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6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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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터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큼 넓고, 또 깔끔했다. 난민촌처럼 얼룩진 천막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지만 않았으면 정말 대관식용으로 넓고 깔끔한 자리를 마련했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가 저 안에 있는 걸 직접 봤으니 넓은 건 이해하겠는데. 왜 이렇게 깔끔하냐? 그걸 벌써 다 치웠어?”
“옆에 쓰레기 버릴 큼지막한 구멍이 있잖아요. 저기 저거, 절벽. 황성 기반이 되는 바닥 쪽 돌들이 죄다 알아보지도 못할 주술로 강화된 것들이라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스카라드님이 도끼로 죄다 쓸어버리셨습니다. 몇 번 터지는 소리 나더니 주술 강화된 주춧돌만 저렇게 깔끔하게 남고 다 날아갔던데요.”
어쩐지. 주변 지면보다 황성 터가 살짝 위로 솟아있는 느낌이더라니. 무식한 힘에 지면이 깎여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황성 터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수도의 생존자들에, 한쪽 구석에 주술 각인을 번쩍이며 주춧돌을 두드려보는 노툼도 저기 보이고. 오트만은 황성 터 옆 지면에 작은 샘 같은 것을 퍼올리고 그 옆에 주저앉은 알드리치는 작은 그릇에 물 한 그릇 떠놓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위령제를 치르고 있었으며. 이드라실은 엘프 숲에서 온 순혈 엘프 타이레아와 뭔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들 각자 할 일을 하는 가운데. 대망의 주인공, 우리 루실라 아에드란 아가씨는….
“이거, 혼자 보기 아까운데.”
“그래서 같이 보고 있잖아요?”
“아니, 너 말고. 그런 게 있다.”
아스트라드가 왜 ‘직접 가서 봐라’ 라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에드란 영애. 이리 지붕도 없는 곳에 모시게 된 점을 사과드려야겠습니다.”
“아, 슈왈츠 공작님. 그리 존대해주시면, 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예의라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러우실 게 뭐 있습니까. 루실라 양. 당장 슈왈츠 저 녀석의 가문은 당대 텔드랏에서 온 여인, 나셀리아 슈왈츠 여사께서 초대 가주, 아서 슈왈츠 경을 도운 덕분에 만들어졌으니 반쯤 가문의 시조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고. 저희 글렌 가문만 해도 오래전, 가문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가문의 안주인이셨던 나디아 글렌님께서 밤낮을 지새운 끝에 그것이 누명임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두 가문의 은인이자 큰 어른 되시는 분의 후계…. 비슷한 신분으로 오셨으니. 이 늙다리들보다 몇 배는 귀하게 대접받을 분이시지요. 안 그러냐, 무토! 모시는 데 소홀함은 없었겠지!”
“옙!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르신! 제가 몸종이 되고 10년 만에 어르신께서 새로 주신 옷을 받았을 때처럼, 아주 귀하게 모셨지요!”
“으음. 잘했다. 영 쓸모없지는 않구나.”
누구는 죽을 듯 발악한 끝에 큼지막한 구멍 하나 뚫어냈던 게 전부였던 마녀의 탑을 단칼에 썰어낸 다이크 슈왈츠 공작에, 그 안하무인의 마법사들이 이름만 들어도 꽁지 빠지게 달아난다는 깨달음 브레이커, 논리의 악마 글렌 공작까지 달라붙어 가문의 조상님 모시듯 깍듯하게 대접하는 게 우리 입 걸걸한 꼬마 상인 아가씨라니.
그리고 비극의 중심인 만큼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있는 드레스에 풀 메이크업까지 하고 온 루실라를 보고 꽤나 당황한 얼굴의 가이낙스에, 그걸 보고 낄낄거리며 ‘아직 일곱 살-’이 어쩌고 하는 비쩍 마르고 퀭한 노인, 스카라드까지.
대관식을 앞둔 황제와 그 가신들의 모습이라기엔 뭔가…. 허술하다고 해야 하나? 목가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보고 있으니 다나랑 처음 만났을 때 이안이랑 벡스 두 놈이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보니까 되게 재밌네.
“아으으으…. 아, 요, 용사님 이쪽이에요 이쪽! 아스트라드! 이제야 오셨네!”
그때, 루실라가 우릴 발견했는지 손을 번쩍 흔들며 소리를 높였다. 어째, 손을 흔드는 게 반가워서가 아니라 살려달라, 뭐 그런 뜻으로 보이기도 하고.
“흠흠. 두 분 공작님. 늦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광명의 도구된 자, 교수라고 합니다.”
“음? 아아. 스카라드가 올려보낸 사내가 자네였지. 반갑네. 슈왈츠 가의 가주, 다이크 슈왈츠라네. 마녀와 그 흉성을 떨어트린 힘은 늙은 내 눈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줄 정도였지. 감명 깊었네.”
“광명의 성자라…. 대대로 가주는 성만 물려받아 쓰는 덕분에, 그냥 글렌이라고 불리는 늙은이일세. 자네가 참으로 그림같이 날뛰어준 덕분에 용기 교단과 제국의 사이가 좀…. 골치 아프게 됐지.”
“용기 교단….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게, 제국에서 뮤트의 침공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이, 용기 교단 사람들이 죄다 제국 변방에 나가 그 치들을 막아내고 있었거든. 설마 제국의 가장 안전한 수도에서 이런 변고가 일어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지 교구도 비우고 냉큼 달려나갔다더군. 참, 누구보다 제국을 위해 헌신해준 사람들은 맞는데, 덕분에 골치 아프게 됐어. 그렇다고 자네 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저 뒤에 광명을 부르짖으며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만 해도, 절반은 원래 용기 교단의 신도들이었으니까 말이야. 가뜩이나 수도를 재건하려 정치적인 면에서 좀 자유로운, 종교 쪽 사람들의 압력이 필요했는데 말이지. 양쪽 모두 잘해주는 바람에 불편해졌어. 음…. 골치 아픈 일이지.”
내가 다가가서 인사하자, 루실라 근처에 있던 두 공작이 아는 체를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스터들의 마스터, 검공에게 실력에 대한 칭찬을 받은 것도 물론 대단한 영광이지만. 당장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대법관 글렌, 수도의 정치 귀족이 전부 시체나 반병신이 된 지금 새 황제의 치세를 바로 옆에서 보좌할 그의 이야기였다.
“아, 그렇게 걱정할 것 없네. 조금 전에 광명의 대주교와 이야기가 다 끝났거든.”
“저, 저랑 이야기하셨어도 됐는데….”
“아니야 아니야. 당장 자네 뒤에 따라온 사람들이 폭도가 아닌 것만 봐도 자네는 할 일을 충분히 해줬는데 뭐. 바쁜 사람한테 이런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맡길 수야 없지.”
물론, 내가 그 이야기에 끼어들기에는 한발 늦었다는 말이었지만.
어쩌겠어. 한쪽에 시간을 썼으면 다른 쪽은 잃어야 하는 것을.
“보아하니 일행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늙은이들은 그만 빠져주지. 이따 대관식 때 봅세. 거기, 바람마법사. 자네는 잠깐 우리랑 같이 가지. 그쪽 대표이니만큼 할 일이 있어서.”
“아, 예. 그럼 교수님, 루실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아스트라드가 나가고, 두 공작이 루실라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물러나자 교수는 가이낙스 쪽에서 훤히 보이게 활짝 열려있던 루실라의 천막을 닫아주었다. 외부 시선에서 차단되자 루실라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 참았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방금 봤어요? 글렌 공작이에요, 글렌 공작! 사교 언어의 화신이자 현대 귀족 화술의 아버지! 그 옆에는 황제만큼이나 제국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검공 다이크 슈왈츠 공작님이셨고! 와, 저런 사람들이 저한테 가문의 어르신이니, 뭐니 하면서 놀려대는데 그걸 농담으로 받아쳐야 할지, 과례를 얌전히 거부해야 할지 정말….”
“되게 들떠 보인다 너?”
“….티 나요?”
“어. 제법?”
“아우우우…. 어떡하지? 화장을 조금 더 짙게 하면…. 아니, 이런 자리에서 너무 화려하면 그건 그것대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밖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겨우 본모습을 드러내는 루실라. 살짝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여러 가지 귀고리를 대어 보던 루실라는, 내 쪽으로 획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 저 사람 되게 마음에 들어요. 신기할 정도로.”
어이구, 말 한번 똑부러지는 것 봐라.
“확신이 섰어?”
“대단히 냉철하고 명확하며 논리적으로 계산한 끝에, 가이낙스 저 사람만 한 배우자감은 없다는 계산이 섰거든요. 정말이에요. 진짜로.”
“흠…. 단순히 그거? 진짜? 어이, 루실. 우리끼리 이야기니까 솔직히 말해 보라고. 만약 상황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게 된 거라면…. 내가 깽판 놔줄 수도 있는데? 어때, 필요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쿠당탕!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루실라의 두 눈이 넘어진 의자와 히죽거리는 내 얼굴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풀이 죽은 듯 가라앉았다.
“으….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요.”
우물쭈물하며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열린 천막의 문틈을 힐끗거리는 루실라.
음,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아닌 것 같다. 혹시나 가문의 입장이나 제국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어거지로 끌려왔으면 진짜 깽판 놔주려고 했는데.
“그럼. 대관식 때 바로 결혼까지 가는 건가? 아니면 약혼? 뭐 얘기 나온 거 있어?”
“우으으으*&&^!!! 그, 그건 너무 빠르잖아요! 잠깐 얘기…. 해봤는데. 가이낙스님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무엇을 어떻게 갚아줘야 할지 모르겠으니, 조금…. 시간을 두고 하, 함께 알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때까지는 수도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고…. 무, 물론 제국의 명예를 위해서! 황제 된 자로서 초대 황제의 유물을 전해준 이에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으면, 새로 태동할 제국에 큰 흠이 될 거라고 해서! 그래서, 그래서….”
“어이구, 알았다 이 녀석아.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도 말고. 대관식 끝나고, 당장 내일 아침에 이 소식을 실은 편지가 제국 전역으로 날아들면 잘생기고 능력 있는 미혼 절대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제국의 미녀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거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경쟁자가 있을 거라는 한마디에, 조용히 눈에 불을 피워올리는 루실라.
“그래…. 그러면, 결국 넌 제국 수도에 남는다는 소리구나.”
“예….”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 녀석도 제 갈 길 가게 됐다는 뜻이겠지.
어디 보자…. 겨울이 지나 해가 갔으니 이제 얘가 열일곱인가? 제국 나이로 열일곱이면 한국 나이로 열여덟?
마냥 애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니 신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교수는 알드리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루실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길게 말해봤자 아까 송별회 때의 반복이 될 테니, 길게는 말 안 한다. 너라면 굳이 잘 살라고 얘기 안 해도 잘 살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고마웠다 루실라. 언제 어디서나 너의 그 당찬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며칠 전 보르카의 앞에서.
몇 시간 전 알드리치의 앞에서 그랬듯.
지금, 루실라의 눈앞에 내밀어진 교수의 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루실라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약간 물기 어린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 너무 짧은 것 아니에요? 먼저 왔던 다른 일행은, 그래도 그동안 있었던 일, 블루 라인이나, 이드라실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나, 막 그런 기억 떠올리면서 눈시울 붉히고 가셨는데. 심지어 노툼도 살짝 울었다구요.”
“길게 해줘? 에~ 본 성자는, 빛의 축복 아래 만난 두 남녀, 루실라 아에드란 양과 가이낙스 아그단 님의 맺어짐을 진심을 담아 축복하며, 앞으로 먼 길을 헤쳐나갈 두 사람에게 작은 충고를 몇 가지 할까 합니다~ 첫째로,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 것이며 둘은 파도를 헤쳐나가는 하나의 배와 같이 모진 파도와 풍랑을 지남에 있어….”
“뭐, 뭐에요 그게!”
“성자잖아. 혹시 주례 서달라고 할까 봐 짬 내서 준비했는데, 오늘 결혼 안 한다니까 만들어놓은 게 아쉬워서.”
교수의 너스레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이 되어버린 루실라는.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그의 너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교수님이나 다른 일행만큼 대단한 능력은 없지만. 정말 열심히, 짐이 안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럼, 알지.”
“블루 라인에서는 좁은 수레 안에 틀어박혀서 손끝이 부르트도록 독한 약초랑 열매를 까서 쥐어짰고, 폭풍의 언덕에서는 물론 혼자 안전한 곳에 있었지만,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편지도 쓰고. 또 그게 문제가 될까 봐 썼던 편지도 버리고 다시 쓰고….”
“알지. 덕분에 자비의 성녀님도 무사히 보내고, 또 그것 덕분에 받은 황가의 초대장으로 골치 아픈 일을 얼마나 많이 넘겼는데.”
“윽….흑….”
어이구. 이럴까 봐 짧게 끝내주려고 했는데.
교수는 얇은 법복의 앞섶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작게 떨고 있는 루실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에 꼭…. 꼭 제국에 돌아와 주세요. 아에드란은…. 절대로 빚을 갚으니까. 여기까지 함께하면서 잘해준 것, 지켜준 것, 동료로 대해준 것…. 모두 해서, 법정 이자까지 꼬박꼬박 붙여서 되갚아줄 테니까…. 그렇게 해줄 테니까….”
“이런. 그럼 내 쪽에서 되갚아야 할 것 같은데. 오지 말아야겠는걸.”
“으이이, 으흐으으… 너, 너무해….”
어이구. 아까 했던 말은 취소다. 아직 애는 애야.
“잘 살아라, 루실라.”
“우으으으…. 용사님도, 잘….”
“얼굴 비비지 마. 화장 지워진다.”
“프흑, 흣…. 끝까지 정말….”
“흐흐흐. 내가 그렇지 뭐. 아, 이건 선물.”
“무슨…. 깃발?”
“선황 폐하의 마지막 선물이다. 이따 가이낙스 보여줘. 수도에서 자란 사람이면, 저게 뭔지 알 거다.”
결국, 눈물이 흥건한 얼굴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게 만들고 난 다음에야, 교수는 루실라의 천막을 나올 수 있었다.
슬슬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정말 대관식이 머지않은 모양.
교수는 근처에 있던 하녀들에게 루실라의 천막으로 들어가 달라는 말을 한 다음, 닫힌 천막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아닌척하던 가이낙스에게 걸음을 옮겼다.
이쪽도 나름 해주고 싶은 말은 참 많은데. 음…. 그러고 보니 황위 쟁탈전 때 패도(霸道)를 추구하는 황제라고 소문이 났었지. 가이낙스가 서른세 살이니까. 패도. 패도. 패도라….
‘뭐, 중세 귀족사회 배경이니까. 열다섯 살 차이는 그리 멀지도 않지.’
성자 행세하느라 시간을 많이 놓쳐서 여러 말해 줄 수는 없고. 딱 필요한 말만 해주기로 했다.
“어이. 신 황제 폐하.”
“….성자. 당신인가.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제국에 휘둘리던 내 검을 꺾어준 것에 감사를-”
“루실라가 당신 엄청 마음에 든대.”
“프훑! 쿨럭, 컥!”
“잘 해보시고.”
음,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저 인간, 전에 줘팼을 때 팍 쪼그라드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묘하게 허당기가 있는 게 루실라랑 같이 있으면 나름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네.
혀를 제대로 씹었는지 연신 기침을 하는 가이낙스를 뒤로한 교수는 흥얼거리며 대관식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발을 옮겼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다 한들, 이런 황량한 곳에서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이 너른 제국의 황제를 위한 대관식이라고 하기엔 조촐하기 짝이 없는 행사.
장소는 다 무너진 폐허였고, 참여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높은 단상 위에 서면 그 끝이 보일 정도에 지나지 않고. 예포도, 행진도, 다른 나라에서 온 축하 사절과 예물도 없었지만.
말 한마디로 같은 귀족조차 벌벌 떨게 하는 공작부터 꾀죄죄한 몰골의 하인까지,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전부가 동원되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나르는 그 모습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막 태어난 작은 왕국의 이름을 알리는 행사 같았기에. 오히려, 지금의 제국에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귀족부터 하인까지. 수도에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 도착했을 때.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 여겼다.”
사람들 앞에 선 신 황제, 가이낙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자의 제국은 하나로 태어났으며, 하나로 만들어졌다. 오늘 일어난 참상의 장본인인 황족으로서, 둘러 말하지 않겠노라. 이 비극의 주동자는 제국이다. 그대들의 일상을 베어낸 것은, 제국의 번영이라는 단단한 틀. 깨어져 나간 그것의 파편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던 고대의 힘은 이미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난 상태였으며, 마침내. 비대해진 제국과 함께 몸을 키운 병마와 같은 그것이, 결국 이 사달을 만들고 만 것이다.”
듣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신랄한 비판. 불안해하는 사람들 사이로, 가이낙스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 내려앉았다.
“허나! 나는 제국의 과거가 잘못되었다 하지 않겠다. 이 넓고 강건한 제국을 보아라. 지금 제국의 작은 도시보다도 못한 크기를 자랑하던 왕국의 영역은 대륙의 절반을 아우르고 있으며, 500년의 태평성대는 가장 가난한 백성조차 굶어 죽을 일은 걱정하지 않는, 역사에 유례없는 강대한 제국을 일궈냈으니!”
“그저, 초대 황제는 그 시대에 필요한 것을 선택했을 뿐이고, 이제 그것의 수명이 끝난 것뿐이라.”
“그러니 우리는. 이 제국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콰악!
가이낙스는 루실라에게 전해 받은 깃발을, 그의 옆에 박아넣으며 외쳤다.
“과거의 힘이 없다 한들, 제국은 여전히 제국이다! 아니, 오히려 무생물 같은 평화를 넘어 생기를 더할 뿐!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늙은 사자의 품에서 마침내 벗어나, 땅에 흩뿌려진 씨앗처럼! 더욱 무성히 자라날 것이다!”
트득. 트드드득.
터만 남은 황량한 황성 터에 나부끼는 빈 깃발. 검게 타들어 간 그 천이, 허물을 벗듯 조금씩 재를 털어내며 새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물려받은 게 아니라, 그저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제국을 위해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이가 그밖에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제국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선 이의 뜻에 따라, 그가 그리는 제국의 모습으로 새 제국의 깃발이 탄생하고 있었다.
‘끝이구나.’
마침내, 길었던 제국의 이야기가 끝을 맺는 모습은, 그 중심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교수에게 있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 열의에 동화된 듯 손을 그러모으며 가이낙스를 우러러보는 사람들.
반짝이는 눈으로 가이낙스의 당당한 선언을 지켜보는 루실라.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그의 일행들과 아스트라드.
새 황제의 탄생을 지켜보는 두 공작과, 자신의 도끼에 기대어. 마침내 긴 약속의 끝과 함께 생을 마감한 처형인.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그의 옆에서 세계수의 가지를 만지작거리는 순혈 엘프.
“고목은 불에 타도 새순을 피워내며, 태풍이 불어와도 그 자리를 지키니! 나는, 짐은 새로이 다시 태어난 제국의 황제, 아그단 1세로서! 500년의 역사를 함께한 사자를 양분으로 자라난 고목의 주인으로서! 제국을 보호하고! 그대들이 자유 의지가 더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만천하에 새잎을 틔워내도록 하겠노라!”
….지직. 지지직.
왜일까. 정말 보기 좋은. 이토록 완벽한 마무리와, 그에 따르는 감동일 텐데.
왜 이렇게 이 간질임이 어색하고, 불안할까.
어째서 이런 기시감이.
어째서, 저 깃발은. 새 제국의 상징이 왜.
“말….도. 안 돼….”
교수의 눈은 검은 재를 털어내고, 새롭게 거듭나는 제국의 깃발에 못이 박혀있었다.
폐허 사이로 우뚝 선 고목. 그 너른 줄기로 제국의 하늘을 떠받치며, 깊은 뿌리로 제국의 땅을 감아. 새로이 자라나는 작은 나무들을 감싼 모습.
위쪽, 줄기로 이루어진 반원. 아래쪽. 뿌리로 이루어진 반원. 중앙의 커다란 기둥과, 그보다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직선.
마치, 위아래로 이어진 반구와, 중앙 발전기의 높은 탑. 그 아래로 즐비한 구시대의 빌딩. 마천루를 표현한.
“저게…. 어째서 여기에….?”
돔의 깃발과, 정확히 같은 형상으로 펄럭이는, 제국의 깃발.
치직- 칙- 득득득득득득득득득득득득
….띠링
“….시스템 알림음…. 어째서…. 지금?”
치직- 칙- 기익-
[P. P. P. P. P….-] [Pla@*^&# ‘professor’가 역사의 교차점에 도달했습습습습- dldldldl] [외부 연결, 노출, 데이터. 차단 완료.] [시뮬레이션 No.3 – 437691. 특이점에 도달.] [….Player ‘professor’ 데이터 허가 지점에 도달하지 못함을 확인.] [비밀 엄수를 위한 신경 자극 및 뇌파 교란….. . . . . Error.] [….확인되지 않은 더미 데이터. ‘# 하이드’ 보류. 일시 보관.] [디버깅 및 페이즈 이행을 위해 플레이어의 권한을 침해합니다.]무수한 문자열의 파도와, 그 속에서 굳어버린 교수의 의식이 게드로이츠의 게임 속, 가장 깊은 곳으로 끌려가며 희미해져 가는 사이.
열렬한 박수와 환호 속에, 가이낙스가 그의 대관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래된 질서를 통해, 새 삶을 이룩해 내리라! 이로써, 새 제국의 개국을 선포한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아아아
아
아
아
아
아….
.
.
.
.
.
늘어진 테이프처럼 천천히 녹아들며, 이내 완전히 정지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머니께서, 왜 천한 인간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자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타각-
“그 또한, 작은 가지가 이해하지 못할 세계의 뜻이겠지요.”
순혈 엘프, 타이레아는 누구도 모르게 교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던 세계수의 가지를 회수하며 멈춘 시간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관리자 ‘World Tree’의 요청에 따라, 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개입합니다.] [게임이 일시 정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