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2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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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
빗소리.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소리가 아니라, 따듯한 건물 안에서 창밖으로 떨어지는, 아늑하면서도 감상에 빠지게 하는 소리.
생각해보면 잠든 내게 가장 먼저 닿은 감각은 항상 소리였다. 어쩌면, 오래된 습관일지도 몰랐다.
감았던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천장뿐이지만, 소리는 전방위에서 감지되는 정보를 전달하니까. 항상 침대 밑에 칼과 샷건을 놔두고 자는 사람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그런 습관이었다.
두터운 벽 너머, 무너진 도시 위로 빗방울이 내려앉는 소리.
난로의 온기와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
규칙적인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
‘….또 살았군.’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 성층권 가까운 높이에서 자유낙하 하는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또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정신이 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블랙박스.
‘어이, 하이드. 어떻게 된 거냐.’
[….]‘하이드? 자냐?’
음…. 안타깝게도 몸과 마음의 힘 전부를 끌어 써서 그런지, 예비 의식인 하이드도 지금은 잠이 든 것 같고. 일단 이 녀석이 깨기 전까지는 나 혼자서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
‘보자…. 우선 몸. 손끝 하나 움직이는데도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군. 마지막에 분명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사지 멀쩡하게 착지한 것은 아닌 모양이야.’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옮기고, 붕대를 감아줬다. 피 냄새는 나는데 붕대는 깨끗하군. 주기적으로 관리해줬어.’
‘호화로운 침실에 벽난로, 석조 건물. 전형적인 귀족 방인데 비해…. 기품 없이 큼지막한 물병이 있군. 그것도 다섯 개씩이나. 거기다 저쪽 창가에 자리 잡은 물이 가득한 욕조까지. 적어도 나를 이곳에 옮기는데 오트만이 협조했다는 것은 확실하군.’
결론, 상황종료. 수도의 환란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쪽으로 끝났음. 일행 중 오트만은 다른 일행을 챙길 만큼 멀쩡한 상태. 도시에 피어오르는 연기로 보아 내가 정신을 잃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음. 그 외 미상. 현 시점에서 확인 불가.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드륵 드르륵-
마침 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와 카트 소리에 교수는 옳다구나, 하고 몸을 일으켰다. 바퀴 소리에 작게 진동하는 철제 트레이 소리라면…. 아마도 메이드. 그의 몸을 이렇게 깔끔하게 관리해준 사람들 중 하나라는 소리니까.
묵직한 나무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환자를 위한 물수건과 수프가 담긴 카트를 밀고 온 메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교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서, 성자님?”
내가 일어나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듯 깜짝 놀라는 메이드였지만, 숙련된 사용인답게 빠르게 평정을 되찾더니 그대로 뒷걸음질 쳐 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이번에는 다수의 무리가 복도를 마구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쿵!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눈으로 안 봐도 어떤 직종의 사람들이 오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는 소란.
“성자님니이이임!!!!”
메이드의 첫 한마디 덕분에 자신이 어떤 자격으로 이 좋은 병실에 머무르는지 알게 된 교수는, 연이어 들이닥친 갑옷 입은 무리에게 실로 성자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얘도 불렀었지.
“라투라. 로-하람. 오랜만입니다, 그레고리우스 형제.”
“이렇게 빨리 쾌차하시다니. 광명께서 그대를 보살피셨습니다, 교수 형제님!”
광명의 성기사단장 그레고리우스와, 그 휘하의 성기사들.
문밖에 가득한 황동 촛대와 성물들을 보아하니, 나는 이들의 손에 의해 주워진 듯하였다.
“읏차. 그럼, 그레고리우스 형제. 제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러는데, 그들에게 소식을 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음…. 성자님. 잠시,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정신이 든 나를 마주했을 때의 기쁨이 가라앉고, 목소리가 무거워진다.
진중하고 담담한. 그러나 감정적 동요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목소리.
불길한 이야기는, 항상 이러한 전조들과 함께 찾아왔다.
“혹시, 제 일행의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광명 성기사단. 잠시 물러나도록.”
“옛.”
진지해진 그레고리우스의 목소리에 조용히 교단의 예를 올린 성기사들이 물러나고. 벽난로 속에 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우자, 그레고리우스는 내 눈치를 살피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빛의 뜻이 닿으신 분이니….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받아들이시리라 믿습니다.”
.
.
.
.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
타닥. 타닥.
장작이 다 타들어가, 뭉근한 빛으로 가라앉은 난로의 온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내게, 최선을 다해 그가 목도한 사실을 이해시키려는 그레고리우스.
“….봐야겠어.”
“성자님.”
“내 눈으로 봐야겠어. 당장!”
벌컥!
긴 이야기가 끝나고, 그의 귀로 들어온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성자가 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그레고리우스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를 발견했을 당시의 상태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침대에 붙들어놓는 게 맞았지만,
“….라투라. 광명께서 그를 인도하셨으니, 감히 지상의 도구는 그분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음이라.”
그 대신, 그레고리우스는 교수가 떠나간 침대 옆에서 작게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그분께서 이겨내시길. 흔들림 없이, 빛의 앞으로 되돌아오시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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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달리는 동안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했던 내부는 부산스럽게 정리한 현장으로, 미처 정리하지 못한 파괴의 흔적으로.
귀족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은 절반은 멀쩡했으나 절반은 거인의 발에 밟힌 듯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끊어진 복도 너머로 비에 젖은 도시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부서지고, 조각나고, 타들어가 차가운 겨울비 속에서도 그을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도시.
그래. 전쟁이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이 꼭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이들의 범위에서만 일어난다는 법은 없었다.
“허억, 허억!”
힘을 다 소진한 몸은 겨우 몇 걸음 뛰는 것만으로도 피로를 호소했지만 터질 것 같은 폐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왜 몰랐을까.’
흑마법의 원리. 깨진 영혼과 악령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던 알드리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던 과거사를 털어내는 모습. 그 심정.
타락한 성녀. 마녀의 대적자. 평범한 인간인 그에게 있어, 반쯤 불멸자에 가까워진 불안정한 신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마지막이야.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야….’
왜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탑을 마주하고, 네리아가 든 영혼 항아리를 제 손으로 깨트리는 그의 모습에 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당장 내 앞가림하기 급해서? 언제나 그렇듯, 이번 사건의 끝에서는 다들 웃으면서, ‘와, 이번에도 죽을 뻔했다!’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끝날 거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서? 왜? 왜? 왜!!!!
쿠웅!
도시가 떠나가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가르쳐준 일행의 거처가 바로 맞은편 건물이었기에. 만약. 만약…. 정말로 누군가를 잃었다면, 영면에 든 그들의 앞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삼킨 비명은 벽을 후려치는 울분으로 세상에 터져 나왔다. 오러를 사용한 여파인지, 형편없는 유리몸으로 되돌아온 내 주먹이 담벼락과 함께 부서지며 하얀 붕대가 붉게 물들어갔다.
빗속에 따라붙는 메이드들을 거칠게 밀쳐내고, 일행이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은은한 불빛. 작게 소곤거리는 익숙한 목소리.
어설프게 만든 수레가 반쯤 숯이 되어 그 문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을 봤을 때는 이빨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제국을 여행하는 동안. 앞에서 내가 수레를 끌고 있으면, 항상 그 뒤에서 오트만과 알드리치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크흐읍!”
교수는 문고리 앞에 망설이는 손을 으스러져라 쥐며,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을 세차게 집어삼켰다.
진정하자. 동료를 떠나보낸 경험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내가 많을 것이다. 리더로서, 경험자로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삼키고, 가라앉히자. 나중에 때가 되면 풀어낼 시간이 있을 테니. 때가 되면…. 푸른 잔디가 자란 비석 앞에 마주할 시간이 온다면….
….후우우.
각오를 마친 교수는, 떨리는 손을 감추듯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조용한 속삭임이 맴돌던 실내에 차가운 겨울비와 함께 바람 소리가 섞여들었다.
“자네…. 몰골이 말이 아니구만.”
“오트만님. 저…. 그….”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가슴에서 퍼올린 말이 목을 타고, 울대를 맴돌며 숨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마법사이자 스승인 노인은 그런 내 모습을 이해한다는 듯 지그시 팔을 잡아주었다.
“그래. 꼴을 보아하니 저쪽 사람들이 얘기는 한 모양이로군. 많이 놀랐겠지. 놀랐을 게야….”
주름진 손이 문을 닫고, 비에 젖은 교수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 친구는…. 저 안쪽 끝방에 있네. 몸도 성치 않아 보이는데, 굳이 자네까지 지금 만나볼 필요는 없다네. 저 불가에 몸이라도 좀 녹이고 나서-”
“아닙니다. 지금 가보겠습니다.”
“….”
그 의연한 모습 덕분에 교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피로가 역력하지만, 손수 손님을 맞이하며 안내하는 모습. 원래 대로라면 그의 역할을 지친 노인이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집을, 잘 골라줬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품있지만 천박하지 않고. 너무 큰 저택도 아니지만 입구의 소란이 안까지 흘러들지 않을 정도의 규모는 있는 저택.
뚜벅. 뚜벅.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지쳐서 소파 위에 잠든 루실라를 지나, 벽에 기대어 내게 고개를 까딱이는 이드라실을 지나, 오트만이 말한 안쪽 방까지.
방안에 노툼이 있는지, 트롤 특유의 거친 기척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문 밖에 걸린 검은 로브는 알드리치의 것이 분명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득.
결국, 교수는 붙잡고 있던 문고리를 으스러뜨리고 말았다.
떨리는 손이 문을 밀고, 정화 의식이 있었는지 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영혼항아리를 두 손으로 쥔 노툼의 시선이 느껴지고, 무너질 듯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교수를 향해 두툼한 녹색 손이 다가왔다.
“그우우. 교수.”
“괜찮아 노툼. 익숙해.”
알드리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그 위에 손을 포개어 놓은. 당장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일어날 것처럼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상태로.
‘성자님의 일행 중, 흑마법사가…. 광명의 인도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레고리우스. 로하람밖에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말은, 이단인 흑마법사에게 최대한의 예를 차린 표현이겠지.
교수는, 잠든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가득한 주름진 손. 그러고 보니 알드리치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구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드리치. 이제 그만…. 편히. 편히…. 윽….”
결국, 쌓인 둑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터져 나와 말을 막았다. 따듯한 방 안에 있던 알드리치의 몸은, 겨울비를 맞고 온 차가운 내 손보다 따듯했으니까. 정말 살아있는 사람의 손을 잡은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스하고.
맥박도 뛰고.
“….음?”
나도 모르게 꽉 쥐니까, 아픈 것처럼 꼼지락거리기도 하고. 오래 잡고 있으니까 땀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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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어느새 흥건하게 떨어져내린 내 눈물에 젖은 알드리치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반쯤 몸을 일으킨 알드리치와 그 옆에 선 노툼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드리치?”
“어…. 음…. 이건, 대단히 색다른…. 음. 솔직히 말하겠네. 자고 일어났는데 덩치 큰 사내가 내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으니, 대단히 이상한 기분이군. 손 좀 놔주겠나? 왜 이러는 건지 설명도 해주고.”
“돌아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누가. 내가? 뭔 그런 재수 없는 농담을 하나. 안 그래도 죽을뻔한 사람한테.”
화악!
알드리치는 덮었던 이불을 확! 하고 걷더니, 입고 있던 비단 가운을 추스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몸으로 하루 만에 깨어나서는,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무슨…. 기가 막히는군 정말. 그런 면에서 오히려 더 자네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게…. 상황이….”
“뭐, 대충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것 같군. 교수 자네는 기이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니까. 실제로 원래대로라면, 자네 반응이 어울리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럼 원래 죽었던 알드리치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신없어 보이는데, 차 한잔 하지.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한 건 내 쪽이 아니라 자네 같구만.”
“예? 예…. 아, 예. 그럼요. 차…. 음….”
갑자기 확 뒤집힌 상황에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교수는 홀린 듯 알드리치 방의 티 테이블에 엉거주춤하게 자리 잡았다.
“어디 보자. 그래,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마녀의 별을 떨어트리고, 마침내 수도를 뒤덮은 저주가 완전히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였지….”
쪼르륵.
노툼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차를 우려내고 따르는 사이, 알드리치는 교수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차례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그의 죽음. 적어도 죽음을 마주했다 확신했던 순간. 그 이후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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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영혼술사로서 대단히 익숙한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생소할 수밖에 없는 그것.
나름 소양이 있어서 썩 유쾌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끔찍할 줄은 몰랐던 알드리치였다.
‘배가…. 아프군.’
어쩌면 그의 죽음의 형태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2년 전 상처를 통해 완성한 저주. 끝없는 환생의 굴레를 깨트리고, 영겁의 세월 동안 이어질 고뇌에서 어머니를 구해낸 대가. 그것이 그의 죽음이었으니까.
그 상처를 헤집는 고통에 알드리치는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토해냈다.
깨어나는 정신과 함께 몸의 감각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까딱이는 손가락과 발가락. 영계로 뛰어들면서 몸이 쓰러진 덕분에 생긴 타박상의 고통. 오랫동안 건물 파편에 쓰러져있어 욱신거리는 근육의 감각.
‘이런 말도 안 되는…. 내가, 살아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것밖에 없었다.
네리아가 사라진 지금. 깨진 영혼 사이로 생명력이 줄줄 새어 나와 죽었어야 할 알드리치는 멀쩡하게 살아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단순히 멀쩡한 게 아니었다. 마지막을 각오했던 만큼 모든 생명력을 다 쥐어 짜냈던 몸은 전보다 더 활기가 넘쳤고, 피부도 조금 팽팽해졌으며, 노안으로 좋지 않았던 시력도 젊었을 때처럼 괜찮아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영혼 사이에 커다란 절벽처럼 갈라져 있던 부분이 알 수 없는 힘으로 말끔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감각을 집중하자, 그 사이를 가득 채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신력이라니…. 어머니, 당신은 대체.”
불완전하지만, 불멸의 경계에 한 발을 걸쳤던 마녀.
제국을 움직이는 힘도, 마녀로서 수십 년간 쌓아왔던 저주의 힘도 잃었지만, 마리아는 이지를 잃고 악령에 가까워진 그때까지도 그 안에 품고 있던 의지 하나만큼은 놓지 않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감정.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끝없는 애정.
작지만 분명 신의 본질에 닿은 그것은, 흩어져가는 마리아의 영혼을 모아 그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적합한 수단에 스며들었다.
망자와 저주, 영혼을 다루는데 능통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길 만큼 선한 마음을 가졌고.
지금 이 순간, 영혼이 깨어져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일 자리를 가진 또 다른 영혼.
그녀가 아니어도 좋으니, 누군가 이 버려진 이들을 인도해주길 바라며
알드리치의 깨어진 영혼에, 갓 태어나 사라진 신의 마지막 조각이 깃든 것이다.
새어나간 생명력의 자리는, 작지만 한없이 신성에 가까운 마리아의 힘이 대신하고.
조각난 그 영혼의 테두리는, 원을 이루고 평범한 영혼이 됐지만 악령이었기에 승천할 수 없는 영혼. 그 갈라진 틈에 꼭 맞는 형태를 기억하는 네리아의 영혼이 부드러운 부름에 이끌려.
그렇게, 작은 신성을 품은 온전한 영혼으로.
“이런…. 세상에 어찌…. 설마. 이 모든 게 당신의 안배라면….”
신이시여. 맙소사.
알드리치는 그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버림받은 영혼들을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결국, 실패로 끝난 메아 마리아의 신격화. 그에 따라 다시 한번 버려진 버림받은 영혼들.
광명의 신자가 아니기에, 로 하람의 하늘이 아닌 다른 망자를 위한 곳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혼술사.
결국, 광명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을 위한 길이 마리아의 완전한 죽음 끝에 탄생한 것이다.
알드리치는 그의 영혼 안에서 작게 휘몰아치는 힘을 느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쪽도 썩 매정한 신은 못 되는 모양인가 보구려….”
알드리치의 눈에 비친 것은 주인을 잃고 무너지는 하늘과, 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은빛 섬광이었다.
환란의 소음마저 가르며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과 선연한 은빛 오러가 문자 그대로 하늘을 가르며, 새 하늘을 열어내었다.
마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소원은 그 죽음과 함께 광명에게도, 세상에게도 적합한 형태로 세상에 남았으며.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네리아의 염원, 선한 어머니를 돌려받는 것은 그의 영혼 안에 부드럽게 자리 잡은 마리아의 조각과 그 주위를 감싼 네리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퍼석.
파삭. 파스스스-
갈라진 별이 마지막 힘을 잃고 바스라지며. 마녀의 힘을 잃은 망자의 사체들이 바스라져 먼지가 되고. 깊게 갈라진 하늘이 그 먼지를 품으며.
쏴아아아-
마침내. 제국 수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타는 수도 위에 나리는 은혜와 같은 빗방울 사이로.
삶의 끝에 새 생명과 함께 사명을 부여받은 늙은 노인의 곁으로, 갈 곳 잃은 망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알드리치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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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록-
긴 이야기 끝에, 식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알드리치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일일세. 참,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일이지. 결국 어머니도 돌아섰다 한들, 광명의 성녀였던 것이야. 죽은 이가 별이 된다는 것은 광명 교단의 가르침. 조금만 눈을 돌리면 빛의 손길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건만…. 결국 동전의 앞면은 평생을 가도 뒷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없다는 게지.”
그래서, 광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에게 바통이 넘어온 것이리라.
교수는 그의 시선 밖에서 일어난 일들. 곁가지로 치기엔 너무나도 엄청난 규모의 일들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떨어지는 별과, 별을 베어 가르며 정말로 새 하늘을 열어낸 가이낙스.
마녀와 알드리치, 그리고 네리아까지. 셋만 남았던 텔드마이어 가의 최후.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확고한, 해피 엔딩.
그리고….
“그럼…. 당신이 이제 신이라는 겁니까?”
“아아. 그렇지.”
얼떨결에, 메아 마리아가 죽을 힘을 다해 만들어낸 신성, 그 일부를 영혼에 품게 된 알드리치.
“흘흘흘. 농담일세. 불완전한 신성, 그나마도 그것의 대부분을 이루던 타락한 부분을 덜어내고 남은 티끌과 같은 힘이니까.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정도.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신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될 테니 말이야.”
정말 상상도 못 한 전개에, 교수는 누가 머리를 한 대 세 개 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한 교수는, 이내 막 정신이 들어 혼란한 그의 머리에 ‘알드리치가 죽었다.’ 라는 인식을 심어준 그 썅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럼, 그레고리우스 그 새끼는 왜 그딴 식으로 말한 겁니까? 나 엿 먹이려고?”
“광명의 성기사로서, 이단의 신성 비슷한…. 것을 품은 나를 봤으니 그리 말하는 게 당연하지. 일단 광명이 버린 존재를 끌어모으는 것은 마녀와 일맥상통하니 ‘빛의 인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라고 표현하는 게 맞으니까.”
이런 염병할 일이 있나.
“그, 그럼. 울다 지쳐 잠든 것처럼 눈이 퉁퉁 부은 루실라는 뭡니까?”
“아, 루실라. 나도 저 아이가 성하도시에 얌전히 숨어 있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군. 저 연약한 몸으로 이 전쟁터 같은 곳을 마구 뛰어다녔다지 뭔가. 나도 믿기 힘들지만, 저 무너진 황성에서 환상처럼 나타난 초대 황제의 검, 라이오넬을 직접 매고 수도를 가로질러 새 주인을 찾아준 게 바로 저 아이라고 하네. 자네가 오기 전까지 온갖 사람한테 시달리다 지쳐서 잠이 든 게야.”
슬퍼서 대성통곡하다가 지쳐 잠든 줄 알았던 루실라는, 우리 일행 중 수도에 얽힌 저주에서 절대 활약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그 인물은 또 어디서 전설을 들고 뛰어다니다 지쳐 잠들었단다.
제발, 이건 예측을 넘어 상상력의 범주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라이오넬? 제국 역사책마다 삽화를 20장이 넘게 차지하는 건국제의 검? 에고소드보다도 급이 높아서 인정받지 못한 자는 들지도 못한다는 그걸, 운반책이라고는 해도 루실라가 들고 다녔다고?
알드리치만 해도 이해하기 버거웠는데, 루실라 얘기까지 듣고 나니 이젠 슬슬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노툼. 옆에서 차를 드럼통으로 마시는 이 녀석도 선조령이랑 퓨전해서 무슨 맹약자인가 거기에 한 다리 걸치고 있었지. 좋아. 좋다고. 나만 빼고 전부 전설적인 뭐시기에 한다리 걸치셨구만.
“그럼, 그레고리우스의 저 얌전한 태도는 뭡니까? 내가 용사일 때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인정 못 한다면서 칼춤을 추던 놈인데. 제국에서 덜컥 성자 이름표 땄다고 저렇게 고분고분해진 건 좀 이상하잖아요? 난 알드리치가, 그…. 죽어버려서, 일행을 잃은 날 생각해서 저렇게 얌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게, 잠에서 깨어나 눈에 들어온 모든 이상한 상황이 ‘알드리치가 죽었다’ 하나로 설명이 되고 있었거든.
내가 성기사단장의 이상한 태도를 입에 담자, 알드리치는 입에 담은 찻물을 힘겹게 넘기더니 킬킬거리며 내게 손가락질했다.
“아, 그 친구? 그럴 만하지. 암, 그럴 만하고말고. 자네 말대로, 그 친구는 눈으로 직접 본 것은 확고하게 믿는 모양이야.”
“….예?”
“이번엔 그 그레고리우스라는 성기사, 그 친구가 똑똑히 봤다고. 사명을 다한 끝에 순교한 참으로 성자 같은 자네 모습이지. 이건 설명보다 직접 자네 눈으로 보는 게 좋겠군. 이드라실이 그때 그 광경을 제법 볼만하게 스케치해 놨더라고. 그레고리우스 그 친구가 한 장 달라고 하길래, 나도 하나 해달라 해서 받아뒀지.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교수는 알드리치가 히죽거리며 건네준 종이를 보고, 이게 뭔지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다.
잘 그린 그림은 분명했다. 반쯤 불에 탄 신전이 있고, 그을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전 주위에 둘러앉아 열성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말을 탄 성기사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 보는 것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 신전의 뾰족한 첨탑 위에, 그림같이 꿰뚫린 남자가 있었다.
첨탑의 끝에 꿰뚫린 남자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와 그을음에 뒤덮인 신전 위로 흘러내리고. 마치 제 임무를 끝냈다는 듯, 그의 마지막 표정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맺혀있었다.
간결하면서도 극적인 장면을 잘 표현한 훌륭한 그림. 문제는 이게 그냥 그린 게 아니라 어떤 장면의 스케치라는 것이다. 보고, 그대로 옮긴 거.
“그러니까…. 저게, 나요?”
“흘흘흘흘. 자네지, 그럼. 그레고리우스 그 친구가 봤을 장면을 상상해보게. 죽도록 제국의 영토를 달려 수도 인근에 도착했는데, 광명의 성광을 담은 혜성이 하늘에서 떨어져 흉성과 충돌하고, 그 빛의 주인이 떨어진 곳에 가보니 저렇게, 신전 위에서 최후를 맞이한 순교자같은 자세로, 그림같은 미소와 함께 자네가 죽어있었어. 적어도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 나는 못봤지만 그걸 옆에서 본 이드라실 말에 따르면 ‘중년의 성기사가 아이처럼 울며 허겁지겁 신전을 기어올라 교수를 끌어내렸다.’ 라고 하더군. 대단한 광경이 아닌가? 신앙이 없던 사람도 당장 라투라!를 외칠만한 장면 같은데.”
“아이고, 로 하람 이 인간이, 아니, 이 신이….”
교수는 하필 그 자리에 그를 떨어뜨린 누군가의 인도에 머리를 싸매고 말았다. 당장 개박살이 난 수도의 상황과 그림 속 상황을 보면,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훤했으니까.
“….수도 상황에, 제가 얼마나 얽혀 있습니까?”
“대단히. 저주가 사라지고 제정신을 차린 민간인들이 패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당장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피투성이 상처투성이인데. 그렇게 대 혼란이 가중되려는 찰나, 신전 벽화 같은 장면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당장 달려가 매달리게 되지.”
“아이고, 맙소사….”
다들 전설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고 투덜거렸는데,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축하하네. 지금 제국의 국교를 바꾸자고 할 정도로 수도 내에 광명의 신도들이 폭증하고 있어. 그들 중 반 수 이상이 고위 귀족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지.”
로 하람. 이 얌생이 같은 신은, 결국 오랜 마음의 빚부터 실리까지 모조리 챙겨간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교수. 생각을 정리해야 할게 끝도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해야할 일 하나는 분명히 떠올랐다.
“….살아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알드리치.”
“흘흘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걸세. 감사받을 일은 아니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것보다 10배는 더 혼란스럽단 한들.
죽어있는 알드리치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상황이라,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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