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4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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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 다각, 덜컥! 다각 덜그럭! 다각 다각-
열심히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마차와, 송구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뒤를 흘끔거리는 마부.
가만히 앉아있노라니, 이것저것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제국 수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감탄한 게 길 잘 닦아 놓은 것이었지, 아마.’
100년은 족히 간다는 제국의 길은 다 깨지고 녹아 황가의 최고급 마차로도 그 굴곡을 어찌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림 같은 저택은 검은 잿더미가 되어 살 타는 냄새와 함께 허공에 흩어지고. 그와 함께 명성이 자자한 제국의 고위 귀족들도 잔뜩 죽어 나갔으니 당분간 이 혼란을 수습하긴 어렵겠지. 이렇게 둘러보면 세상이 죄다 멸망한 것 같지만, 결국 수도에 국한된 재앙이었으니까. 당장 수도 밖에선 하룻밤 사이에 가주와 식솔들을 잃은 귀족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황제의 부덕함을 성토하고 나설 것이 뻔했다.
‘전처럼 제국의 힘이 남아있었다면 혼란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진정되고 얼마 안 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들 잊어버리겠지만, 지금은 그게 없으니까.’
제국은 긴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른 혼란으로 이어질, 암흑기에 가까운 혼란이.
똑똑똑.
“성자님.”
“….”
똑똑똑똑똑똑똑
“성자님. 저 그레고리우스입니다. 성자님?”
“….”
교수는 아까부터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심각하고 고뇌에 찬 얼굴을 하며 자신만의 상념으로 파고들었다. 아, 안 들린다. 제국의 혼란과 그 암울한 미래에 심취하여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안 들려 안 들려 안 들려-
내가 대답이 없자, 인기척이 마차 앞으로 멀어져가는 것이 들렸다.
‘휴우. 끈질긴 자식.’
일행과 같이 있던 저택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저택 앞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헐레벌떡 달려와 마차 옆에 따라붙던 그레고리우스.
지치지도 않고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부르던 그레고리우스가 사라지자, 마침내 포기한 줄 알고 한시름 놓은 교수는.
“거기, 마부. 몸이 좋지 않은 성자님께서 잠이 드신 모양이니, 지금부터는 우리가 그분을 모시겠네.”
“하, 하지만 글렌 공작님께서 반드시 직접 모셔오라고 제게 말씀을….”
“어허. 성직자에겐 성직자의 탈것이 있는 법이야. 빛의 도우심으로 성위제용 가마 한 대가 저 끔찍한 화마 속에서 살아남았더군. 성자님께서도 광명의 예를 따르는 것이 더 편하실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보게.”
에라이 썅.
벌컥! 우당탕탕!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그레고리우스와 마부의 대화에 부서질 듯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미처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형제.”
성위제용 가마라면 그거다. 신도들 사이로 고위 성직자가 지나가며 그들과 악수도 나누고, 인사도 하는 교단 행사에서 걷기도 힘든 늙은 성직자들을 위해 만든 가마.
제법 높이가 있어 두텁게 몰려든 인파 속에서도 가마에 탄 사람을 훤히 볼 수 있는 늙고 병든 성직자 전용 퍼레이드 카.
모른 척하다 거기에 태워지느니 내 발로 나가는 게 훨씬 낫지.
“성자님! 무사하셨군요!”
“아니 뭐, 몇 시간 전에 잘만 움직이는 거 봤으면서 뭘….”
“그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상심으로 신열(神熱)이라도 오른 줄 알았지 뭡니까! 하긴, 그렇게 등을 맞대고 고난을 헤쳐온, 형제 같은 일행분이 로 하람의 은총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로 가버리셨으니. 이 그레고리우스, 감히 성자님의 상심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신열이라니. 무슨 무당도 아니고.
알드리치의 이야기를 꺼낼 때 그레고리우스가 그렇게나 머뭇거리던 이유를 알게 된 교수는 그가 진짜로 가져온 커다란 가마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놈은 글러 먹었어.’
광명의 성기사단장, 그레고리우스.
용사 회의 때 나 뮤트 냄새 난다고 내 팔 자른 놈.
대주교가 교단의 용사라고 공인한 다음에도 제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날 믿을 수 없다며 으르렁거린 로 하람의 골수 광신도.
그리고, 십자가에 박힌 순교자처럼 화마에 휩싸인 신전 첨탑에 꿰여있던 나와 그 앞에 무릎 꿇은 신도들을 제 눈으로 보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무례를 용서해달라 빌며 직접 나를 끌어내린 장본인.
“….그레고리우스. 꼭 여기서 마차를 세웠어야만 합니까. 여기서?”
“예! 갈 곳 잃은 신도들에게 광명의 의지가 이곳에 닿았음을, 수렁에 빠진 이에게 아직 붙잡아 의지할 것이 남아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부?”
“그…. 이 앞부터는 길이 마차가 지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내리시는 게 맞기는 합니다만….”
“핫핫핫핫! 물론, 그런 부차적인 이유도 있지만 말입니다! 자, 가시지요, 성자님! 신도들이 성자님의 광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에 멈춰선 루실라의 마차와, 무토라는 녀석의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건물의 잔해를 넘어가는 루실라.
내 마차 뒤에 차례로 멈춰서는 일행의 마차들.
그리고.
“라투라, 로-하람!”
“라투라!!!!!! 로- 하람!!!!”
“라투라!!!!!! 로- 하람!!!!”
“라투라!!!!!! 로- 하람!!!!”
“광명이 있으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
“어흐흐흑! 라투라…. 라투라!”
“아아, 광명이시여. 인도하는 빛이여….”
“로 하람께서 그분의 도구 된 자의 손을 빌려, 붉은 별을 강타하는 혜성으로 강림하셨도다!”
“라투라! 라투라!”
“어둠이 깊다 하여 눈을 감지 말지어다! 길은 언제나 있으며, 우리 위에 그 길을 비추는 빛이 있는 한! 기도하고, 나아가며! 포기하지 말지어다! 우리의 삶이 곧 누군가의 등불이 될지니!”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뾰족한 첨탑을 가진 광명의 신전과 그 앞을 가득 메운…. 신도들.
마차가 멈춰선 곳은, 하필이면 아직도 내가 박혀있던 곳의 핏자국이 선연한 신전 앞이었다.
내 피는 밀도가 높아서 그런가, 비가 내려도 잘 지워지지 않은 듯했다.
“허허허허. 성자님.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닙니까? 대주교님의 새 정책처럼, 정말 지위의 높낮음도, 출신이나 기타 속세의 여건에 상관없이 다들 빛을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아, 예….”
글….쎄. 눈앞에 암살자가 뚝 떨어져도 ‘방문하신 용건은.’ 같은 말과 함께 방명록을 집어드는 엄격한 집사부터 기품이란 이런 것이다,를 체화한 듯한 수염 성성한 중년 귀족까지.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 열렬하게 눈물을 흘리며 [라투라!!!!] 를 부르짖는 모습은, 어…. 인상이 깊긴 하지만, 좀 무서운 것 같은데.
“팔라우스 형제님이 교리를 전파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감명이 깊지요. 대단한 재주입니다.”
“확실히 대단한…. 재능이군요.”
장담하는데, 저거 이쪽 방면의 전문 인력이다. 어디 산골 촌동네에 3일만 박아두면 거기 동네 사람 전부 다 광명의 광신도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저 열렬한 인파를 보고 있자니 나를 꼭 모셔와야 한다는 그 저의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민심 안정이라…. 확실히, 아무런 기반이 없을 때는 종교만 한 것도 없지.”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수도에 있던 민간인들의 입장에서는 ‘어이쿠, 머리가 어지러운데. 으음…’ 하고 휘청하며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지옥의 한 가운데로 뚝 떨어진 상황이다.
악몽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 악몽이 너무 생생하고 뭔 짓을 해도 깨지 않는 상황. 사람은 물에 빠지면 뭐라도 단단한 것을 붙잡기 마련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수도에서 의지할 만큼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은 딱 두 개밖에 없지 뭐.
이 상황을 해결한 맹약자 및 신황제.
지금도 로 하람이 특별히 신경을 쓴 듯, 먹구름 사이로 새어든 한줄기 서광에 은은하게 빛나는 광명의 신전.
당장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의 향방에 대해 공표하기 전까지, 사람들을 어르고 달랠 수단으로 종교를 택한 것이다.
“….어쩐지 신전 앞에 딱 세웠더라니.”
글렌 공작. 제국 학자집단 ‘이성의 전당’의 수장.
마법사 개인의 ‘이해’를 논파하여 그들에게 세계의 규칙을 주입하고, 섭리에서 벗어난 ‘깨달음’ 자체를 박살 내 마법을 부숴 버리는 지성인 집단의 수장이란 말은 3월드 전체를 통틀어 최강의 아가리 파이터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언변이 뛰어난 만큼, 정치력도 발군이겠지.
아마 길도 치우고자 했으면 못 치웠을 일도 없었을 거다. 날 여기에 내리게 하려고 일부러 안 치웠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른 일행들도 각자 마부의 안내를 따라 인파가 적은 골목을 통해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멀뚱멀뚱 쳐다보며 모른 척하는 내 마부랑은 달리 말이다.
“하아아아. 이거 원. 알고도 속아줘야 하니….”
나야 뭐 건물 지붕 타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당장 기도라도 안 하면 비명을 지를 듯 절박한 얼굴로 사제 앞에 무릎 꿇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말 한마디 해주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레고리우스의 달라붙을 듯 끈적한 눈빛을 털어내듯 치를 떤 교수는, 발 디딜 틈 없이 모인 인파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좀 지나갑시다~”
“윽, 누가 신성한 미사 시간에…. 흐어억!”
“예, 예. 지나갑니다, 지나가요~”
“어우, 이봐요! 지금 사제님이 말씀하시는 게…. 히이익!”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교수가 비집고 지나갈 때마다, 종교적 몰아를 방해하는 누군가를 날카롭게 돌아보다, 이내 넋을 놓아버리는 사람들.
“교수님이다.”
“성자님이셔요.”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이다. 분명, 저 첨탑에 내걸린 그분의 숭고한 성체를! 피와 희생의 증거를 보았소!”
“돌아가셨는데…. 돌아오신 게로군!”
“신성한 임무를 마치고 광명의 품에 안기셨던 그분이 돌아오셨다!”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셨다! 우리를 이끌기 위해! 암운에 빠진 제국을 비추기 위해!”
웅성웅성, 수근수근!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인파 속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하긴, 가을 과메기처럼 신전 위에 내걸린 꼴을 봤는데.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혹시나 사람들 팔다리라도 부러뜨릴까,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인파를 헤치고 나온 교수는 간이 단상 위에 선 사제에게 작게 인사하며 그 옆으로 다가섰다.
“오오, 오오오오. 라투라, 성자시여!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어, 그…. 팔라우스 형제….님?”
“예! 예!!! 제가 광명의 포교사제, 팔라우스입니다 성자님! 올라오시지요! 길잃은 사람들이 광명의 옥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나오려 하는데….”
“뜻에 따르시지요! 아, 그리고 내려오시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주교님이 성자님과 접촉하는 즉시 통신을 연결하라고, 모든 사제에게 지시를….”
아, 노먼 대주교. 그 인간도 있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쳐 단상에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오스트리아 출신 콧수염쟁이 선동가 뺨치게 단호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이끌던 사제가, 내 말 몇 마디에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눈을 하곤 사제복 밑단으로 바닥까지 쓸어 보이며 내게 자리를 건네주는 모습을 보니…. 뭐랄까.
‘이제 이쪽 방면에서 내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거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서 좀 쫄리기도 한 것 같고.’
이럴 때 하이드가 속에서 낄낄거리며 놀리기라도 했으면 오히려 마음이 좀 편했으련만. 이 녀석은 또 뭐가 문제인지 잠에서 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어쩌겠어. 미친 척하고, 눈 딱 감고 해야지.
내가 단상에 오르자,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아니, 입을 다물었다기보다는. 콧김을 훅훅 내뿜으며 헐떡거리는 게, 달려들고 싶은 것을 참으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말로, 그냥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정도만 보여주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라투라. 제국의 형제님들.”
솨아아아-
입만 열었는데, 무슨 내가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리고, 눈을 비비는 사람들.
“염치없게도 광명의 도구로서, 성자라는 직함을 부여받은 이. 성자 교수입니다.”
대단한 열정이나 감동적인 문구, 신앙의 글귀조차 없는, 낮고 건조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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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그 말에 다리가 풀린 누군가가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와아아아아아아!!!!”
“그분이다! 그분이 나를 보셨어!”
“아아, 성자님! 형제님! 피 대신 신앙을 나눈 나의 형제시여!”
신전 앞은 광명 찬양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기도하고, 울고, 더러는 모르는 옆 사람을 끌어안고 ‘살아줘서 감사하네, 잘했어! 아주 장해! 살아줘서 고마워 이 사람아!’ 같은 말을 마구 외치는 광란의 장으로.
“….이제, 내려가면 되는 겁니까?”
“꺼윽, 꺽, 끄흑… 라투라, 오오 광명이여, 라투라….꺼으윽, 꺽, 흐흑, 아아아….”
“….팔라우스 형제님?”
뭘 좀 수습하려 해도, 옆에 있던 포교사제까지 같이 눈이 돌아가 버린 상황.
‘….이런 건 좀 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데.’
교수는 부슬비가 멎어 들며, 그림처럼 갈라진 구름 사이에서 내려온 후광이 그의 뒤에 내려앉은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빛의 신이라서 그런가. 조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아주는 모습.
아무래도, 가이낙스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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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교수가 신전 앞 성자 찬양의 장에 붙잡혀 잠시 뒤처진 사이.
“이쪽입니다, 아에드란 양.”
“저,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황성…. 아니, 황성 터로 갑니다. 성하도시는 그나마 좀 살아남은 건물이라도 있지만, 올 암페리아는 정말 어디 하나 멀쩡하게 살아남은 건물이 없거든요. 우습게도 기둥부터 바닥까지 깔끔하게 무너진 황성 터가 그나마 좀 정돈된 편이라, 그곳에 천막을 치고 모여 계십니다.”
루실라는 무너진 건물 사이지만, 미리 준비된 것처럼 깔끔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결혼? 내가?’
워낙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했고, 정말 죽을 만큼 피곤한 상태에서 일행들의 얼굴을 보니 그만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쏟아져 곯아떨어지고 말았는데.
세상모르고 자는 사이, 뭔가 쑥쑥 진행되어버린 듯했다.
‘….진정하자, 루실라. 대관식이라고만 했지, 그 어디에도 내 이름은 들어가 있지 않았어. 당장 가이낙스 그 사람이랑은 채 30분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데다 수도가 이 모양인데 성혼이라니. 아직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귀족가 여식으로서 결혼이란 단어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같은 나이대 여성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이 생각했다고 봐야겠지.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연결이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침 한 방울조차 믿을 수 없는 귀족 사회에서 결혼이란 그나마 강한 억제력을 가진, ‘혈연마저 배신하면 진짜 아무짝에도 믿을 수 없는 놈’이라는 낙인을 찍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계산해야 했다.
심지어 그 요상한 ‘텔드랏의 구혼자’ 소문이 돌며 내심 이번 여행에 배우자를 찾게 될 거란 막연한 상상 속에 귀족 사내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계산이라면 또 그녀에게 자신 있는 분야였다.
‘스으읍- 후우우. 스으읍- 후우우! 좋아. 루실라. 하나씩 생각해보자고. 이성적이고, 귀족답게. 가이낙스. 분명 장점이 많은 상대지만, 리스크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해. 자아, 평소처럼. 살펴보는 거야 재무, 친인, 권력, 뭐든지 하나하나, 찬찬히….’
짧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루실라는, 상인으로 단련된 판단력을 날카롭게 세우며 가이낙스에 대해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전 제국의 1황자. 패도적으로 알려진. 적통. 군사적인 면에서 뛰어나고…. 음…. 남자다운 외모에, 기사로서 본인 실력도 훌륭하지만, 정치적 관계에 대한 견해나…. 앞으로 혼란이 예정된 수도의 중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화악!
[운명 따위에 휘둘리는 것에는 이미 진절머리가 났어.]“으엑?!”
“예? 아에드란 영애, 부르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발을 헛디뎌서….”
세간에 알려진 정보 사이로 스며들 듯 떠오른 가이낙스의 모습.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갈라진 듯, 거친 목소리로 자조하던 남자.
‘집중해, 집중! 계산하는데 딴생각이나 해서 어쩌자는 거야! 결혼은 현실이야! 으…. 그러니까…. 군사적 능력 덕분에 여러 무신, 사병을 소유한 변경백이나 기사단이 유명한 가문과 친분도 있고, 외교적 능력은-’
화악!
[나는 그것이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워서 그러니.] [아에드란 영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1황자 가이낙스겠지. 30대 중반. 패왕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스스로도 훌륭한 기사라 알려진 자.] [눈을 뜬 지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열병에 걸려 쓰러지기 전 황궁의 정원에서 넘어져 울던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지.]“으잇?”
이,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네. 왜 이러지?
다시금 계산에 집중하려 해도 가이낙스라는 단어에 마음을 찌르는 바늘이라도 달렸는지 떠올릴 때마다 펑! 하고 그의 낮은 목소리와, 음울한 얼굴이 떠올랐다.
[길을 잃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생소하고 고통스럽기야 하겠으나. 그 또한 다들 감내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영애는 대체…. 이 광경을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가 있지?] [여전히 나는 제국의 황제가 될 생각은 없는데. 당신 입장에서…. 그래도 되겠소, 레이디 루실라?]“아우우우…. 으아아아….”
벗어나려고 생각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기억에 루실라는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상인이라…. 그럼 값을 치러야겠지.]값을 치러야겠지.
값을 치러야겠지.
값을 치러야겠지.
값을 치러야겠지……
‘값? 무슨 값? 무엇으로? 나한테? 가이낙스 그 사람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에 고뇌하며 작아진 모습.
그녀를 뒤로 하고 불타는 도시로. 사람들 곁으로 향하는 넓고, 남자다운 등.
비밀 통로의 안전가옥. 환기를 위해 작게 낸 창으로도 분명히 보이던 은빛 물결과, 멀리서도 어쩐지 표정이 보이는 듯, 후련하게 검을 떨쳐내는 가이낙스의 모습.
‘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오러는 그 사람의 영혼을 형상화한다고 했던가.
단단한 금속처럼 빛나던 그 은빛 오러와 가이낙스의 우묵한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다섯 살 무렵 처음 손에 쥐어본 은화가 떠올랐다. 차갑고, 단단하며, 그녀의 손 안에서 점차 따듯하게 녹아드는 그 황홀한 감각.
맹세코, 돈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계산을 할 수가 없다. 내심 만나본 남자 중 가장 독특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교수에게도 몰래 ‘얼마….쯤 하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과 함께 가격을 매겨본 적도 있었지만, 이 남자에 대해서는…. 도저히 계산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50년 정도, 같이 살아보면 또 모를ㄲ….
쿵!
“아이고, 아에드란 영애! 역시 몸이 안 좋으신 게….”
“아니에요! 아냐! 절대 아니니까 돌아보지 말아주세요!”
머릿속에 비눗방울처럼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 넘어진 루실라는, 엎어진 상태로 차가운 바닥에 잠시 이마를 붙이고 숨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무토라고 했죠.”
“어…. 옙. 이제 돌아봐도 됩니까?”
“절대. 안돼요. 지금 우리가 황성 터로 가고 있다구요.”
“그렇지요.”
“가서 가이낙스님을 만나 뵙고, 치장을 한 다음, 대관식에 들어갈 거구요.”
“예. 전하께서 아에드란 영애의 안위를 확인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셔….”
“흐읍!”
“…..서, 빨리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후, 후우. 후우! 아, 알겠어요. 우선, 순서를 조금 바꾸도록 하죠. 황성 터에, 사용인 도시에서 살아남은 하녀, 하인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다고 했죠? 귀족 치장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예…. 대관식 전까지만 준비되면 되니, 아직 시간은 여유 있는 편이….”
“없어요! 여유 없으니까, 당장 그쪽부터 가도록 해요!”
“어…. 하지만….”
무토는, 아버지의 서릿발 같은 명령과 곧 황제 되실 분의 평온한, 그러나 약간의 떨림을 숨길 수 없는 명령과, 그의 뒤에서 어떤 모습으로 넘어졌을지 짐작 중인 영애의 간절한 부탁 사이에서 갈등했다.
제국에서 제일 입담 좋고 비열하며 폭언과 폭행에 능한 아버지의 몸종으로 살아온 덕에 눈치 하나는 비상하게 발달한 무토인 만큼, 그 셋의 발언 중 무게를 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글렌 공작 = 곧 황제 되실 분의 가신.
곧 황제 되실 분 = 이쪽 아가씨한테 꽤나, 상당히, 안달이 날 정도로 관심이 있어 보임.
아가씨 = 눈치 없게 당장 봐야겠다는 황제 되실 분과는 다르게, 자기 챙길 정도의 정신은 있어 보임.
몸종…. 이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신분 덕분에 어여쁜 하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아온 무토는 이런 방면에 있어서도 제법 해박했다.
보통은, 제정신 차린 쪽이 관계를 주도하기 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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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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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 황제(진) < 아가씨
딩딩딩딩-!
“….아에드란 영애? 드레스나 장신구. 머리와 화장은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십니까?”
“….가요. 가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하죠. 시간을 좀…. 들여야 할 것 같으니까.”
글렌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공작의 몸종으로 15년을 살아온 무토는, 다음 대 제국의 실권을 틀어쥘 분에게 줄을 대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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