서 멀어지는 것이 두 분의 안전을 위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시나요?”
….꽈아악!
그 말에, 가이낙스는 손에 쥔 두 동강 난 검의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맞는 말이고, 이성에 따른 합리적인 도움이다. 냉정하게 살피니 그가 가려던 방향은 괴물과 미치광이가 득실거리는 불길의 한가운데였으니까.
하지만 왜. 왜 이렇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가. 무엇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머뭇거리고, 이토록 그를 분노케 하는가.
‘설마. 아직도 내 안에 제국의 망령이 남아있나? 그것이, 불타는 성하도시를 보고 내 발걸음을 붙잡고 있나?’
고뇌하는 그의 앞으로, 악착같이 따라붙은 끝에 마침내 그와 눈을 마주하게 된 아에드란 영애가 다가왔다.
“당신이 말한 대로, 이제 당신은 자유에요. 황성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황제의 생사는 알 길이 없으며, 제국의 힘은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는….”
“가이낙스, 당신이 제 입으로 말한 것처럼 이제 당신은 자유라고!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 행동,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순수하게 인간 ‘가이낙스’의 의지라는 뜻이에요. 말해봐요, 가이낙스. 당신, 방금 제가 말리기 전에 뭘 어떻게 하려고 했죠?”
“나는….”
달려나가려고 했다. 황족을 위한 비밀 통로답게 온갖 물리적, 마법적 방어가 가득한 이곳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스스로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저 사람들을 막고 거리를 배회하는 저 괴물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 이유 따위가 필요한 생각일까?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도시가 불타고 있는데?
침묵, 그리고 화마에 휩싸인 도시와 그의 검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눈빛.
그것을 본 루실라는 생긋 웃으며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가이낙스? 잠시…. 칼 좀 빌려주시겠어요?”
….덜컥.
루실라는 천으로 감싼 라이오넬을 벽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둔 다음, 맡겨놓은 물건인 양 당당하게 가이낙스의 칼을 요구했다.
“얼른요. 어차피 부러진 칼이라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면서.”
“영애는 대체…. 이 광경을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가 있지?”
“이익, 무, 무겁….네! 후우! 저희 용사님이랑 같이 다니다 보면 다 적응하게 되거든요.”
휘청!
용사라면 맨손으로 그의 오러를 깨부순 그 대단한 성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사자검은 단검처럼 휘둘렀던 주제에, 그의 손에 반 토막 난 검은 가까스로 들어 올린 루실라가 힘겹게 그 쇳덩이를 어깨에 걸치고는 말했다.
“….설마 저주받는 건 아니겠지.”
“그게 무슨-”
까아앙!
가이낙스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루실라는 온몸을 던져 어깨에 짊어진 쇳덩이를 휘둘렀다.
벽으로. 정확히는, 벽에 기댄 사자검, 초대 황제와 운명을 함께 했다는 전설 속 라이오넬의 손잡이가 있는 곳으로.
초심자가 휘둘렀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부러진 검은 정확히 라이오넬의 손잡이에 틀어박히며 쨍한 소리가 울렸다.
그건, 제국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가이낙스가 보기에도 경악할만한 미친 짓거리였다.
“무슨….짓이오! 아에드란 영애!”
“아구구 허리야…. 뭐긴요. 저것 때문에 안 쓰려고 하던 거잖아요, 라이오넬. 물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손님이 원한다면 뭐. 작은 가공 정도는 해드려야죠.”
가이낙스는 루실라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라이오넬을 살폈다.
사자검 라이오넬. 한때 용의 발톱과도 그 자웅을 겨뤘지만 흠집 하나 없었다는 위대한 초대 황제의 검.
그 전설적인 검의 손잡이가. 살아 움직이듯 생생한 사자머리 조각이 있는 부분이 형편없이 부서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자검, 라이오넬을…. 부쉈다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상인이고, 검술 따위는 배운 적 없으며, 오러는 당연히 쓸 줄 몰라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하지만 지금….”
“그야, 500년이나 된 물건이잖아요? 막 다루면 좀 상하고 그럴 수도 있겠죠 뭐. 사실 그쪽한테 넘기려고 제가 좀 많이 살을 붙였는데, 이거 골동품이에요, 골동품. 그냥 좀 괜찮은 검. 낡아 빠진 검이지만, 적어도 가이낙스 당신이 들고 나가려던 몽둥이 같은 검보다는 훨-씬 쓸모 있을 것이 자명한 검. 됐죠, 이제? 더는 거부감 같은 거 없으시죠?”
“그…. 음….”
가이낙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속임 같은 장난에 불과했고, 겨우 장식 하나 뜯어낸 것으로 저 검의 본질이 사라지진 않았으나.
-파삭!
부러진 검을, 그것도 가녀린 귀족 영애가 쓰러지듯 휘두른 검에 허무하게 박살 나는 사자머리 장식을 본 순간, 그의 속에서도 뭔가 응어리진 것이 바스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주가 깨어지듯 그 사자머리 장식과 함께 바스러진 그것은, 라이오넬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에 울리던 묘한 끌림이었다.
‘저 검을 놓아 보내지 못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나였나.’
의무감. 가슴 한 켠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던 그의 속내. 결국 운명이 내정한 자가 나라면, 내가 이곳을 벗어난 순간 모든 것이 어그러질 것이라는 걱정.
우습지만, 황제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에도 그는 허무하게 죽어갈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검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 주박과도 같은 의무감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짐에, 가이낙스는 허탈한 숨을 뱉어내고 말았다.
사자의 제국은 끝났다.
깨져 떨어져 나간 사자머리 장식은, 그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철컥.
가이낙스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름 없는 괜찮은 검’은, 그가 쓰던 곡도와 무게도, 균형도 비슷해 익숙하게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검사라는 족속이 그렇듯. 새 검을 휘둘러보며 만족을 숨기지 못하는 가이낙스를 보던 루실라는 생긋 웃으며 그의 앞길을 터 주었다.
“가세요, 자유인 가이낙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젠 당신의 운명을 개척하세요.”
“….여전히 나는 제국의 황제가 될 생각은 없는데. 당신의 입장에서…. 그래도 되겠소, 레이디 루실라?”
작은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루실라 아에드란, 텔드랏에서 온 여인.
그녀 또한 어떠한 운명의 인도로 이곳에 와 라이오넬을 짊어졌으니. 만약 그가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그녀의 운명 또한 제 갈 길을 찾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머.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가이낙스?”
“운명에 휩쓸린 자의 미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그의 멈춰 선 뒷모습에, 루실라는 언제 주웠는지 부서진 장식을 작은 주머니에 챙겨넣으며 배시시 웃었다.
“저야 뭐. 텔드랏의 여인이니, 전설이니 하지만. 저는 결국 상인 루실라에요. 라이오넬이 상인에게 제 운명을 맡겼다면, 다소 평가절하된 가격에 팔려나가는 것도 각오했어야죠. 상인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재화와 물건을 옮기는 자. 그것을 어떻게 쓸 지는 구매자의 손에 달렸을 뿐이랍니다. 운반자로서, 물건이 제 주인을 만난 것이면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사자검 녀석, 골동품 주제에 제 값 다 받고 넘어가려고 땡깡 부리는 게 말도 안 되긴 했구요.
조금 전까지는 저잣거리의 상인처럼 마구 밀어붙였던 주제에, 배웅은 여염집 아가씨처럼 치마를 곱게 들어 올리며 하는 여인.
마지막까지 이어진 작은 농담은 그녀가 정말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물건을 옮긴 정도로 생각하는 모습. 그가 추구한, 휘몰아치는 운명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상인이라…. 그럼 값을 치러야겠지.”
“에? 지금?”
“….나중에. 계산은, 다녀와서 얘기하는 것으로 하겠소. 이곳은 안전하니 어머니와 함께 여기 있어 주시오.”
“예, 뭐…. 그런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쳐주실지-”
타닥!
가이낙스는 루실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불타는 도시로 몸을 던졌다.
‘손수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여자 같으니까.’
투화악!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휘두르자,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온 오러가 앞길을 가로막던 화마를 걷어내고 그 앞에 길을 만들어 내었다.
오러. 검사의 혼을 형상화했다 알려진 그것.
1황자였던 시절의 그것처럼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넘실거리진 않았으나, 가이낙스는 그저 검의 형태로 단단하게 굳어진 지금의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오러. 그것은 스스로 깎아낸 자아의 총아이니, 순수하게 조종당하는 황족은 그것을 피워낼 수 없음이 자명하며.
지난 34년의 세월 동안 적어도 기사로서의 자신은 제국의 의지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자신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 오랜 삶에 있어, 검을 쥔 순간만이 진실로 나였다…. 그 뜻인가.”
쿠웅-
감상에 취해있던 가이낙스의 앞에 녹아내린 시체가 엉겨 붙은 괴물이 나타났다.
“하, 하하하하….기사 가이낙스라. 일곱 살에서 27년을 뛰어넘은 사내치곤…. 시작이 좋구나!”
마침내 진정으로 스스로를 되찾았음을 깨달은 기사가, 해방의 웃음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 삶의 모든 것이 지배당했기에, 오히려 그 중심에서 순수하게, 오직 검으로 단련된 기사의 오러.
크고 화려한 황금의 검집에서 마침내 그 날을 드러낸 가이낙스의 오러는,
서걱-
금속을 정련해 뽑아낸 듯, 단단한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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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도시를 휘감은 불꽃과 비명.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그 사이를 가르는 은빛 오러.
붉은 달이 뜬 하늘, 그런 가이낙스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벨 보.”
“반백 년도 못산 녀석이 허릿심이 제법 있군. 도끼를 써도 되겠어.”
“뇌가 벌써 관짝의 흙이 된 네놈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지. 검공,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자가, 맹약의 주인이 되기에 적합하다 보는가?”
“….적어도. 쉬이 흔들리진 않을 분이라 보오.”
“떠들 여유 있으면 내려서 뛰어 이것들아! 별 거지 같은 바람이 불기로서니, 늬들 다 태운 순간부터 이미 정원 초과야! 예정된 도착 시간보다 한참 늦었다고, 어! 알아!”
“마법사. 도움에 감사하오. 덕분에 우린 늦지 않고 도착했으니.”
“뭘 감사씩이나 하는가, 슈왈츠 대공. 지들 말마따나 그런 바람이 불어서 우리 전부를 태우고 오게 됐겠지 뭐.”
“글렌! 내가 네놈을 코흘리개 때부터 봤어 이놈아! 네놈은 아무 말 할 자격이 없어! 애초에 종자는 왜 태우겠다고 그 지랄을 했냐? 저 검박이는 지 자식들도 다 뒤에 내버려 두고 홀몸으로 탔는데.”
“공작이 몸종 하나 없이 어딜 나갑니까! 그래서 짐칸에 태웠잖아요!”
“거긴 찬바람이 지나는 곳이라 사람이 탈 자리가 못돼!”
수도 상공. 바람마법사의 기구 안.
오늘따라 묘하게 잘 밀어주는 겨울 바람을 타고 수도로 날아오던 늙은 마법사는, 아무리 달래도 온갖 떨거지가 있는 곳으로 기구를 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도를 향해 몰려오던 각양각색의 일행을 태우게 되었고, 결국 생각했던 시간보다 한참 늦고 말았다.
-저, 저젇젖저느는ㄴ….괘,괜차차차찮스스습니이이이…드드득, 이이이 무,무토오오….. 글렌 고고고공작가의 우수숫수수수한 사용인으롣드드듣드듣, 언제나 주주주주인님을….
“거 보쇼. 괜찮다고 하잖습니까.”
“….글렌. 네놈은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모나있었지.”
“영감이 내 과자를 빼앗아 먹은 그때부터였을 거요, 아마.”
“….고얀 놈. 귀여운 맛이 없어.”
“내 나이 60에 귀여우면 그건 노망이요.”
“나는 세수가 113살이다 이놈아.”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그랬잖소. 노망난 영감이라고.”
만날 때마다 진절머리가 나는 녀석이었으나, 가진바 능력 하나는 확실해서 결국 태울 수밖에 없던 녀석이었다.
붉게 물들어 저주가 가득한 하늘을 보니, 특히나 더.
하늘의 구름을 가늠하던 노 마법사는 기구의 바람을 조절하던 어린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은 늙은 나보다 네가 더 잘 보니 물어보자꾸나. 저기 저 아래 계신 분이 우리 맹약의 주인 되실 분 같은데. 바람은 어디로 불고 있느냐.”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 사이에 피어난 정전기를 가지고 노는 마법사.
그의 물음에, 녹색 로브의 마법사는 손끝에 스치는 바람을 가늠하며 대답했다.
“조금 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저 아래가 아니라, 다른 놈이 있어?”
“저분은 맞는 것 같은데…. 저희 자리는 따로 있는 것 같아서요.”
녹색 로브의 말에, 느슨하게 풀려있던 기구의 공기가 날카롭게 조여들었다.
“저 앞에, 저건가?”
“예. 스칼라드님. 저곳에 내려 드리겠습니다.”
녹색 로브의 마법사는 잠시 성하도시의 은빛 검광을 눈에 담고는, 기구의 바람을 돌렸다.
‘이것도 그런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마법사, 아스트라드는 올 암페리아의 성벽 너머. 하늘을 꿰뚫을 듯 자라난 탑에서 불어오는 익숙한 바람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나 바람을 이끌고 다니는, 덩치 큰 성자를 떠올리며.
맹약자들을 태운 기구는 폭풍의 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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