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1
Chapter.4 눈꺼풀(3)
***
“후욱, 후욱”
숨이 거칠어진다. 무섭다. 이게 게임이라는 사실 따위는 머릿속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저 유리병 속에 둥둥 떠서 나를 지켜보는 눈알도, 너무 많아서 보관도 안 하고 책상 위에 널부러진 손목도, 눈을 돌려도 끊임없이 정신쇠약에 하이라이트 되는 저 녹슨 쇠톱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상상력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나가야 한다. 게임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야. 더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새로 얻은 [극단적 재생력] 덕분인지 부상당한 부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잘린 부위까지 모두 다 자라날 것으로 보였다.
‘척추가 재생되면, 이 모든 감각이 동시에 나를 덮치겠지. 하지만 탈출을 하고 싶으면 일단 몸을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끔찍한 구조다. 탈출하고 싶으면 육체적 고통을, 그게 싫으면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하다니. 의도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왜긴. 마법사니까 그랬겠지!’
마법사. 강력한 범위 공격과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함으로 RPG 게임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직업. 그 훌륭한 직업을 고른 플레이어의 비율은, 전체의 2.5%다.
잘못 본 거 아니고, 2.5% 맞다.
마법사가 성격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거야 잘 알려진 전통이지만, GG 세계관에서 마법사는 단순히 까탈스럽다, 로 표현하는 게 모욕적일 만큼 제대로 미쳐있다. 흑마법사, 미친 마법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선량한 마법사까지 모조리 미쳤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미친놈이 마법사가 되는 게 아니다. 마법사라서 미친 거다.’ , ‘착한 마법사는 있어도 멀쩡한 마법사는 없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마법사들의 광기는 악명이 높았다.
나는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 상당히 질이 안 좋아 보이는 녀석에게 무려 ‘실험체’로 잡혀 온 것이다.
투둑, 툭! 우드득-
“윽! 아, 아으윽! 끄으으으윽!”
척추다. 마침내 척수신경계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고통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커억, 끅! 아윽, 아아아악!”
뭐, 감각이 돌아오면 도망쳐?
허황된 꿈이었다. 고통이, 온 신경을 지져대는 듯한 감각이 사고를 불태우고 전신을 마비시켰다.
[일어….나….]철컹! 꽈아아악!
그 끔찍한 고통 사이로, 거칠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구속된 팔이 쇠사슬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움직여….어머니를….위해….]철컹 철컹!
우드드득!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향이 부드럽게 비강을 휘감았다. 그래. 나는 움직일 수 있다. 그럼 움직여야지.
자연스럽게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구속된 사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덜 아문 상처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척추가 부러지고 감각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때. 움직이는데.
철컹 철컹!
몸을 구속한 족쇄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 몸은 이런 상황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 이 나약한 몸은, 조금 세게 힘을 주면 금방 분리됐으니까.
뜨드득, 우드드득!
촤아악!
뜨거운 핏물이 바닥에 뿌려졌다. 손은 아직 묶여있었지만, 이제 팔은 움직인다. 허리를 묶은 사슬은 좀 긴 편이니, 나머지 손과 발목을 모두 뜯어내면 저 책상 위에 있는 쇠톱을 가져올 수 있겠지.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몸을 당신에게-
벌컥!
“허억, 허억! 이런! 늦어버렸군!”
누구지
몸의 기억에 없는 사람. 펑퍼짐한 옷에 지팡이. 새하얀 수염. 아, 이게 마법사인가. 신기한 몸이다. 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보를,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받아내고 있어. 그 짜증 나는 비명이 어머니의 부름을 가로막고 있지만, 문제없다. 몸의 주인은 잠들었으니까.
‘피 묻은 앞치마, 손에 든 녹슨 쇠톱, 남자….늙은 남자 목소리.’
놈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마법사.
“이런, 벌써 척추가 재생되다니. 공들여서 부숴놨는데. 어째 재생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단 말이지…..”
“어머니, 움직인….”
“벌써 스스로 사고할 정도로 자랐나. 어쩌면…. 이제 시간이 없을 수도….”
‘남자의 손. 물. 물 덩어리. 물 덩어리? 창?’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남자의 손에 형태를 이룬 물이 떠올랐고,
“미안하지만, 자네는 다시 잠들어줘야 겠어, 뮤트.”
우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몸에 깃든 의식이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또옥. 또옥.
어둡다. 손발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밀도 있는 어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힘들지?’
누군가의 목소리.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억 한쪽 구석에서 무게를 더해가던, 그런 목소리.
어머니.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작은 틈이 생겼다. 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따라, 교수는 끈덕지게 발목을 붙드는 어둠을 밀어내며 그 검은 수면을 향해 유영해나갔다.
‘네가 웃는걸….봤단다.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 얘기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날 이후로 5년이 흘렀고, 저는…..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마음이 급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더욱 힘차게 팔을 뻗는다. 엄마, 어머니,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빛을 향해 팔을 뻗는다. 수면 밖으로 고개를 들어 받은 숨을 내뱉자, 어둠에 젖어 흐릿한 어머니의 얼굴이, 눈을 타고 흘러내리며 다른 것의 얼굴로 바뀐다. 그것이 내게 손을 뻗는다.
콰악.
머리 가죽이 찢어질 것 같다.
괴물.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 내 머리채를 잡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역겨운 괴물의 입에서는, 익숙한 황무지의 냄새가 났다.
‘망각. 잊고 살아가는 것. 넌 언제나 쉬운 길만 택하는구나.’
‘……’
‘즐거워? 이 정도면 괜찮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 혹시나, 정말로 네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닥쳐.’
‘그리운 목소리….라. 역겹지 않아? 이렇게 그리워할 거라면, 이렇게까지 자책할 거라면 그때는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거야?’
‘닥쳐. 닥쳐! 닥쳐어어어!!!!’
폐부 깊숙한 곳에서 토해낸 비명은, 목구멍에서 맴돌다 가슴속으로 사그라들 뿐이었다.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괴물의 얼굴과 교수의 얼굴이 나란히 수면에 비쳤다.
눈물을 흘리는 괴물. 무표정한 교수.
두 얼굴 사이에 다른 점은, 표정뿐이었다.
울고 있는 교수의 얼굴이, 흐리멍덩한 교수를 응시했다.
‘기억을 지운다고 결과마저 사라지진 않지. 명심해. 네가 쉬는 숨 한번, 한 번이 네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라는 것을.’
무표정한 교수의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비명이 문장이 되어 흘러나왔다.
‘난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야. 일이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발악하듯 힘겹게 토해내는 교수의 말에, 괴물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괴물은 교수의 머리를 잡은 채, 한 단어 한 단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무지가 바로, 죄라는 거다, 멍청아.’
촤아악!
흉터가 가득한 손이, 교수의 머리를 다시 어둠 속으로 처박았다.
***
촤아악!
“푸허어억! 흐어억! 허억! 허어억!”
“음? 오오, 정신이 들었군!”
“허억! 흐어어억! 커허억!”
“자자, 천천히. 작은 숨을 여러 번 쉬어보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교수는 일단 그 말에 따라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몸에 감각이 없는 것을 보니, 다시 척추가 부러진 모양.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교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장소는, 아까 있던 그 끔찍한 방 그대로였다. 위치도 그대로 방의 중심. 그렇다면 몸을 구속한 것들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몸이 커다란 나무 욕조 같은 것에 들어가 있다는 것.
욕조는 검붉은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붉고, 쇠비린내가 나는 액체.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었다.
‘방송 화면 미리 내려놓길 잘했지. 이런 게 그대로 나갔으면, 들어왔던 사람들 전부 다 나갔겠다.’
방송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무지에서 지친 삶을 힐링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루의 피로를 녹이고 힐링하러 온 사람들에게 하드코어 스플래터 무비를 선물한다면? 방송이 망하는 선에서 안 끝나지. 커뮤니티에서 마녀사냥당할걸.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고, 시스템창을 확인하고, 이상한 방에 있는걸 확인한 다음에….. 어떻게 됐지?
‘기억이 없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히…..
‘그 목소리.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난 뒤로, 정신을 잃어버렸어. 뮤트 세포가…. 내 몸을 움직인 거야.’
“흐음. 숨이 돌아온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진정한 모양이군. 자, 이게 몇 개로 보이지?”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가 깨어나자마자 뭔가 열심히 기록하던 늙은 마법사는 내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일단…. 따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마법사가 내 몸에 뭔가 조치를 취한 덕분에 감염이 끝까지 진행되지 않은 거야. 그 방법을 알아낼 때 까지만, 고분고분한 척을 해야겠어.’
교수가 멍하니 있자, 마법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런. 아직 숫자를 셀 정도로 회복되진 않은 건가? 그럼…..”
“손가락은 세 개고, 내 이름은 교수이며, 은빛 함성 용병단에 소속되어 투란 방어전에 참가했습니다. 자, 이 정도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습니까?”
속사포처럼 이어진 교수의 대답에 마법사는 웃음을 지었다.
“아주 완벽하군. 놈에게 의식을 지배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정신을 차리다니.”
“놈….이요?”
“뮤트 세포 말일세. 지금 자네의 전신에 퍼져있는 그것.”
교수는 자신의 목 바로 아래, 출렁이는 핏물을 보았다. 지금도 간간히 움찔거리는 몸.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니.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명이 많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나, 슬슬 시간이 돼서 말이야. 우선 해야할 일부터 처리하고 설명해주지.”
“어떤일….말입니까?”
“자네 치료.”
늙은 마법사는 책상 위에 쇠톱을 손에 들었다가, 녹이 슨 날을 보고 고개를 젓더니 앞치마 주머니에서 새로운 쇠톱을 꺼내 들었다.
“뮤트 세포는 참 독한 놈들이란 말이야. 생명체는 물론, 저런 무생물 위에서도 어떻게든 적응을 하겠다고 발악을 하니. 뮤트의 피가 묻은 금속은 저렇게 녹이 슬어버려서 오래 못쓴다네. 자, 내가 지금부터 자네 손을 자를 건데, 놀라지 말게.”
어, 음. 어느 부분에서 안놀라면 되는건데? 손을 자른다는 부분? 아니면 그걸 태연하게 잘릴 사람 앞에서 말하는 부분?
“뭐, 뭐라고요? 내 손을? 잘라?”
“괜찮아, 괜찮아. 이미 조치를 다 취해두었으니 하나도 아프지 않을 거야. 자네가 들어 있는 욕조를 채운 혼합액은, 일견 징그러워 보여도 상당히 비싼 물건이거든. 뮤트의 피에 강력한 마취성분을 가진 약재와 성수를 조금 혼합해 넣었지. 지난번보다 마취제의 비율을 높였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거야.”
출렁!
마법사는 통 속에 장갑낀 손을 쑥 집어넣더니, 쇠사슬에 묶인 교수의 팔을 건져내었다.
“….그 사이 또 다 아물었나. 이정도면 4급…. 아니, 3급 변종도 뛰어넘겠군.”
“자자자 잠깐만! 치, 치료라면서요! 치료랑 그 손을….그거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다가오는 톱날에 교수가 발작적으로 소리지르자, 마법사는 약간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흐음…. 내가 두 가지를 동시에 못하는 성격이라. 자르고 설명해주면 안 될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별로 안 웃긴데….. 뭐, 좋네. 그럼 설명부터 해주지.”
금방이라도 손목을 썰어버릴 듯하던 쇠톱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그는, 좀 전에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가 말했다.
“뮤트의 감염체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교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뮤트의 감염체계. 월드 3 뮤트의 감염체계. 분명…..
“혈액, 타액 접촉 시 감염 시작. 감염된 자는 즉시 사제에게 정화를 받아야 하며, 감염이 너무 많이 진행됐다면 정화를 받아도 치료되지 않는다. 완전히 감염되면 홀린 듯 북부에 있는 여왕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오오, 제법이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잖나! 역시 그녀가 데려온 사람이라 그런가?”
“그녀라니?”
“아가트경 말일세. 아가트경. 샤를롯 데 아가트, 그 목석같은 아가씨께서 자네를 업고 신전까지 달렸지.”
그러고 보니 샬롯과 우호 관계가 적힌 메시지에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그녀가 나를 신전으로 옮긴 모양이다.
“그럼…. 이곳은 신전인가?”
“거 벼락 맞을 소리를 쉽게도 하는군? 이렇게 생긴 신전은 악신의 신전밖에 없다네. 여긴 내 집이야. 정확히는, 내 연구실이지.”
‘그럼 넌 뭐 하는 놈이길래 자기 사는 집을 악신의 신전처럼 꾸며놓은 거냐!’
교수의 마음속에서, 점점 이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얘기를 계속해서, 신전에서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부탁하는 상대가 상대다 보니 나름 애를 써주었다네. 신성력을 엄청 때려 부었지. 하지만 진행을 약간 늦추기만 할 뿐, 효과는 거의 없었다네.”
그야 그럴 것이다. 신성주문 ‘정화’는 몸에 깃든 사이한 것, 몸을 해치는 것을 제거하는 주문이니까.
뮤트세포가 몸의 정상세포보다 많아지는 순간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몸에 더 큰 피해를 준다. 교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인 정화 주문은 사람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주문의 효과가 흩어졌을 것이다.
“그래, 자네는 그 자리에서 죽을 운명이었어. 몇 분 지나지 않아 감염이 자네의 뇌를 파고들어, 신전 기사단에 의해 ‘구제’될 운명이었다네.”
“….그리고 거기서 날 빼내온 게 당신이고.”
“그렇지! 마침 연구차 투란에 들렀던 내가 신전 근처를 지나고 있었고, 정말 우연히도 아가트경과 친분이 있었던 나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자네의 ‘치료’를 전담할 수 있게 된 것이야.”
“치료라…. 내가 마법 의학계는 잘 몰라서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도 ‘치료’ 라고 부르나?”
내가 턱으로 주변에 가득한 표본을 가리키자, 노 마법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까칠하게 굴다니, 자네도 한 성격 하는군. 못 믿겠지만, 치료가 맞다네.
뮤트 감염인자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 침식과 재생이지.
파고들어 간 부분을 침식하여 자신과 동조시키고, 그렇게 동조된 부분을 지배하며 제 몸처럼 보살피지. 나는 이 부분에 집중했네. 아무리 악명 높은 뮤트 감염인자라도, 힘의 한계는 있는 법이 아니겠나? 이미 많은 실험을 통해서 그 부분은 증명이 됐지. 마나가 가득 차있는 기사의 몸에는 침투를 못 하고, 마나가 없다고 해도 잘 단련된 육체에는 쉽게 전염되지 못했어.”
마법사는 상처 투성이인 내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힘을 소모시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한걸세.”
“힘을….소모시켜? 전염중인 뮤트를?”
“그래. 말했다시피 뮤트 인자는 감염체를 제 몸처럼 소중히 여기지. 제 몸이 맞으니까. 만약 그 감염된 신체에 끊임없이 깊은 상처를 줘서, 뮤트 인자가 모든 힘을 상처의 재생에 쏟아붓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이렇게 말이야!”
“억!”
서겅!
마법사는 잠시 내가 한눈을 판 사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물의 칼날로 내 손목을 잘라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 집중하게! 절단면을 봐!”
마법사는 손목이 잘려 자유로워진 팔을 들어 올렸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손목은 잠시 피를 흩뿌리더니, 순식간에 아물어 둥근 살덩어리가 되었다.
“색깔이….!”
“자네도 보이지! 감염되어 검붉은 빛을 띠는 다른 부분과 달리, 온전한 살색을 띄는 재생된 부분이 말이야!”
믿을 수 없게도, 정말 잘라낸 부분과 그 주변의 피부색이 달라졌다. 뮤트 세포가 물러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내 원래 피부의 색을 되찾은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지난 한 달간, 자네의 몸을 지켜온 것이라네. 재생이 되면 상처를 주고, 또 주는 것을 반복해서 말이야.
그러다가 왕국의 윗분들도 슬슬 상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 연구는 주목받기 시작했지.
그렇지 않은가? 넉 달 전만 해도 성벽 앞에 얕은 해자를 파놓고 불을 좀 높이 피워두면 죄다 알아서 타죽던 그 허약하던 뮤트가, 단신으로 도시를 함락하고 로드릭 제1기사를 패퇴시킬 만큼 강해졌는데? 몇 주 전에 왕실에서 명령이 내려왔지. 내가 하고 있는 연구를 지원해줄 테니, 뮤트에 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뮤트의 감염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강화할 방법을 찾으라고 말이야.”
툭.
잘라낸 손목을 닦아 병에 넣은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네. 이곳, 나의 저택에 있는 수십 명의 왕실 마법사들이 자네의 몸을 이용해 연구하고 있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자네는 어차피 감염의 진행을 막기 위해 상처를 내야하고, 우리는 쓸만한 실험재료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교수는 너무 엄청난 사실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실험체라.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처럼 수 많은 마법사들의 실험대에 올라가고 있다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교수는 일단 지금은 참아보기로 했다.
‘….침착하자. 애초에 미친 작자를 상대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침착하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얻어내고….’
“자네 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주 감탄하고 있네. 종류에 상관없이 피만 제공하면 무한정 사용할 수 있고, 단련된 몸 답지 않게 무른 편이라 여러 실험에 필요한 가공도 용이하지. 재생이 빠른 만큼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실험 결과도 빨리 나오는 편이야. 그야말로 연구용으로 이상적 몸이지! 연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정보를….정보를….
끼릭-
“음, 이번 표본도 잘 나왔군?”
교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살릴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뚜둑.
그순간, 힘겹게 버티고 있던 교수의 이성이 무너졌다.
“으아아아아악!! 죽인다! 죽여버린다아아!!!”
“허허허. 화가 났군? 그래, 화가 날만 하지. 이해하네. 하지만 자네 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화를 가라앉히는 게 좋을 거야.”
“집어쳐! 내가, 이것만 다 풀어내면 네 그 썩어빠진 머리통을-으윽!”
투웅-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기묘한 소리. 그리고 마치 숨을 통해 안에서 퍼져 나오듯, 콧속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달콤한 향기.
“그러게 내가 가라앉히라고 했잖나. 자네는 가망이 없어. 이미 감염이 뇌에서 진행되고 있으니까. 자네가 그렇게 이성을 잃어버리면, 뮤트가 그 정신을 파고들어 자네를 집어삼키려 든단 말일세.”
“윽, 으으으으으!!!”
“쉬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게. 자네는 이상할 만큼 뮤트의 정신 오염에 대한 저항이 높으니, 잘하면 앞으로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만큼 우리에게 훌륭한 실험 재료를 만들어주겠지.”
“너어, 너어어어어!!!”
“지금은 내가 도와주겠네. 부디, 최선을 다해 견뎌주게.”
타각, 뚜둑 탁-
“슬립”
묘하게 관절 꺾이는 소리와 함께 수인이 맺히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이름. 이름….”
“음? 아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통성명도 못했군!”
마치 지팡이를 들고 오는 것을 잊었다는 것처럼, 원독 어린 교수에게 평온한 어조로 대답한 마법사는, 핏물 속으로 허물어져 가는 교수를 향해 예의있게 인사하며 말했다.
“리드 플로우 학파 제 6위계, 아이작 만달리우스일세. 부끄럽게도 이번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의 위에 올라섰지.”
“아이작….만달리우스….”
“아, 자네 이름은 알고 있으니 괜찮네, 교수. 아가트경이 잘 부탁한다고 하더군.”
“아이작…..아이작…..”
떨어져 가는 의식속에서, 교수는 놈의 이름을 곱씹었다.
‘죽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개자식을 죽인다.’
잠이 들기 전까지, 교수는 끊임없이 그 말을 되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