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11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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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밤은 아름답다.
메마른 대지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만들고, 그렇게 가릴 것 하나 없이 온전한 속내를 드러낸 은하수를 보고 있노라면 옛사람들이 왜 별을 헤며 전설을 써내려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황량한 대지 위에 풀과 나무, 사람들을 키워낸 오아시스는 잔물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빛나며, 그 아름다운 하늘을 온전히 품어 지상에 내려 앉혔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옛날이라면….”
“토브룬 말이에요? 당신은…. 사납고 무서운 괴물이 되어, 마탑을 부숴 도시에 홍수를 일으켰고.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그 안에 고여있던 재화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흘려보냈고. 지는 해와 물 내음 속에 당신과 이렇게 걷고 있으니, 괜히 옛날 생각이 나는 거 있죠? 그러고 보니, 저기 계신 저분. 그때 당신이 탑 위에서 흔들던 마법사님 아니에요? 이름이…. 오트만? 오트만 보들레르?”
“한때의 추억입니다….”
“후훗. 과연, 저분에게 물어도 추억이라 대답하실까 모르겠네요? 아, 인사한다. 손 흔들어요. 자연스럽게?”
교수는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은 락샤샤와 사막의 오아시스를 거니는 중이었다. 이곳 저곳에 피어오른 모닥불에 모여든 사람들이 달빛에 비친 둘을 흘끔거리고, 선원들로 보이는 이들은 휘파람과 박수를 보내고, 어인처럼 물속에서 머리만 드러낸 오트만은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법사 노인은 축복과 함께 수면에 담긴 달빛을 쪼개 분수로 피워올렸고, 야자수 위에 걸터앉은 엘프는 평화로운 미소와 함께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지극히 평화롭고, 로맨틱한 상황.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오랜만에 만난 연인으로 소개하고, 단 둘이 천막에 들어가 한참 있다 나온 뒤, 전보다 가까워진 모습으로 오붓하게 산책하는 두 남녀. 천막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이미 기정사실이라 여겨질 만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한시름 놓았던 교수에겐 기분 좋은 불편함이었다.
“그…. 락샤샤. 좀 떨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음~ 싫어요. 당신은 체온이 높아서 편리하답니다? 사막의 밤은 차가우니까.”
“그래도, 천막에서 했던 말이랑 행동이 좀 많이 다른 게-”
“쉬잇. 목소리 낮춰요. 말했잖아요? 누가, 어디서 우리 얘기를 듣고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연인인 척, 밀착하는 게 중요한 얘기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우리, 일에 집중해야죠?”
“으으으음….”
그렇게 속삭이며 더욱이 그의 팔에 붙어오는 락샤샤.
천막에서 어느 정도 관계를 정리하고 나온 뒤, 산책이라도 하면서 슬슬 사막에 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 볼 요량이었는데….
‘중요한 얘기?’
‘여러 가지로. 사막 국가의 지원에 대한 것도 있고, 사막 전체의 동향에 대한 것도-’
‘쉬잇. 그런 얘기라면 이렇게 떠들어서야 되겠어요? 자, 이리로.’
‘어, 어어어어-’
내용을 듣던 락샤샤가 눈을 빛내더니, 이렇게 연기까지 해가며 그를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교수는 락샤샤가 그의 목에 남긴 키스 마크를 어색하게 긁적이며 그녀의 손길에 끌려갔다.
잠시 후.
사막 배가 늘어선 모래 바다의 경계까지 나온 락샤샤는 베일을 벗어 바닥에 깔더니, 그 위에 앉으며 옆에 앉으라는 듯 자리를 두드렸다.
파스슥-
“그건….?”
“재 나비 날개 가루에요. 낮의 열기를 담고 있어 따듯하기도 하고, 밤을 기원으로 하는 여러 가지 주술을 방해하는 데도 효력이 있답니다?”
….찰팍
[은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메시지 마법을 사용해도 되는데.] [사막의 주술을 얕보지 마세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주술은 현대의 신비와는 체계가 많이 달라서, 힘의 고저에 상관없이 슬그머니 파고드는 것들도 많답니다?]“그러니까….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렇게 한적한 곳으로 나와, 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뜻이에요.”
“안전이라….”
교수는 락샤샤가 작은 유리병 안에 붉은 종이 같은 것을 손으로 비벼 넣고는 둘이 앉은 자리 아래에 파묻는 것을 보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확실히. 뭔가 있군.’
[되-게 묘한데 이거. 사람은 맞나? 맥박도 거의 뛰질 않아. 누가 모래 안에 파묻어서 죽어가는 사람 아냐?]‘그런 것 치고는 슬금슬금 움직이잖아. 이쪽에 대단히 관심 있어 보이는데.’
정말 희미하게 뭔가 느껴지긴 했다. 오아시스의 지하수에 젖은 지면이 아니라, 질감이 다른 액체가 모래 밑에 뭉쳐있는 감각. 호흡도,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익숙한 질감과 농도는 신선한 사람의 피가 분명했으니 락샤샤가 말한 ‘위험’이라는 게 아마 저런 놈들이겠지.
“….교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죽이면 안 돼요~?”
“알고 있었어?”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서, 얘기할 환경을 만들었겠죠? 달그림자의 수장이 외지에서 건너온 수상한 남자와 밀회를 즐긴다. 여기까지만 해도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놈이 한둘이 아닌데, 철저하게 숨은 미행을 색출해 죽이면서까지 은밀하게 숨겨야할 것이 있다고 소문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미행에 시달릴 거에요. 저런 녀석들은 사막에서 일상처럼 달라붙어 있으니 무시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답니다?”
“일상이라니…. 사막이 전쟁 중이기라도 한 거야?”
그렇다면, 군사 지원을 목적으로 찾아온 내게 있어 그리 좋지 않은 소식.
“네.”
“응? 진짜?”
무심코 물어본 내 말에, 락샤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사막은 전쟁 중이랍니다. 한때 황금기를 이룩한 위대한 사막 왕국이 몰락한 이후, 수백 년 동안 계속.”
“….미안해요, 교수. 당신이 목표로 한 사막 왕국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멸망하고 없어요.”
“….사막 왕국은 없다.”
끄덕끄덕.
“그럼. 달그림자가 사막 왕국에 속한 정보단체라는 것도 거짓말인가?”
살랑살랑-
뭔데 그럼.
내 물음에 부정을 표하는 락샤샤의 베일이 물결치듯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교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보자…. 사막에 뭔가 어마무시한 게 있고.
뮤트는 어딘가 숨어들어서 꿈지럭대고.
빵빵한 교단 백으로 지원이나 받을까 했더니, 교단 이름만 대도 사막 튀김당하는 동네에, 심지어 몇백 년짜리 전쟁 중이라고 하며,
반뮤트 박교수의 감각도 벗어나서 수계마법사 감각으로 겨우 찾아낸 미행이 일상인 것처럼 말하는 락샤샤까지.
“….할 얘기가 엄청 많겠군.”
“괜찮잖아요? 밤은 길고, 누구누구 때문에 대단히 아쉽게도- 긴 밤 동안 할 일이 얘기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커헉!]슬그머니 어깨를 기대오는 락샤샤의 눈웃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하이드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락샤샤는…. 한 살짜리 의식체에겐 너무 강한 자극이긴 했다.
스물다섯 살 먹은 박교수에게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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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같은 사막이라도,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고 오아시스도 더 많았으며, 사람들이 모래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었던 시절.
모든 사막을 한데 묶어 다스리던 사막 왕국이 있었다.
내지와 달리 사막은 마을과 마을, 오아시스와 오아시스 간 거리가 대단히 멀었으며, 그 사이를 왕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사실상 오아시스 마을은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각 마을의 촌장이 부족장처럼 다스리는 토호들의 영역이었다.
이 수십, 수백 개로 나눠진 지방 토호들을 묶어둔 것이 사막 왕국의 왕, ‘태양 왕’이라 불리는 이의 카리스마였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왕은 그 힘에 취해 자만해버렸으니.
스스로를 태양이라 부르던 왕이 그만 사막의 달을 탐해버린 것이다.
그의 만행으로 신성한 밤의 달은 추락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으며.
짝을 잃은 태양은 힘을 잃어가며, 그 분노를 담아 태양 왕의 머리 위로 그의 사체를 내던졌다.
그리하여. 천년의 권세를 누릴 것만 같던 위대한 사막 왕국은 한순간에 폐허가 되고. 분노한 태양의 저주로 사막은 끓어오르는 열사의 대지가 되었으며. 8할의 오아시스가 말라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부족해지며, 구심점을 잃은 토호들은 살아남은 오아시스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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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막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랍니다?”
“사막 왕국의 멸망과, 힘 잃은 태양과 달이라…. 그럼. 지금 하늘에 떠 있는 저건? 모조품?”
“글쎄요?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전설이니 실제 사실과 비교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태양과 달은…. 무언가의 상징이라든가?”
교수는 노랫말처럼 다가오는 락샤샤의 목소리 속에 생각을 더듬었다.
사막 왕국의 정세. 이건 금방 유추할 수 있다.
들끓는 몬스터, 극한의 환경, 교류가 억제된 사회.
생존지를 중심으로 각자의 세력을 구축한 황무지를 생각하면 머릿속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극한의 환경에서 구심점이란 단순히 상징적인 게 아니라 각각 떨어진 지역의 생존물자를 조율하고, 상황에 맞는 규칙과 환경을 만들어내는 조율자의 역할을 하니까. 황무지에서는 게드로이츠가 만들어둔 시스템, 거래소와 드론이 이런 조율을 일부 담당하고 있었다.
그게 없어지니, 물은 많은데 먹을 게 부족한 토호는 식량이 풍부한 오아시스를 습격하고. 염분이 부족해 비실대는 오아시스는 소금사막을 낀 지역을 약탈하고. 각자 도생,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까진 아주 스무스한데 말이야….’
태양 왕이라 불리는 이와, 전설 속 두 신. 태양과 달. 여기서부터는 무한한 추측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진짜 태양과 달이 떨어졌다…. 고는 보기 힘들겠지? 아무리 수백 년 전이라도, 겨우 몇백 년 사이에 떨어진 해와 달을 뚝딱 만들어냈을 리는 없으니까. 무언가의 상징이라고 보는 게 좋겠지.
달을 탐한 사막의 왕이 고고한 하늘의 달을 떨어뜨렸다. 뭔 지랄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왕이 어떤 상위 존재를 사막 위를 기는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떨궜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짝이 되는 존재가 세트로 떨어지며, 자살공격으로 왕국과 왕을 사막의 모래알갱이로 만들어버렸다…. 이건데.
태양왕과 태양. 사막의 두 개의 태양이 싸웠다? 왕위 다툼 끝에 왕자 둘이 상잔했다는 비유? ….아냐. 그럼 어떤 식으로든 사막 왕국이 이어졌겠지. 심지어 그 자리를 대체할 지역 군주들도 많은 동네니까 왕조만 바뀌고 사막 왕국은 이어졌겠지. 그러니까,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랑은 일단 거리를 좀 두고.
[사막에 뭔가 있다는 것은 짐작했잖아? 그게 만약 전설 속 사건의 여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아무래도 그게 맞겠지. 금기. 어기는 사람을 잡아가는 사막의 절대적인 규칙.’
그게 뭔지는 제쳐두고, 일단 전설 속 설화가 사실에 기반했다고 가정하면…. 현재의 금기는 저 시절 태양과 달이 추락한 대사건으로 발생한 부산물이라 봐도 되겠지.
팔카투스 그놈이 이 동네에서 뭘 꾸미는 것도 얼추 설명이 된다. 영락한 신의 유해라. 시체 파먹는 뮤트새끼들이 침을 질질 흘릴만한 소재가 아닌가? 사막 사람이라면 대부분 들어본 전설이라고 하니 여기저기 기생체를 뿌리고 다니는 뮤트가 이 전설을 입수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설…. 전설이라…. 그럼.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막 왕국에 속해있는 달그림자는 뭐 하는 집단이지?”
“음…. 이건 아-주 민감한 기밀이라. ‘관계자’가 아니면 알려줄 수 없는데…. 알고 싶어요? 알고 싶으면….‘관계’자가 되어야할 텐데…. 다시 돌아갈까요, 우리? 조금 서두르면 해가 뜨기 전에는….”
“저, 저기요?”
“아아, 중독될 것 같아. 조금은 무심하게 반응해보는 게 어때요? 자꾸 그렇게 나오면, 하염없이 괴롭혀주고 싶으니….까?”
어우, 살 떨려. 이 여자가 진짜….!
뭐가 그리 웃긴지 고개까지 돌리고 숨죽여 웃던 락샤샤는 웃느라 맺힌 눈물까지 닦으며 말을 이었다.
“사막 왕국은 없어졌지만, 왕국의 후계는 살아남았어요. 달그림자는 그분을 보호하고, 모시며, 왕혈을 지키는 존재로서. 사막 왕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집단이랍니다?”
오. 후계자라. 가이낙스 같은 친구였으면 쓸만하겠는데? 왕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집단이라면…. 내 생각보다 달그림자의 세력도 상당하겠고.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라는 말에 지원군은 진작에 포기했던 교수는 락샤샤의 말에 살짝 희망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세력은. 친왕세력은 얼마나? 오아시스는 몇 개 정도 다스리지?”
“없어요.”
“….응?”
“없어요. 하나도?”
락샤샤는, 반달 같은 눈웃음에 미동도 없이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왕혈. ‘사막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를 모시는 것은 오직 우리 달그림자뿐. 금기와 함께 전해 내려온 사막 왕국의 설화가 평범한 사막 사람들에게 왕혈에 대한 존중을 심어주긴 했지만, 오아시스의 지배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왕가의 후손은 그들에게 있어 사막에서 가장 강한 지배자에게 제공되는 왕관. 사막 왕국의 계승을 자칭하며, 사막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 겨우 그 정도예요.”
“그럼, 달그림자는….”
“그분과 마찬가지로, 쇠락해가는 고대의 흔적일 뿐이랍니다. 패자의 자리를 원하는 지배자들은 왕혈을 손에 넣기 위해 그분을 납치하고, 여의치 않으면 죽여버리곤 해요. 우린 그분을 지키기 위해 사막에서 가장 강한 지배자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 지배자를 위해 암살과 첩보를 행하며, 그렇게. 간신히 사막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듯 천천히 말을 고르는 락샤샤를 보며, 교수는 슬금슬금 접근하는 미행자에게 더욱 감각을 집중했다.
‘….삼국지가 따로 없군. 춘추전국시대에 가까운 환경에. 상징적인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왕혈이라….’
삼국지에서 동탁, 십상시의 손에 놀아나던 어린 태자가 생각나게 하는 환경이다. 인간이 아니라 옥새 비슷한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은데. 달그림자의 특수한 위치를 생각하면 미행이 붙는 것도 당연해보였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외부인에게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가 아닌가. 락샤샤가 내게 내밀한 감정을 품고 있다지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여자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와 관련한 다른 얘기로 이어진다는 뜻이겠지.
내가 잠자코 기다리자,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듯 한번 더 웃어 보인 락샤샤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최근…. 지금 사막의 심장께서 몸을 의탁하신 분, ‘열두 걸음의 지배자’ 카울라디의 신변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죽었나?”
“죽었다면 오히려 간편했겠죠. 갑자기 정복욕이 타올랐는지, 사막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자신이야말로 사막 왕국의 계승자임을 증명하겠다며, 최근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승산이 없어 보여?”
“그다지? 지금껏 수많은 영웅과 강자들이 사막을 일통하겠다며 깃발을 들어 올렸지만, 성공한 이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카울라디의 상태도 이상했어요. 다소 강압적이긴 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놓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최근 들어 성격이 폭급해지더니, 진정한 사막의 힘을 얻었다며 때가 되었다고 날뛰지 뭐에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침략자의 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모시는 분의 안위에 위협이 되니, 소속된 곳을 벗어나 다른 토호의 보호를 받아야겠다는 소리 같고. 이 얘기를 내 앞에서 꺼낸다는 것은-”
“그냥 도와달라고 하진 않았어요? 비록 실질적인 힘은 없지만, 금기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사막에서 ‘사막의 심장’이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도움의 대가로 우리가 당신의 뜻을 대변할 수 있어요. 사막 전체의 존중을 받는 왕혈의 부탁과,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당신의 말이라면…. 충분히 지원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이 마지막 말을 위한 대화였군.
열두 발자국인지 열두 발가락인지 하는 놈이 ‘사막의 심장’이라는 왕관을 그냥 보내줄 리가 없으니 빠져나오는 것을 도와달라. 대가는, 사막 사람 전체의 사랑을 받는 고대 왕가의 후손이 직접 지배자에게 하는 부탁. 덤으로, 외지인으로서 사막의 전투에 끼어들 명분.
“….내가 성자라는 것이 걸리면 난리가 날 텐데?”
“그러니, 이렇게 서둘러 달려온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세작이 당신의 뒤를 캐기 전에- 저희 달그림자의 천막 아래, 당신을 감추기 위해서?”
세상에.
“아까는 내가 보고 싶어서 앞뒤 안 보고 달려왔다더니?”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공사가 같은 자리에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겠죠? 당신은 나의 그리운 님이며, 세상에 퍼져나가는 위명에 앞서 제 눈으로 확인한 위대한 전사니까?”
….확실히, 보통여자는 아니다.
락샤샤의 말을 곱씹어보며 계산을 해보던 교수는 그리 어렵지 않게 그녀의 제안 속에서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딱히 지원군 문제만 가지고 사막을 파고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지원군이라고 해도, 그리 대군을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전쟁에 이겨 그 카울라디인가 하는 놈을 꺾고 내가 편든 쪽이 정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런 환경이면 쉽사리 전투 인력을 넘겨줄 수 없을 것 같은데.”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확실히 대군을 지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지금 저희가 새로 몸의 의탁하려는 곳의 지배자는 좋은 인재를 많이 데리고 있거든요. 혹시, 사막의 피라는 물질을 다루는 이들을 아실까요? 물이 없는 이곳에, 물과 섞이지 않는 검은 사막의 정기가-”
“오케이, 딜!”
락샤샤의 입에서 이어진 말에, 교수는 두말할 것 없이 달그림자 수장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사막에서 고용 가능한 NPC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 모래와 기름을 다루는 마법사! 대지 마법사 중에서도 대단히 특수한 힘을 다루는, 대지와 물, 대지와 화염 등 멀티 클래스가 대부분이라는 그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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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안만두 : 기름 법사다!
– Jokass : 전통의 오일 파워! 석유 법사! 만나면 승패에 상관없이 전장이 개지랄나는 씹극혐 새끼들! 넘버원 장판 법사!
– takealook : 뼛속부터 사막맨인 놈들이라 뭔 개지랄을 해도 사막 밖으로 나오지 않는 놈들이지만, 오히려 사막에 미친 놈들이라 고대 사막 왕가 적통의 호의라면…. 그 허들을 넘고도 남겠다야! 애초에 지배가 불가능한 또라이라 얘들 데리고 있는 놈들도 서로 협조하는 정도로 데리고 있을거야! 명분 조금만 쥐여주면 싸그리 납치 가능하겠어!
– 골드만SUCKS : 유전이 터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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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드 최종 전투는 영구동토에서의 전투. 환경 요인을 생각했을 때 이 동네 오일맨들이 우리 가는 길 따라 꺼지지 않는 불만 유지해줘도 남는 장사다! 영구동토에 얼지 않는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열 명, 아니 다섯 명만 데려와도 남는 장사가 될 거라는 생각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인 교수는, 그대로 오른손을 모래 바닥에 꽂아 넣어 지척까지 접근한 미행자를 뽑아 올렸다.
푸억!
“…. ….! …..!!!”
“혀가 잘린 암살자. 카울라디가 보낸 사람은 아니고…. 파락스? 두마칼로? 아무래도 사막의 심장께서 자리를 옮기고 싶어한다는 것이 소문이 났나 봐요? 다른 지배자의 하수인이 따라붙은 것을 보면?”
뚜둑-
“어머나.”
“죽이면. 그쪽에 내가 당신이랑 손잡았다는 소문이 난다고 했지? 계약서 대신으로 딱이네.”“어머나~ 박력 있어라.”
락샤샤는 목이 부러진 미행자의 손에 들려있던 송곳을 들어 끝을 살짝 핥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면 왕혈의 마지막 수호자가 락샤샤인 만큼 그녀를 죽이면 왕혈을 납치하는 게 배는 쉬워질 테니. 그녀도 왕혈만큼이나 암살자에게 시달렸겠군.
“그럼, 성자의 신분은 저희 쪽에서 감춰드리겠고. 새 신분이 있으셔야 할 텐데…. 혹시 신분을 증명할만한 다른 것을 가지고 계신가요? 새로 만든 것은 주술에 금방 탄로가 나거든요. 당신의 손을 오래 탄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살짝만 손보는 편이 좋은데….”
“신분증이라. 그런 것은….”
아. 있네.
교수는 주머니를 뒤적여, 인벤토리 언저리에 처박혀있던 허름한 나무패 하나를 락샤샤에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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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패
F급 용병 – 트랩퍼 – 교수
본 인장의 소유자가 [F]급 용병으로 신분을 증명받았음을 표함.
– 투란시 은빛함성 용병길드장 왈도프 토프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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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
“진짜 내 건데.”
“F급에, 함정과 석궁을 주로 다루는 용병이…. 마탑을 맨손으로 부수는 괴물과, 하우누만 투기장의 승자이며, 제국에 내린 재앙을 직접 쳐부순 성자와…. 동일 인물이란 말인….가요?”
“어떻게, 이걸로 안 될까?”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나와 용병패를 번갈아 보던 락샤샤는 고개를 돌리더니,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니 숨죽여 웃음을 참는 끅끅거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정말…. 당신은 언제나, 날 놀라게 하네요?”
또 눈가에 고인 이슬을 닦으며 [F급 용병 교수]의 용병패를 찬찬히 뜯어보는 락샤샤.
“생각 이상으로 충분하답니다. 진짜 신분패가 있으니 이름 정도만 바꾸고, 음…. 저희 달그림자에서 고용한, 오래전 사막을 떠나 용병 생활을 하던 사람 정도로 할까요? 모래에 얽은 흉터도 있고. 피부는…. 조금 다쳐도 되는 사람이니까, 열심히 햇볕을 쬐다 보면 금방 비슷해질 것 같고.”
“굳이 사막 사람으로 해야 할 필요는….”
“있어요. 달그림자는 고대 수호자 집단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왕가에 봉사하는 이들이니까. 친인이 아닌 용병을 고용했다고 하면 다들 의심할 거예요.”
“아, 예….”
“이름은…. 이름. 당신의 이름은…. 역시, 그것밖에 없어.”
락샤샤는 용병패 위에 여러 가지 문양을 그리더니, 실을 엮듯 그것을 한데 묶어 교수의 이름 위에 덮어씌웠다.
[F급 용병 – 트렙퍼 – 살라딘]“살라딘?”
“네. 살라딘. 그게, 앞으로 당신이 사막에서, 달그림자의 용병으로서 써야 할 이름이랍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락샤샤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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