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89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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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라…. 메아 마리아….”
“막아라. 우리를 버린 빛이, 그분의 앞에 닿지 못하게….”
온 피부가 녹아내린 얼굴로 환희와 절망, 분노 같은 게 한 데 뒤섞인 존재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뻐어어억!
어기적거리는 몸짓과 달리 제법 손맛이 있는 무리.
만전 상태에서는 주먹질로 성벽을 쪼개는 내게 있어 손맛, 그 반발력이 느껴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저들이 그 정도 힘과 내구성을 가지고는 있다는 뜻이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어!’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이 자리에서 수백 년 동안 저 녹아내린 좀비들을 상대한다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생사의 경계에서 벗어난 저주받은 망자들이니까. 죽음을 박탈당하고, 승천하지 못한 영혼만 남아 대충 뭉쳐진 살더미를 생전의 형태로 움직이는 괴물들.
죽을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니 아무리 박살내고 으깨버린다 한들 또 다른 살더미가 뭉쳐 만들어지며, 밤하늘 같은 색의 자색 신성, 메아 마리아의 신성은 그들에게 중갑 기사와 같은 방어력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래. 겨우 중갑 기사정도의 방어력. 수천의 저주받은 백성이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쇠로 된 작은 언덕을 때려 부수는 정도의 수고일 뿐이다. 지금의 내게 있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쿠욱.
“진짜 개 치사한 새끼들이!!!!”
살점의 파도 속에서, 내 전력을 다한 공격이 쏟아질 때마다 기척도 없이 찔러 들어오는 창칼이 그것을 방해했다.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공격.
빠르지도 않고, 오러 같은 기운도 없이 슬며시 다가온 창끝. 살더미 사이에서 스며 나오듯 고개를 내민 그 끝이 거력을 담은 내 팔뚝을 슬쩍 찌르는 순간.
-뿌가악!
“윽….!”
작은 바늘과 같은 따끔함이 느껴지며 내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려 터져나갔다.
[역행 계열 저주일세! 마녀의 성기사들은 접촉이라는 강한 매개를 통해 자네의 힘, 그 방향의 일부를 꺾은 거야! 공격에 전력을 다하지 말게! 그대로 자네에게 돌아올 테니!]알드리치의 다급한 설명에 교수는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무한히 몰려오는 귀찮을 정도로 단단한 녹아내린 망자들.
시간이 갈수록 그 완성도를 더해가는 마녀의 흉성.
뚫고 나가려고 제대로 힘을 쓰면,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망자 사이에 스며들어 쿡쿡 찔러오는 저주받은 성기사들의 창. 닿기만 하면, 중간에 방향이 바뀐 힘과 힘이 충돌하며 팔과 다리가 펑펑 터져나가는, 빠져나갈 수 없는 늪.
게드로이츠의 게임을 하며 여러 종류의 강적을 만났지만, 이렇게까지 전투 자체가 불합리하고, 짜증 나며, 기분이 더러운 적은 처음이다!
안 죽는 놈들이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그놈들 밀어낼 정도의 공격은 호시탐탐 저주 카운터만 노리는 놈들한테 막히고! 이렇게 시간 끌리면 패배는 확정이고!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알드리치, 넬과 함께 저주받은 영혼 자체를 잡아먹으며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는 중인 영혼술사뿐인데….
[그쪽까지 도와줄 여유는 없어! 노툼의 ‘출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라네! 그게 열려있는 덕분에 아직 이렇게 버티는 거지, 정말 이 마녀의 탑이 닫힌 공간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가 저주의 일부분이 될 게야! 힘은 물론 시선, 혈액, 사고마저 모두 역행하며 그 자리에 굳어버릴 거란 말이지!]그나마도, 알드리치가 있어서 겨우 이 정도에 그친 수준이란다.
오트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장을 거듭하는 마녀의 탑을 막기위해 전력을 다해 탑의 핵을 수탐하며 억제하는 중이고. 노툼과 알드리치는 ‘출구’의 유지. 나는 적의 방어 기제에 완전히 사로잡혀 운신이 불가한 상황.
‘….결국 이번에도 죽자고 돌격해야 하나.’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하나 가능성이 있긴 했다.
힘의 가감 없이, 카운터를 온전히 맞아주며 전력을 담은 일격으로 저 망자의 파도를 때려 부수는 것.
문제는 그게 손해를 감수한 공격을 넘어 내 스스로가 폭탄이 되어 적진 한가운데 뛰어드는 꼴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물리적 공격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 공격을, 전력을 다해 내게 쏟아내는 것과 마찬가지.
갈등의 논점은 ‘이걸 하고 마녀를 상대할 힘이 남아있을까?’를 넘어 ‘이런 짓거리를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로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가만히 있으면 패배하는 상황. 결국 이번에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이드, 내가 의식을 잃으면 바로 교대해.’
[오케이.]전력을 다한 돌진. 이것조차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박차고 나가야 할 땅은 저주받은 살점으로 뒤덮여 푹푹 빠지며 반발력을 모두 흡수했으니까.
대신, 확실하게 붙잡을 것은 있었다.
가벼운 도약과 함께 망자의 벽이 다가오자, 교수는 힘껏 그의 주먹을 뻗었다.
머리 끝까지 쥐어짠 집중 속에서 그의 주먹이 슬로우모션처럼 망자의 뒤섞인 육체를 향해 뻗어 나가고.
스르륵-
그 사이에서, 혈관에 뒤덮인 창날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공격. 지금 반응하면 역행의 저주가 담긴 창날을 피할 수 있었지만, 교수는 공격을 회수하지 않았다.
쿠욱-
다시 한번 느껴지는 창끝의 감각과,
빠각!
전력은 아니나, 적지 않은 힘이 담긴 그의 주먹이 고스란히 그의 팔뚝을 통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반발력. 강한 공격을 위해, 땅을 박찰 수조차 없는 이곳에서 적을 일격에 날려버리기 위해 그토록 갈구하던 것!
“크흐읍!”
손끝부터 터져나가던 오른팔의 근육이 부풀며, 뼈를 타고 되돌아오던 그의 공격, 그 반발력을 힘껏 내리눌렀다.
마치 힘껏 내지른 그 주먹을 도움닫기 삼듯, 찰나의 순간 역행하는 힘과 내리지르는 팔 힘이 만나 생긴 단단한 균형. 다음 공격을 위한 발판!
“카운터 도움닫기다, 이 새끼들아!!!!”
발로 땅을 찍어누르며 박차듯, 두 힘이 마주하며 되돌아온 힘이 그의 몸을 밀어냈다.
오른팔로 찍었기에, 한쪽으로 편향된 힘.
그것을 탄 몸이 회전하며,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살점의 벽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을 타고 한 바퀴 회전한 발끝에 첫 일격과 남은 전력까지 합친 모든 힘에 모여들고, 갈라진 외피 사이로 오러의 불꽃이 점화했다.
이글거리는 거대한 망치처럼, 회전의 첨단에 모여든 힘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망자의 벽에 날아들었다.
“거기서, 나와아아아아아!!!!”
뻐어어어엉!
괴물의 다리에 걷어차인 망자의 파도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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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후두둑. 후두두둑.
“허억, 허억! 쿨럭…. 우웨엑!”
오른팔. 어깨까지 복합골절.
왼쪽 다리. 발끝부터 골반 어림까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폭발.
교수는 충격에 뒤집어져버린 속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공격의 여파를 계산했다.
잘려나간 것도 아니고 아예 터져나간 팔, 다리. 재생하는데 약 30초.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방금 그의 킥을 맞고 터져나간 망자의 파편.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마구 뒤섞이던 망자의 벽에 난 일그러진 구멍.
그리고.
“쿨럭, 꺼흐윽…. 이래서…. 자기 뒤질 거 생각하지 않는 놈들이 싫어….”
폭발의 순간, 지금까지와 달리 강하게 찔러 들어와 그의 몸을 꿰뚫은 저주받은 창.
“다….시는…. 버림받지…. 않으….리….”
“보내….지…. 않겠…. 비극이 반복되….는…. 세상을….”
절걱. 절걱.
그 터져나간 망자들의 육신을 방패 삼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주받은 성기사들.
“개같이 단단하네…. 쿨럭! 성기사가 저주랑, 신성을 동시에 다루는 게…. 말이냐….”
무한히 되살아나는 메아 마리아의 백성들이라도 세계 밖의 힘. 에드온이나 다름없는 오러에 의한 손상은 쉽게 복구할 수 없는 듯 흩어진 망자의 살점들은 서로 뭉쳤다 바스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
쌍방 모두 병신이 된 상황에서 아주 조금만이라도 저 저주받은 성기사들이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다면 다시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는 다시 한번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히게 될 것이다.
‘저 새끼들 치우고 나가야…. 나가야 뭘 할 수나 있는데….’
꿰뚫린 가슴의 상처 속으로 뭔가 파고들며, 뿌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공격에 수류탄 파편처럼 날아간 망자의 사체들. 그 일부가 뚫어놓은 탑의 벽에서 물줄기 몇 가닥이 들어오고, 잘 들리지는 않지만 메시지 마법이 왕왕 울어대며 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들렸다.
콰악, 뚜두두둑!
“으으으으!”
푸확!
벌써 가슴의 일부를 잡아먹은 창을 뽑아내자 살점이 한 뭉텅이 떨어져 나갔다. 저주화가 자라고, 가까스로 뚫은 구멍이 막히기 시작한다. 자색 신성력의 성기사들. 어떻게든, 어떻게든 저들만이라도. 마녀의 별이 완성되기 전에. 여기서 그 힘을 소모하도록.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도록.
시간을.
시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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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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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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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직. 치지직-
그 순간이었다. 겨우 무릎까지 재생해 몸을 일으킨 교수 앞에, 작은 스파크가 일어난 것은.
마녀의 탑에 난 구멍으로부터 안으로. 불규칙한 실처럼 이어진 스파크.
『콜-』
시작만으로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쭈뼛서게 했던, 그를 노리고 발동된 대주문을 부르던 늙수그레한 목소리.
『블루 라이트닝』
꽈자자자자작!
그 스파크의 끝자락에, 점점 아물어 작아지는 탑의 구멍으로 보이는 희미한 비행체의 끝에서 푸른 번개 다발이 저주받은 성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동시에 아물어가던 탑의 구멍을 태우고, 찢어발겼다.
훤히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수염이 성성한 노인.
“오옴…. 어쩐지 바람이 재수 없다 했더니…. 홈을 부숴먹은 놈을 만나려고 그랬나….”
스스로를 폭풍의 언덕에 부는 두 번째로 깊은 바람이라 소개한 번개 마법사, 질풍의 갈류드.
“무토, 무토!!! 빨리 올라와서 어르신 모셔라! 이 양반은 마법 쓸 때마다 치매 노인에 가까워져 가니까!”
“예, 옛! 지금 갑니다!”
“사전! 내 사전도 들고 오너라!”
노인의 뒤에서 나타난 고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얼굴의 또 다른 노인. 뒤이어 나타나는 이들도.
모두, 교수가 봤거나,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이들이다.
역팔자로 치솟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제국 법관의 화려한 의복에 낡아빠진 두꺼운 책. 그리고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니는 몸종. 제국 대법원이자 모든 마법사의 천적, ‘이성의 전당’의 수장. 공작 그웬과 몸종 무토.
-서걱!
-뎅겅!
“본디 검가는 황위 쟁탈전에 개입하지 않으나, 이번에는 도를 넘은 듯 하군. 스카라드, 허울뿐이지만 그대도 공작위를 가졌으니 그웬 앞에서 입에 담을 변명을 생각해두시오.”
“이거 봐. 제대로 목을 잘라주지 않으니까, 다들 미련이 남아서 이렇게 기어 나오잖아. 공작이고 나발이고, 초대 황제의 인가를 받은 처형인으로서 죽어야 할 놈을 제대로 보내주는 것. 그뿐이다. 원래 내 일 하는데 누가 누구 눈치를 봐.”
기구를 박차고 내려와, 순식간에 저주받은 기사들을 베고 목을 날린 두 사람.
마스터들의 마스터. 슈왈츠 가의 현 가주. 대사(大師)라고 불리는 검사. 검공, 다이크 슈왈츠.
살아있는 언데드. 처형인들을 위한 마지막 자비, 처형자 스카라드.
“역천의 저주목이라. 감히 세계의 찌꺼기 주제에 어머니 나무의 형태를 모방하다니. 불경하고, 같잖습니다.”
품에서 꺼내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은 저주를 밀어내는, 진짜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 왔으며. 풀과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옷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에 경멸을 가득 담은, 유일하게 플레이어에게 잘 알려진 순수 엘프. 달빛 문지기 타이레아.
마지막으로.
“어째, 당신은 볼 때마다 몸의 일부가 사라져 있는 것 같네요.”
“너….!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네가 여기에, 어떻게?”
“그런 바람이 불더군요. 반갑습니다, 교수.”
바람에 펄럭이던 로브가 벗겨지며 얼굴을 드러낸 또 다른 마법사.
머무는 바람. 바람의 눈길이 닿아, 그들의 인정으로 폭풍의 언덕에 영원히 머물 수 있기에. 그들의 고향을 대표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선출된 마법사.
일곱 바람이 인도하는 4음계 마법사.
아스트라드 델하스트.
하나같이 제국에서 유명하고 고절한 히어로 유닛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아스트라드는 하늘을 뒤덮은 적색 거성을 올려다보며 작은 바람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 바람 위에 오래된 약속을 띄워 보냈다.
“폭풍의 언덕은, 과거 바람의 대공 펠릭스님이 황제와의 내기에서 진 빚. 그 세 번째를 갚고자.”
“검가 슈왈츠는 그 이름이 남아있는 한, 영원히 이어질 맹세를 지키기 위해.”
“후흐흐흐…. 들개, 스카라드는…. 오직 이날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고….”
“숲의 가지는, 인간 황제의 약속을 기억하기에.”
“읽어라, 무토.”
“예,옙! 어…. 대법관 글렌은. 가장 오래된 법전의 마지막 빈 페이지를 채우기 위하여….”
녹빛 바람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저마다 오래된 맹약을 입에 담는 영웅들.
그 말에 담긴 힘이 하나씩 차오를 때마다, 녹색 바람의 중심에 황금의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작지만, 의식에 집중한 마녀마저 되돌아보게 할 정도로 응축된 힘. 적색 거성이 눈동자처럼 그들 위에 내려앉은 가운데, 아직 완성되지 못한 맹약에 글렌 공작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다섯이라…. 둘이 부족한데? 이봐, 바람 미치광이들의 관리자. 하나는 그분이라 치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나? 이거 중간에 빼먹고 온 녀석 있는 것 아니야?”
글렌 공작의 말에 그의 지팡이에 난 구멍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아스트라드. 그 사이로 슬쩍 새어 나오는 휘파람 소리에 당황한 그는 그 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맹약을 넘기며 말했다.
“여기가 맞습니다. 저도 그녀가 마지막 맹약자일 줄은 몰랐지만.”
‘….그녀?’
그 말과 함께, 내게 의미 모를 눈짓을 보내는 아스트라드.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교수가 애를 쓰는 사이. 저주받은 사체로 뒤덮인 바닥에서 그를 일으키는 커다란 손길이 있었다.
“아, 고마워. 노툼.”
“….”
“노툼?”
탑의 입구에서 주술로 저주화의 탑을 불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던 노툼. 그녀는 전신의 주술각인을 환하게 빛내며 아스트라드에게서 건너온 맹약의 그릇에 손을 뻗었다.
“….주술사, 찔레 눈동자 아그탁. 몸은 흙으로 되돌아가고, 영은 흔적만 남았으나. 후손의 몸을 빌려, 오랜 친우의 부름에 응한다.”
화륵!
노툼의 손끝에서 피어난 주술의 불꽃과 함께, 마침내 맹약의 그릇에 황금의 물이 가득 차올랐다.
‘찔레 눈동자 아그탁. 붉은 눈. 주술사…. 붉은 눈의 대 주술사! 노툼에게 깃든 선조령 셋 중 하나! 제국은, 스스로 필요한 것을 불러들인다! 맙소사!’
노툼의 선조령. 그들 중 하나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후손의 몸을 빌려 과거의 약속을 입에 담은 것이다.
“오래된 약속이 모두 모였으니. 무토! 책을 펼치거라! 얼른!”
“예, 옛!”
글렌 공작은 눈치 빠른 몸종이 펼쳐든 법전의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마지막 장에 나타난 황금의 글귀를 보며 손을 뻗었다.
[살아남으라. 그리하여, 번영하리라.]제국의 하늘이 열리던 날, 초대 황제가 그 입에 담은 맹세.
….쫘아악!
그답지 않게 망설이듯 손을 머뭇거리던 공작은, 작은 한숨과 함께 단숨에 제국의 첫 번째 칙령이자, 500년의 주박이 된 그 페이지를 찢어내었다.
두터운 법전이 바스라지고, 구겨진 종이에서 황금빛 가루가 흩어지며, 손아귀 속에 구겨진 종이는 어느새 깃펜이 되어 공작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새 법을 써내려 갈 깃펜. 그 잉크가 될, 과거의 맹약.
그 모든 준비를 마친 글렌 공작은 그 맹약이 담긴 깃펜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으며 교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 만신창이. 이제 어떻게 해줄까.”
“….예? 저요?”
교수는, 설마 여기서 그에게 그런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라, 멍청하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래 너! 어울리지 않게 법복 입은 놈!”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당장 눈앞에서 단칼에 저주화의 탑을 썰어버린 사람만 해도 제국의 전설, 마스터 오브 마스터 검공 슈왈츠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마녀의 성기사들을 머리와 몸통으로 분리해버린 깡마른 노인은 처형자 스카라드, 무력만으로는 3월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괴물이다.
당장 저 질문을 한 사람만 해도 대법관 글렌 공작.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들에게 논쟁을 걸어,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논리로 모순된 깨달음을 파괴해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앗아가는 언변의 달인이다.
아스트라드는 그렇다 쳐도 저기 엘프 또한 진짜 숲 엘프의 대표나 다름없는 수문장. 누구 하나 나보다 떨어지는 사람이 없는데 왜 나한테 주도권을 넘기지?
“….그야, 우리는 모두 해묵은 과거를 따라 이곳에 온 이들이니.”
내 물음에 글렌 공작은 담담하게 답했다.
“우리를 이곳에 끌어들인 것은 과거에 묶인 힘이니라. 마녀의 힘 또한 과거에서 거슬러 올라온 옛것이니, 충분히 우리 힘으로 상대하기에 이치가 맞지. 허나, 결국 마녀는 과거를 벗어나 현세의 존재로 거듭났으며, 그것의 끝을 맺는 것은….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야. 그게 아니면, 끝이 나질 않아.”
“과거와, 현재라….”
“자, 알아들었으면 빨리 결정하거라. 지금. 무엇을 어찌 하면 되겠느냐.”
쿠우웅-!
글렌 공작의 말 사이로, 스카라드가 찍어낸 저주화의 탑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엉겨 붙으려다, 오트만의 물줄기에 핵이 모두 꺾여나가며 마침내 쓰러지는 저주의 마천루. 동시에, 흉성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린 시체들이 새 탑을 수십 개씩 쌓아 올리는 모습 또한 보였다.
기대했던 지원군. 내게 맡겨진 선택권.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소모전.
“저를 위로 올려 보내주십시오.”
“위라…. 준비는 됐고?”
“준비를 하기 위해 올라가는 겁니다.”
교수는 조금 전부터 조용해진 알드리치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쐐기. 이 장대한 스토리의 시작을 알리며, 자신이 마녀의 대적자임을 처음부터 알렸던 존재.
제국의 힘이 얽힌 이야기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면, 마녀를 위해 준비된 이야기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그였다.
기도하듯, 넬과 함께 손을 그러모아 뭔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준비하는 모습.
알드리치의 힘은 물리력이 아니라 그 특수성에 있으니, 그가 마녀에게 닿게 하는 것이 내 역할 이리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끼를 휘두르던 뼈만 남은 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검게 썩은 이빨을 다 드러내며 웃던 스카라드는, 넓은 도끼 면을 내밀었다.
“올라타. 신선한 친구…. 아랫도리에 힘 단단히 주고….. 흐후후후…”
그것으로 끝. 전조도, 힘의 집중도 없었다.
부와아악!
물리력을 거스르듯 깔끔하게 휘둘러진 도끼에, 피부가 밀려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교수의 몸이 하늘로 쏘아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끔찍한 흉성으로.
그 너머, 마녀가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지는 교수를 보며, 글렌 공작은 조용히 뇌까렸다.
“전설 셋이 모여 제국의 하늘을 열었으니. 그 끝맺음 또한, 셋이 어우러지는 것이 맞겠지.”
저 위는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글렌은 하늘에서 눈을 돌려, 지상에 쌓여가는 저주받은 자들에게 향했다.
과거의 영웅인 그들의 역할은,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끌려온 악이 저 마지막 싸움에 끼어들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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