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05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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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우선. 여기서 더 이상의 지원군을 찾아다니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뮤트 세력이 주춤한 틈을 타,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지금까지 끌어모은 전력으로 총공세를 가하는 게 좋을까?
옛날 같았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했겠지만, 지금 내 상황을 보면 후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로드릭. 국토의 대부분이 뮤트에게 점령당해 여기저기 챔버메이드가 기념비처럼 보이는 땅이 되었지만, 어쨌든 왕은 살아남았고, 왕을 모시는 기사들도 살아남았으며, 기사의 나라라는 이름답게 항전 의지도 굳건하다.
병력. 로드릭 정예병은 대부분 전사. 하지만 로드릭 너머로 확전을 원하지 않는 자유도시연합과 텔드랏에서 지원병을 보냈고, 지금은 귀족가 사병을 덜어내는 차원에서 가이낙스 신황제 폐하가 무지막지한 숫자의 병사를 지원 보내기로 했다. 하우누만 너머의 초원 부족 중 상당수가 새 땅을 찾아 로드릭으로 이주를 시작했으니 기마병 편제도 제법 늘었다고 봐야겠지.
정예. 일단 진짜 막장 운영만 하지 않으면 교단 주최로 각국의 용사님들이 모이는 것은 어느 월드나 동일하다. 당장 로드릭 전선에도 곳곳에서 몰려온 히어로 유닛이 활약하는 중. 거기에 성녀를 되찾은 자비 교단이 협조를 약속했고, 광명 교단은 교단의 구심점이 된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가는 어디라도 병력을 보낼 것이다. 기본 히어로유닛 세트 + 5대 교단 중 둘의 매우 적극적인 협조 + 세계수 때문에 마지못해 협조하는 순혈 엘프들. 전장을 내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마법 전력도 분명 지원을 나왔을 것이고, 거기에 우리 일행도 있으니 정예 전력도 꽤나 괜찮은 편이다.
상대는? 일단 악신화 뮤트 여왕 때문에 초반에 부족했던 물량은 보충했겠지.
네임드 유닛. 바즈유르 사망(추정). 책사 및 지원계 팔카투스. 에데오르나(부상 회복 중, 혹은 회복 후 진화 중). 시간을 좀 줬으니 둘, 혹은 셋 정도 네임드가 더 나왔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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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어때? 이 정도면…. 슬슬 다른 지원군 없이 엔딩 볼 각이 나오지 않을까?
– 노루Drug해요 : 나오지 않겠는데?
– professor : 아니, 왜?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성장했잖아? 폭풍의 언덕에서 에데오르나도 때려잡고, 제국에선 거의 신에 근접한 마녀도 막 때려잡고!
– takealook : 꼬옥, 겜 잘 풀어나가다 한번쯤 ‘나정도면….?’ 하는 자만에 빠지는 최상위 플레이어들!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불세출의 검사! 최강 아르갈리안 소드와 천류제의 결투 영상! 그리고, 그런 아르갈리안 소드랑 동귀어진한 최종진화 에데오르나 막고라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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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대로 사막 행을 회피하려는 내 눈앞에 떼껄룩 녀석이 보내준 영상이 떠오른다.
산사태에 완전히 묻혀버린 마을과 도시.
그 산사태의 장본인인 두 검사가 산 하나를 통째로 썰어대며 싸운 끝에 평지가 되어버린 고원.
검광이 일 때마다 한때 절경이었을 산봉우리가 버터처럼 잘려나가고, 귀를 찢는 금속음에 구름이 흩어져 말간 하늘이 드러났다.
검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하늘을 가르고 산을 쪼개는 사람들의 대결. 이게, 3월드 최강이라 불리는 이들의 수준이다.
얘가, 아르갈리안 소드가 아군인데 그냥 내버려두면 인간이 진다는 것은, 상대 쪽에서도 이만한 괴수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뭐라고 반박할 때마다 대화방에 무시무시한 영상이 하나씩 떠올랐다.
가령, 완전히 인간에 가까워진 형태로 등 뒤에 펼쳐진 교회 종탑만 한 외장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최종 진화형 에데오르나 라든가.
오러를 사용하는 정예 기사단을 성과 함께 통째로 갈아버리는 바즈유르의 영상이라든가.
거의 다 뚫은 줄 알았던 저지선에 거대 애벌레 같은 뮤트가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벽을 쳐대서 그대로 사흘이고 나흘이고 시간이 끌리는 영상이라거나.
으으음…. 하긴. 클리어를 못했다뿐이지 그동안 클리어에 근접한 플레이어는 꽤 됐으니까. 다들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최종 전투에 돌입했다가 어디선가 튀어나온 굇수님들에게 다들 대가리가 깨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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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kass : 이래도, 이래도 아직 할만한 것 같음? 응? 심지어 너 월드에서는 여왕이 아니라 악신으로 한단계 격상하셨는데? 심지어 번영, 생존 계열 신인 것 같던데 궁지에 몰렸을 때 필살기로 대규모 부활이라던가, 한정 불사 같은걸 막 뿌려대면 어떻게 될 것 같냐? GG에서 최악을 상상하면 항상 그 이상이었다는 것 몰라?
– professor : ….알지.
– Jokass : 그럼, 엘프 숲에 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시간이 조금 남은 지금. 현 시점에서 더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그냥 귀찮으니까, 이쯤 하면 될 것 같으니까 로드릭에 가버리는 것은 말이 안되겠지? 실패하면 영원히 이 안에 남을지도 모르는 몸이면서?
– professor : 안….되겠지. 으음….
– Jokass : 이제 선택지가 두 개 남았는데, 길은커녕 어딜봐도 나무뿐이라 길을 잃기 십상에, 거리도 멀어서 오며가며 4주는 잡아먹는 데다가 아무리 말을 잘 들어도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아인종이라, 인간 군편제에 억지로 끼워넣는 수준밖에 안 될 남부 대수림이랑. 당장 동부 3국의 너른 대로를 따라 빠르게 오갈 수 있으며 그쪽 고위층에 아주 진~한 인연까지 있는 사막국가 타클란이랑. 어느 쪽이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
– professor : 그게, 음….
– Jokass : 사막 갈거지? 응?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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옘병 저 눈치 없는 새끼가 진짜.
평소의 맹하던 그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는 논리에 교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지. 애초에 말 꺼내기 전부터 사막으로 가는 게 우연히 생긴 여유를 가장 잘 사용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눈치 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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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 웨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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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대화방에 대놓고 ‘생각하는 중’이라면서 저렇게 점 네 개만 찍어놓는 게 무서워 죽겠잖아! 어쩌면 내 현실 몸 옆에서 전원 코드 만지작거리면서 어떤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다나가 몸이 약하다지만, 어떤 식으로든 독해져야 살아남는 세계에서 남들보다 약한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오히려 남들보다 더 독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다나가 그 몸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서 지하 도서관에 병원 장비까지 들여놨는지도 못 들어봤네.’
알고 보면 저 여자 과거가 나보다 더 어마무시한 것 아닐까? 상당히 뭐가 많이 무너진 폐허의 지하에 살고 있었는데. 막 공사용 중장비 타고 다니면서 ‘그냥 놔둬도 죽을 목숨이라지만, 너희 모두의 남은 평생을 합친 것보다 소중해.’ 이러면서 스캐빈저를 한 다스씩 쳐죽였다거나.
다나의 침묵 속에 불안에 빠진 교수의 상상이 깊어질수록, 과거의 다나가 사라 코너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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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 웨건 : 나도, 사막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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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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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 웨건 : 아까도 말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한계까지 쥐어짜내도 모자랄 상황에 계산을 하고 멈추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 스피드 웨건 : 나도 알아. 교수랑 내 관계가 좀 기형적이라는 것. 서로 얼굴도 모르고 7년을 알고 지내왔고, 마주 보고 대화한 시간은 채 하루가 안 되는데 연인이네, 감정을 나눴네, 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 노루Drug해요 : 저기요
– 스피드 웨건 :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잊어버린 것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매년 겨울이면 대화방에 죽은 사람이 없는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는 행사가 있고, 그게 일상처럼 지나갈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려져.
– 스피드 웨건 : 교수 당신은 이미 생물학적으로 죽은 것에 가까운 몸이고, 나는 이미 의사가 말한 수명을 넘겼지. 시합이 끝나고, 추가 시간도 모두 지나고, 왜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나. 의심하던 찰나에 너를 만나고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담은 거야.
– 스피드 웨건 : 이런 말 하기 창피하지만, 난 마음이 급해. 어느 순간 네가 사라져버리고 내가 그 슬픔을 삭이기도 전에 죽어버릴까 봐 무서워. 네가 지금 어색해하는 것처럼, 이렇게 ‘기형적인 만남’을 끝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릴까 봐 마음이 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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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어…. 다나? 저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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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 웨건 : 그러니까! ….네가, 가장 안전하고 빠른 방법으로 나와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다 해줘. 사막이든, 우주든 어딜 가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필요한 일을 해.
띠링-!
[Player ‘스피드 웨건’ 님이 대화방에서 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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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누가 끼어들 틈도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진 글자만 남기고 다나가 나가버린 뒤, 대화방의 커서는 초점 없는 눈빛과 소리 없는 욕설을 삼킨 채, 조용히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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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Drug해요 : 어휴, 등신.
– Jokass : 복받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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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벌게져 어버버거리는 교수에게 떨어진 것은, 47구역 대화방 공식 커플의 차가운 비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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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내가 뭐, 어, 잘못한 게 있나?
– Jokass : 얘는 귀족, 정치인, 황제같은거 앞에 있을 때는 대가리가 4차원 슈퍼컴퓨터마냥 굴러가더니, 이런 상황만 되면 주판 수준으로 떡락하더라.
– 노루Drug해요 : 우리 다나도 어쩌다 저런 놈한테 꽂혀서는, 어휴 답답해. 아까워 죽겠네 진짜. 내가 말을, 말을 안하려고 해도….
– 흥안만두 : 야.
– professor : 아니 그러니까, 음, 내가 뭘 어떻게 하질 않았는데 뭘 어디서 잘못했는지….
– 노루Drug해요 : 몰라? 진짜 몰라? 그렇게 대가리가 좋아서 차력쑈인지 뇌력쑈인지 모를 플레이를 하는놈이 몰라아아? 이건 개씹@#*&*@#^!^&좆@#&*^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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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이 분위기는?
갑자기 다나가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고 가버렸는데, 다들 그럴 것을 예상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이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이상한 취급하는 그런 분위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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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Drug해요 : 뭘 안 했으니까 잘못한거지 이 등신아! 아오! 진짜 눈앞에 없어서 줘 팰수도 없고! 야! 너 방송 끊기고 외부랑 완전히 차단됐을 때! 그게 고작 다섯 시간 전이다, 다섯 시간! 너야 잠을 쳐 자든, 기절을 하든 했으니 순식간에 지나갔겠지만 이쪽은 뉴스 속보마냥 ‘박교수, 마침내 사망! 침묵하는 돔, 결국 영웅은 생환에 실패했나?’ 같은 글이 커뮤니티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게 겨우 다섯 시간 전 이었다고 이 천하의 개 상 병신 폐급 호로새끼야! 다나는 네가 저 꼴이 되어서 실려왔을 때 한번 준비했고, 다섯 시간 전에 한번 더 마음을 먹어야 했다고! 뭐를? 결국 뒤져버린 박교수씨와 마주할 각오를!
– Jokass : 나일리, 그만하자. 여기 사람들이랑 다 같이 이러지 말자고 약속 했잖아. 괜히 걱정 시키지 말자고.
– 노루Durg해요 : 그만하긴 뭘 그만해! 애미십팔십장생이 몰라도 정도껏 몰라야지! 배려한다고 그냥 넘어가주니까 진짜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잖아! 야! 나 다나 있는 병실에 놀러갔다 왔거든? 옷 좀 이쁜거 입으라고 옷장 뒤져봤는데, 흰 병원복이랑 검은 상복 딱 두벌 있더라 씹새야! 대가리가 그렇게 좋으면 이쪽에 제발 조금이라도 할당하면 안되냐? 어! 진짜 개새끼 똥구멍에 말라붙은 부스러기 같은 놈이-
– Jokass : 아이고, 얘 또 흥분했네. 야, 우리도 적당히 나갔다 온다. 얘는 내가 진정 시키고 올테니까 혼자 생각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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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듣지 못했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 오간 대화를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클리어 또는 죽음이라는 상황을 모두 아는 사람들.
라이브로 잘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꺼져버린 라이브 방송. 돔의 침묵과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소문.
인간 박교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사람들.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본 적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왜 생각 못했을까. 내가 세계수와 처음 만났을 때. 묻지도 못할 만큼 불안해하다가 입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질문이 [혹시 내가 죽었느냐]였는데. 내가 마주한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을 텐데. 그것도 나처럼 바로 답해주는 이 없이, 방송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내가 남겨지는 쪽이 아니라 남겨두고 떠나가는 쪽이 된 상황 따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반면 선천적인 심장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다나는 나와 반대로, 언제든지 다른 이들의 곁에서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왔겠지.
그러다가, 이제 막 서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작은 감정이 싹이나마 피우려던 찰나, 38구역 오르페우스 사건이 일어나고. 돔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녀를 변종의 시체 앞에 데려가더니 이게 나라고 소개한 것이다. 지인이시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서…. 등등. 이게 그녀가 마주한 상황이다.
‘나는 마음이 급해.’
아마 그때 피부로 느꼈겠지. 지병이든 뭐든 황무지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잃을지 모른다는 것을.
처음 느껴본 감정이 갈 곳을 잃어버리자 그녀는 그것을 힘겹게 붙잡았고, 애타게 매달려 식물인간이 된 내 앞에서 그것을 키워갔던 것이다. 돔의 과학자들이 게임 속 내 데이터를 찾는 4개월 동안. 깨어난 내가 ‘그냥 나를 좋아하는 예쁜 사람이구나. 근데 그게 스피드 웨건이었구나!’ 정도의 감정만 가지고 있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내 손을 잡고, 나를 끌어안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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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리 : 언젠가, 다나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언니의 웃는 모습을 볼때마다 고개를 돌리던 어머니의 눈빛을 이제야 이해하겠다고. 언니의 밝은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영정 사진과 향의 연기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마지막 추억으로 기억할 순간을 같이 떠올리셨던 거라고. 그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자의 눈빛이라고. 그래서 한마디라도 더, 한순간이라도 더 치열하게 나누고 싶다고 했어요. 상대가 나보다 감정이 적은걸 아는데, 그딴걸 신경쓰지 못할 만큼 마음이 급하다고.
– 홀리 : 으으, 사실 이것도 언니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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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오르페우스 사건 이후, 접속기 안에서 유령처럼 눈을 뜬 내 앞에 나타난 다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는지.
내가 주변 사람들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데 익숙해져 있듯,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나는, 그렇게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내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몰랐다. 이런 감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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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ealook : 솔직히, 네가 먼저 말했어야지. 별일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사히 나가서 볼 수 있다. 나 안 죽는다. 그게 기본 아니냐?
– professor : 나, 나 지금 잠깐만 다나한테 메시지 해봐야 할 것 같아서….
– 홀리 : 늦었어요. 언니 오늘 진짜 중요한 건강검진 있었는데, 교수님 멀쩡하다는 말에 진료실 박차고 뛰어나왔던 거거든요. 아마 지금쯤 다시 진료실로 돌아갔을걸요. 부담주기 싫어서 아예 대화방에 안돌아올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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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 나가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나는 꼼짝없이 이 세계에 감금되어 있었다.
입에 담긴 말은 많은데 들어줄 이가 없어진 상황.
“오옴…. 고민이 길구나아. 어디로 갈지…. 모르겠나?”
부끄러움으로, 수치심으로, 미안함으로 붉게 달아오른 귓가에 늙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를 떠올린 교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동부….사막국가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동부라…. 건조한 바람을 타겠구나.”
나간다. 가장 빠르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완전하게 클리어해서 나간다.
그렇게 해서, 더는 불안해하지 않게 해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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