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99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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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의 그 ‘일시정지’를 눈치챈 사람이 꽤 됐는데, 글렌 공작 덕분에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것도, 글렌 공작가의 힘이라는 제법 괜찮은 보증수표가 붙어서.
갑작스레 노호성을 지르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는 글렌 공작의 모습에 모여든 사람들이 당황하긴 했지만 황제 가이낙스가 진정시키자 어떻게 무마되기도 했고.
살짝 문제가 있었다면. 그 소란을 진정시키는 방식이었다고나 할까.
“그거, 꼭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숨겨도 모자랄 판에, 거기서 날 앞으로 부르다니….”
“그대가 짐의 대관식을 망친 것은 피차일반이 아닌가? 가장 위엄있어야 할 황제의 대관식에, 그런 동네 술집에서나 있을법한 소란을 일으키다니. 그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해두지.”
글렌 공작이 어버버하며 떨어져나간 직후, ‘세계수? 성자님이? 부탁을 받아?’ 같은 소리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가이낙스는 다시 한번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초대 황제가 제국의 주인이 되기를 청원하였을 때. 아직 사자검이라 불리기 전, 라이오넬 앞에 맹세할 때! 그 맹세의 참관인으로 자리한 세 명의 증인이 있었노라! 그 중 하나는 친우였던 트롤 대주술사 아그탁이었으며! 하나는 그의 반려이자 명망 높은 귀부인, 아나스타시아 아그단이었고! 마지막으로! 숲 엘프의 장로가 그 맹세의 참관인으로서, 운명과 운명을 엮는 계약의 증인으로 자리했노라! 나는, 사자의 운명에서 벗어나 고목의 제국으로 다시 태어날 이 나라의 중심에서 다시 한번 맹세를 올리니! 그날과 같이 증인 셋을 청할지어다!’
다소 즉흥적이긴 했지만 제국의 중심에서,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을 입에 담는 그의 말에는 단순한 설득력 외의 힘이 서려 있었다.
그 외침에 가장 먼저 반응한 노툼이 벌떡 일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아니 정말로 정신을 잃고 선조님의 귀신이 들려서는 빨간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서 주술사의 자리를 채웠고.
상황을 아는 사람들의 조용한 응원과 눈빛, 묘한 압박을 이기지 못한 루실라가 이를 꽉 물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 귀부인의 자리를 채웠으며.
마지막으로, 당장 세계수의 부름을 받았다고 공표가 된 데다, 지금도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옆구리에 세계수를 상징하는 푸른 문양이 박힌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니까. 500년 전 맹세에서 엘프 장로님이 맡았던 자리를, 당장 자리를 비운 엘프 대신 세계수가 떡하니 도장 찍어놓은 내가 하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뜻에 따라주어 잘 해결되었군. 고맙다. 새 황조로서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런 오래된 것을 이어받아 정통성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니 말이야. 제국의 계약마법이 세 명의 자격 있는 증인에 의해 효력을 발휘하는 것도 다 제국의 오래된 설화와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이지. 제국의 모든 법과 관습에 구 제국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네. 비록 그 힘은 사라졌으나. 아니, 사라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형태로나마 남아있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처지가 아니겠는가. 도와줘서 고맙다, 성자.”
“사실, 딱히 도와드리려고 앞에 나갔다기보다는…. 그때 앞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저-기 계신 저분이 막 무섭게 검을 딸깍거려서 앞으로 도망간 것뿐인데요.”
뭘 어쩌겠는가. 당장 마스터 오브 마스터, 검공 다이크 슈왈츠님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이 나이 먹고 이렇게 흔들린 것도 오랜만이거늘….’ 같은 소리와 함께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검사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개인의 소우주를 완성시키는 존재인 만큼, 찰나이지만 세계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내가 몹시, 대단히 흥미로우셨겠지. 당장 칼 한번 꼽아보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과거 증인으로 한번 섰으며, 이번에도 그 자리를 기꺼이 맡은 대주술사 아그탁- 의 귀신이 들린 노툼.
얼굴이 새빨개져선 가이낙스를 힐끔거리며 ‘무,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같은 소리를 남몰래 속삭이는 루실라.
피가 새어 나오는 옆구리를 틀어막고 도망치듯 앞으로 달려 나오는 나까지.
얼추 500년 전의 증인. 주술사, 귀부인, 엘프 대표자의 자리를 대체한 우리 셋이 앞으로 나서고. 그렇게 가이낙스가 500년 전의 그 순간을 재현하는 것으로 대관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하고. 뒤늦게 도착한 검가의 기사들은 재현된 개국의 전설에 감동하고. 수도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 인근 영주들이 차례로 수도에 방문하여 참상을 확인하고, 제국의 바뀐 주인과 마주하고, 충성을 맹세하고.
수도를 재건할 인부들이 도착하고, 나무망치와 수레. 금속 못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 가득 울릴 때까지.
마녀와 저주로 얼룩진 수도를 달릴 때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더니, 편안한 시간은 봄날 눈 녹듯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대관식으로부터 3일 뒤. 나를 비롯한 다른 일행이 모두 완전히 회복한 지금. 수도에서의 일도 다 끝났으니,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식량.”
“챙겼어.”
“어포.”
“가이낙스가 챙겨줬어. 그냥 주워 먹다 다 먹어버릴 정도로 괜찮은 걸로.”
“가이낙스가 아니라 황.제.폐.하! 폐하께서 용사님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건 잘 알지만, 제위 초기인 만큼 다른 사람들의 귀에 황제 폐하를 함부로 부르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는 너는 ‘가이낙스~ 가이낙스님~’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더니.”
“그! 저, 그건….!”
“알지 알지. 무려 황제 폐하의 연인이자 그의 운명을 인도한 ‘텔드랏에서 온 여인’이며, 폐하의 즉위를 증명한 세 사람 중 귀부인, 그 반려가 차지해야 할 자리에 이름을 올리신 루실라 아에드란 님이시니 말이야.”
능글거리는 교수의 말에 루실라는 얼굴을 붉혔지만, 이제는 부정하지도,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몸짓도 하지 않았다. 지난 3일간 루실라는 우리 일행보다 가이낙스의 곁에서 더 바쁘게 움직였으니까. 3일 사이에 아에드란 가문에서 나한테 편지가 왔다. 뭔가 복잡한 수식어가 잔뜩 들어있긴 했지만, 요약하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호의를 입어,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산하는 중이다.’ 정도. 그 집 아저씨가 되게 좋아하는 게 편지에 막 보이더라고. 하긴, 집 나간 딸애가 제국의 황후님이 되셨는데. 그것도 날치기로 사고 쳐서 된 게 아니라, 정통성이나 업적, 그 무엇하나 떨어지지 않는 반석처럼 단단한 위치에 올라서. 이건 영지 대문에 플래카드 걸어놓고 소 한 마리 잡아야지.
[흐흐흐흐. ‘축! 집 나간 우리 딸, 제국의 지존을 사로잡다!’ 정도는 되려나?]‘농담 아니야. 동네 시골 잔치처럼 그렇게 하진 않아도, 지금쯤 아에드란 가문은 결혼 소식을 사교계에 전한다는 명분 하에…. 스팸 메일마냥 편지를 뿌려대며 자랑질을 하시는 중일 거다. 텔드랏의 고위 귀족부터 숲속에 틀어박혀 사는 버림받은 방계 귀족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한테는 다 전했을걸. 아이구, 이를 어째! 딸내미 하나 신경 못 쓰는 사이에, 걔가 제국의 새 황제 되시는 분을 사위로 만들어 왔네? 이제 우리 가문은 제국의 외척이다- 부럽지- 느그 딸은 집에서 머리나 만지작거리고 있지- 뭐, 이런 내용을 한가득 담아서 말이야.’
음. 역시 로드릭 가는 길에 텔드랏에 한번 들러야겠다. 소개팅도 이렇게까지 잘되면 상다리 휘어지게 한 상 내어주는 게 예의지. 마르지 않는 황금이라 불리는 가문의 답례. 기대가 되는군.
“거기, 길 막고 있지 말고 비켜요, 비켜- 으헉! 서, 성자님! 아이구 이거 죄송합니다! 자재가 앞을 가려서 성자님인 줄도 모르고….”
목재가 잔뜩 담긴 수레를 밀던 인부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겨울이 가고, 하늘은 언제 아마겟돈 뺨치게 흉흉했냐는 듯 청명하기 그지없고.
집도, 가족도 잃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일어서듯, 새 터전을 만드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는구나.”
“그렇네요.”
“슬슬, 이제 우리도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내 말에, 수레에 실을 짐 목록을 살펴보던 루실라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은 수도의 귀족들은, 황성 터에 지어진 천막 황성에서 황제와 앞으로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자리로.
사용인 도시의 사람들은, 그 주인이 있는 곳이나, 그들을 위해 재건되는 수도에서 할 일이 있는 곳으로.
황제의 반려…. 후보 중 부동의 지지율을 자랑하는 압도적 1위, 루실라님은 황제 곁으로.
덜컹!
“알드리치. 정말 그것만 들고 가도 되겠습니까? 뭐 먹을 거라도, 하다못해 식수라도 좀 들고 가시지.”
“아냐. 늙은 몸에 들어갈 식량이 얼마나 된다고 지고 가나. 먹어서 내는 힘보다 들고 가는 데 들어가는 힘이 더 들어.”
악령을 잃고, 흑마법사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혼술사로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알드리치는, 또 다른 영혼이 기다리는 곳으로.
“그럼…. 짐도 다 실었고. 이제 정말 갈 시간이군.”
그리고, 아직 멸망의 위협을 앞둔 세계를 위해, 할 일이 많으신 성자님 일행은, 또 다른 위험. 악이 도사리는 곳으로.
산더미 같은 짐이 실린 수레와 교수 일행. 작은 봇짐을 진 허름한 로브의 알드리치를 번갈아 보던 루실라는, 매달리듯 그들의 짐 목록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폐하한테 별다른 요청 안 하고 가셔도 되는 거예요? 이곳에 온 목적은 분명, 제국의 높으신 분에게 잘 빌붙어서 로드릭의 전선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그런 거라면 이미 차고 넘치게 얻었으니까 별말 없이 가는 거지. 나중에 두고 보라고. 제국 회계장부 앞에 앉아서 내 이름을 씹으며 치를 떨 루실라 네 얼굴이 훤하니까.”
“교수님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각오해야겠지만. 그럼 엘프는. 여기 정령 풍선 두고 가시는데, 이제 엘프 숲으로는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아, 그거. 맞아.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기념품으로 가져가. 좀 허름해도 폭풍의 언덕 마법사들이 만든 물건이니까 예비 황후님 품위를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닐 거야.”
황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필요한 것은 분명히 받았다.
‘제국은 긴 잠에서 깨어났으니 이제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비록 수도가 이렇게 폐허가 됐지만, 결국 수도를 제외한 다른 영지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으니 말이다.’
‘영지에서 뮤테이션 블러드의 흔적을 발견한 영주들은 방비를 강화하고 군량을 비축하겠지. 나는 공식적으로 제국이 제 3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공표할 것이다.’
새 황제의 선포. 제국이 공격받고 있으며, 그 대상 또한 명확히 지정됐다.
‘병력은 충분히 보내줄 수 있으나, 정말 힘이 되는 기사 전력은 지원하기 힘들 것이다. 당장 근위 기사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수도에 가주와 식솔을 지키기 위해 올라와 있던 여러 귀족의 기사들도 대부분 죽고 다쳤지. 황권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만큼, 제국의 중앙을 튼튼히 할 만큼의 기사는 내어줄 수가 없노라.’
‘….그럼 좀 골치 아프겠네요. 기사들이야 황제랑 이렇게 독대도 하고, 술잔도 나눈 저를 존중하겠지만, 귀족의 사병들은 녹봉을 주는 제 주인의 명령이 1순위이니. 귀족들이 병력 아끼겠다고 소극적으로 움직이라 하면 전선에서 써먹는 데 좀 애먹을지도….’
‘그건,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예?’
‘당장 성자 그대가 황제의 제위를 증명하는 3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거야,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인데요.’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나, 그것이 나의 가장 큰 호의이자 보상이다.’
‘….아! 어쩐지 신앙심 한 톨 없는 다른 귀족들도 보는 눈빛이 바뀌었더라니!’
‘설명할 필요는 없는가. 역시. 교단 소속만 아니었다면 옆에 두고 싶었거늘.’
황제가 말한 가장 큰 호의이자 보상. 황제가 됨을 증명하는 셋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린 것.
어쩌다 보니 떠밀려서 얻은 명성인데. 가만 생각하니 이게 씹을수록 괜찮은 자리인 거다.
“왜요?”
“봐봐. 제국이 새 황조를 연호한 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과거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상징이지. 귀족도 그렇지만, 기사들이 특히 더 그렇거든. 외곬수 기사들 중에는 그런 부분이 맞지 않으면 충성 맹세를 꺾어버리는 인간들도 있으니까.”
“그렇….죠.”
“심지어 제국은 그게 더하지. 제국의 역사 그 자체가 제국 전체를 휘두르던 나라니까. 당장 제국의 법부터 관습, 문화, 동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까지 제국의 역사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거든. 하우누만에서 우리가 박살 냈던 계약마법 걸린 계약서, 기억나? 세 명의 제국 고위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이가 동의해야 계약을 무산시키거나, 바꿀 수 있다는 제약.”
“아, 그거요. 기억나죠. 그게…. 어? 세 명? 계약?”
“흐흐흐흐. 감이 오지? 그 계약마법, 기원이 초대 황제의 맹세와 세 증인에 두고 있는 마법이야. 참고로 황제는 황제가 되면 죽을 자리에 나설 수 없으니 황제가 되지 않겠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 자리에 모여있던 넷이 투표를 통해 초대 황제를 추대했으며, 황제는 툴툴거리며 그들과 검 앞에 맹세를 했다고 하지.”
요점은, 제국을 휘두르는 힘이 사라졌다 한들, 그 역사와 설화는 이미 제국민들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신 황제는 초대 제국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으로 계승이 이루어졌음을 공표한 것이고.
“정통성. 그 증명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이지. 이제 몇십 년이 흘러 다음 대 황자가 자리를 물려받거나, 아니면 쿠데타가 일어나 가이낙스 황조를 엎어버리고 새 황제로 등극한다고 해도. 기사들의 충성을 받기 위해 정통성을 증명하려면 너, 나, 노툼. 이렇게 셋을 증인으로 초대하거나, 최소한 우리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불러 세 명의 증인으로 세워놓고 맹세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
엘프 장로는 초대 황제의 증인이 되어준 것으로 이후 500년 동안 제국으로부터 엘프 숲을 그들의 영역으로 인정받았으며, 출입하는 자들을 마음껏 살해할(!) 권한마저 받았다. 왜냐? 당장 엘프 장로가 툭 튀어나와서 ‘새 황제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음을 초대 황제의 증인으로서 선언한다!’ 한마디 하면 가까스로 이긴 황위 쟁탈전이 바닥부터 뒤집어질 수도 있거든. 정통 빠돌이 기사들이 ‘저놈은 안 된단다! 역사의 증인이 그리 말하신다!’ 하면서.
결국, 앞으로 황제님들은 대대로 나를 보거나, 나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이와 좋은 관계를 맺어 가실 거라는 의미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광명의 유일한 성자이자 용사로서 빛의 대리인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제국을 구한 영웅이며, 뜬금없긴 하지만 창세부터 존재해왔다 여겨지는 엘프의 신목 세계수님이 ‘괜찮은 놈’ 도장까지 콱 찍어준 레전드 중에 레전드란 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이 타이틀이 한사람한테 다 박혔지?’ 할 정도니까 나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이는 앞으로 없을 것이고. 그럼 내가 죽은 뒤에는 나의 후인, 자식이라던가, 내가 인정한 사람이 증인의 권한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소리다.
결국 박교수씨 가문이 대대손손 황제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귀족님들도 매우 설설 기게 될 것이라는 뜻.
귀족님들이 ‘저분 무조건 잘 모셔!’라고 할 테니, 황제의 명에 따라 제국 귀족들이 로드릭으로 지원 보낼 무수히 많은 정예병들이 내 말을 아-주 잘 들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제 막 새로 지어진 창고 앞에서 우리 일행을 위한 수레와 알드리치의 봇짐을 챙겨주던 루실라는, 저마다 갈 길을 준비하는 우리를 지그시 응시하였다.
“와….!”
“어때, 네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받을 만큼 받은 것 같지 않냐?”
“음…. 가이낙스님이 지원군을 얼마나 보내주신대요?”
“황명으로 최대한. 귀족 사병은 수가 적을수록 황권이 강해지거든. 로드릭 쪽에서 치고받아서 제국까지 불똥이 튀지 않는 게 제국 입장에서는 더 좋기도 하고. 각 영지의 상비군만 남기고 가능한 병력 전부를 로드릭으로 보낸다더라. 공식 명목은 ‘제국을 침입한 뮤트를 벌하기 위한 공격.’ 로드릭을 지원한 게 아니라, 제국 자체적인 공격이라 이거지. 지휘관은….”
“설마….”
루실라가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교수는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변경백으로 군사 작전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 맡는다더라. 거기까진 내가 해 먹지 못했지. 물-론, 머리 좋은 걸로 소문났고, 일신의 무력을 제국 수도의 모두가 봤으며, 당장 대관식의 증인으로 황제와 사이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성자님의 의견을 그분이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와, 도둑놈.”
“미안하지만, 가이낙스 그 양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도둑놈이 될 수 없단다. 거울을 보렴, 루실라.”
“황제 폐하라고 몇 번을! 으우이익…. 일단 알겠어요. 역시 용사님이라 그런지, 제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요. 그럼, 엘프는 어떻게 됐어요? 그쪽 지원군이 원래 용사님이 출발하게 된 계기잖아요?”
“그건, 황제 폐하보다 더 깔끔하게 처리됐지.”
교수는 재생력이 듣지 않아 지금도 피가 살짝 배어 나오는 허리의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깔끔한 붕대 위로 살짝 삐져나온 세계수의 인장이 보였다.
이룬 경지 때문인지 멈춘 시간 속에 일어난 일을 관찰할 수 있었던 슈왈츠 공작에 의하면, 엘프 숲에서 온 순혈 엘프가 세계수의 가지로 내 옆구리를 찌른 다음 내가 사라졌다고 했다.
‘정말 죽일 듯이 깊게 찌르더군. 자세히는 보지 못했으나, 찔러놓고도 본인이 당황했는지 살짝 동요하는 모습도 보였네.’
아마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수도 전투에서 내가 워낙 터프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그만큼 튼튼한 놈인 줄 알고, 끝이라도 찔러넣으려 전력으로 쑤셨겠지. 비전투 상태인 내 유리몸은 그 날카로운 세계수의 가지를 푸딩처럼 받아들였고.
‘그나저나, 역시 순혈 엘프는 관리자의 수족이라는 소린데…. 그래서, 타이레아라는 그 엘프는 어디로 갔습니까? 얘기하고 싶은 게 좀 있는데.’
‘글쎄…. 숨이 진정된 것을 보니 체력을 회복한 모양이군. 그 이후는, 대련 한 번 더 해주면 가르쳐주겠네.’
철그럭.
‘….싫어요. 싫다고 했습니다. 카, 칼 내리세요! 검공! 슈왈츠 공작님! 잠, 잠시만-’
스거어억-!
“으!”
….나쁜 기억이 떠올라버렸군. 노친네가 눈이 좋아서 멀리서도 내 전투를 봤는지, 웬만한 상처 정도는 회복한다는 것을 알고 진짜 막 갈기더라고.
아무튼, 검에 미친 할아버지랑 죽을 힘을 다해 놀아드리긴 해야 했지만, 내 옆구리에 이따시 만한 세계수 문신이 왜 생겼는지는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엘프 숲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나 이제, 세계수가 공인한 인간임. 엘프는 내 행동 방향에 무조건 긍정할 수밖에 없어. 부정한다? 그럼 세계수가 눈깔이 삐었다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엘프들은 이제 내가 ‘도와주세요~’ 하면 득달같이 달려 나와야 할 처지라고.”
내가 상상했던 세계수랑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녀는 분명 엘프들의 근원, 어머니 나무였으니. 엘프 숲에 가기도 전에 거기 대빵이랑 만났는데 굳이 그 멀고 복잡한 엘프 숲을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음. 원래 목적 중 하나인 ‘광명 교단의 차별적 행보를 반성하고, 이종족 중 노예로 가장 많이 팔려간 엘프와 화해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한다.’라는 과정은 어쩔 수 없이 넘겨버리게 됐지만. 뭐, 전장에서 같이 등 맞대고 싸우다 보면 미운 정도 들고, 화해도 하고. 그러다 하프도 마구 태어나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종족 간 불화는 누그러들겠지, 뭐.”
결국, 다 이뤘다. 제국의 지원도. 엘프의 지원도. 내 개인의 성장도.
물론 기사의 지원은 없고, 달려 나온 엘프들은 인상 팍 쓰고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티를 팍팍 내겠지만.
어쨌든, 목표로 했던 일들을 목표로 했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 다 이뤄낸 것이다.
일 끝났고, 쉴 만큼 쉬었으니까. 이제 가야지.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그렇게 몸을 혹사했는데. 예정보다 일찍 끝냈다면, 조금 쉬어주시는 것도….”
“어휴, 절대 안 된다. 그레고리우스 그 새끼가 눈치채기 전에 빨리 튈 거야. 달라붙으면 로드릭까지 가는 내내 경전과 찬송가를 읊어줄 놈이란 말이다.”
루실라는 뭔가 말을 하려다, 지난 3일간 그레고리우스의 행보를 떠올리곤 수긍해버렸다. 이상하게 상처가 낫지 않아 옆구리에서 흐른 피를 ‘성혈’이라 하며 피가 떨어진 흙 한 줌, 판석 하나까지 모조리 파내어 축복받은 상자에 담아가질 않나. 기도를 모른다는 교수 말에 어딜 가든 따라다니며, 심지어 2층 침실 밖에 기어올라서까지 기도문을 끝없이 외워대질 않나.
일부러 교수가 잔뜩 흘려둔 피를 그가 수거하러 간 지금, 교수는 무조건 수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럼, 루실라는 가이낙스랑 잘 해보고. 혹시나 사교계에서 깝치는 년놈들 있으면 외가에 연락해서 돈으로 눌러버리고.”
“용사님….”
“알드리치는…. 건강하십쇼. 어디 위험한 데 가지 마시고. 다음에 볼 때 서로 무덤 앞에서 보는 일은 없도록 해야죠.”
“재수 없는 소리를 참 평온하게도 하는군. 사지를 찾아다니며 몸을 던지는 자네보다는 오래 살 테니 그런 걱정은 다른 친구들에게나 해주시게. 나야 내 갈 길 간다지만, 여전히 자네 옆에 남을 친구들은, 으음…. 믿는 신이 없으면 내가 찾으러 가겠네. 정이 든 만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고맙네, 알드리치. 죽으면 찾아와 준다니, 퍽이나 위안이 돼. 그래, 자네는 이제 해방이라 이거지?”
“끌끌끌끌. 그럼! 이제 저놈이 뭔 사고를 쳤나, 노심초사하는 삶에서 자유라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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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덕담. 가벼운 인사. 시답잖은 농담 몇 마디.
그게, 각자의 길로 갈라서는 일행의 마지막 인사였다.
이미 넘칠 만큼 마음을 담아서 전했으니까. 그때 담았던 만큼 다시 담을 감사가 없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작별을 고했으니까.
봇짐을 짊어진 늙은 영혼술사는, 버림받은 영혼이 있는 어딘가로 발을 돌리고.
사용인 도시의 정문에 서서 그들을 배웅하던 제국의 안주인은, 그녀를 데리러 온 황가의 호위기사들을 따라, 다시 그녀의 배우자가 있는 곳으로 등을 돌리고.
“….역시, 짐을 더 실었어야 하나.”
“지금도 우리 넷이 먹기에는 넘치게 싣지 않았나.”
“그냥…. 좀 가벼운 것 같아서요.”
올 때와 달리, 일행 셋이 줄어든 수레는, 수도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바람 마법사의 기구로.
“태워줘서 고맙다, 아스트라드. 그리고…. 번개 할아버지?”
“오오옴…. 갈류드다 이놈아.”
“어차피 돌아가는 길인데요 뭐. 홈의 다른 스승님들도 교수님 보면 좋아할 겁니다.”
“흠…. 어이, 아스트라드. 최근 떠오르는 파티, ‘교수 용사 성자 세계수의 공인자 파티’에 들어오지 않을래? 결원이 생겨서 자리가 많이 남았는데. 너 정도면 충분히- 우아아아아악-!”
– 쿵!
“가, 갈류드님! 진짜 밀어버리면 어떡해요!”
“오오옴…. 튼튼한 놈이니 뛰어서 쫓아오겠지. 감히 우리 아스트라드를….”
그렇게, 길었던 제국에서의 여행의 끝에. 각자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일행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향해 발을 돌렸다.
….물론.
“어우우우, 허리야. 노인네, 진짜 거기서 밀어버리네. 그래도 나름 그쪽 은인 비슷한 사람을….”
띠링-!
[Player ‘professor’ 가 역사의 교차점의 관찰 범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제한된 일부 시스템을 정상화시킵니다. 외부와 연결이 허용됩니다.] [주의 : 정보 제한에 대한 위반사항이 생길 시, 기억 소거 과정이 재개됩니다.] [플레이어 권한 침해를 막고 싶다면 자격을 획득하십시오.]“….되게 좆같네 이거.”
다시 연결된 대화창과 개인 메시지 함 위로 끝없이 올라가는 텍스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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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안만두 : 어.
– 흥안만두 : 어, 어어어어! 왔다! 야 왔어! 시바 이 새끼 왔어! 메, 메시지! 개인메시지 싹 돌릴 테니까 거기 꼼짝 말고 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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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Jokass’님이 대화방에 입장하셨습니다.]– Jokass : anjrkdjEjgrpehls
– Jokass : 아오, 씨! 뭐가 어떻게 된거야! 여기 어디야! 야 박교수! 너 뭐하고 있었냐! 돔에서도 아무 얘기 없고, 다나씨도 입 꾹 다물고 있고! 우리 진짜 너 뒤진줄 알았어! 흥안만두 이녀석, 어디 산속에 갇혀서 할 일이 없어지니 이제야 쓸모가 있어졌구나! 기다려봐, 가서 노루랑 애들 좀 불러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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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밖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
교수에게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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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류제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