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0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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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계에 그어진 선처럼 검광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죽음이 이글거리는 도끼가 경계를 벗어난 망자들을 확고한 죽음의 세계로 되돌려놓으며.
저주받은 대지에 세계수의 축복이 내려앉고,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마법 부수기’의 역사가 담긴 낡은 책의 글귀가 흑마법의 구조를 분해하고.
번개의 폭풍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망자의 비를 빨아들이며, 조각난 고대의 주술 골렘들이 주인의 부름으로 다시 몸을 일으켜 살아 움직이는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찰나의 실수. 바늘귀와 같은 작은 틈만 있어도 순식간에 저주의 탑을 우후죽순으로 피워내며 개화를 거듭하고, 수도를 넘어 제국으로 퍼져 나가며 저주에 뒤덮인 모든 이들을 빨아들인 또 다른 흉성을 만들어낼 망자의 세례.
이미 재해의 단계조차 넘어선 저주. 역사에 기록된다면 ‘멸망’의 단계에 도달했다 할 수도 전역에 쏟아지는 재앙의 씨앗을 단 여섯 명의 맹약자들이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한 전장의 상공으로.
포탄처럼 쏘아진 남자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폐부를 옥죄는 자색 안개의 장막과, 고통인지 환희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저주받은 이들을 스치며, 마침내.
구름 위로. 하늘과 하늘을 가르는 그 경계 너머, 흉성으로.
폭-
구름을 뚫고 나온 교수의 눈에, 마침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 자색의 서광에 휩싸인 마녀가 들어왔다.
반쯤 완성된 흉성. 인간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그 끔찍한 별의 중심에, 보랏빛 꽃잎에 둘러싸여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여인.
『아아…. 이리로…. 더는….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탁한 눈동자와 의미 잃은 말의 반복.
마녀는, 신격화와 동시에 대부분의 이지를 상실한 뒤였기에.
흉성에서 뻗어 나온 촉수를 박찬 교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완벽한 신이 되려 했기 때문이겠지.’
지상에 그 권능을 나눠준 5대 선신. 그들조차 필멸자의 운명에 개입하기 위해 스스로의 완전성을 뒤틀었거늘. 자신의 것이 아닌 제국의 힘을 흡수하고, 섭리에 역행하는 저주를 이용해 신성의 반열에 올라간 그녀가 온전한 신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흐트러진 정신과 육체. 그 풀어 헤쳐진 앞섬에 가득한 자해의 흔적을 보며 교수는 양팔에 힘을 끌어올렸다.
흉터는 막 돋아난 새 살이 아니었다. 노인의 피부에 새겨진 상처처럼, 세월의 풍화가 가득한 오래된 상처. 저 육신은 마녀가 빼앗은 황녀의 몸이니 황녀의 생전에 새겨진 상처는 아닐 것이다.
육신은 영의 그릇이며, 영은 육신의 거울이다. 아마, 마녀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가 몸에 스며들어 저런 흔적을 남긴 것이겠지.
흑마법. 영혼의 상처 사이로 흘러나온 생명력. 흩어져야 할 그 힘을 뒤틀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사악한 학문.
알드리치가 말하길 흑마법사는 대부분 사악한 이들로 표현되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끔찍한 존재였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흑마법은 깨어진 영혼, 그 틈새에 계약한 악령, 원혼 등을 기워 넣어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그들의 손을 통해 사역하는 학문이라네. 흑마법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은 그 영혼에서 악령이 차지한 부분, 악령의 영역이 넓어지며 더 많은 생명력을 흑마력으로 바꿀 수 있게 됨을 의미하지.’
‘따라서 흑마법사는 그 위계를 높일수록, 점점 작아져 가는 자신의 영혼으로 그 나머지를 잡아먹은 악령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네. 뛰어난 정신력으로 그것을 이겨낸다 한들, 자신의 본질이 악령에 가까워짐은 피할 수 없지.’
‘흑마법사. 그것은, 결국 인간의 영혼에 파고든 악령이 생명을 가진 악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불과한 존재라네. 아무리 대단한 영혼과 정신력을 가진들, 그것은 피할 수 없어. 그 대단한 영혼을 먹고 자란 악령이 상대이니.’
그것이 세간에서 표현하는 타락. 하물며, 성녀 마리아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모든 이들을 저주로 더럽혀 그녀의 영혼에 받아들였다.
그녀도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으리라.
연고 없는 여인을 태워준 마차, 그 일행이 몸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을 때.
몇 달을 함께한 소박하고 따듯한 마을이 화마에 휩싸이고, 녹아내리는 그들의 영혼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을 때.
그 모든 고통과 원망이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던 그녀의 영혼과 선의 속으로 파고들며, 어느새 고통과 절망 어린 시산혈해 속에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변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거친 칼날로 뜯어낸 것처럼 찢겨나갔고, 그 자리에 스스로가 만들어낸 악령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누구보다 선했기에, 어떤 흑마법사보다 많은 원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흑마법사.
마녀, 메아 마리아.
그녀의 신위는, 더는 돌아갈 곳 없는 이의 발악에 가까웠다.
스스로의 선의를 증명할 마지막 수단. 타락하고 더럽혀졌다 한들, 이들 모두와 함께 별이 될 수 있다면. 금성처럼 빛날 수도 없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흉하다 한들.
빛을 등진 그날의 맹세 그대로. 모두에게 평등한 빛을 나눠줄 완벽한 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 아아아….』
이지를 잃은 마녀의 손끝에 새하얀 빛이 나리자, 별의 가죽을 벗기듯 흉성을 뒤덮은 사체들이 게걸스럽게 그것을 향해 몰려들었다.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겹치고, 으스러지며, 불규칙한 그 형상을 저주화의 줄기로 엮어낸 창. 희끄무레한 살점과 피의 색이 겹치고, 겹치고, 겹쳐. 번들거리는 검은 덩어리가 될 때까지.
누구보다 강렬한 선의를 기둥 삼아, 끝없는 악의로 빚어낸 창이 그녀의 손에 들리고, 그 마지막 기원의 장애물을 향해 쏘아졌다.
그녀를 조롱하는 저 무수한 별빛처럼. 초라하고 추한 흉성을 비웃는 달빛처럼. 그것을 등지고,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를 향해.
『보내줘…. 보내….줘…. 로 하람…. 제발….』
어린아이 같은 기원 속에, 별의 힘을 담은 창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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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저주화의 꽃잎. 바스러지는 그 가루 하나하나가 인식될 정도로 고양된 정신. 교수는, 메아 마리아라는 신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창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하얀 불꽃, 오러를 모조리 그 양팔에 쏟아부었다.
트드드득, 푸화악!
갈라진 지면에서 용암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갈라진 외피 사이로 치솟는 하얀 불길.
쓰면 쓸수록 쉽게 사용할 힘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법, 블러드 아머는 이미 내 몸에 융화되었다고 해도 좋은 상태.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을 구성하고, 부족한 내구성을 보충하며 충격을 흘려내고 있다.
마법은 세계를 이해하고, 재현하는 힘.
오러는 세계를 부정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우는 힘.
서로 상반된 힘이기에. 오러의 불꽃을 틔워내는 순간, 그것을 다루는 내 육신도 같은 파괴력으로 바스러지는 중인 것이다.
‘탑 안에서 오러를 전력으로 펼쳤을 때, 내 팔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도 그 때문이겠지.’
허투루 사용했다간 사용 직후 블러드 아머가 모조리 타들어간 유리몸이 상대에게 노출되는 자살기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교수는, 망설임 없이 전신에 오러를 끌어올렸다.
‘상대가 별이라면, 나도 유성 정도는 되어 줘야 합이 맞겠지.’
-콰아아아아아악!
바람조차 숨죽인 정적 끝에. 하늘을 향해 쏘아진 별의 창과 하얗게 불타는 유성이 마주하고.
콰드드드득!
검은 창끝이 가슴에 닿는 순간, 교수는 활짝 펼친 두 팔을 그 창대에 박아넣었다.
“크으….. 으으으으으!”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극명하게 차이 나는 힘. 전력을 쏟아냈지만,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별을 이룬 신의 힘을 이겨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파고든 손끝이 창을 긁어내고, 그 손톱자국의 길이만큼 교수를 꿰뚫은 창이 그를 저 위로, 하늘 너머를 향해 밀어내고 있었다.
“으으으, 으으으으으!!”
마녀와, 그녀의 흉성이 멀어진다. 하늘 위로, 푸른색을 넘어 어둑한 별들의 영역으로.
창과 함께 끝없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몸. 교수는, 그 몸에 깃든 모든 오러를 창에 박힌 손끝으로 쏟아부었다.
밀어낸다. 밀어낸다! 여기서, 이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을,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쓰레기 같은 이야기의 끝을…. 내고 만다!
콰악!
마침내, 그 몸으로 붙잡은 창의 중심에 손톱이 닿는 순간. 교수는 얼어붙어가는 핏방울 하나까지 모조리 백열시키며 그의 가슴에 박힌 창을 뽑아냈다.
-콰아아아!
그의 가슴을 꿰뚫고, 그의 피에 젖어든 창이 하얀 기둥처럼 불타고 있었다.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줬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가까스로 막아내, 그 여파를 흩어내는 정도가.
트득…. 툭….
이미 전력을 다한 오러로 불태워 버린 몸. 근육과 근육, 피부와 피부를 연결하던 블러드 아머가 오러의 불꽃에 모두 타들어가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무너져가는 육신은 기둥과 같은 창에 매달려 있는 것이 한계였지만.
창의 중심부. 악의가 뭉친 외피를 뚫고, 그 중심에서 그의 두 손이 맞닿은 순간. 교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으며. 그 또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이에게 닿기 위해.
“믿음이고 신앙이고 먼지만큼도 못 주지만…. 이번 한 번만, 도와줘.”
지금껏 그 누구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지금. 간절함을 담아.
창의 중심부에서 만난 두 손을. 기도하듯 겹쳤다.
“….당신 딸이니까. 당신이 저렇게 만들었으니까.”
라투라. 로 하람. 은총을, 광명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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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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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활한 별들의 공간에서. 초신성이 폭발하듯,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을 것이다. 몸의 외부에 깃든 마력과, 내부에 깃든 오러. 두 힘 모두가 그 맹목의 빛과 반발하여 터져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바닥의 바닥까지, 그 전력을 모조리 쏟아낸 지금은, 텅 비어버린 교수의 속은 신성을 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섭리를 거스르는 불합리의 힘은 그 무너져가는 육신을 수복한 것으로도 모자라 손끝을 타고 한껏 그러안은 마녀의 창으로 흘러 들어갔다.
오직 그 전부를 태워서 발했기에, 마지막 순간에 주어질 수 있었던 기적.
으득, 으직, 으지직-
파아앙!
노도와 같은 신성에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가는 창의 저주받은 외피가 터져나갔다. 남은 것은 그 안에 깃든 거대한 신성과, 희미하게 남은 성녀의 선의. 그리고, 거대한 빛의 창에 두 손을 박아넣고 한껏 몸을 웅크린 성자.
“후우웁, 흐으으으읍- 으그그극…..!”
뇌를 태우는 고양감 속에 호흡마저 멈춘 채. 스스로를 태우듯 힘을 모으고, 또 그러모아, 살과 가죽으로 된 방아쇠와 같이 당겨진 성자의 육신이 임계점에 이른 순간.
화아아아아악-
.
.
.
.
.
으득.
“라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
수도의 상공을 뒤덮은 붉은 흉성 위로 눈부신 혜성이 내려앉았다.
….후둑. 후두둑.
쿠르르르르르-
가진 모든 힘을 넘어, 빌린 힘까지 모조리 쏟아붓고 낙하하는 교수의 눈에 빛의 창에 꿰뚫린 흉성이 추락하는 게 보였다.
“누가…. 받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 위에,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 속에서, 교수는 작은 반딧불 같으면서 석양처럼 웅장하기도 한 이상한 빛이. 그를 따사롭게 비추며 사라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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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서걱!
은빛 검기가 치솟으며 길을 가로막은 괴물 한 무리를 동시에 양단했다.
불에 탔을 뿐만 아니라 지면 자체가 뒤틀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된 성하도시.
황족으로서 대로만 다녔던 그로서는 지금 그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
검을 휘두를수록 힘이 빠져나가기는커녕 더욱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태어나 이토록 충족감을 느껴본 적도, 자유롭다 느껴본 적도 없었다.
제국의 힘에 이지를 빼앗겼기에, 더욱 순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 검에 영혼을 담아, 처음으로 오러를 피워내 기사가 됨을 공표했던 순간.
그 맹세처럼, 이지를 잃고 꼭두각시가 되어도 그는 기사였기에.
검 끝에 자리 잡은 은빛 오러는 그 수없는 휘두름에도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불타는 수도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그의 뇌리에 주입된, 제국의 의지가 남긴 지식이 조각난 서책처럼 하나하나 떠올랐다.
저 알 수 없는 핏덩이에 뒤덮인 것은 베르나르 백작의 저택. 방계 몇을 제외한 직계 모두가 수도에서 죽었으니, 철 수급에 지장이 생길 것은 분명하다.
마구 밟혀 터졌지만, 저 사치스러운 인장이 새겨진 목걸이의 주인은 팔렉스 후작. 그의 죽음으로 곡창지대를 소유한 그의 영지 또한 혼란에 빠질 테니 인근 영지의 식량 사정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수도 전역이 이런 상황이니, 제국의 고위 귀족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을 것은 자명한 사실.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의 희생양은, 언제나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었다.
후계 다툼. 영지전. 기근. 어쩌면…. 반역까지.
그 모든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전과 같이 제국이 건재함을 보여 귀족들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들을 움직이던 거대한 손, 황제의 힘도 사라졌으니.
“나는…. 이 나라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이것 또한 주입된 감정일 수 있으나,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그는 제국의 양민들이 덧없이 스러져가는 것을,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외면할 자신이 없는데.
그 아에드란의 작은 영애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자유인이니.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기사로서 그의 오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될 뿐이었다.
‘….나라면, 구할 수 있다. 그 모든 환난 속에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기 전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주입된 지식이지만 제국을 움직이기 위한 모든 지식은 뇌리에 남아있었다. 능력도, 명분도 있으며. 그의 손으로 살려낸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열기에, 앞으로도 그들의 삶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제국의 안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유로워졌다 생각했지만, 희미하게 남은 그 실에 이끌려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제국으로 남은 이 나라를 평화롭게 이끌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쿠우우우우우-
수도 어딘가를 헤매고 있던 그의 머리 위로, 하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하늘을 뒤덮고, 사악한 저주를 뿌리던 그것이. 비록 저주의 힘은 옅어졌다지만, 그 질량만으로도 수도를 으스러뜨리고 모든 것을 무로 만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
당황한 가이낙스는 주변을 살폈지만, 벌써 그의 뒤를 정처 없이 따라온 사람들이 수백이 넘은 지금, 그들 모두를 대피시킬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참으로 상징적인 것 같지 않나. 떨어지는 하늘, 무너진 제국. 그리고, 당신의 손에 들린 개천의 검까지.”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가이낙스가 돌아서자, 인상 사나운 중늙은이와 몸종으로 보이는 소년이 무너진 건물에 기대어 있었다.
“글렌 공작….이로군.”
“하대를 한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 제국의 티끌 하나 남지 않은 그 모습을 보니, 이미 죄다 벗어던진 것 같아서 말이지.”
“당신이 여기에 왜 있는 것이오. 마녀의 힘이 제국을 뒤덮은 직후에 출발했다 하여도 글렌 공작가에서 이곳까지는 족히 하루가 넘게 걸릴 거리인데….”
“….오랜 약속과, 바람 한 조각이 도왔다고 하지.”
알 수 없는 선문답에 가이낙스는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곳곳에 치솟는 하늘빛 오러나 검은 불꽃, 청명한 나무줄기 같은 것을 보아 글렌 공작과 같은 제국 각지의 강자들이 수도에 몰려든 것 같았다.
아마, 이것도 제국의 힘이 사라지기 전 어떠한 안배가 있었던 모양이지.
바스락-
글렌 공작은, 저주를 파훼하며 새까맣게 물든 사전 한 장을 찢어내버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오.”
“무엇을 말이오.”
“뭐긴 뭐야. 이 나라 말이지.”
지친 듯, 떨리는 손길로 페이지를 넘기던 글렌 공작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손길을 멈췄다.
“남들과 달리, 제국의 몇몇 이들은 제국의 비사를 알면서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지. 그렇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끌려가는 그 기분을 아주 잘 알아. 다시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자신이 있나? 결국, 자네가 황제가 되면. 제국의 인도에 따른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이 모든 일은 없던 것처럼 넘어가고, 제국민들은 1황자가 황위에 올랐구나, 하고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이 모든 것이, 미약하게 남아있던 제국의 실에 이끌려 이루어지는 일일 수도 있는데. 다시 한번 사자의 운명을 받아들여, 제국의 천년을 채울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야.”
가이낙스는 글렌 공작의 말에, 수도의 화마로도 가릴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떨어지는 하늘. 무너지는 제국.
그래. 확실히 상징과 같은 부분이 있었다. 그를 다음 대 황제로 만들고자, 여기까지 유도된 것 같다는 의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내면이 자유로움에. 새로 깃든 오러에 다른 어떠한 것도 섞여 있지 않음에 확신을 가졌기에.
벽에 기댄 글렌 공작을 지나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있다 하여. 그 위를 걷는 이가 모두 길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검을 뽑아 그 영혼을 담아낸다. 차가운 듯, 선연하면서도 단단한 은빛 오러. 그 휘황한 광채가 하늘을 겨눴다.
“새 하늘을 열겠으나, 그것이 사자의 하늘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그렇다면, 누구의, 무엇의 하늘이 되겠나?”
품에 손을 넣은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글렌 공작.
“….”
가이낙스는, 입에 담을 만큼 분명하진 않으나 그의 내면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제국의 형상을 입에 담으며 별을 향해 뛰어올랐다.
“푸, 푸흐흐흣, 푸하하하! 하! 걸작이구나, 무토! 걸작이야! 하이고, 황제라는 놈이, 그 자리에 오를 각오를 마친 사람이 저따위 생각이나 하다니!”
그 뒷모습에, 오랜 세월 마법사의 천적으로 내면의 형상을 읽어내는 데 익숙해져 있던 공작은, 차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품에서 깃펜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황가의 힘. 맹약자의 약속을 녹여내,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릴 황금의 깃펜을.
“아아, 왕이시여. 새로이 약속의 주인이 되실 분이여. 정녕 그러시다면, 받아가시길. 그 앞길에 제국이 함께할지니.”
공작의 깃펜이 가장 오래된 법전, 마지막 페이지에 다음 대 황제의 이름을 새겨넣는 것으로 그 끝을 맺었다.
마침내 끝을 맺은 법전. 그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이낙스의 검에 깃들어, 그 노도와 같은 힘으로 기사의 검을 밀어 올렸다.
제국의 시작을 알린, 태초의 황제이자 영웅이었던 자의 힘.
500년 동안 제국을 이끌어온 그 초대 황제의 힘이, 마침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그 다음 후계의 검끝에서 마지막 빛을 틔워내고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담은 은빛의 검이, 별을 향해 휘둘러졌다.
투확-
억눌린 공기를 가르는, 작은 바람 소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 새벽. 밤하늘에 떨어지던 유성에 잠을 깬 제국의 시민들은.
은빛 섬광이 하늘을 가르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고, 입을 모아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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