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3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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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닥. 타닥.
쏴아아아.
“….”
꼼지락 꼼지락.
긁적 긁적.
겨울비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그 온기와 낮은 불빛 앞에 모인 사람들.
“좋습니다….. 총원 7, 열외 1. 열외내용, 은퇴-를 제외한…. 6명 전부 모였네요. 우선, 이 미쳐 돌아가는 제국 수도에서 이렇게 모두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박수 한번 쳐줍시다.”
“으음…. 그, 그렇지. 다들 이렇게 건강하게 다시 보니, 참 좋구만.”
“그렇….죠? 정말 천운이었다고 할 수밖에…. 하하, 하하하하….”
짝짝짝짝.
“그만.”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는 교수는 간단한 다과 거리와 함께 그의 앞에 모여든 일행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
.
.
.
.
도대체 이게 뭐 어떻게 된 거냐.
“정리를 좀…. 해봅시다. 서기, 앞으로.”
“예.”
교수의 말에, 둘러앉은 일행 중 이드라실이 중앙으로 나왔다.
사명감 넘치는 스토킹 하프엘프, 이드라실. 이 녀석은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을 기록하는 아주 훌륭한 습관이 있다.
“우선, 성하도시에서 흩어지기 전까지는 다들 같이 다녔지. 거기서 흩어진 게…. 언제였지?”
팔락.
“수도. 올 암페리아 진입 직후입니다. 오트만, 노툼, 알드리치로 이루어진 마법사 팀은 꽃의 황비 궁으로. 교수님은 황후 궁으로. 저는 루실라를 정령술로 성하도시에 숨긴 뒤 교수님의 뒤를 따라 성벽을 넘었으며….”
“거기는 넘기자고. 그 이후로 전투가 일어났고, 나는 1황자를 줘 팬 다음 황후궁에 갔다가, 황성으로. 마법사 팀은 꽃의 황비 궁에서 나오다가 근위기사들한테 걸려서 도주. 이드라실은 보나마나 내 뒤를 쫓아왔을 거고. 맞지?”
“예. 높은 성탑에서 지원사격 중이었습니다. 당시 교수님은 황성의 정문. 마법사 무리는 동문 부근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루실라는 홀몸으로 황성에 뛰어들어와-”
움찔-!
“….기적적으로, 교수님의 뒤를 따라 황성에 들어섰습니다.”
“그래…. 기적적으로 말이지. 정말 기적같이…. 어이, 이해불가 1호. 설명이 좀 필요한데?”
“어….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 확신? 사면 무조건 10년 내에 가격이 10배는 뛸 물건을 시장바닥에서 발견했을 때의, 그런 느낌?”
꾸우우욱-
루실라의 ‘나도 모르겠는데?’ 하는 표정에, 미간을 짚은 교수의 이마에 더욱 주름이 짙어졌다.
그래. 앞부분, 황성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진행이었다고. 그런데 저기서부터, 뭐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단 말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소설 같은, 그것도 저잣거리의 광대들이 우스꽝스럽게 과장한 설화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를 따라 들어온 이드라실의 눈앞에서 내가 환상처럼 사라지고.
그 안을 헤매던 중 무너지는 황성의 파편 속에서 루실라를 발견, 일단 눈앞의 지하 창고로 대피했는데, 그곳에 고대 제국의 무구가 즐비했으며.
그중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초대황제의 검이 있었고, 이 상인 아가씨가 검에 홀린 듯 그것을 등에 메고 황성에서 탈출, 그대로 검 주인을 찾겠다고 또 그 난리가 난 수도를 헤맸단다.
와. 이게 돈 주고 본 연극이었으면 팁으로 동전을 한주먹은 던져주겠는걸? 전력을 다해, 산탄처럼.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모를 정도인데, 이게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란다.
그 다음은 더 심했다.
“처음엔 그놈이 가이낙스인 것도 몰랐어?”
“예…. 그냥, 막 아른거리는 황금빛 기운이 ‘이놈이다! 이놈이야!’ 하고 막 소리치는 것 같길래, 일단 덥썩 붙잡아서 황제 한번 해볼 생각 없냐고….”
내가 제국의 힘에 잠식된 그놈의 오러를 박살 낸 뒤 가이낙스 그놈의 표정을 봤다. 평생을 암굴에 갇혀 생활하다 이제야 빛을 본 사람 같은 얼굴로, 어머니와 함께 해방의 기쁨을 나누던 녀석. 황제는커녕 제국 방향으로는 침도 안 뱉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는데. 또 어떻게 설득해서 기어이 칼을 쥐여줬단다.
“그 결과가 저거고?”
“예…. 아예 며칠 먹을 식량과 갈아입을 옷까지 가져왔다며, 제가 저 마차에 탈 때까지 마부석에서 숙식을 하시겠다고….”
겨울비가 내리는 창밖, 이 난리 통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으리으리한 장식이 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위에 두꺼운 망토를 입은 마부가 이쪽을 흘끔거리며 손을 비비고 있었다.
“엣-취잉!”
기침과 함께 콧물이 죽- 늘어지자, 재빨리 망토 자락으로 그것을 슥 닦아버리는 마부. 아는 얼굴이다.
“무토…. 라고 그랬나? 글렌 공작가? 공작님 몸종?”
“예. 저도 그냥 마부인 줄 알았는데…. 공작가 다음 대 후계자래요. 원래 글렌 공작가는 후계자를 저렇게 키운다고….”
어쩐지. 하늘에서 저주받은 망자가 비처럼 떨어지는 곳에, 히어로 유닛인 글렌 공작은 몰라도 옆에 종자 같은 게 있어서 이상하다 싶긴 했지. 나름 한가닥 하는 녀석이니 데려왔겠지.
확실히 대대로 제국 법관하는 집안이라 교육도 클라스가 다른 모습이지만. 글렌 가문 후계 교육이고 나발이고는 우리한테 안 중요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저렇게 명목상 몸종인 녀석을 시켜서 부담 팍팍 주면서 루실라를 초대한 사람이다.
“….가이낙스 보내고, 그 비밀통로에 이드라실이랑, 황후랑 같이 남았다고?”
“예….”
“뭐 얘기한 거 있어?”
“그…. 비밀통로는 황족을 위한 시설이라, 만약을 대비한 안전 가옥 같은 기능도 갖추고 있어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더라구요. 황후님이 제가 너무 지쳐 보인다고, 숨도 돌릴 겸 차 한잔 내리자고….”
“그리고?”
“그…. 가문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나, 나이, 용사님 일행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랑, 상인으로 살아왔던 이야기, 그, 그리고…. 텔드랏의 구혼자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어, 조금 많이…. 아주 많이….”
말을 조금씩 더듬던 루실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눈치가 빠른 루실라인 만큼 황후의 관심이 어떤 방향에 집중되어 있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가이낙스 앞에서 황제의 검, 그 상징적인 사자 장식을 박살 내고. 벼락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한 가이낙스 앞에서…. 뭐라고 했다고?”
“우와아악! 이, 이디! 말하지 마! 그땐 내가 제정신이-”
“[가세요, 자유인 가이낙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젠 당신의 운명을 개척하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야아아. 그리고. 그에 대한 가이낙스의 대답은?”
“[상인이라…. 그럼, 값을 치러야겠지.]”
“캬아아아~ 죽인다. 어이, 루실라 아에드란 비 전하.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예? 서로 과거의 못난 꼴 봐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쌤쌤으로 치자구요.”
“으와아아아#^^*@(@#!!! 하, 하지 마세요!”
“어디 보자. 수도에 신전도 거의 멀쩡한 곳이 없던데. 주례는 내가 서줘야 하나? 나름 성자라 얼추 될 것 같기도 하고.”
“으으으으!!!”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나를 한번 쳐다봤다가, 창밖의 마차를 한번 쳐다봤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루실라.
경사 났네, 경사 났어. 텔드랏 구혼녀 설화에 커다란 한 획을 그으셨구만.
기실 텔드랏에서 온 여인의 이야기는 위기에 빠지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남자를 그녀들의 손으로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였다.
위기. 잘 먹고 잘살던 제국 수도가 폭삭 무너져 저주의 온상이 되고.
과거 제국의 망령에 짓눌려 도피하려던 가이낙스에게, 과거 따위 상관하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새 황제의 손을 이끌어 검을 들게 한 여인이라. 그 결과, 가이낙스는 흉성을 베고 새 하늘을 열었지.
“….좋아. 이해불가 1호는, 스스로 번영하는 제국의 힘이 새 황제를 위한 며느릿감을 알아보고, 그 역할을 다 하게 한 것으로 이해하자고.”
“제, 제발! 그, 그렇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왜. 싫어?”
“….”
가이낙스의 반응은 빼박이고, 당장 루실라 본인도 보아하니 썩 싫지는 않은 모양.
하긴. 몸 좋고 덩치 좋고 남자답게 생긴 남자의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을 봤는데, 그 남자가 내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더니 칼 한 자루로 별을 베어내는 개쩌는 모습을 봤으면 나라도 심장에 직격이지.
나중에 텔드랏 쪽에 들를 일 있으면 아에드란 가주한테 한턱 내라고 해야겠다.
좋아. 루실라는 이쯤하고.
“다음. 이해불가 2호. 나랑 말 400마리 가지고 죽네 사네 하던 숲트롤이 알고 봤더니 고대 제국의 맹약자였다?? 거기, 노툼 양. 이 기상천외한 연극 제목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우우.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닌 게 아니니까 이러지.”
가만 생각하면 제국 곳곳에 주술 흔적이 많이 남아있긴 했다.
대마법과 고대 주술로 강화되어 오러도 잘 안 박히던 올 암페리아의 성벽.
핏물 떨어지는 검을 들고는 황제 곁으로 가겠다고 미쳐 날뛰는 기사들을 막아서고, 황가의 인장이 있는 사람한테는 제 손으로 다리도 만들어주던 어마무시한 크기의 주술 골렘들.
환상처럼 황제의 손짓 한 번에 장소가 휙휙 바뀌던 황성. 심지어 환상도 아니고, 필요한 순간에 루실라에게 라이오넬을 건네줄 정도의 실용성까지.
마법사인 내가 마법의 기운을 못 느꼈으니 그것도 황제의 힘과 주술이 섞인 것이라 봐도 되겠지.
몇백 년 묵은 제국 시설 여기저기에 발자취가 아주 진하게 남은 게 아주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거 지금 옆에 계실 거 아냐. 선조님. 그냥 좀 물어 봐주라.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아직 뭐가 덜 끝났는지 노툼의 이마에서는 지금도 희미하게 주술 각인이 빛나고 있었고, 노툼은 그게 신경 쓰이는지 계속 이마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우우움…. 이 나라 만들 때, 싸움 많았다. 찔레눈동자, 황제랑 아는 사이. 황제가 자식처럼 아끼던 다리 여섯 개 달린 말 받고 친구 됐다. 선천적으로 잘 걷지 못하던 아그탁은 그 말을 고아 먹고 말처럼 빨리 달리게 됐고, 그게 고마워서 친구인 황제 편에서 싸웠다. 그게 다다.”
트롤은 무슨 말 본위제 같은 문화가 있나. 여기도 말이냐.
“그리고, 그게 너한테 들러붙은 선조령 셋 중 하나란 말이지? 그래서 너한테 강신한 그 선조령이 제국의 골렘과 기타 등등 시설을 마구 휘두를 수 있었고?”
“그우우.”
….만약 그렇다 치면, 노툼이 없었다면 제국과 마녀 퀘스트의 해결이 상당히 난해해진다는 소린데. 로드릭 숲의 말하는 트롤에 지나지 않던 노툼을 발견해서 여기까지 끌고 와야만 정석 클리어 루트가 된다고? 이건 너무 억지 아닌가?
이건 난이도를 떠나서 불합리의 영역이다. 억지라고. 노툼이 필수라기보단, 녀석 덕분에 자연스럽게 어떤 과정을 건너뛰었다고 보는 게 좋겠지.
‘노툼에게 처음부터 선조령이 붙어있던 것은 아니니까. 노툼은 선조령들에게 선택된 거고. 만약 노툼이 없이, 제국에 오는 사이 주술 캐릭터가 붙을 껀덕지가 있다면….’
주술. 이종족. 원시적인 느낌. 제국 퀘스트….
따악!
“하우누만! 제국 퀘스트 경로에 하우누만이 낑겨있는 게 그래서였구나!”
황제의 힘이 날 끌어들였다면, 그것의 본격적인 시작은 역시 그 편지 드래곤….에 의한 기구 추락이라고 보는 게 좋겠지. 추락한 기구가 떨어진 자리는 하우누만. 제국령에 속해있지만, 제국에 완전히 속하지 않은 이종족, 초원부족이 사는 곳.
대전 상대중에 대놓고 주술을 사용하는 페어도 있었다. 주술 방패로 자기 부족 생명력 연동해서 깔짝거리던 놈. 원시적인 문양으로 치장한 초원부족에, 그린스킨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하우누만.
정석 루트였다면, 여기서 주술 관련 NPC를 영입하고, 그 녀석의 몸에 고대 제국과 관련된 선조령이 깃들어 맹약을 위해 모여드는 게 수순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린스킨 역사상 최고의 아웃풋이라 자신 있게 공헌할 수 있는 노툼 덕분에 미리 선조령을 확보, 하우누만에서 무지성 깽판을 치고 나올 수 있었던 거고.
‘아마 경기 끝나고 만난 그 방패 쓰던 놈 부족, 내가 로드릭으로 보낸 그쪽에서 한 명 영입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쪽 지도자 딸이 나를 보는 눈빛이 좀 데려가 달라는 것 같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것으로 고민 하나 더 해결. 역시 믿고 쓰는 노툼 덕분에 부자연스럽게 돌아왔던 하우누만 행이 논리적으로 연결됐군.
“마지막으로. 이해불가 3호. 알드리치….는 아까 들어와서 다 얘기했으니, 넘어갑시다. 오트만은 별일 없죠?”
“으음…. 뭔가 소외된 기분이네만. 없네. 마녀의 탑을 억제하고, 맹약자들과 함께 저주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는 수도에 난 불을 끄기 위해 애썼지. 비가 내리기 시작한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쉴 수 있게 됐고 말이야.”
“좋습니다…. 그럼, 제가 없던 곳에서 일어난 일은 대부분 들었네요.”
정리.
루실라 – 진짜 전설이 된 텔드랏의 구혼자. 신행 끝에 절망한 제국의 1황자를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새 운명을 열어낸 검을 전달함. 넘겨준 칼 대신 새로 지어질 신축 황궁의 대문 열쇠를 받을 것으로 추정.
노툼 – 고대 제국의 맹약자. 당장 선조령이 동의하면 올 암페리아의 성벽에 깃든 주술로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5미터부터 10미터까지 다종 다양한 주술골렘으로 수도 내에서 깽판 가능.
알드리치 – 신.
따악!
“악! 왜 때립니까! 신이 사람 팬다!”
“아 글쎄, 신은 아니라니까!”
“마ㄴ…. 크흠! 성녀였던 분이 가지고 계시던, 저주랑 기타 등등 다 떼어내고 순수하게 성녀의 영혼이 빚어낸 신위를 이어받았다면서요! 애초에 신의 조각이었던 영혼이 빚어낸 그게 신의 힘이 아니면 뭡니까?”
“그게 그런 대단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잖나! 그건 그냥…. 바닥 난 내 생명력을 채우고, 깨진 그릇을 다시 이어 붙일 정도였어. 온전히 사람 하나가 가진 힘. 고작 그 정도지. 힘으로만 본다면 나는 전보다 형편없이 약해졌네. 영혼의 틈에서 생명력을 거래할 악령이 없으니 간단한 흑마법조차 쓸 수 없고. 이젠 같은 나이대의 늙은이들보다 조금 건강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 게야. 지금만 해도, 어머니가…. 수도에 몰고 온 덕에 내 주위를 배회하는 영혼. 그들을 하나씩 돌려보내기에도 벅찬 수준이지.”
알드리치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부드럽게 쓸어보였다. 어둑한 난롯불 사이로 그의 손끝에 희미한 빛이 어리는 게 보였다. 빛이라기보다, 파동의 일렁거림에 가까운 무색의 빛.
어색해진 알드리치의 얼굴에, 교수는 조용히 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그들을 위해 살아가실 겁니까?”
“….도움이 되지 않아서 떠난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네. 미안허이. 난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멍한 얼굴로 고통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눈에서, 얼굴에서 52년간 내 안을 채우던 네리아의 얼굴이. 마녀로 살아가던 어머니의 고통이 보여. 나는…. 어머니께 이어받은 이 힘으로, 그들의 안식을 돕고 싶네. 남은 여생을 그것으로 보낼까 해. 면목 없지만, 미안한 소리를 하게 됐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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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 말에 담긴 무게를 되새기는 일행들 사이로 침묵이 감돌았다.
“….잘됐네, 뭐. 해피엔딩 아닙니까.”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 해야 할 말을 하는 게 또 리더의 역할 아니겠어.
미안함 가득한 눈으로 일행을 둘러보던 알드리치에게, 교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알드리치. 결국, 평생 안고 살아온 마음의 응어리를 다 털어내셨네요.”
“도움만 받다 이렇게 가게 되어 염치가 없네…. 고마워, 정말로 고맙네, 모두들. 흑마법사로서 신도 기적도 믿지 않으니, 내 모든 감사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자네들에게 돌리겠어….”
짝.
짝짝짝짝.
어둑한 방안에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의 그것과는 다른, 말로 다 못할 감정을 행동에 담아 표현하는 축하와 격려의 박수.
“고생했다, 스승. 잘 배웠다. 덕분에 영혼을 배웠고, 조상 귀신도 만날 수 있었다.”
“아냐, 노툼 너는 상상도 못 할 재능을 지녔으니, 내가 아니어도 분명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을 게야.”
“….귀신 늙은이를 만난 시간보다 만나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몇 배는 길었다. 그 세월 동안 내가 손에 잡고 휘두른 것이라곤 바위나 나무 몽둥이가 전부였으니, 귀신 늙은이는 틀렸다. 배웠다. 깨달았고, 많이 달라졌다. 모두 귀신 늙은이를 만난 뒤에 생긴 일이다. 고맙다.”
노툼의 두툼한 손이 알드리치의 어깨를 감싸고, 녹색 얼굴에 송곳니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가 맺혔다.
“축하하네, 알드리치. 사실 중수(重水)같이 단단하고, 무게 있는 자네의 마나를 볼 때마다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여서 흐르지 못하는 그 물이 언제 자신을 잃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했지. 이제 물이 다시 흘러갈 길을 찾았으니 당연히 축하할 일이겠지.”
“오트만. 자네는….”
“허허허. 말 안 해도 다 안다네. 나야 뭐.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닌가? 운이 좋으면 언젠가 나도 내 바다에 닿을 수 있겠지. 그때까진 그냥 흘러가 볼 생각이야. 작은 계곡의 투명한 물줄기도 좋지만, 기왕이면 세찬 강줄기에 올라타는 게 강바닥에 흔적이라도 하나 남기기엔 좋겠지.”
주름진 두 팔이 서로를 부둥켜안다가, 서로의 로브 안에 든 유리병이 만나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두 늙은이 모두 체통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드리치님….”
“루실라. 네겐 미안한 게 많구나. 언제나 너 자신으로 봐줬어야 하건만. 항상 나는 네 그림자 속에서 네리아의 잃어버린 삶을 봐 왔으니. 네리아도 저렇게 밝은 아이였지. 네리아도 저렇게 활기찬 아이였지. 살아있었다면, 저런 밝고 활기찬 아가씨로 자랐을 텐데, 하고 말이다. 네가 이렇게나 밝게 빛나거늘, 제대로 마주해 주지도 못했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알드리치님이 항상 저를 살뜰하게 챙겨주신 게 없는 일이 되지는 않잖아요. 저는 조부님이 안 계셔서,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 걸요. 아이 참,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난담. 음! 아아! 흠! 축…하해요, 알드리치님!”
눈물을 감추려는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알드리치의 품에 안기는 루실라.
“엘프는 이별에 그리 연을 두지 않습니다. 결국 흙으로 되돌아가, 어머니 나무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니. 하지만…. 보르카에, 당신까지. 인간의 이별을 보고 배운 게 있다면. 사람들은 헤어짐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진 다음을 받아들이려 슬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재미있는 의견이로군.”
“루실라가 우는 이유는 앞으로의 여행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지요. 노툼이 감사를 전한 것은 앞으로 감사를 표할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 그 마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은 짧은 삶을 사는 만큼,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저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들만큼 공감할 방법은 모르지만….”
팔락. 팔락.
“제게 남은 당신의 순간들은. 소중히 간직하며 곱씹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엘프의 전송이라…. 귀한 선물을 받았구만. 자네도, 무사히 숲으로 돌아가길 빌겠네, 이드라실.”
무뚝뚝한 얼굴로 손때 가득한 수첩을 펼쳐 보이며 알드리치에 대한 기록. 그의 당황한 얼굴, 교수의 멱살을 잡는 손, 오트만과 진정제를 나누며 히죽이는 모습을 펼쳐 보이는 이드라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알드리치는 주름진 눈꺼풀 사이에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차례가 돌아. 그 모든 광경을 지긋이 지켜보고 있던 교수가 알드리치의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모든 파티가 겪게 되는 순간이죠. 파티원이 곁을 떠나가는 것.”
“자네에겐, 내 몇 번을 사과해도-”
“그 방식이 참 다양하기도 합니다. 사람인 만큼, 부대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거슬리는 부분이 도드라지고. 불화가 쌓이고 쌓여 깨진 그릇처럼 흩어지는 사람들도 있고. 가장 높은 확률을 자랑하는, 불의의 사고로 차가운 무덤만 남긴 채 살아남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지는 경우도 있고. 지금 우리처럼, 여행 끝에 목표를 이루고. 새 삶을 찾아 축복 속에 떠나가는. 아주 희귀하지만, 가장 보기 좋은 경우도 있고.”
“교수 이 사람아….”
“저는 우리 파티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원 일곱. 열외 둘. 열외내용, 원하는 것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찾아 은퇴. 이 숫자가 일곱을 채우게 되는 순간이 우리 모두의 해피엔딩이 아니겠습니까.”
교수의 굳은살투성이 손이 알드리치의 주름진 손을 마주 잡았다.
“가끔 신전에 들러서 연락하십쇼. 이교도라고 뻗대는 놈 있으면 ‘이 통신을 연락하는 사제는 성자님과 직통으로 연결된다네.’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됩니다. 맨발로 굴러 나올 사제가 한둘이 아닐걸요. 제가 이제 그 정도는 됩니다.”
“후흐흐흐, 정말, 끝까지 자네답구만. 자네다워….”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알드리치는 일행 모두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 남은 평생에 걸쳐 이어질 감사의 첫마디를 이 자리에 두고 가겠네. 잊지 못할 경험과 잊지 못할 추억. 생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친구들이 되어주어 정말로 감사하네. 덕분에, 이뤄지지 않을 거라 여기던 염원을 이루고, 이렇게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나게 되었네. 이젠, 세상을 주유하며. 이들처럼 길잃은 이를 인도하는 자의 삶을 살고자 하니….”
뚝. 뚝….
“염치 불고하고, 교수 용사파티에서 내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네…..”
바닥에 닿을 듯 숙인 노인의 마른 눈에서 끝내 눈물이 떨어지고.
그의 앞날을 격려하듯, 남은 다섯 일행의 열렬한 박수가 이어졌다.
짝짝짝짝-
밖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몸종이자 공작가 후계자, 무토도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된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히며 박수를 치다, 퍼뜩 생각이 난 듯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저…. 겨울비에 얼어 붙어가는 제 몸이 따스해질 정도의 분위기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성자님 일행 전부 앞으로 공작님과 가이낙스님의 초대가 와 있습니다. 축하를 넘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대관식에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한다고. 그…. 지금 가시면 앞에서 지켜보던 제가 공작님에게 맞아 죽습니다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크흥! 으으음. 늙어서 추태를…. 그래, 대관식. 그게 있었지. 으음….”
“어…. 할 거 다 하긴 했는데. 보고 가시죠? 그래도 일행의 어른이신데. 루실라 가는 것 보고, 세트로 송별회하고 나가시면 되겠네.”
“대관식이라. 아, 그런 의미였나. 하긴. 시국이 혼란스러우면 황가부터 안정시켜 귀족의 동요를 막는 법이지. 그래, 루실라가, 으으음…. 이건 보고 가야겠군.”
“….에? 어? 어??”
“저 친구도 오래 기다렸는데 말 나온 김에 출발합시다. 가이낙스 그 친구랑 할 얘기도 있고. 더 기다렸다간 진짜 저 마부 역할 하는 친구도 얼어 죽겠고.”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성자님! 마차는 저 말고 다른 곳에 몇 개 더 준비해 뒀으니, 모자라면 그쪽으로 타고 오시죠. 아, 아에드란 황…. 영애님은 여기 타셔야 합니다. 따로 예를 차릴 필요가 있는지라.”
눈치가 빠른 건지, 이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던 건지.
입담 좋은 몸종…. 비슷한 거, 무토 덕분에 무겁고 먹먹했던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어, 어어어, 나…. 드레스도 다 찢어졌고, 지금 입은 옷은 상인들이나 입는 옷에 아직 얼굴도, 준비가아아-”
“지금 수도에 몰려있는 생존자들이 다 사용인 도시의 생존자 아닙니까. 전문가는 넘치게 준비되어있으니 몸만 오시면 됩니다. 자자, 타시죠. 얼른!”
능청스러운 듯하면서도 상황을 주도하는 말투부터 손짓까지. 어어 하는 사이 루실라를 태운 마차가 반쯤 치워진 수도의 거리로 나아가고, 그걸 뒤에서 보고 있던 일행의 눈에도 장난스러운 웃음이 맺혔다.
“저희도 가죠. 오래 기다렸다고들 하니.”
“그래…. 가볼까.”
철썩!
마부의 고삐가 말 잔등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일행을 탄 마차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알드리치는, 일행과 함께하는 마지막 행사가 될 이 길을 충분히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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