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00
나-ㄹ을 세우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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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갈고 날을 세우는 행위는. 일정하고, 규칙적인 과정을 따른다.
칼을 두고. 숫돌을 눕힌다. 날이 많이 거칠다면 까슬까슬하고 입자가 성긴 숫돌을. 그게 아니라면 손끝이 거슬릴 정도의 숫돌을.
물을 조금 적시고, 규칙적이고, 일정한 힘으로. 한때 가장 날카로웠던 검의 일부를 버리고, 다시 날카로워진다.
천류제는, 사람의 삶도 그와 같다고 여겼다.
“용병왕. 검귀. 손잡이 없는 검…. 이것 참, 유명인사라 그런가. 이름이 많기도 하시군. 우습지 않나? 세상 사람들은 뭔가 유명한 것에 대단한 이름 붙이는 것을 참 좋아한단 말이지. 그런 허명이 자꾸 쌓이니 이름만 들어선 뭐 하는 놈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검사. 그것 하나로 부족하다면, 다른 검사와 구분할 이름 하나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안 그런가?”
천류제는 대답 대신, 그의 앞에 선 검사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이름 없는 검이고, 어디서 얻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흘러넘치다 못해 뿜어져 나오는 예기와는 달리 피딱지와 녹이 잔뜩 슬어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 뿐.
“….말이 많군.”
“후흐흐흐…. 흐핫핫핫! 하긴! 두 검사가 검을 들었으니, 긴말이 필요 없긴 하지! 허나…. 갈아내다 못해 스스로까지 갈아버린 네놈에겐 조금 일러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이번에는 한 수 봐주는 차원에서 떠벌이가 되어주도록 하지.”
스릉.
스산한 고원. 새벽 별이 막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야수같이 눈을 빛내는 사내가 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아르갈리안 소드. 가슴 아프게도, 이제는 검으로 나와 견줄 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자다.”
“….천류제.”
….아작.
아르갈리안 소드. 하늘을 베고, 산을 가르며, 신과 용을 베었다 전해지는 검사는 씹고 있던 뿌리의 마지막 조각을 어금니 사이에 담았다.
“너 같은 녀석을 싫어하진 않으나. 나도 나름 인연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 밥맛 없을 때마다 씹어대는 이 요상한 나무뿌리도 그렇고.”
“….”
“엘-파르나. 그런 이름이었지. 여염집 엘프 같은 이름과 달리 수틀리면 망치부터 휘두르는 그런 녀석. 녀석은 잘….갔나? 전사로서?”
이름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천류제는 점차 잦아드는 숨소리와 첨예해지는 집중력 속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엘프. 전투망치. 숲. 그리고, 나무뿌리 씹는 소리.
‘제 검끝이 어디로 가는지도 신경 쓰지 않으며 날만 세워대는 자라. 뜻도, 의도 없이 세상이라도 베어낼 셈이냐.’
블루라인에서 만난 작은 엘프 마을. 베는 맛이 없던 다른 엘프들과 달리, 그를 죽음에 가깝게 몰아넣은 엘프 여전사.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기념품까지 챙겨왔던 그 날의 대결.
쿵!
천류제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깎여나가다시피 한 대모의 전투망치를 꺼내 들자, 아르갈리안의 얼굴이 잠시 굳었으나.
한숨. 미소. 이를 다 드러낼 듯 사나운 미소와, 으스러질 듯 움켜쥔 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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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작!
-쩌어어어어엉!!
오래된 기억을 곱씹듯, 입안에 으스러지는 나무뿌리를 신호로.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와 검귀라 불리는 이의 검이 맞붙었다.
그 충격만으로 굵은 수목이 해일에 휩쓸린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부러지고.
두 검사의 밀어내는 힘을 견디지 못한 대지가 갈라지는 사이.
검광과 불꽃. 충격과 살의 사이에서, 천류제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내장을 뒤흔드는 충격이 그를 두드리고, 섬뜩한 예기가 그를 깎아내듯. 삶의 더께를 갈아내고, 희미한 기억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리듯.
‘어우, 이게 집이야 돼지우리야.’
….욱신.
‘마! 사람이 규칙적으로 살아야지!’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진로 고민은 안 해도 돼서 좋겠네. 원래 하나만 잘하면 먹고는 살아.’
‘이름이 없어? 그게 뭔 병신 같은…. 아, 미안하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지. 잘됐네. 이렇게 된 거, 졸라 멋있는 걸로 하나 지으면 되는 거 아냐.’
‘….천류제! 와 시바, 존나 멋있어! 누가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물으면, 남들이 덕수, 지미, 케일럼 그렇게 얘기할 때 너는 [천류제요] 하는 거다! 야! 돈 내놔! 이건 돈 받아도 되겠다!’
욱신. 욱신욱신!
‘….해버려. 더 늦기….전에.’
‘나 없다고…. 또 예전처럼 병신같이 살지 마라. 류제야.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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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걱.
두드릴수록 강해지며, 깎아낼수록 날카로워지는 검처럼.
고통과 살의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보는 것만으로도 비명이 터져 나오는 내면의 칼날을 보며 천류제는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입에 담았다.
스물하나. 그처럼 구멍 나고 불순한 잡철이라도, 벼리고 두드리면 사람을 찌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으며.
‘인간의 삶은, 검과 같으니.’
푸화악!
스치듯 그의 가죽을 훑어내는 일격의 피보라 속에. 몰아치는 검광 속에 천류제는 과거로, 크라콜란지아 거리의 수많은 마약 중독자 중 하나였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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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a! hoc piger!!!(깡통! 이 돼지 같은 자식아!)”
떼카. 깡통.
언제부터인지 그의 이름이 되어버린 호칭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약에 찌든 이들이 쓰레기처럼 길에 널린 이 거리에서. 짐승처럼 붙어먹은 이들의 부산물로 태어나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이름 같은 것을 붙여줄 정신이 있는 부모는 흔치 않았으니까.
이름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누군가 그를 부를 필요가 있을 만큼의 쓸모는 있다는 뜻이니. 깡통이나 돼지, 쓰레기 같은 호칭이라 한들 그것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녀석! 오늘까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잖아! 네놈이 빚진 약값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퍼억!
“으윽….”
그러니, 깡통. 돼지. 쓰레기로 불린다 한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곳에는 좋은 일의 기준이 그만큼이나 낮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부스스슥-
여기서 그에게 이름이란 사치를 부여해준 쓸모는, 그가 쇠를 좀 만질 줄 안다는 것이었다.
“….”
아직 약에서 덜 깬 떼카는 몽롱한 머리로 날붙이가 있을 만한 곳을 더듬었다. 칼은 덜 만들었다. 쇠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울림이 머리를 흔들고, 멍해지다 보니 또 약이 그리워 작업하다 말고 그대로 취해버렸던 것이다.
그가 날붙이를 찾는 이유는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그를 걷어찬 남자, 마테오 때문이었다. 저 녀석은 한번 사람을 패기 시작하면, 되려 제가 더 화를 내며 상대가 죽을 때까지 손발을 멈추지 않으니까. 그렇게 죽은 사람을 여럿 봤다.
“그건…. 물건인가? 때깔은 곱다만…. 덜 만든 것 같은데? 어이, 엘 센티오의 성격 알잖아? 이미 봐줄 만큼 봐줬는데, 이따위 반푼이를 선물이라고 드리면-”
“….마무리만 하면…. 돼….”
“마무리, 마무리, 뒈질놈의 마무리만 벌써 3일째! 으우우우! 개돼지 같은 약쟁이….. 4시간! 딱 4시간만 더 주지! 해가 지기 전에 그걸 완성 못 하면, 그 반푼이 칼이랑 네놈 목을 엘 센티오 앞에 가져갈 거야! 나도 면피를 하려면, 이 반푼이 칼에 크라콜란지아의 깡통이 만든 유작이라는 이름값 정도는 붙여야 할 테니 말이야!”
“….흐. 흐힉. 힉….”
“씨발. 이래서 약쟁이들이랑 거래하기 싫다니까. 퉤!”
떼카는 그의 웃음이 마테오의 성질을 건드릴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거리에서 협박이랍시고 하는 소리가 겨우 ‘죽여버리겠다.’ 정도라니. 머리가 굳었어. 벌써 1년이나 이 골목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배우질 못하다니.
떼카가 반쯤 완성된 칼을 화로에 넣은 것은,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소란스러운 머리를 좀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작은 벌레가 우글거리듯, 약을 달라고 보채는 구멍 난 뇌를 진정시키려면, 이게 제일 좋았으니까.
땅- 따앙-
햇살이 닿는 지면의 거죽 아래. 어둡고 축축하며, 지붕 없는 이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하수도. 그중 5미터 남짓한 통로를 차지한 떼카의 공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하수도를 울렸다.
따아앙- 따아앙-
이 울림. 망치를 잡았을 때만은 손이 떨리지 않았다. 힘껏 휘두른 망치가 쇳덩이를 때리고, 쇠가 모루를 울리며, 모루를 타고 다시 되돌아온 충격이 그의 몸과 머리를 울린다. 머리가 흔들리면, 약을 달라 아우성치는 벌레들이 조금 조용해진다. 이 순간만큼은 마약이 불러온 갈증도, 기이할 만큼의 식욕도. 아무것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두려움도 가신다.
이렇게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 구멍이 숭숭 나버린 내 머리도. 약에 찌든 몸도. 거스러미를 벗고 유려하게 빛나는 이 쇠붙이처럼, 다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따아앙- 따아앙-
약쟁이들이나 할 법한 기적적인 탈출의 꿈도 머리를 울리는 진동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그는. 어렵사리 구한 전기화로의 배터리가 모두 다 할 때까지 쉼 없이 쇠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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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아앙- 따아앙…. 터엉-
“….윽.”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울림이 쇠질에 취한 그를 일깨웠다. 좋지 않은 소리. 장인의식 따위는 없지만, 마약굴이나 다름없는 빈민가에서 모아온 온갖 잡철이 아름다운 검으로 거듭나는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 그로서, 이 소리는 매우 불쾌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화로의 강한 빛에 반쯤 멀어버린 눈을 끔뻑이자 어둑한 하수도에서 반짝이는 그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박하지만 정련된 철. 다듬어진 금속의 아름다움. 그 단정하고 유려한 칼등성이에, 흉하게 찍힌 망치 자국.
곁눈질로 화로를 보니 전열기의 출력이 많이 줄어있었다. 지난번 납품의 대가로 가장 큰 배터리를 받아왔는데, 아무래도 마테오 그 자식이 어디서 싸구려 중고품을 구해준 모양.
흉하게 일그러진 칼의 등허리를 보는 떼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은 약해졌고, 칼은 망가졌다.
“….기요….”
불쾌하고, 가렵고, 미친 듯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돈 따위는 없으니 어떻게든 불을 살려서 곱추 같은 칼을 되살려야 할 텐데. 하다못해 남은 약이라도 좀 있었다면….
“저기요….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아아아…..”
….카앙!
오늘따라 유난히 심한 머릿속 소란에 떼카는 망치를 집어던졌다. 안 되겠다. 나가서 쓰러진 녀석의 주머니를 뒤지든, 마테오놈을 찾아가서 사정을 하든 해서 뭐라도 먹든가, 약을 하든가 해야지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이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 빛이다! 저기요! 거기! 이봐요!”
….환각인가?
떼카는, 그의 것으로 인정받은 통로 끝에서 뛰어오는 허여멀건한 놈의 목소리에 약을 쓰는 게 너무 늦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콜란지아에 동양인이라니. 그것도 제법 깔끔한 옷에 모자까지 쓰고 카메라 같은 고가의 물건을 들고 있는. 그러고도 아직 누군가에게 잡혀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녀석이 있다니.
“누구든 좋으니 저 좀, 저 좀 도와주세요! 혼합 전자 마약의 실태를 취재하러 한국에서 온 기자입니다! 웬 미친놈들이 다짜고짜 쫓아와서는….”
“….미친놈.”
떼카는, 제 발로 이 무저갱 속에 들어온 머저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칭호로 그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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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못 나가요? 아니 왜?”
한서호. 이름부터 멍청해 보이는 녀석을 쫓아내지도, 마테오에게 팔아먹지도 않은 것은.
우적 우적!
“물.”
“아니, 배가 많이 고프신 건 알겠는데.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라니까요?”
“물.”
“어휴. 자요, 자!”
꿀꺽 꿀꺽!
우선, 녀석의 커다란 백팩에 물과 먹을거리가 잔뜩 들어있었다는 것과.
“다 먹고는 취재 도와주시는 겁니다? 기사 잘 나오면 따로 돈은 이체해 드릴 테니까.”
“….선금. 절반.”
“그, 지금은 아까 드린 게 전부고…. 아아아!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지금 없다는 거지, 여기서 기사 하나 크게 떠서 본사에 보내기만 하면! 그게 진짜배기면 바로 성과급 들어온다니까요! 현지 취재니까 취재비용도 나올 거고! 그거 나오면 나머지 채워 드릴게! 응? 서로 도웁시다, 좀!”
….털썩.
“….샌드위치. 하나 더.”
녀석이, 내게 새 배터리를 살 수 있는 수단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휴. 나름 며칠 취재할 각오로 챙겨왔는데. 그걸 다 드십니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마약 중독자를 상대해보지 않은 녀석이다. 중독자들은, 약 기운이 돌지 않으면 기이할 정도로 식욕이 왕성해지니까. 하루만 옆에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도 모르는 것으로 보아, 약쟁이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놈. 무슨 배짱으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온 것일까.
떼카는 새 배터리를 위해서라도 녀석을 좀 도와주기로 했다.
그가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봉투들을 대충 밀어버리고 쓰레기 더미 같은 의자를 밀어주자, 한서호라는 동양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 위에 앉으며 작은 녹음기의 전원을 눌렀다.
“그럼. 몇 가지 좀 물어보겠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곳 상파울루, 크라콜란지아 거리가 정부도 포기할 정도의 마약 거리라고 들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마약을 접하게 됐으며, 왜 번듯한 직장도, 가족도 다 포기하고 거리 위의 삶을 선택했는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야.”
떼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양인 바보의 말을 끊고, 주머니에서 빈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희미하게 누런 가루가 남아있는 작은 비닐쪼가리.
“실로암. 이 거리의 신이자…. 악마이자….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놈. 이곳 사람들은 이곳의 땅이 아니라. 이 작은 비닐쪼가리 위에 서서 살아가.”
바깥 사람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이제 녀석도 이곳에 들어왔으니 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떼카는 열심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양인을 뒤로하고, 그의 하수도를 가린 천막을 걷었다.
입에 담기엔 과하게 험한 곳인 만큼. 직접 보고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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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음? 뭐야. 내가 오늘 약을 했었나? 헛것이 다 보이네? 깡통이 제 소굴 밖으로 나오다니. 그것도…. 바깥 놈을 옆에 달고.”
“물건…. 받아.”
“게다가 완성품을 배달하러 왔다고? 어이, 떼카. 설마 내일 죽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지금 내 앞으로 밀린 예약이 네 건이라고. 다들 쟁쟁한 카르텔의 돈이니, 카포니, 엘 뭐시기니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네가 죽으면 곤란해.”
떼카는 퉁퉁한 마테오의 너스레를 무시하고, 실패작이나 마찬가지인 그 쇳덩이를 내밀었다. 그에게나 실패작이지, 넓적한 쇳덩이와 칼도 구분 못 하는 카르텔 놈들에겐 어차피 같은 물건일 테니까.
그의 예상대로 마테오는 한쪽 칼등이 눌린 실패작을 보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오. 여전히 솜씨 하나는 일품이군. 그나저나. 굳이 이렇게 나와주신 이유가 뭔지 알고 싶은데. 아, 혹시 옆에 그 녀석. 팔러왔나? 눈깔 돌아가는 걸 보니 아직 아무도 손댄 적 없는 새것 같은데. 나야 사람 장사는 안 하지만 그거 하는 친구들은 알고 있지. 일단 줘봐. 동양인은 희소해서 비싸게 쳐주는 녀석도 꽤 되니까.”
“내가 쓸 거니까 신경 꺼…. 잠깐. 시장에 들렀다 오려 하는데….”
“네가? 음…. 뭐, 상관없지. 슬슬 해 지니까 ‘선’ 밟지 않게 조심하고. 너야 뭐, 이곳 토박이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그래.”
마테오. 이 마약인들의 거리를 관리하는 마피아 중 하나인 녀석은 그의 비좁은 사무실 반대편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기왕 네가 쓸 거면 교육 잘 시켜. 괜히 뛰어나갔다가 외지 녀석들이 한소리 하면 고생하는 건 나 같은 관리책이니까.”
대충 마테오에게 신경 끄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어준 떼카는, 얼이 빠져있는 동양인 머저리를 잡아끌고 마테오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마약인 거리에서 칼을 파는 대장장이라니…. 재미있는 기사가 될 것은 확실하네요.”
“칼은…. 그냥 만들어진 것뿐이야. 녹슬기 전에 아무한테나 넘길 뿐이지.”
“이곳 토박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 거리에서 태어나신 겁니까? 칼 만드는 일은 어디서 배우셨죠?”
“자리 잡은 녀석은 대부분 여기서 나고 자란 놈이야. 쇠 만지는 일은 감옥에서 배웠지. 여기 사람이 뭘 배울 수 있는 곳은 감옥밖에 없거든.”
그리 대단한 것을 배운 건 아니었다. 감옥이라 해도 일반적인 감옥이 아닌, 나가지만 않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인 곳.
잡혀간 죄수가 감옥에 가족을 데려갈 권한이 있는 이곳은 브라질 정부가 범죄자를 사회에서 격리했다는 명분만 주는 곳일 뿐, 그 어디에도 교화와 체벌의 의미는 없었다.
감옥 안에 마약을 파는 가게도 있고, 부리또를 파는 곳도 있으며, 매춘굴도 있다. 뭐라도 쓰임새를 증명하지 못하면 ‘방석’이라 불리는 감옥 내 노예계급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떼카는 들어오면서 주워들은 일자리를 입에 담았다.
‘저, 쇠를, 쇠를 좀 다룰 줄 압니다….’
‘음? 꼬맹이, 진짜냐? 마침 빈자리 하나 있었는데.’
교도소 사회 안에서 필요한 쇳덩이라고 해봐야, 숟가락이나 손가락 길이의 허접한 날붙이 정도. 숟가락도 손에 맞는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 그냥 물 몇 방울과 가루를 좀 올리고 끓일 정도면 됐다. 교도소에서 주는 나무 숟가락은 그런 데 있어선 쓸모가 없었으니까.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쇠를 때려 넣고, 녹슨 덩어리 같은 걸 만들기를 몇 번. 아직 대마와 담배 정도만 입에 물고 살던 떼카는 살기 위해 열심히 기술을 갈고 닦았고, 출소할 때쯤 제법 쇠를 만지는 놈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물론, 5년에 이르는 형량을 채우는 사이 완전한 중독자가 된 지 오래였다.
서호는 한 편의 범죄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그의 어깨를 붙드는 마른 손목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어이쿠, 말로 합시다, 말로! 갑자기 그렇게 멈춰 세우면….”
“여기. 선이야.”
“선?”
“정부에서 그어놓은 선. 이곳 사람들은, 이 선 밖으로 나가면 죽거나, 끌려가.”
크라콜란지아 거리가 마약인의 거리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몰려들어 방치된 이후로.
정부에서 도시의 흉물인 그들을 치우려 할 때마다, 중독자들은 오물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무기로 이 마약인 거리를 지켜내었다. 정부가 거리를 치우고, 중독자들을 쫓아내면 그들은 근처에서 가장 좋은 지역으로 몰려가 대로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 아름다운 남미의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부자 마을은 도처에 약에 취한 걸인과 지난밤에 죽은 시체가 널린 곳으로 변했으며, 작은 거리 하나 치우려다 도시 전체의 항의를 마주하게 된 정부는, 차라리 이 거리를 그들만을 위한 곳으로 내버려 두고, 그렇게 외부와 거리를 격리하는 것으로 도시의 안정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곳 마피아와 정부의 약속이지…. 여기 사는 쓰레기들이 이 거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게 관리해주면…. 이 지역을 아예 경찰의 순찰 지역에서 제외시켜주는 것…. 범죄를 위한 치외법권이 완성된 거야….”
“그, 그럼,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약에 절어서 이곳에 돌아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나가지 못해. 길 잃은 여행객이든, 납치당한 행인이든. 이 안에 던져진 순간, 너는 세상에서 격리된 거야….”
떼카는, 좋은 이야깃거리에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자조적인 한숨을 내뱉었다.
‘약 기운 때문에 멍청했군. 의미 없는 일을 해버렸어.’
생각해보니 이곳은 정부와 마피아, 양쪽에서 모두 외부와 연결을 끊어놓은 지역인데. 기자라고 해서 외부에 기사를 넘길 방법이 있겠는가.
떼카는 모든 것이 낡고 허름한 이곳에 유일하게 선명한 노란 페인트, 정부가 그어놓은 경계 앞에 망연자실한 동양인을 보며, 그가 언제쯤 약에 취해 거리에 누울지 생각해보았다.
이 정도에 다리가 풀리는 것을 보니, 잘하면 이틀 안에 그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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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류제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