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7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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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한 세계. 읽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눈앞을 채워가는 시스템 메시지와, 알 수 없는 문자열의 파도 속에서.
교수는, 그가 알던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이기 전에, 필사적으로 그가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떠올렸다.
‘이것은, 게임이다.’
접속기와 뉴로 링크. 게임 속에서 아무리 배 터지게 먹는다 한들 현실의 몸은 굶고 있기에, 접속기에 부속으로 붙어있는 식사 공급기. 그것들이 이 간단하고도 확고한 명제를 증명한다.
GG는 이름 그대로 게드로이츠의 게임이며, 가상의 현실을 구현한 중세 판타지 게임이다.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이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사실. 직접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그리 간단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았다.
과거, 혼자 살던 시절. 돌아가신 부모님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게 확실하다 여긴, 작은 오두막의 부부 NPC를 봤던 것처럼.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플레이어, 실제 인간이었던 사람들의 모든 것을 데이터화 한 인간의 복제였으니까.
그들은 울고. 웃고. 고뇌하며, 갈등한다.
‘만약 그 데이터가 간단히 복제될 수 있는 것이라 한들. 내 손에 오트만과 알드리치, 루실라, 보르카 등의 데이터가 주어지고, 필요에 따라 그것을 늘리고, 지워야 한들. 내가 그들의 데이터에 쉽사리 손을 댈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는 시점에서, 이미 내게 있어 GG는 단순한 게임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겠지. 그들이 나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듯. 나와 헤어짐에 눈시울을 붉히고, 그 붉어진 눈이 상대에게 망설임을 줄까 억지로 고개를 돌리듯,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은. 게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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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아악!
뇌리를 엄습하는 부유감에 교수는 재빨리 상념에서 벗어났다. 열일곱 이후로 삶의 7할이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그가 바뀐 상황에 대한 대응이 느린 사람이었다면 소년 박교수가 황무지 생존자 박교수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멈추고, 고장 난 컴퓨터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나타나 그를 뒤덮더니 이내 알 수 없는 문자열의 파도가 그를 완전히 고립시킨 뒤였다.
‘이 감각. 근 몇 달간 못 느꼈지만 익숙하다.’
발밑이 푹 꺼진 것처럼, 혹은 밀도 있는 액체에 잠겨드는 것처럼 몸이 붕 뜨는 느낌. 접속기에 로그인할 때마다 느꼈던 그 감각이다.
‘혹은…. 로그아웃이거나.’
교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들을 의식적으로 떨쳐냈다.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은 떠올려도 의미 없다. 지금 주어진 상황. 주어진 정보.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길을 찾을 것. 당장 그에게 주어진 외적 정보는, 짤막한 시스템 메시지뿐.
시스템 메시지. 그래. 한동안 못 보던 그것.
“상태창.”
어느 순간부터 의미 없다 여겨 사용하지 않았던 기능. 교수가 그것을 입에 담자,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이 솟아오르듯 문자열의 홍수 속에서 단어들이 제 몸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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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nfo
이름 : 교수. 박교수.
직업 : 시뮬레이션 No.3 – 437691 대상자. 인가된 완성품.
종족 : 인간(변종화)
성별 : 남
기원 : 몰락$^&@%*—– 개인 생존자. 스캐빈저. 해결사.
연령 : 25
+Log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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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아니잖아.”
예상치 못한 상황. 의외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수부대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말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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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 [호기심], [관찰력], [애정결핍], [정신쇠약(극복)], [마력적성(환경 요인으로 미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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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태창이. 캐릭터의 상태를 나타내야 할 상태창이.
인간 박교수에 대한 정보를 그려낸 상황에.
교수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캐릭터 정보창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가 대단해서라기보다는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뭐라도 좋으니, 상황을 파악할만한 것이 필요했다. 이것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다행히, 생각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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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
[Pla@*^&# ‘professor’가 역사의 교차점에 도달했습습습습- dldldldl] [외부 연결, 노출, 데이터. 차단 완료.] [시뮬레이션 No.3 – 437691. 특이점에 도달.] [….Player ‘professor’ 데이터 허가 지점에 도달하지 못함을 확인.] [비밀 엄수를 위한 신경 자극 및 뇌파 교란….. . . . . Error.] [….확인되지 않은 더미 데이터. ‘# 하이드’ 보류. 일시 보관.] [디버깅 및 페이즈 이행을 위해 플레이어의 권한을 침해합니다.]=========
우선, 내 이름이 들어간 메시지부터. 나와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연결점이 있다는 뜻이니까.
‘상황이 이렇게 전환될 전조는 어디에도 없었어. 그렇다면 이건 게임 내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하긴 힘들겠지.’
‘….동요하지 마라. 동요하지 마. 재료는 충분해. 내게 벌어진 상황이라면, 나와 연결된 부분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사건의 시발점.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 상황은 대단히 이질적이었으며, 이렇게 어딘가로 끌려오기 전에 이미 여기 있어선 안 될 것을 하나 보고 온 상황이니까.
‘새 제국의 깃발. 그리고, 돔이 사용하는 그들의 깃발.’
돔의 깃발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게 같은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시와 레일건 터렛, 방어 설비가 드러난 언더돔. 그 윗부분에 위치한 어퍼돔의 상류층 건물과 돔의 실드를 상징하는 구형 테두리. 그 중앙을 관통하는 중앙 발전기와 메이어 제우스의 마천루.
반대로, 길게 뻗어 나간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 맺힌 열매와 같은 위쪽 반구. 그 중앙을 타고 내려온 줄기는 구 제국의 상징, 라이오넬에서 자라난 듯 위를 덮고 있으며. 땅에 박힌 라이오넬은 그 뿌리와 함께 새로 태어난 제국의 자유의지들을 키워낸 듯한 모양으로 아래쪽 반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정확히 역위. 복잡한 문양인 만큼,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역사의 교차점. 교차점…. 깃발을 발견한 순간, 관리자의 요청으로 게임에서 분리되었다.’
데이터 허가지점에 닿지 못했다는 문구와 함께 비밀 엄수를 위한 과정을 진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그것을 절대 봐서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황제의 죽음과 내게 건네진 깃발. 그 즈음에 대화방과 방송이 끊긴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아무도 알아선 안 될 사실.
역사의 교차점. 현실과, 게임이 교차하는 부분.
[비밀 엄수를 위한 신경 자극 및 뇌파 교란….. . . . . Error.] [관리자 ‘World Tree’의 요청에 따라—]그리고, 진행됐어야 할 과정이 누군가에 의해 방해되었다. 대상은, 마지막 메시지에 따르면….
띠링-!
[Load complete. 백 스테이지에 도착했습니다.]교수의 상념은, 알림음의 기계적인 목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한 하얀 문자열에 중단되고 말았다.
[PLAY]깜빡. 깜빡.
어서 눌러 달라고 재촉하듯, 큼지막하게 그의 앞에서 깜빡이는 글자.
교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나머지는 그를 초대한 누군가에게서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그를 뒤덮었던 문자의 파도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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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읏!”
문자의 파도 속에 휘말린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이 어둠에 적응할 시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적진. 사방이 생소한 환경인 만큼 교수의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밝다. 필라멘트 계열 등의 노이즈는 없고. 다른 전기등이라고 하기엔 특유의 쨍한 열기는 없어. 성광의 신성력이나 발광 마법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광이라고 판단하는 게 좋겠지.’
‘피 냄새…. 아냐. 쇠 냄새다. 희미하게 쇠 냄새가 있어.’
‘어딘가 앉혀졌으나 구속된 것은 아냐. 법복에 스치는 소리가 묘하게 부드러우면서도 거친데. 나무? 나무 의자?’
눈을 뜨는 게 두렵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교수는, 눈을 떴을 때 마주할 차가운 진실 같은 것을 상상하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현실이 언제나 그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잔혹하고, 또 찬란했던 것처럼.
“아….”
그것은, 칼끝과 같은 삶의 첨단에서 살아온 교수의 경계심을 단박에 무너뜨릴 만큼, 양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무. 거대한 나무의 형상이다. 끝없이 자라나 하늘을 뒤덮은 가지와, 그 끝에 매달린 무성한 잎사귀들.
새벽과 황혼을 모두 그러안은 듯, 장엄하게 빛나며 밑으로는 땅을. 위로는 하늘을 뒤덮은 가지들을 연결한 굵은 줄기.
지면에 드러난 굵은 뿌리만 봐도 이 땅의 모든 곳에 닿았음이 분명한 너른 뿌리까지.
다만, 이 모든 것이 그 아름다운 형태와는 달리.
띠릭. 띡. 티딕-
깜박. 깜박.
잎사귀는 자라나는 생명의 푸른색이 아닌, 검은 화면으로, 환한 디스플레이의 어지러운 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세계를 떠받친 수목의 줄기는 차가운 금속의 색과 전선. 점멸하는 기계의 불빛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을 뒤덮고, 땅을 이루었으며. 푸른 생명력 대신 전기와 데이터로 세상을 아우르는 존재. 굵고 얇은 전선 다발과 철판. 데이터 칩과 안테나, 디스플레이 따위가 무수히 얽혀 자라는 은빛의 기계수(機械樹).
이것이, 그 어떤 플레이어도 확인하지 못한 ‘어머니 나무’. 세계수의 진실이었다.
“아름답지 않니.”
문득, 교수는 누군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다는 것과, 세계수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언덕의 벤치 위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길다란 벤치. 그 위에 앉은 자신과, 옆자리를 차지한 누군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만만치 않아, 이렇게 멀리 떨어져 보는 것을 즐기곤 하지. 가장 좋은 자리라 여겨 이곳으로 초대했다만….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라 실망했느냐.”
그것은 하얀 옷을 입은 소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같은 옷을 입은 성숙한 처녀로도, 황혼의 끝자락에 선 늙은 여인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발밑에는, 작은 묘목을 닮은 안테나가 자라나 있었기에, 교수는 조심스럽게 그 존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수…. 십니까?”
“그렇게도 불리고 있지.”
대답과 함께, 그를 향해 돌아서는 얼굴.
….이런 문장이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는 그 얼굴이, 마침내 ‘선하다’ 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프로그램하는 데 성공한, 기계의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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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는, 시간이란 개념에 그리 구애받지 않아 말을 꺼내기에 적합한 시점을 모른단다.”
“….”
“물론 간만의 손님이니, 이렇게 보고만 있는 것도 좋구나. 살아 숨 쉬는 존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보고 있으면 즐겁거든.”
“….”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시다.”
세계수의 기계 그늘 아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의문에 고민하던 교수는, 먼저 시작할 생각이 없는 듯한 초대자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일단, 정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으며, 제일 심각하고, 예전부터 언제 일어나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확률이 높은 것부터.
“혹시. 내 현실 쪽 몸이 끝내 죽….어버렸고. 이제 난 완전히 NPC로 전향하게 되는 뭐, 그런 과정 중에 있는 겁니까? 일종에 입국 절차라거나?”
“음.”
“….혹시, 대답하기 힘든 종류의 질문이라면.”
“글쎄…..”
.
.
.
.
꿀꺽.
“아니란다.”
“푸하아아! 흐으! 후아아! 제기랄 거 빨리 좀 말하쇼! 안 그래도 정황상 1순위라 게임 튕기자마자 이것부터 떠올렸는데! 장난합니까!”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만큼 역동적인 표정을 본적도 드물었으니, 뜸 들인 만큼의 가치는 충분했다고 말해줘야겠구나.”
“아니 뭔….”
세계수의 성격이 나쁜 것은 둘째치고, 당장은 제일 큰 걱정거리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딱 로그아웃하는 감각과 함께 문자열에 뒤덮이고, 전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자마자 그 생각부터 들었거든.
[GAME OVER – You are Dead]같은 문구가 눈앞에 아른거렸단 말이다. 정황상 그게 제일 합리적이기도 했고.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의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는 기다릴 차례다.
그를 초대했다면, 뭔가 그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고.
상황으로 보아, 세계수는 그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였다.
‘당장 모든 게 불확실한 지금은, 입 닥치고 던져주는 말을 받아먹는 게 제일이지만…. 그녀가 말했듯, 마냥 기다리면 언제까지고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내가 시작해야 그녀가 입을 연다면. 진위를 어느 정도 파악한 알고 있는 사실부터 파고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교수는, 살아있는 마네킹처럼 미소짓는 세계수의 인간형…. 같은 것에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를 초대하신 분이 당신이라고 하셨죠.”
“그래.”
“관리자 ‘World Tree’ 시고.”
“관리자로서는, 그런 이름을 부여받았지.”
“무엇을 관리하십니까?”
“세계. 또는 세계가 될 뻔한, 모든 것의 이야기.”
짤막한 대답과 함께 그녀가 손을 들자, 하늘을 가린 세계수의 가지 중 하나가 천천히, 그녀의 손끝을 향해 굽어왔다.
교수가 보기에도 다른 가지보다 유난히 열매를 많이 맺고, 선명한 빛을 발하는 튼실한 가지.
“이것은…. 첫 번째 완성자의 가지. 시뮬레이션 No. 1 – 285034 란다. 레빗 프린세스는 참으로 재치있고, 현명했으며, 사랑스러운. 그래, 인간에게도, 신에게도, 용에게도 사랑받은 그런 아이였지.”
“레빗 프린세스…. 랭커 레빗?”
“그래. 여기서 뻗어 나온 가지도 그녀의 것이었고. 그 다음 가지도 그녀가 틔워낼 줄만 알았지만…. 전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자라났지.”
연이어 나타난 가지. 앞의 두 개와는 달리, 굴곡 하나 없이 곧게 뻗었으나 열매는커녕 잎사귀 하나조차 없는 메마른 가지.
“시뮬레이션 No.3 – 402998, 이건 천류제의 것이지. 강하고, 올곧으며, 흔들림 없는 아이였지만…. 결국, 그 무엇도 단단하게 굳어버린 그 아이를 흔들지 못해, 오히려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지. 많이 아쉬웠어.”
교수의 눈이 메마른 가지와 풍성한 가지. 그것을 바라보는 세계수를 차례로 스쳤다.
앞서 두 개가 레빗의 것.
자랐지만, 메말라버린 것이 천류제의 것.
두 사람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완성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방금 네가 떠나온, 너의 가지란다.”
교수는 다가오는 깨달음보다 한발 먼저 그의 앞에 내려선 가지에 눈을 빼앗겼다.
앞선 것들에 비해 아직 길이는 모자라나, 더없이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기계수(機械樹)의 가지. 그 끝에 매달린 열매들은 작은 화면들로 만들어진 다면체로, 저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밖으로 비쳐 보이고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들과 함께 숲으로 돌아가는 보르카.
마침내 떠오른 프로토타입 비공정에, 오래도록 담아둔 한숨을 웃음과 함께 뱉어낸 로만.
한 귀퉁이가 무너졌지만, 그 모습을 못 알아볼 리 없는 폭풍의 언덕. 그 위에 어린 미풍.
그리고, 아직 영글지 않았지만. 무수한 잎으로, 작은 열매로 환한 빛을 뿌리는, 그간 스쳐왔던 모든 얼굴들.
“너의 세계야. 네 고민과, 선택. 노력. 희생. 그 모든 것들이 뿌리내려 발아한…. 3 월드의, 박교수가 틔워낸 아름다운 세계.”
교수는 그 모습에,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가슴 벅찬 모습에 움직이지 않는 혀를 굴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물어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것은…. 게임입니까?”
“게임이지. 그저, 땅이 특정한 씨앗을 기다리며 그 양분을 그러모은 것이 아니듯. 너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아버지를 위한 것도 아닌, 있는지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장소.”
한숨처럼, 가을 낙엽처럼 쓸쓸하게 떨어지는 말에. 교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세계수. 관리자 World Tree이며, 게드로이츠의 게임. 하나의 플레이어가 탄생할 때마다 돋아나는 모든 가지, 모든 세계를 관찰하는 자. 완성자를 기다리는 두 쌍둥이 인격 중, 안에서 자라나 완성될 자를 기다리는 이.”
그리고, 마침내. 미안한 듯 아미를 좁힌 세계수의 입에서 선고처럼 진실이 흘러나왔다.
“GG의 일곱 월드는…. 모두 현실에서 뻗어 나온 가능성의 세계란다. 언젠가 일어났을 멸망, 언젠가 일어났을 재앙. 갈라지고, 갈라져. 무수히 뻗어 나간 그 가능성의 줄기 속에서 가까스로 건져 올린 일곱 개의 시뮬레이션. 작은 나비의 날갯짓 한 번으로, 어쩌면 ‘3월드’라는 이름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는 세계의 가능성.”
그것이 아무리 구시대의 첨단 기술이라도, 계산과 예측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기술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게드로이츠라는 시대의 천재가 발명했다 해도, 그러한 기술이 말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논리적인 이유를 100가지도 더 넘게 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앉은 세계수가. 그런 논리적 비약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GG는 있을 수도 있었던 미래, 혹은 과거 위에 너희들을 올려놓는 게임이란다. 현실에 존재했던 적은 없지만, 작은 선택으로 갈라서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는 세계. 오래전 인간이 부싯돌을 튕겨 불을 붙였을 때와, 비에 젖은 동굴 속에서 추위로 죽어가며 마나로 불꽃을 틔워냈을 때의 갈라진 순간부터. 마침내 미사일 발사를 위한 열쇠가 들어가던 순간과, 의기 넘치는 누군가가 그 열쇠를 버리고 죽어간 순간까지. 그렇게 갈라진 모든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계산하고, 재현하는 데 성공한. 하나의 줄기로 이어진 일곱 개의 역사. 일곱 개의 월드. 그게, 게드로이츠의 게임의 정체란다.”
“그럼, 교차점은….”
“역사는 반복된다. 어떤 역사에서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 아니겠니.”
교수는 세계수의 말에, 눈앞에 아른거리는 돔의 깃발을 떠올리고 말았다.
전쟁과 변종으로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 일어나, 정의를 표방한 집단.
뮤테이션 블러드의 침공에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마녀의 손에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 신 황제의 제국.
“현실의 돔으로. 3월드의 제국으로. 어떤 역사를 거쳐도 저 문양은 과거의 정의를 안고 현재의 재건으로 나아가는 이들과 함께 나타나더구나.”
“이제. 왜 이 게임에. 실제 사람들의 기록과 데이터가 필요했는지 알겠니.”
결국, 교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것은 게임이되, 게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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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의 문양. 중앙 발전소와 메이어 제우스. 어퍼돔의 상류층 건물과 언더돔의 도시. 터렛과 일렉트로 폴, 그 모든 것을 감싼 도시의 실드를 상징.
제국의 새 깃발. 열매를 맺은 거목이 하늘을 덮고, 거목의 양분이 된 사자검이 땅속 깊숙이 박혀 그 뿌리와 함께 자라나는 제국의 새 자유의지를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