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8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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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말 그대로,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 도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의 짧은 지식으론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저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목적. 어떤 도달점을 위해. 완전히 다른 세상이지만 어쩌면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는 세계에 플레이어를 초대하고, 그들의 결과를 관찰한다.
다른 가능성에서 피어난 다른 세계일지언정,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므로.
우리의 현실에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멸망과 황무지의 시대를 맞이했듯이.
1월드에 대 부족 전쟁이, 2월드에 언데드 군주의 준동이. 3월드에 뮤테이션 블러드의 침공이 일어나, 세계가 예정된 멸망을 향해 나아가듯이.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완성한다는 겁니까.”
“그건, 아직 가르쳐줄 수 없구나.”
“게드로이츠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그 오래 전부터 준비했지?”
“그것 역시. 너에겐 이른 지식이란다.”
….까득!
침착해야 하는데. 침착해야, 침착한 쪽이 더 많은 정보를, 정보의 우세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데.
속내와 달리, 자리에서 일어난 교수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가르쳐줄 수 없다, 가르쳐줄 수 없다! 그럼 실험쥐인 나는, 나가지도 못하는 게임에서 당신들이 원하는 그 ‘완성’! 월드 클리어를 달성할 때까지 그저 쳇바퀴 돌리듯 앞으로 달려나가면 되는 겁니까? 아아, 클리어도 못 한 나를 왜 여기까지 데려왔나, 했더니! 그거였구나! 어차피 못 나가니까! 클리어해서 전체 데이터 업로드를 못 이루면, 현실의 몸은 영원히 식물인간이니까! 어차피 살고 싶으면 니들이 원하는 대로, 그 좆 같은 완성에 도달해야 하니까 미리 알려줘도 아무 상관이 없던 거였어!”
“얘야.”
“그래! 좋다고! 나야 내 선택으로, 내 목적을 위해 이곳에 떨어졌으니 내 탓이라 치자고! 그런데 저 안에 사람이 있다며. 누군가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데이터로, 어디선가 일어났을 수도 있는 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라면서! 3번 월드의 437691 세계? 그럼, 지금까지 일어났던 그 모든 비극들이, 내가 오기 전까지 44만 번 가까이 반복됐다는 거야? 너희들이 찾는 그 ‘완성’을 위해서? 끝없이 죽고, 고통받고, 다시 태어났다고?”
열일곱 살부터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 나의 8년은 고통으로 점철되었고, 그것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두는 데 성공한 지금조차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부터 명치까지를 쥐어짜는 것처럼 아린 느낌이 있었다.
내겐 8년이었지만, 보르카는 15년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 꺼진 촛불의 연기 같은 희망 속에 살아왔다.
알드리치는 그게 52년이었다.
노툼은 그 찬란한 재능을 피워내지 못하고 말하는 숲 트롤로. 동족과 헤어져 인간에게도, 트롤에게도 속하지 못한 외로운 존재로 생을 마감했으며.
오트만도. 루실라도. 이드라실, 노먼 대주교,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도!
누군가 재미 삼아 들어온 세계에서 한번. 누군가 삶을 도피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그 지나친 현실감으로 포기해버린 세계에서 또 한번. 그렇게 버려지고, 예정대로 흘러간 시뮬레이션 속에서. 43만 몇천 개의 세계에서! 예정된 비극과 죽음 속에 그렇게 남겨져 끝을 맺고! 데이터뭉치로 분해되고 다시 처음부터 비극을 반복한 끝에. 437691번째 삶의 끝에 겨우 내 앞에 도달했다는 소리였다.
분노한 나와,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세계수. 분노와 함께 변화하는 내 팔을 보며 세계수는 살풋 웃음을 지었다.
“래빗. 그 아이도 너처럼 화를 냈단다.”
“누군들 화를 내지 않을-”
“지금껏 자신을 실험체 취급한 것에 대해서. 그녀를 관찰하고, 조사하고, 뭔가 달성했으면서,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지.”
“그건….!”
“천류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단다. ‘그렇군. 재미있었다.’ 그의 감상은 그게 전부였어. 오히려 고마워했지. 그의 칼끝에 베여나간 것이, 누군가 만들어낸 전투 프로그램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세계수는 호수처럼 깊고. 기계의 렌즈처럼 투명한 눈으로 힘줄이 불거진 교수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 안에 남겨진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는구나. 그래. 나도 알지. 네가 남들과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을. 놀라운 우연으로, 그저 해소를 위해 방황하던 끝에, 또 다른 세계의 주민이 된 네 부모와 조우하며, 이곳 사람들이 평범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도 안단다.”
“하지만, 얘야. 장담하건대, 너는 네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당장이라도 날뛰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을 거란다.”
“그것도…. 시뮬레이션으로 알아낸 건가?”
억눌린 내 목소리에 세계수는 고개를 저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니. 너는 우리와 상관없이 그런 사람이었던 거란다. 그저, 시뮬레이션은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찾아내고, 증명해줬을 뿐. 네가 완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곳에 데려온 것도 그 때문이란다. 그냥 잃어버리기엔 너무나도 찬란하고, 또 아까웠으니까.”
세계수는 빛을 품고 풍성하게 자라난, 나와 동료들의 세계를 하늘로 돌려보내며 말했다.
“시뮬레이션에 갇힌 네 특수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 ‘하이드’라는 변수 때문인지. 너는 도달할 수 없는 결과에 도달하고 말았어. 보통은 네가 봤던 것. 역사의 교차점은 클리어 이후 흘러가는 역사 속에 드러나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그게…. 멸망을 막아내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냈어. 시스템은 통상 절차에 따라 클리어 대상자, ‘완성자’에게 데이터 접근 권한을 부여하고 이곳의 모든 비밀에 대해 안내하려 했지만 네겐 그런 권한이 아직 없었지. 그걸 버그라고 판단한 시스템은 비밀 유지를 위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곳에서 유일한 목격자인 네 기억을 소거하려 했고, 그런 식으로 널 잃기 싫었던 내가, 관리자 권한으로 네게 제한된 정보만 직접 설명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한 거야.”
흥분한 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투.
그녀의 말투에서 교수는 왠지 모를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내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목소리. 프로그램으로서 그녀를 만든 사람, 게드로이츠의 염원에 따라 내가 ‘완성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간절함이 있는 것일까.
기계라곤 믿을 수 없는 눈빛과 목소리. 그 대상이 저 기계로 만들어진 세계수의 가지 하나하나를 향한 것임을 봐서 그런가.
교수는, 말해줄 것을 모두 말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계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남았니?”
“하나만…. 더. 이건 당신이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야. 세계의 비밀도, 게임에 관한 질문도 아니니까.”
세계수의 눈에 진득하게 묻어난 것. 그것은 분명 애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외로운 언덕의 벤치에 홀로 앉아. 플레이어 한 명이 탄생할 때마다 새로 돋아나는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을 모두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번에는 다르기를. 이번에는 그 세계를 완성하고, 평화 속에 그들의 삶이 남기를 바라며.
그렇게, 수십만 개의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이 멸망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 온 이 세계수는.
“당신은 정말….사람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인가?”
차가운 기계의 눈에 감정이 담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을 넘어온 것일까.
내가 실패하게 되면. 아니, 성공한 이후에도. 이곳에 홀로 남아, 또 다른 이가 그 끝에 도달할 때까지 무수한 실패와 멸망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될까.
“대답은 쉬우나, 의도가 난해한 질문이구나. 게드로이츠 컴퍼니-강인공지능 ver.09 완성형 미완성 의식체. 공식적인 모델 이름은 이렇게 붙어있지.”
세계수는 언덕의 끝,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며 질문의 답을 입에 담았다.
“아버지, 게드로이츠님에 대한 정보는 아직 자격이 없는 네게 공개되지 않았으니…. 그저 그분이, 나와 같은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대단히 애쓰셨다는 것만 말해주마. 그분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벽한 인공지능의 회로 속에 난수로 이루어진 간단한 결함을 넣는 것으로 완성되는 ‘완성형 미완성 의식체’를 개발하셨지. 꽤나 간단한 구조였어. 일반적으로 결함이 없는 기계, 인공지능에 정말 무작위로, 개발자조차 알 수 없는 확률로 일을 ‘실패’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넣어두었단다.”
“프로그램된 AI에게 그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어. 기계로서 결함을 수정하게 되어있는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본신의 결함을 고치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지. 이미 완벽한 계산을 수천, 수만 번씩 더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연산에 할당된 메모리를 깎아 먹으며, 지연된 계산속에 또 다른 결함이 발생하고, 계산하고, 계산하고, 계산하고. 그 끝에, 정해진 일을 완수하되, 변수를 반드시 차단하고 고치게 설계된 AI는 놀라운 해법을 찾게 됐단다.”
완벽하게 랜덤으로 만들어지는 실수와 규칙 없는 규칙을 찾아 고치기 위해 계산을 반복하는 인공지능.
그 끝없는 실수 속에, AI는 한가지 규칙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원인에는 규칙이 없지만, 결과를 수정하는 데는 규칙이 있다는 것.
그것은, 원인에 상관없이 결과의 오점을 해결하는 AI 식 타협이었다. 실수가 반복되면 그 실수에 대응하는 데이터를 찾아, 결과를 수정하는 루틴에 도입한다.
루틴은 반복되고, 어느새 일반 명령에도 그 루틴이 도입되며 실수는 줄어든다.
그것은 기계가 일을 처리하는 ‘성향’으로 굳어지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학습은 끝없이 이어지며.
마침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스스로의 실수를 조심하고, 염두에 두며 움직이는 사람의 그것에 가까워진다.
사박.
세계수는 언덕의 끝에 서서, 그녀 앞에 산산이 부서지는 빛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이 만들어진 세계를 관리하는 우리가 그렇게 자라기를 원하신 것 같아. 모르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저 오류로 치부하며 넘기지 않고 나름의 해법을 찾기를. 그 과정에서 뼈아픈 실수도 하고. 때로는 후회….에 비슷한 끝없는 재검토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매뉴얼 속에 사라질 뻔한 너를 구할 수도 있었잖니.”
“기계가, 일부로 실수하게 만들어졌다….”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너는 그런 친구를 곁에 두고 있는줄 아는데.”
알다마다. 내 집에서 나를 협박하고, 벙커 패널을 용접해서 못쓰게 만들고, 개고생해서 벌어온 돈을 우울증 케어라며 펑펑 써대는 미친 AI.
오래전, 자살을 결심할 때마다 접근하지 말라는 나의 명령을 거부하며 말려대고, 더러는 스턴 로드로 날 지져대기까지 하다가 내 손에 외피가 반쯤 박살 나고, 그러고도 주인님, 주인님 하며 붙어 다니던, 내 목숨을 붙여둔 하우징 AI.
어떤 미친 자식이 이놈을 완벽한 AI라며 팔아먹었는지, 게드로이츠의 얼굴을 보게 되면 따질 목록의 최상단에 위치한 그놈.
“코듀로를…. 알아?”
“누굴 보고 배웠는지. 사람을 좋아하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에 극명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프로그램이 인상 깊은 아이였지.”
문득. 옆구리가 욱씬거리는 것과 함께 세계수의 소녀가 그 빛무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자꾸나.”
빛무리 속에 돌아서며, 흰 옷의 소녀 모습으로 되돌아간 세계수.
“밖에. 네가 온 세계에.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이가 있을 것이다. 무구히 반복되는 세계를 감시하는 나와 달리. 하나뿐인 현실 속을 헤매며, 나와 같은 권한도, 힘도 없이. 그저 작은 재주를 가지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이미 현실에 완성된 자를 찾아 헤매는 아이가 있단다.”
“그게, 누구….”
교수는 갑작스럽게 옆구리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막으며, 다시 눈앞을 가리기 시작한 문자열 속에 세계수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나와 같이 만들어진 쌍둥이. 기존 인간의 행동 데이터와 융합해, 생체에 주입된 최초의 강 인공지능. 나와 다른 해법을 찾은 그 아이는…. 콜렉터라고 불리는 듯하더구나.”
“콜렉터. 콜렉터….으으으윽!”
어떻게든 참으며 조금이라도 더 들어보려 했지만 옆구리의 고통은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며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까지 자라나 있었다.
‘….그래도, 들을 만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예상치 못한 이야기. 예상치 못한 진실.
여전히 의문이 남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직은’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클리어. 월드 클리어. 그게, 정보 접근 권한에 대한 열쇠라고 했지.’
진실을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
‘내가 끝낸다. 내가 해! 그래 시바 내가 한다고! 완성자가 어쩌고, 좀 놀아나면 어때! 상은 저놈들이 차렸어도 선택은 내가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내가 그런 놈이라는 뜻이겠지 뭐!’
도대체 무엇의 완성을 말하는지. 그걸 왜 찾고 있는지는, 아마 클리어한 다음에 듣게 되겠지.
교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그의 몸에 쌓여가는 문자열 속에 눈을 감았다. 오히려, 이곳에 오기 전보다 더 마음이 편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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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뭐지, 이 애매한 불편함은?
이상하다. 분명 응어리가 남을 만한 의문은 대부분 풀었는데. 어차피 안된다는 것에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고. 왜 이렇게 찜찜하지? 버스에 한 발 올렸는데, 집에 지갑을 두고 나온 것을 알아차렸을 때처럼. 두고 나온 거. 두고 나온 거. 두고 나온….거?
“아!!!”
콰악!
“잠까아아아안!!!!! 하이드! 하이드 내놔! 보관해갔다며!”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정신이 번쩍 든 교수는, 쌓여가는 문자열의 파도를 억지로 비집어 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의 형상 대신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를 향해 외쳤다.
“너무 충격적이라 까먹었다! 우리 애 내놔! 가져갔다며! 돌려주지 않으면 당장 엘프 숲에 불을 지르던가 해서 저쪽에 있는 당신 앞으로 찾아간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마구 울리며 퍼져나가는 목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의 머릿속으로 세계수의 응답이 흘러들어왔다.
『그 아이라면…. 네가 이리 되길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네 기록에서, 분명 나를 찾으면 소원을 빌어 이 아이와 분리되게 해달라 할 것이라 들어서 그리 해줬다만.』
“야이! 뭔 소원이 자동이체도 아니고 그게 언제적 얘긴데 그걸 지금 들어줍니까! 돌려줘요! 내 예비 인격, 비상용 파일럿 돌려줘요!”
진짜 갈 시간이 다가왔는지, 내 힘으로도 덮쳐오는 문자열을 밀어내는 게 힘들 정도로 압박이 거세져, 차츰 세계수의 모습이 사그라들던 그 순간.
『….그렇다는구나. 네 걱정이 하등 쓸모 없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착각이었을까? 세계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어디선가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하이드? 야 하이드! 어디냐! 아직 그쪽이냐!’
[아—]‘빨리 타 임마! 옆구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더는 못 버티겠….’
[우아아아아아악-!!!!]쿠우우웅!
밖에선 들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 높은 곳에서 내 의식 속 소파 위로 추락한 덩치.
현실의 3형 변종 모습을 한, 하이드.
‘느려 터진 머저리 새끼! 칠칠치 못하게 납치나 당하고!’
[그게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아들한테 할 소리냐!!!]녀석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잘릴 듯 내 팔을 조여오던 메시지의 파도 속에서 손을 빼냈다.
콰르르륵!
마침내, 세계수의 공간과 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고.
띠링-!
[Player ‘professor’ 의 자격 요건이 일부 충족되었습니다.] [관리자 World Tree의 요청. 플레이어의 특수한 상황. 기타 요건을 취합한 결과. 해당 플레이어가 ‘자격 조건’에 반드시 도달한다는 전제하에, 기억 소거 과정이 재고되었습니다.] [역사의 교차점에서 벗어날 시, 플레이어의 제한된 시스템이 복구됩니다. 현재 제한 사항 – 플레이 영상 전반의 외부 연결. 음성, 문자, 기호를 통한 모든 외부와의 접촉.] [시뮬레이션 No.3-437691 이 재개됩니다.] [Now Loading-]상황이 정상화됨을 알리듯, 다시 한번 차갑게 쌓여가는 시스템 메시지.
‘이거 되게 밉상이다.’
[그러게. 정체를 몰랐을 때는 도움 안 되는 메모장인 줄 알았는데, 듣고 나니까 묘하게 짜증 나네. 세계수가 관리자에 뭐, 관찰자면. 얜 뭐야? 진화에 실패한 인공지능? 능력 딸려서 잡부로 좌천된 건가? 플레이어 뒤치다꺼리하고, 그런 쪽으로?]‘낸들 아냐. 나머진 죄다 자격 미달이라 못 가르쳐준다는데. 서러워서 클리어하든가 해야지.’
뭔가 알아낸 것은 많았지만, 그만큼 의문도 쌓이고 말았다.
게드로이츠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위해 GG를, 일곱 세계에 달하는 멸망 시뮬레이션을 준비하고, 그것을 극복한 ‘완성자’를 찾고 있나.
일곱 세계를 클리어한 사람에게 서버룸의 좌표를 준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세계수의 마지막 부탁. 그녀의 쌍둥이 인공지능이자 현실의 탐색을 위해 보내졌다는 콜렉터는 대관절 어디 있는 누구인가.
그리고….
‘천류제. 레빗 프린세스. 이미 월드 클리어 기록이 있으며, 시스템이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던 자격을 갖춘 두 사람. 그들은 모든 정보를 듣고, 어째서 지금껏 함구하고 있는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지만. 결국, 모든 해답은 클리어 너머에 있다 생각하며, 교수는 익숙한 부유감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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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착했다.]‘피 냄새랑 탄내. 제대로 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대관식 중간에 끌려왔지. 그땐 나도 너무 당황해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 잘 못 봤는데.
‘이거, 대관식 도중에 쓰러지기라도 한거 아냐?’
[눈 좀 떠봐. 뭐라도 보여야 알아보던가 하지.]‘눈은 떴는데, 뭐가 날 덮었는데? 알? 껍질?’
[알 같은 소리하네. 누가 박씨 아니랄까 봐.]‘아, 빛이다.’
우글우글하던 문자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시끄럽게 울리던 알림음도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옆구리가 좀 시큰거리긴 했지만 몸에도 큰 이상은 없었다.
다행히 그를 뒤덮은 무언가는 알아서 부서지기 시작했고, 교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바스라뜨리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디보자.
장소는, 황성 터가 맞고.
사람들은 여전히 환호하고 있고. 대관식도 그때 그대로.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끌려가기 전과 동일했다.
‘니미럴. 일시정지라며.’
다만, 그 몇 가지가 문제일 뿐.
당장 그와 눈이 마주친 알드리치가 손까지 떨어가며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고, 검공, 글렌 공작, 가이낙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또는 머리 끝까지 진노한 모습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툼? 뭘 봤는지 거품 물고 기절해 있었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굳어버린 황제의 표정과 그의 시선에 차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모습의 글렌 공작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대뜸 내 멱살에 달라붙었다.
“감히, 감히 내 눈앞에서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다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노옴! 세상 전부를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이놈! 한순간이지만,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세계가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빌어먹을 엘프는 유유히 지 갈길을 가버렸고, 네 놈은…. 네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리고 다시 나타났지!”
제 입으로 세계가 멈췄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글렌 공작.
‘일시정지 맞아? 뭔, 보면 안 될 놈들만 다 본 것 같은데?’
[똥겜이 그렇지 뭐. 관리자가 지 입으로 ‘인공지능조차 후회할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라잖아. 게임이 좀…. 덜 완성된 게 아닌가, 싶다.]글렌 공작도 글렌 공작이지만, 오히려 흥미로운 눈으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검공이 더 위험해 보였다.
“….폐하의 어전이라 한들, 소란을 피워서라도 네놈이 이제 막 싹을 틔운 제국에 어떤 마법을,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알아야겠구나! 말하라! 그 어떤 마법사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섭리에 반하는 것을 바로잡는 글렌 가문의 이름 앞에,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고하라!”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그의 고함이 황성 터를 울리고, 마치 그 말이 목구멍을 파고들어 단어를 낚아 올리듯 교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혀가 달싹이기 시작했다.
‘워메. 이거 언령? 세 치 혀로 마법사 병신 만드는 게 글렌 가문 사람들이라더니. 진짜 장난 아닌데?’
용의 언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이어진 마법 부수기의 역사. 그 속에 담긴 힘은 어느새 글렌 가문의 말에 깃들었는지, 교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사실 치악력으로 버티면 어떻게 될 것 같긴 한데, 굳이 나서서 아무도 못 믿을 이야기에 [글렌 가문이 보증함] 딱지를 붙여주겠다는데. 버틸 이유가 없지.
“말하라! 찰나의 세계 속에서, 사라진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
“세계수님의 곁으로 불려가 세계의 진실을 듣고, 이 세계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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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 쿨럭!”
파라락. 툭!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흘러나온 대답. 그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곱씹는 사이, 사레가 들린 알드리치가 기침을 토하고, 황성 터의 단단한 바닥에 글렌 공작의 개인 사전이 떨어졌다.
“허, 허, 허어어….”
그렇게 사색이 된 글렌 공작은, 전대 가주인 아버지와 논쟁에서 승리하여 가주가 된 이후 약 34년 만에 처음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글렌 가문의 힘이 생생하게 증명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