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
Chapter.4 눈꺼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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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뭘까.
다음 날 아침,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교수는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는 물건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 황 도 ]….복숭아 그림, 노란색 배경. 내가 알고 있는 그게 맞다. 복숭아 통조림.
문제는, 대관절 이게 어디서 났으며, 왜 개봉된 상태냐는 것이다.
“으음…. 그러니까 어제 분명….”
다행히 좋은 술을 먹어서 그런가, 끊어진 필름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기억 속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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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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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뭐, 교수? 이름이 박교수라고?”
“키히힛! 사람 이름이 어떻게 교수….”
“심지어 하는 일은 게임 방송이라고! 너 정도 되는 남자가 말이야! 크하하하! 이거 말세야! 말세로구만! 아니, 말세가 맞잖아? 크흐흐흐!”
“….모쪼록 그렇게 됐으니, 자주 와서 보고 가라. 에이 썅!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뭐 어때! 야! 한 잔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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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웨에엑!”
탁탁탁탁-
“안주도 없이 독한 양주를 그렇게 퍼먹더니. 쪼그만한 놈이 많이도 쳐먹었다.”
“으어어어….뜨듯한 국물 먹고 싶다….”
“어이쿠, 모래라 균형 잡기가. 일어설 수 있으니까 아직 안 취했네. 나 잠깐 좀.”
“어이, 교수. 어디가?”
“어어. 저기 마트 가서 라면 좀 사 올게.”
“….뭐?”
“밑에 마트 있잖아 마트.”
“아니, 우리 방금 거기서 목숨 걸고 도망쳐 나왔는데?”
“시어머니 같은 놈! 걱-정을 하질 마! 내가 누구야, 저 돔의 바퀴벌레들, 렙터 전쟁광 새끼들을 이 대가리 하나로 발라버린 사람 아니냐! 다 ~ 생각이 있어!”
“어이, 벡스. 쟤 취했다. 좀 말려ㅂ-”
“가방 빌려 간다, 이거?”
“아니,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이야아, 로오망에 살고 로오망에 죽는 메탈 죠님, 쫄았어?”
“허허허허허허허허허. 이 새끼들이. 어이, 연장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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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 진짜 텅 비었네?”
“스캐빈저? 렙터한테 싹쓸리고 죄다 튀었지. 돔? 렙터한테 처발리고 튀었지. 렙터? 우리가 떨군 어보미네이션이랑 다이까다 죄다 뒤졌거나 튀었을걸? 말했잖아 내가! 다~ 생각이 있다고!”
“으으음…. 햅번,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튀면서 알뜰살뜰하게 가져갔나 보네. 라면 말고, 오뎅탕도 없냐?”
털그럭-
“어이, 술 취한 모지리들! 이리 와서 이것 좀 들어봐! 통조림 코너 선반이 몇 개 쓰러져 있는데, 밑에 뭐가 있는 것 같아!”
기기기긱-
“벡스, 빨리…. 허리 부러지겠다….끄윽!”
“황도! 황도 있다!”“오오오오!!!”
“보물이다! 판도라의 밑바닥에는 희망이 있었고, 45구 보물상자 밑에는 황도가 있었어!”
“과일 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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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다!”
“달아!”
“국물이! 당분이 몸에 스며든다! 범죄적이야!”
“흐으윽, 으허어엉-”
“아아, 살아있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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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 취한 남자들이 모이면 바보짓을 하는 게 전통이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런 짓을,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짓을 하다니!
교수는 뭉툭한 것으로 때려서 연듯한 통조림을 보며, 아연한 기분이 되었다. 벡스 녀석이 칼 가져오기 귀찮다고 주머니에 있던 보안 열쇠로 찍어서 열었지. 뭐, 텅스텐 열쇠라 흠집도 안 난다고 했었나?
“후우우. 진짜 바보 같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게 된 것, 그 사람들과 이렇게까지 마음이 잘 맞은 것, 그리고…. 멸망 이전처럼 마음을 터놓고 신나게 놀아본 것.
그래, 어제의 바보 짓거리는 정말 놀이였다. 멸망이 시작된 지 7년만에, 교수는 신나게 놀아본 것이다.
“…..요 며칠간 기억만 가지고도 1년은 우울증 걱정 없겠군.”
교수는 토사물과 빈 통조림 캔, 그 사이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
“어이, 정말 따로 갈 거냐. 나랑 벡스랑 같이 43구역에서 향신료나 팔자니까?”
“쓰읍- 너 따라다니다간 제명에 못 죽을걸? 아니, 그 많은 화약은 어디서 난 거야?”
“아, 얘기 안했나? 나 렙터 출신이야. 그 새끼들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알이 꽉 찬 무장트럭 하나 들고 튀었지.”
“….미안한데, 가끔씩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병 같은 거 있어?”
“크하하하! 이 턱도 그때 날아갔지! 지금도 렙터 소사이어티의 네스트에는 내 현상금이 붙어있을걸?”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선생님. 앞으로 만나면 모른 척하는 겁니다.”
“크흐! 남 말 하긴! 교수, 어제 일로 너희 둘 목에도 현상금이 걸렸을 거다. 이름을 숨긴건 현명했어.”
놀랍게도 범퍼와 후드가 떨어지고 후면이 걸레짝이 된 허머는 좀 시끄러워진 것을 빼면 멀쩡하게 움직였고, 이안과 다리에 부목을 한 벡스는 교수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럼…. 이제 작별이군.”
“뭐, 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사나이가 되어서 질척하게 매달릴 수는 없지.”
“히히히. 47구역에 올일 있으면 찾아오라고. 아, 벡스! 그 정리라는 건 다 끝났냐? 이제 좀 괜찮아?”
“…..”
교수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하던 벡스는, 절뚝이며 앞으로 걸어 나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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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같이 가요! 14부대 아저씨!’
‘어이, 꼬맹아. 아저씨들은 말이야. 사람을 많이 죽였어. 너무 많이 죽여서, 이제 우리가 착한 사람들인지 좀 헷갈린단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꼬맹이를 탈출시키고 사지에 남는다] 같은, 누가 봐도 착한 일을 주기적으로 해주는 거야. 일종의 자기 증명이지.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으으, 흐으으으….’
‘정 부담스러우면, 작은 빚 하나 졌다고 생각해! 나중에 커서 우리 부대 사람 만나면 좋은 밥이나 한번 대접해주면 되지. 어이! 다 올렸어! 이륙해!’
‘아저씨! 아저씨이이!!!’
‘Have Fun! 네 인생은 아직 한참 남았어! 삶을 즐겨라,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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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 Fun(헤브 펀. 즐겨라)’
“햅번.”
“뭐. 왜 그렇게 징그럽게 보냐. 무섭게.”
교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벡스가 내민 손을 맞잡아주었다.
찰칵, 찰칵,
조각나고, 무너진 기억들이 하나 둘제자리를 찾아간다. 무너진 블록처럼, 쏟아진 퍼즐처럼 흩어진 기억과 감정들이, 규칙적으로. 하나, 둘, 셋. 다시 하나.
벡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흐흐, 히히히히.”
지금까지처럼 새는듯한 웃음이 아니라,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을 기약하며.
***
위이잉-
푸쉬이익!
하우스 비닐과 청소기 다섯 대로 만든 에어록.
안에서 숨을 참아야 한다는 불편함만 빼면, 바깥의 먼지와 안쪽을 분리하는데 이만한 시설도 없다.
그렇게 보호복을 벗어두고, 문을 열면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다. 익숙한, 살색에 가까운 회색 냄새.
집이다. 3박 4일의 다이나믹한 여정 끝에 돌아온, 집.
“주인니이이임!”
아아, 이 화려한 외출의 원흉을 보고 썩어들어가는 마음까지, 정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야.
“아빠 돈 벌어 왔다.”
“이야아~ 오는 길에 좋은 거라도 주워오셨…..으엑! 그 샷건 뭐에요! 환불 못했어요!”
내 등에 걸려있는 잘 빠진 더블배럴 샷건을 보며 경악하는 코듀로를 보며, 나는 엄격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해라. 오늘부터 네가 모실 새 사모님, 미스 배럴이다.”
“…..이상하다. 오늘 밖에 방사능 폭풍이 불었나. 일기예보에 없었는데.”
아니, 한번 쏴보니까 파이프 샷건에 더 이상 손이 안가더라고.
헤어지기 전 아직도 환불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이안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
***
“그, 그럼 이게….?”
“그래. 너의 주인님은, 환불하러 가서도 목돈을 벌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다.”
고오급 샷건 한 정, 혹시나 상할까 봐 이중 삼중으로 천을 둘러놓은 그림, 정교한 무브먼트가 돋보이는 롤락스 시계, 그리고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 추가로 황도 한 캔.
이번 여정의 수확물을 본 코듀로는, 행복회로를 맹렬히 태우기 시작했다.
“거, 거래소! 거래소에는 얼마에 올리실 생각이에요!”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어.”
오면서 내내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좀 골치 아프다.
45구역 보물 쟁탈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을 순서대로 꼽으면
스캐빈저 > 돔 > 렙터 순이 된다.
스캐빈저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집까지 오는 길에 습격 한번 안 받았을 정도로 숫자가 줄었다.
돔은 정예부대 20여 명과 그들의 장비 일체를 잃었고,
렙터도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세 집단의 공통점은, 피해는 피해대로 입었는데 얻은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이를 득득 갈고 있는데, professor라는 아이디의 판매자가 갑자기 고가의 구시대 물건을 판매한다면?
‘100% 방송 터지지. 내 인생도 터지고.’
무조건 눈치챈다. 특히 그 렙터 지휘관 놈. 안 죽었으면 이빨이 닳아 없어지도록 갈고 있을 텐데, 여기서 내 커뮤니티 아이디가 걸리면 그대로 추살령 확정이다.
“마켓플레이스를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지. 그쪽에 요청하면 마켓의 이름으로 올려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겠지만, 결국 돔에서는 아는 거니까.”
으음…. 뭔가 유명한 작품을 장물 처리하는 도둑이 된 느낌인데.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상환일까지 이제 6일…. 정도 남았는데.”
“내가 집에 오는 길에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어차피 예술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딱 두 부류잖아? 돔 상류층, 아니면 예술가 연합.”
“그렇죠.”
“그럼 어차피 돔 쪽은 껄끄러우니까, 예술가 연합이랑 직접 접촉하는 건 어떨까?”
“오. 굿 아이디어.”
다른 집단은 몰라도, 예술가 연합은 접촉하는 방법이 굉장히 간단하거든.
교수는 바로 접속기에 연결해 커뮤니티에 들어간 다음, 간단한 글 하나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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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귀한 건가요? by professor
캐릭터가 플레이 불가 상태라 집 주변 정리를 좀 하고 있었는데, 땅속에 뭔가 튀어나와 있길래 팠는데 이상한 도자기 같은 게 나오더라구요. 혹시 아시는 분 답변 부탁드립니다.
*보안상 사진 첨부는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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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사진도, 정확한 묘사도 없는 흔한 커뮤니티 낚시 글. 보통 사람은 제목만 읽고도 거르는 글이지만,
띠링-!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원하시는 접촉 구역과 좌표를 말해주십시오 by 예술가 연합-W
안녕하십니까. 예술가 연합의 W라고 합니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 확언을 드릴 수는 없으나, 귀하께서 발굴하신 도자기는 구시대의 물건이 아닌가 사료되고 있습니다.
저희 예술가 연합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지식과 문화의 보존에 힘을 쓰고 있으며, 원하신다면 무료 감정 및 거래를 주선해 드리고 있으니 메시지로 접촉이 가능한 구역과 좌표, 접촉 시간을 보내주시면 저희가 맞춰서 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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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연합은 이런 글 하나하나에 전부 반응한다.
“이야. 답변 칼같네.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인원이라도 있나?”
“그런데, 얘네 이렇게 마구잡이로 상대가 원하는 장소로 움직여주면, 아무나 대충 글 올리고 매복해서 기다리면 탈탈 털리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한 친구들이 참 많았는데, 연합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서 커뮤니티에 인증 글 올린 뒤로는 거의 없어졌다.”
렙터 소사이어티가 폭력, 돔이 구시대 질서와 기술로 대변된다면, 예술가 연합은 ‘비밀스러움’ 으로 유명한 집단이다. 본부가 어디인지, 구성원이 몇 명인지 아무도 모르고, 소수 정예라는 것, 조각이나 그림, 공예품 같은 과거의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메시지가 오고 나서 두 시간 뒤에 만나자고 한 다음, 한 시간 뒤에 약속 장소에 갔더니 예술가 연합에서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 경이로운 전투력과 이동속도 때문에, 커뮤니티에서는 예술가 연합에 3형 변종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소문도 돌았었지. 3형 중에는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녀석들도 많으니까.”
“그, 그런 걸 혼자 만나러 가셔도 돼요?”
“아, 문제없어. 건드리지만 않으면 황무지에서 이 녀석들처럼 신사적인 집단도 드물거든.”
교수는 4시간 뒤에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며, 여유 있게 웃었다.
***
오후 9시 58분.
“….진짜 칼같네.”
어둑한 골목,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지만 새하얀 양복을 입은 남자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교수가 접근하자, 읽고 있던 책을 덮어 품으로 갈무리한 남자는 어색 한점 한 군데 없는 귀족적인 인사로 교수를 맞이하였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professor’. 예술가 연합의 ‘W’라고 합니다.”
낮은 목소리. 정중한 자세. 황무지라는 환경에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흰 정장.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적어도 평범한 집단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교수는 인사에 앞서, 가방부터 풀었다.
“피차 바쁜 처지에 인사치레는 생략합시다. 물건부터 확인하시죠.”
달칵.
자신을 W라고 부른 남자는 작은 손전등을 꺼내 들더니, 교수가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하나씩 신중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모두 보기 드물 정도로 잘 보존된 유물이군요. 땅에서 파냈다고는 보기 힘든데.”
“혹시 거래에 개인사까지 포함되는 겁니까? 내건 좀 비싼데.”
“너무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해당 물건의 기원을 알면 역사를 밝혀내는 게 더 쉬워서 그러는 거니까요. 비밀로 하고 싶으시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달칵.
다시 손전등을 끈 남자는, 조심스럽게 시계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시계부터 시작하죠. R사의 시계는 구시대에도 명품으로 유명했던 물건입니다. 미세한 부품 하나하나 스며든 장인의 손길,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가 엄선한 디자인, 그리고 그 네임벨류까지…. 구매할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죠.”
남자는 부드러운 벨벳 천으로 장식된 상자 안에 시계를 넣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 그림입니다. 연원을 밝힐 필요도 없죠. 그 끔찍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 그림이 살아남았다니, 신에게, 그리고 이것을 찾아낸 ‘professor’ 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젠장, 심장아, 제발 나대지 마. 이런 건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값이 오른다구.
“유명한….. 작품입니까?”
“대단히. 영국의 화가이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입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도 하던 반전주의 작가의 작품이 멸망한 세계에 살아남아 있다니, 아이러니하군요.”
뱅크시.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다. 아이 참. 손이 왜 이렇게 떨리지.
“그래서 가격은 얼마나…..”
“흠. 보존 상태도 훌륭하고. 작품의 가치도 남다르니…..”
슥.
남자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이 정도면 어떠신지요.”
“오, 오백만?!!!”
“오십만입니다.”
“아.”
이 새끼가.
김칫국에 푹 절여져있던 뇌가 50만이라는 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겁나 유명한 작가라며.”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전설적일 정도는 아니지요.”
“그래서, 두 개 합한 게 그거라고? 목걸이는?”
“R사 시계에 10만, 뱅크시의 작품에 40만입니다. 목걸이는 보석은 귀한 것이지만, 세공이 예술품이라 보기엔 조잡하군요. 목걸이는 사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망했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은 작품을 기름 2통 값으로 사시겠다?”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는 것에 늘 못마땅해했습니다. 예술가로서 작가의 그런 성향은 존중해야지요.”
그리고.
교수에게 한걸음 다가온 그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판매처가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거래소에 경매를 올리면 충분히 가격을 띄울 수 있는 물건을, 그런 조잡한 방식으로 접선해서 판매한다는 게 의미하는 사실이야 뻔하지요.”
“윽!”
예리한 자식. 이거 완전 예술가가 아니라 사업가잖아? 덤탱이 씌우는건 포기해야겠군.
“260만!”
“50.”
“240!”
“50.”
스릉-!
“한 번만 더 50 같은 소리 지껄이면, 여기서 두 개 다 아작내버리고 집에 가겠다!”
“….100”
“180!”
“…..120. 졌습니다. 이게 저희가 부를 수 있는 최선입니다. 삶의 기치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바뀐 세계에서, 그림처럼 아무짝에 쓸모 없는 물건을 이 가격에 사는 것은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130!”
으드득!
“좋….습니다. 130. 바로 입금하도록 하지요.”
그는 가방에서 태블릿 같은 것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뭔가를 입력했다. 교수도 가방에서 낡은 통신기를 꺼내 연결했다.
“어이, 코듀로. 들리냐.”
“옙! 수신 양호!”
“입금은.”
“130만! 정확히 확인됐습니다!”
탁!
‘됐다.’
통신기를 집어넣은 교수는, 좀 전의 신경전이 없었던 것처럼 햇살처럼 화사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하하하, 이것 참. 깔끔한 거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 있으면 종종 봤으면 하네요.”
“그렇….군요. 저희도 professor님의 이름, 꼭 기억해두도록 하지요.”
그림과 시계를 챙긴 남자는, 교수의 손을 슬쩍 잡아준 다음 안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30만이라….. 기대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선방했지 뭐.”
모든 집단에서 군수물자로 취급하여 유통과 소비를 엄금하는 휘발유가 큰 통으로 여섯 개. 이정도 값이면 나름 잘 받았다고 생각하며, 교수는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빚은, 110만.
11시간 뒤에는 캐릭터가 정신을 차리고, 5일 후에는 빚을 모두 갚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