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1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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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
바람조차 숨죽인 하늘. 그 차디찬 공기에, 얼어붙은 꽃잎이 산산이 부서지듯.
그녀의 별과 함께, 마리아의 꿈도 추락하고 있었다.
‘사랑해.’
결국. 그녀는 이기적인 빛의 신에게 지고 만 것이다.
빛과 불꽃의 창에 꿰뚫린 그녀의 몸이 바스라지는 것처럼. 그녀의 별도, 별을 이룬 그녀의 백성들도. 함께한 모든 영혼도 흩어지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모든 영혼을 헤아리며 떠나보내고 있었다.
‘사랑해.’
한때 선하기만 했던 영혼은 이제 비수와 같은 저주와 악의가 무수히 파고들었기에. 그녀의 정신은 온전히 되돌아올 수 없었다. 마음에 남은 말. 그녀의 손을 떠나면, 정처 없이 이승을 배회하다 한 줌의 먼지로 되돌아갈 저주받은 영혼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속삭이던 그 말 한마디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망가진 영혼이라도, 신의 조각이며 한때 완전했던 존재의 파편이기 때문에.
마녀, 메아 마리아는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한때 성녀였던 영혼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 다른 몸을 찾아가게 될 테니.
모든 힘을 잃고, 이제는 시작의 선의마저 더럽혀진, 망령의 집착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모두가 내버린, 저 불쌍한 영혼들을 보듬을 이는 그녀밖에 없으니까.
성녀의 영혼이 몸을 떠나 세상을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버림받은 자들의 여신 메아 마리아로서. 그녀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해.
언제가 됐고, 무너진 영혼을 일으켜 세워. 메아 마리아는 다시 한 번 마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지금은 잠이 들 시간이었다.
사락.
‘….’
하지만. 별과 별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떠나가는 그녀의 발길을 잡아당기는 알 수 없는 인력이 있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이제는 모두가 떠나간 그녀의 영계. 버림받은 자들의 안식처.
[돌려줘.]그 생과 사의 간극에,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혼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래. 네리아. 이제야. 이제야…. 도착했구나.”
아니, 하나가 더 있었다. 선명하게 일렁이는 소녀의 영혼과, 꺼질 듯 위태로운 노인의 영혼.
‘아.’
이지를 잃은 그녀에게 짧은 감탄사를 선사할 만큼, 뜻밖의 재회.
“어머니.”
마녀의 탑에 들어선 후. 수많은 영혼에 둘러싸인 그녀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지금 이 순간을, 전장 속 자신의 안위도 잊은 채 이 순간만을 위한 주문을 준비하던 영혼술사.
알드리치. 그의 손목에 묶인 영혼의 사슬이 마녀의 영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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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팍. 찰팍. 찰팍. 찰팍.
알드리치는 의식의 저편, 영계 또는 무의식이라 표현되는 공간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일렁이는 마녀의 영혼을 향해 다가갔다.
영혼술사로서 수많은 선한 이들의 영혼과 그 이상의 악한 영혼, 악령들을 보고, 다뤄왔지만.
지금 눈앞의 영혼만큼 추악하고, 손상된 영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날 미쳐버린 어머니의 눈 속에서 봤던 것처럼. 수천의 안구와 수만의 팔을 기워 붙인, 살과 피로 이루어진 끔찍한 괴물의 모습.
사람은 살아가며 많은 상처를 받는다. 가족의 상실과 같은 크나큰 비극이 아니라, 작은 다툼. 사소한 분노. 흘려듣는 비난과 같은 작은 상처도. 결국 마음에 새겨짐은 변함이 없다.
사람이 그것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위에 따듯한 눈처럼 시간이 덮여나가기 때문이다.
알드리치는 그것을 ‘영혼이 아문다.’라고 표현했다. 모든 감정과 기억은, 어떠한 형태로도 영혼에 흔적을 남기나. 사람의 영혼이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위에 또 다른 흔적이 쌓여. 흔적과 흔적을 잇는 시간이 그 상처를 덮어 나가기 때문이라고. 영혼술사로서 알드리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메아 마리아의 영혼은 지옥과도 같았다.
“단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끌어안고 가시려 했던 겁니까.”
성녀의 영혼은 끊임없이 세상을 맴돌지만, 그것이 전생이라 단정하긴 어려웠다. 성녀가 죽으면 그 영혼은 적합한 신자의 몸을 찾아가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영혼에 스며든다. 새로 성녀가 된 이는 성녀가 되기 이전 자신의 삶, 농부라든가, 빵집 둘째 딸과 같은 평범했던 삶은 모두 기억하지만 정작 전대 성녀로서의 삶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영원히 필멸의 삶을 맴돌아야 할 성녀를 위해 준비된 작은 축복 때문이다.
세상은 수백 년의 감정과 기억, 그 흔적들을 모두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힘든 곳이니까. 성녀가 시간의 무게에 눌려 쓰러지지 않게, 육신을 벗어나 잠시 자신의 품에 돌아왔을 때 그 기억을 덜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인도에서 벗어난 메아 마리아에게는 그런 축복이 닿지 않았으며. 그녀 자신도 품에 안긴 수많은 상처, 수많은 영혼들의 기억을 단 하나라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찰팍. 찰팍. 찰팍.
52년. 52년이다.
신전에서 벗어나,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귀족 소년이 흑마법사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쫓아오는 신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야 했고. 가까스로 얻은 빵 한 조각에서 자릿세를 떼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으며. 겨울 연못처럼 차가운 비에 젖은 거리에서 기며, 토하며, 죽어가며.
끝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이던 순간까지.
부드러웠던 손이 피와 악에 물들어갈수록 알드리치는 그날 석실에서 봤던 어머니의 눈을 떠올리며 속에 차오르는 감정을 곱씹었다.
무엇을 곱씹었을까. 분노? 공포? 그리움?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된 지금도, 그때 그가 씹어 삼켰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 시절 그가 바라던 어머니와의 재회가, 결코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을.
차라리 괴악한 마녀의 영혼이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팔을 휘두르며 악을 썼다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텐데.
눈앞의 영혼. 여전히 그날 석실에서 봤던 것처럼 안구와 팔을 기워 붙인 끔찍한 괴물의 형태를 한 영혼이지만, 조각나고 찢긴 그 괴물의 눈에는 그때와 같이 가득한 악의가 없었기 때문에. 품은 힘과 영혼을 모두 덜어내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틀려버린 성녀의 영혼만 남았기에.
알드리치는, 그녀를 위해 준비한 저주를 풀어내었다.
성녀의 영혼이 삶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신이 내정한 이치라 한다면.
그것을 끊어내는 저주 또한, 하늘이 정한 것이라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영원히 끊어낼 수 없는 것. 일견, 흑마법사의 눈에 그 형태가 저주와 흡사하나. 누구도 그 대가 없는 속박을 저주라 여기지 않으며, 안고 가는 것.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실.
“해주(解呪), 천륜(天倫).”
알드리치의 손끝에서 풀려난 영혼의 실. 그것이 모여들어 형태를 이루더니 작고 단단한 형상을 이루었다. 작고 얇아서 어린아이나 쥘법한 단검. 그마저도 칼날도 없는 빈 손잡이만 있는 것.
대상은, 그 실 끝에 닿은 자.
주문은, 52년간의 고뇌와 갈등. 그날의 기억에 닿는 순간마다 알드리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저주와 그리움. 상반된 기억 전부.
촉매는…..
[돌려줘]52년간. 영혼 주술을 타고난 악령이되, 그 재능 대신 흉악하게 몸을 불려 괴물 같은 힘만을 발휘한 악령 네리아. 그녀의 영혼이 타고난 재능을 모두 덜어내어 벼려낸 또 다른 천륜의 칼날.
소녀에서 괴물로. 드레스와 송곳니, 끔찍한 악령의 형태로 거듭난 네리아의 손에 두 혈육의 염원으로 탄생한 저주의 칼날이 들렸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끊어내기 위해, 사라지지 않는 천륜으로 빚어낸 칼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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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일그러진 소녀의 칼날이, 흉측한 성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돌려줘]푸욱.
[돌려줘]푹. 푸욱, 꾸우욱-
[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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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줘….]제 어미의 심장을 찌른 딸의 눈이자, 악령의 짐승과도 같은 흉측한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악령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오직 그 영혼이 뒤틀리던 순간, 그때의 감정과 기억 한 조각이 부풀어 만들어진 파편과도 같은 존재이니까.
이룰 수 없는 욕망. 눈앞의 진실이 아니라 상상 속으로 도피해버린, 어린아이 같은 모습.
칼에 매달리듯 허물어지는 소녀의 악령 앞에, 흉측한 어미의 영혼이 허물어졌다.
[돌려줘]‘사랑해’
[돌려줘]‘사랑해’
[돌…. 돌려…. 줘….]‘아….’
모래로 만든 탑이 무너지듯. 어긋난 욕망으로 부푼 뒤틀린 영혼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돌려받을 수 없음을 알지만, 그것을 입에 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소녀의 영혼도.
사랑하는 모두를 떠나보내고 난 마지막에, 그녀의 품에 안긴 사랑하는 이 위에 허물어지는 어머니의 영혼도.
그 어떤 이도 행복한 결말에 이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 오직 그 끝을 맺기 위해 평생을 달려온 영혼술사의 눈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담은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사랑….해….]사르르륵.
결국. 아무 일도 없이 성녀의 영혼이 사라지고.
파스슥-
그 앞에 허물어진 소녀의 악령도, 멍한 눈으로 그녀의 반쪽, 오라비와 눈을 맞추다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알드리치는 제 손으로 깨트린 영혼항아리. 그 파편을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흩뿌리며 무릎 꿇었다.
어머니도, 네리아도. 저주에 물든 타락한 영혼이니 그토록 바라는 안식에 들지도, 자신의 별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겠지만.
아아, 나의 어머니. 아아아. 나의 여동생아. 너무나도 불우하여,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이 결말을 행복이라고 빌어줄 수밖에 없는 나의 가족아.
“편히 쉬시길. 이제….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 편히…. 편히 잠들…길….”
그럼에도, 알드리치는 비극으로만 끝나야 했던 그들의 삶에, 작은 안식이라도 깃들기를 바랐다.
적어도, 마지막을 준비하는 알드리치 자신에게는. 그의 주검 앞에 슬픈 얼굴로 선 이들을 떠올릴 정도의 안식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역시. 말하지 않길 잘했어.”
푸슉.
일그러진 두 악령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짐과 동시에, 알드리치의 복부에 기다란 자상이 생기며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흉터. 52년 전 그날, 석실에서 아버지의 칼에 꿰뚫린 복부의 상처.
흑마법사는 영혼의 균열을 계약한 악령으로 메꿔 살아가는 존재다. 뒤틀린 방식이지만 염원을 이룬 네리아가 사라진 지금. 알드리치의 깨진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막을 수단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일 뿐이다. 두 영혼을 엮어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며, 반쪽이 사라진 지금 다시 원래 가야 할 곳으로. 그날 죽었어야 함에도, 편법으로 극복한 생명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다.
루실라는 감정이 격한 아이이니 많이 울겠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네리아가 생각나, 잘해주고 싶었는데.
이드라실. 그 엘프는 삶과 죽음이 뒤섞인 인간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배움이 빠른 만큼 걱정이 앞서는구나.
오트만. 맑은 물결처럼 청명한 영혼을 가진 친구. 이 나이에 친구를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에게나 물처럼 스며드는 재주가 있었지. 이 친구는 나이도 있으니, 잘하면 금방 다시 만날지도 몰라.
보르카. 그 늑대인간은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을까? 광명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도 영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면, 그들 가족의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볼 수 있을까?
노툼. 설마 내 영혼을 수집하는 것은 아니겠지.
교수. 아아, 평생 닿지 못하리라 여겼던. 텔드마이어 가의 이야기, 그 끝에 도달하게 해준 고마운 친구. 아마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겠지. 말이라도 했으면 제가 방법이라도 찾아봤을 거라고. 너무 능력이 출중한 나머지,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그냥 두고보지를 못하는 친구이니. 조금만 여유를 가져주면 좋으련만.
졸린 듯 감겨가는 눈꺼풀과 함께 왔던 길을 처음부터 다시 걸어오듯, 지나온 그의 삶이 뇌리에 스쳤다. 사람들이 주마등이라 말하는 그런 것이겠지.
후회하나? 억울한가? 두렵나? 아니면….즐거웠을까?
“흐, 흐흐흐흐흐…. 여전히, 이 나이를 먹고도 모르겠구나….”
알드리치는 의식의 수면에 번져가는 그의 피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상할 만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딱 하나 든 생각이 있다면.
“….그 친구가 혼자 만들어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일행과 이승에 남아있을 친구. 그의 말년을 같이한 친구를 위해, 회갈색 물약을 충분히 만들고 왔나, 하는 사소한 생각뿐이었다.
기억 속 늙어가는 그의 모습. 교수와 만난 순간부터 기억의 색이 유난히 짙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알드리치의 주름진 눈이 감겼다.
….반짝.
서로 얽힌 작은 빛 두 조각이 솜털처럼 날아와, 52년간 아물지 못하고 남아있던 그 상처 위에 내려앉는 것을 끝으로.
또 하나의 길었던 이야기의 끝이.
안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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