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5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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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훗, 큼, 흠! 아, 이거 죄송합니다. 손수건 하나 드릴까요? 흰옷에 닦으면 얼룩질 것 같은데.”
“으, 고맙다. 성직자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네. 저 여자, 내 손에다 코를 풀었어.”
“교수님은 그게 문젭니다. 그 우는 여자 얼굴을 직접 닦아주신 분이 그렇게 말하시면, 하나도 안 힘든데 너스레 떠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실상은 제법 고역이었을 텐데.”
교수는 아스트라드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그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마법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소년은 잠깐 못 본 사이에 쑥 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유로운 태도도 그렇고, 폭풍의 언덕을 대표하는 ‘거주’ 바람의 마법사라는 모순적인 직함도 그렇고.
“하하하하. 교수님 주변에는 여전히 재미있는 일이 가득하네요.”
노상 시큰둥하고 기복 없던 표정에서, 이젠 제법 웃을 줄 알게 된 것도 그렇고.
‘….세월이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든 경험이 사람을 키운다고 하더니.’
폭풍의 언덕에서 그의 스승과 가족 같은 마법사들을 절반 가까이 잃고 휑하니 비어버린 홈을 거닐던 시간이 소년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키워낸 것 같아서, 교수는 괜히 툴툴거렸다.
“재미? 넌 저게 재미로 보이냐?”
“음…. 네. 교수님이 꽂혀있던 신전의 첨탑을 그대로 두고 이곳을 성지로 등록하느냐, 잘 보존된 상태 그대로 밑단부터 잘라다가 로드릭에 있는 본단에 모셔놓고 성물로 지정하느냐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성기사들 만큼 재미있는 장면도 드물죠.”
“으으음….”
반박할 수가 없군. 그건 나도 좀 웃겼거든. 세상 심각한 얼굴로 ‘첨탑이 자리한 곳과 추락한 성자님의 조우가 가지는 상징성’ 이니, ‘현 시대에 만들어진 대형 성물이 가질 상징성과 그로 인해 강화될 신도들의 신앙심’이니 하는 소리들을 하고, 또 말리러 간 줄 알았던 그레고리우스가 ‘이 일은 로드릭에 있는 본단에서 정식으로 논의 중에 있으니 자중하라’ 같은 소리를 하는데, 다들 일생일대의 기로에 선 것처럼 진지해서 차마 웃을 수가 없더라고. 옆에서 나 데리러 온 아스트라드랑 웃참하느라 이 뿌리가 시큰거릴 정도였지.
“이러다 내가 길 가다 넘어지기만 해도 ‘성자의 발걸음을 멈춘 돌이다! 잠시 경계하고 주변을 살피라는 로하람의 뜻이다! 저 돌! 뿌리까지 상하지 않게 곱게 파내라!’ 할 수도 있겠어.”
“아, 그거 농담이라도 다른 사람들 듣는 데서 하지 마세요. 아까 통신마법 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교단 관계자가 들으면 당장 성수병부터 맞추겠다고 도기 장인 찾아갈 것 같으니까.”
“….들렸냐?”
“바람은 어디에나 있잖아요. 어쩌다 보니, 어떻게 들렸네요.”
“하아아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손 한 번만 잡아달라고 몰려드는 신도들을 상대하던 중. 대주교님이 한 시간 넘게 신성 통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짐작이 가서 죽어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통신 마법에 어찌나 신성력을 때려 부었는지, 연결한 사제가 번쩍번쩍 빛이 나서 도저히 무시할 상황이 안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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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성자 교숩니다.”
[….]“어…. 라투라? 노먼 대주교님?”
[….돌아오시지요.]“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 본단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시성받으시고, 교단의 성자로 본단에 눌러앉아 계시란 말입니다!]“어우, 영감님 목청도 좋으셔라. 그, 제가 약속 안 지키고 제국에 뛰어든 것 때문이면…. 내가 미안합니다! 아 미안해요! 상황이 좀 급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소식이 거기까지 갔는가 모르겠는데, 아니 세상에! 제국 수도에 글쎄-”
[과거 스스로를 ‘광명의 자식’이라 부르던 교단 사람들이 스스로를 도구라 폄하하게 하고, 교단의 세가 하향 일로를 걷게 된 씻을 수 없는 실책, 잃어버린 성녀님이 타락한 마녀로 강림하여 제국을 저주의 온상으로 만들고 황족을 마구 시해했으며, 악신 하나로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이 대륙에 두 번째 악신으로 강림할 뻔한 사건이라면 서면으로 제 집무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보고됐으니- 감히 성자님의 경고를 무시한 이 노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어…. 잘 아시네요. 예. 그렇게 되는 바람에, 나름 광명의 성자로서 사명감에-] [그리고 또한! 멸망의 흉성을 강타해 그 사악한 의식을 저지한 광명의 ‘신성’을 한껏 품은 혜성! 그것의 정체가 우리 성자님이라는 것도 아주 자알~ 알고 있지요! 자, 아직도. 아직까지도 로 하람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우기실 겝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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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의 그 중후하고, 차분한 대주교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흥분한 노먼 대주교는 젊었을 적 몰락한 교단의 고위 사제로 사교계를 종횡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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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타락한 성녀님을 막아내고, 추락한 자리가 저희 광명의 신전이었다면서요!]“떨어진 게 아니라 처박혀서 꿰뚫렸는데요. 지금 뱃가죽에 아주 큼지막한 흉터도 남아서-”
[대단히 상징적이지요! 성흔까지 남으셨다니 기록에 남기기도 훨씬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 일들은 잠시 제쳐두지요. 이제 그만 교단으로 돌아와 주셔야겠습니다. 와서 제대로 시성(諡聖)의식도 치르시고, 직책도 부여받으시고.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으음…. 성녀님을 잃은 그 날 이후 추기경부터 교황님까지, 대주교 이상 가는 직책을 가진 모든 형제님들이 교단을 이끌지 못한 죄를 통감한다며 스스로 평사제의 신분으로 내려가셨으며, 그 이후로도 대주교 이상의 직책을 짊어지는 오만을 행하는 자가 없었지요. 허나, 그 원인이 된 성녀님의 삶을 매듭지어주신 교수님이라면 추기경…. 정도의 직책은 부여해야 형평성이 맞지 않을까 하온데.]“추기경이면…. 대주교 위쪽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꼬박꼬박 존대해드리고 있잖습니까. 교수 추기경 예하. 대주교 위, 교황 아래 직책이지요.]“아이고, 아이고오! 나는 그거 됐습니다. 당장 성자만 해도 벅찬데. 나처럼 밖으로 나다니는 사람한테 직책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밖으로 그만 나다니셨으면 하니까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교수가 어떻게든 대주교의 ‘우리 품으로 들어와라!’ 공격을 막아낼 말을 떠올리는 사이, 한숨 소리와 함께 아이 달래듯, 차분해진 대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압니다. 성자님의 그 희생정신. 남들이 제 몸을 사릴 때, 당신께서는 몸이 두 개가 아닌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세상에 그 빛을 남기고 계신다는 것을. 덕분에 그토록 불신자의 가면을 쓰셨지만, 이제 온 세상이 당신을 성자로 부르고. 또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교단을 떠올릴 때 당신의 이름을 함께 떠올리는 이들이 대단히 많아졌지요. 당신께서는, 광명의 새 구심점이 되신 겁니다.]“그건….”
“잠시만요 대주교님. 힘이라는 게 그리 단순하게-”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이제 성자님과 제가 쌍수를 들고 부정한다 한들 당신께서 광명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자님이 이번 사건처럼 험지에 몸을 내던지셨다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고행 끝에 의지할 자리를 찾은 나그네는 그 자리에 몸을 누이기 마련이지요. 당신이 죽는 순간, 그 자리가 끝없는 무저갱이 되는 것입니다. 구심점을 잃고 추락하는 사제들이 무저갱이. 당신이 스러지는 순간, 성녀님을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종교적 상실이 생길 것입니다. 두 번 있었던 일은 세 번도 일어날 수 있으니. 신도들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에 두려움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광명의 이름도. 로 하람의 신명도 서서히 세상에서 사라져 가겠지요.]=========
성직. 지금까지는 어떤 곤란한 행동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 그 맹목성에 기대에 빛의 뜻이 그러하다, 하고 넘겼지만.
광명 교단이라는 하나의 팩션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까지 올라온 지금, 이제 그 맹목성에 해당하는 의무를 짊어질 순간이 온 것이었다.
사실 교단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에 들어가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기사 플레이를 하며 히로익 포인트를 쌓아가면 ‘제일 기사’ 라는 명성과 함께, 각국의 제후들이 자신을 섬길 것을 종용하며 거부하면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거나.
천류제처럼 용병 플레이만 죽어라 하면 어느 순간 ‘용병왕’이 되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 용병들이 알아서 귀찮은 일을 정리해주고, 슬쩍 한마디 흘리면 우르르 몰려들어 깽판을 놔준다거나.
그게 귀찮으면 레빗이 동료, 가신들과 함께 만든 ‘프린세스 가문’처럼 자체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작게나마 한 집단의 수장이 된다거나.
결국 정상급 플레이어가 된다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긴 했다.
다만…. 광명 교단의 경우, 그 구심점이 되어줄 이를 백 년 가까이 갈망하다 이제야 찾게 되어 다소 제안이 격앙된 감이 있는 거지.
대주교도 자신이 조금 과하게 흥분한 것을 인지했는지, 잠깐의 침묵으로 말을 고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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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제가 이렇게 말한다 한들 성자님 같은 분이 안전한 교단에 얌전히 틀어박혀, 저와 함께 서류나 붙잡고 씨름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라도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바쁘신 분에게 이다지도 길게 말하고 말았지 뭡니까.] [명심하십시오. 작은 호롱불을 가릴 천은 존재하나, 떠오르는 새벽을 가릴 천은 존재하지 않음을. 광명의 새벽이 되셨으니, 부디 스스로의 안위가 단순히 당신 하나의 안위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내려앉은 무수히 많은 작은 빛들이, 모든 형제들이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명심….하겠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노구의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군요.]“뭐. 결국 몸조심하라는 이야긴데 그 정도 부탁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니까요.”
[물론, 본단에 들러서 시성의식은 꼭 치러주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아, 그리고. 성자님이 순교하신 첨탑 말인데,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자리에 두고 성지로 만드는 것이 향후 재건될 제국에서 광명의 세를 넓히는 데 도움이-]“안 죽었는데 뭔 순굡니까! 끊습니다!”
[하하하하. 라투라. 부디, 안녕하시길.]=========
그것으로 대주교와의 통신은 끝을 맺었다.
“당장 저녁 기도문 한 줄 못 읽는 사람한테 지난 몇십 년간 아무도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아 비어있던 추기경 자리를 들이밀다니. 성자니 뭐니 해도, 사실 대주교랑 밀담을 나눈 끝에 가짜 성자로 활동하며 교단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자고 합의한 거라고. 그 사이에 로 하람은커녕 그 어떠한 종교적 행위도 없었단 말이지. 당장 지금만 해도 빛,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로 하람이 아니라 에디슨이고.”
“그렇게 성자 자리가 부담스러우셨으면, 왜 두 시간 가까이 사람들 앞에서 성자 행세를 하셨는지 모르겠는데요? 교수님 힘이면 저 정도 인파에 밀리기는커녕 저 사람들을 세 겹으로 쌓아서 눌러도 가볍게 밀치고 나오실 수 있었을 텐데.”
“으으으음…. 두 시간까지는 안 했어. 나도 빨리 황성 터에 가야겠다는 자각은 있었으니까.”
“예, 예. 제가 부르러 올 때까지 우는 여자의 눈물 콧물 닦아주시던 분답게 참 설득력이 있으시네요.”
“….어째 한 마디를 안 지냐?”
“마법사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사무를 관장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더라구요.”
한 시간? 한 시간 좀 넘게 잡혀있었나?
내 손이라도 잡아보자고 달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린 시간이 그쯤은 될 것이다.
솔직히 이쯤 해줬으면 됐겠지, 싶은 시점은 있었다. 나도 바쁜 사람이고, 빨리빨리 할 일 끝내고 좀 쉬고 싶기도 하고. 당장 제국에 묵직-한 은혜를 입혀놓은 상황이니, 막 태동하는 새 제국에 이런저런 말을 남겨두면 향후 4월드에 내 입맛대로 쑥쑥 성장한 제국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한마디라도 더 남기려면 당장 가야 하니 적당히 하고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성자님. 이 아이 이름을 지어주실 순 없겠습니까? 이 환란 속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부모란 새 생명을 만들어낸 존재이며, 하나 하나가 로 하람의 일부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빛이 내려앉는 법이지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이 이름은 그분들을 위해….’
‘저는 이 애 할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아내를 지키다 죽었고, 내 딸, 아이 엄마 되는 내 딸애는 도와줄 사람 없이 혼자 애를 낳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가족이라곤 할애비 되는 저밖에 없는데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부모의 고용주 되던 귀족님도 돌아가셨는데….’
‘….이리 줘 보시죠. 애가 참 이쁘네.’
이 난리통 속에서, 노인은 죽은 딸의 젖을 빨고 있던 아이를 품에 안고 신전을 찾아왔으며.
‘성자님. 손이, 제 손이 안 보여요. 잠깐 취한 듯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도시가 불타고 제 손이… 아아아…. 기도를…. 저는 기도할 손이 없으니, 염치 불고하고 성자님께 기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순백의 사제복과 성물을 갖추고, 두 손을 모은다 한들 광명에 닿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손이 없다 하여 기도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레고리우스, 이 형제님을 좀 살펴주시겠습니까?’
‘교단의 정화 사제들이 오는 중입니다. 도착하는 즉시 부상자들을 위한 치유소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붕대를 풀어, 거친 이빨에 뜯겨나간 자국이 가득한 빈 손목을 들어 보이며 기도를 부탁하는 여자가 있었고.
‘….’
‘괜찮습니다.’
‘….윽, 끅….’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이곳까지 온,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투성이 손으로 아무 말도 못 하던 멍한 눈의 남자는 내 위로 한마디에 그대로 허물어지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의 죄를 고해하다 잠들어버렸다.
[당신은 이제 광명의 새벽이십니다.]이런 일을 해본적은커녕 구경해본 적도 없지만.
급하게 떠올린 내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고, 타들어가듯 속을 좀먹던 말을 뱉어내며, 이윽고 생에 의지를 되찾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디아…. 좋은 이름이군요. 내 딸도 하늘에서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광명이 나디아와 성자님의 앞길을 비추길….’
‘이곳에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아아, 라투라….’
‘그리 말씀하시니….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달릴수록 지치기는커녕 머릿속에 환한 불이 켜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가이낙스가 있는 곳에서 새 제국의 토대가 될 정치적 조언 한 마디와, 눈앞의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마디. 둘 중 어느 것이 가치 있을지 저울질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가이낙스 쪽으로 기울며, 지금이라도 가서 뭐 한마디라도 끼어들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재촉하고 있었지만.
‘하나라도 더.’
‘이 사람까지만. 겨우 말 한마디, 기도 한번 해줄 시간 정도는….!’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위안과 희망이 된다는 것.
[세상에 내려앉은 무수히 많은 작은 빛들이, 모든 형제들이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사하길 기원하고, 그것을 이렇게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것을 마주한다는 것은.
정말, 정말로 괜찮은 경험이었다. 향후 4월드에서 제국의 성장 방향이 어쩌고, 당장 제국의 군사적 지원이 어쩌고 하는 것도 다 잊어버릴 만큼.
“흠흠. 뭐, 고생한 만큼의 보상으론 나쁘지 않았어. 힐링이 됐다고나 할까.”
“그걸 보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야말로 사람들이 교수님을 우러러보는 이유 아닐까요.”
아무튼. 그렇게 끝도 없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다가, 슬슬 내가 필요하다고 찾으러 온 아스트라드 때문에 정신 차리고 같이 빠져나온 터였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이유는?”
“아, 곧 조촐하게나마 대관식 준비가 끝날 것 같아서. 아무래도 혼란을 진정시키려면, 제국의 중심이 확고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많은 사람 앞에 보여야 하니까요. 지금 생존자들이 신전 앞에 3할 정도, 황성 터에 7할 정도 있는데 교수님 데려오면 나머지 3할 다 따라올 거라고 해서 데리러 왔습니다.”
“아, 대관식. 맞다. 다른 일행은 다 도착했냐?”
“후후후. 벌써 도착해서 준비 다 끝냈습니다. 특히 루실라 그분은 아주 전투적으로 움직이고 계시던데요. 저는 이렇게 다 무너진 수도에 그렇게 많은 드레스와 장신구가 살아남았을 줄 몰랐습니다. 여기서 멀쩡한 레이스 하나 건지고, 저기서 멀쩡한 드레스 골조 살려오고. 사용인 도시의 하녀들이 대부분 이런 방면의 전문가인 데다, 다들 굉장히 의욕적으로 손을 보태서 그런지 잠깐 눈 돌린 사이에 고급 드레스 하나를 뚝딱 완성하더라구요.”
“우리 애가 좀 똑부러지긴 하지. 그래서. 가이낙스 그 인간 반응은 어떻디?”
“그건, 교수님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보시죠.”
서두르는 사이 황성과 수도를 가른 절벽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스트라드의 바람으로 계곡을 건너 무너진 황성 터로 들어섰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 몇이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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