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16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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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했어요.]“살라딘이라. 노예의 이름치고는 거창한 이름이로고. 그렇지 않습니까, 야긴님?”
[듣고 있어요? 과해도 너무 과했다니까요? 조금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요. 하지만 이건…. 지나치다 생각하는 게 이상할까요?]“그게 아닐지도 모르지. 이자의 전 주인인 마법사는 꽤 오랫동안 사막 행을 준비했다고 하니, 애초에 사막의 토호에게 바칠 요량으로 이 친구를 키워냈다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겠나? 그렇게 보면, 살라딘이라는 이름도 대단히 전략적이지. 본디 대대로 고대 왕가를 지키는 자들에게 수여되어온 이름이니 말이야.”
“과연. 마법사가 머리를 잘 썼군요.”
“그 천박하고 제멋대로인 족속들은 예로부터 잔머리를 잘 굴리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지.”
[무기를 다룰 줄 알았다면 얘기를 하시지. 그런데 어디서 배운 걸까요? 제 사적인 관심으로 당신의 행보를 전부 조사했는데, 도끼를 잘 다룬다는 정보는 없었는걸요? 비밀이 많은 남자라…. 싫지 않아요. 파고드는 맛이 각별하다고 할까?]‘씁. 하나만 말해라, 하나만. 섞어 들으니까 뭐가 누구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네.’
교수는 한쪽에서는 주술을 통한 음성으로, 다른쪽에서는 육성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락샤샤와 주술사들 사이에서 시달리며 새로 받은 가죽 벨트 뒤쪽을 만지작거렸다.
창이나 쇠뇌 같은 것을 등 뒤에 거는데 사용되는 어깨에 걸치는 형식의 벨트. 등쪽 고리에는 새로받은 도끼가 걸려있었으며, 불자국으로 까슬까슬하게 일그러진 도끼의 옆면은 손끝으로 긁을수록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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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도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노예 데뷔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뭐. 워낙 오랜만에 휘두르다보니…. 조금 흥이 과했던 것도 있지만.’
2월드 시절 그의 도끼 사용법은 용병의 그것과 같았으니까. 뭔 지랄을 해도 오러를 만들어낼 수 없고, 월드가 진행될수록 상대는 강해지니 그에 맞춰 위력을 올리려면 도끼의 질량에 체중까지 실어서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는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온갖 물리력 경감 마법 부여로 떡칠이 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왕실 기사들과, 그들의 시체에서 일어나 그 장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언데드 군주의 데스 나이트들. 오러가 없는 교수로서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 무식하게 전력을 쏟아넣은 일격을 암습으로 때려 맞추는 수밖에 없었고, 월드 후반 즈음에는 그가 전사인지 암살자인지 잘 구분하지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게 중심과 회전력을 이용한 제대로 된 도끼술이 아닌, 일격 필살, 실패 시 도주로 점철된 기이한 도끼술에 익숙해져 있던 것.
그때의 그 감각으로, 지금의 근력을 이용해 휘둘렀으니.
충돌 직전에 뭔가 아닌 것 같음을 깨달아 겨우 오러를 둘렀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검은 전갈의 머리통과 같이 도끼도 쪼개어졌을 것이다.
덕분에 몸속에 스며들어 충격 완화를 담당하는 블러드 아머는 또 오러에 반발하다 궤멸. 잘 익은 수박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교수의 양팔도 도끼를 잡은 그 상태 그대~로 팔꿈치 어림에서 터져버렸고,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팔을 주워다 붙인 교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세 번째 시험을 끝내고-
이렇게 주술사들의 찬사를 받으며 의식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야긴님. 궁금한 것이 있사온데….”
“평소라면 계급이 낮은 자네의 질문 따위는 일축했겠지만, 이 정도 전사를 데려왔으니 몇 마디 정도는 베풀어주지. 뭔가?”
“아시다시피, 이번 전사 노예는 마법사가 이미 가공을 끝낸 물건이 아닙니까? 마법사가 직접 카울라디 님에게 권한을 넘긴다 하였는데, 굳이 대법을 시행할 이유가….”
“쯧쯧.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로군. 앞서 몇마디라고 했으나, 그런 멍청한 질문이라면 이것 하나로 끝인 것으로 하지. 당연히, 주술 각인을 새겨야지. 다른 이도 아니고 노예를 다루는 주술사인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상하군?”
상급 주술사의 의문에 고개를 푹 수그리는 에올라키-락샤샤. 그런 그의 뒷머리를 빤히 내려다보던 야긴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노예 전사단이란 우리의 태양이 되실 분에게 있어 그분의 뜻을 대리하는 수족과 같은 이들. 그런 귀한 자원을 천박한 마법으로 가공한 것도 불쾌한데 주술 한 가닥 없이 그대로 카울라디님에게 진상한다? 그것은 우리의 왕에게 있어 둘도 없는 모욕이고, 아름답고 고아한 주술에 대한 모욕이며,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그분에게 가장 가까운 내게 있어서도 모욕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대단히 중하게 쓰일 노예일 터. 그런 놈이 내 낙인 하나 없이 카울라디 님의 곁에 서게 된다니. 사막의 모래가 말라도 안될 일이지.”
‘결국 아랫놈이 가져다 바칠 노예에게 자기 이름 적어서 진상하겠다는 소리군.’
뒤쪽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개소리고. 앞쪽은 결국 외부 인사가 가공한 노예이니 믿을 수 없어 자기네 방식으로 한 번 더 한다는 내용.
예상했던 과정이다. 미리 락샤샤와 계획을 다듬으며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던 부분중에 하나였고.
사흘, 나흘이 걸린다고는 해도 결국 그 거대한 검은 전갈을 혼자 때려잡을 정도의 전사들이 이 주술 각인 한방에 카울라디의 수족을 자처하게 된다니. 나름 정신력에 자신이 있다고는 해도, 사람일이 어떻게 될줄 모르는데 무턱대고 이런 놈들에게 내 정신을 맡긴단 말인가? 안그래도 몸엔 밖에 두고온 데이터 소울 플레이어인데, 여기서 세뇌타락조교당해서 나중에 밖에 나가서도 ‘카울라디님 만세! 황무지! 새로운 사막을 카울라디님에게 바치리라!’ 하면서 3형 변종 몸으로 막 날뛰면 어쩔거야.
내가 이러한 불안 요소를 입 밖에 냈을 때, 락샤샤는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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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답니다? 저도 세뇌 각인에 정통하진 않지만,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마법과 달리, 주술은 당신에게 조금 더 친숙하고 회복하기 쉬운 방식으로 진행되거든요?’
‘그럼 조금 안심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친숙한 방식인데?’
‘음~ 두개골을 열고, 뇌 전체에 [암살라의 시선] 주술을 조영해 가장 사용감이 적은 기억 부위를 찾아낸 다음- 그대로 절개해서 적출, 기존의 기억에 덮어쓸 새 기억과 약물에 절여서 [붉은 아가미 벌레]와 함께 집어넣고 봉합한답니다?’
‘….안심?’
‘일반적인 주술로 해주 불가능하게 외과적 수술이 동반된 강력한 주술이지만…. 당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토브룬에서 당신의 그 모습은, 겨우 머리 조금 만지작 거리는 수준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 여기서 나가야겠어. 이건 미친짓이야!’
‘후후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서 지켜보면서 충~분히 살펴줄테니까? 으음~ 당신의 숨겨진 속살. 다나, 그 여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렇게까지 은밀한 부위는 못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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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몸서리칠 정도의 공포로 변했다.
‘으으으! 확실히, 락샤샤도 보통 사람은 절대 아니야. 뭔 사람 뇌를 은밀한 속살이라면서, 막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계획을 설명하는데….’
하지만 락샤샤가 설명한 것처럼 이런 외과적 시술에 의존한 방식이 내게 유리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당장 블루 라인에서 이드라실의 정령 화살 한 발이 머리통에 직격한 적도 있었고. 인간 다진고기에 가까워지는 경험 사이에서 머리라고 그걸 다 피해 간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 말고도 머리가 상한 적이 꽤 있는데 지금껏 멀쩡한 것을 보면 외과적 수술은 크게 문제 될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락샤샤는 단순히 내 재생력만 보고 말했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생각과 기억을 잘 정리해 여기저기 매달아두는 취미를 가진 하이드도 있다. 주술사들이 불법 다운로드한 기억 따위는 내게 영향을 미치기도 전에 그 녀석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결과적으로 별 위험은 없는 게 맞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짜각, 짜각.
드륵드륵드륵드륵드륵!
“음? 야긴님. 살라딘이라는 이 노예, 전사답지 않게 뼈대가 약하군요? 두개골이 약해서 톱이 안으로 들어갈 뻔 했습니다?”
“누아트. 입 다물게. 머리에 침이 들어가면 처리하기 골치 아프니. 어디…. 남는 부분이 좀 있나?”
“이것도 이상한 게, 전사답지 않게 남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어디…. 여긴 어떻습니까?”
싹둑, 싹둑, 툭!
“흐음…. 양이 적지만, 조금 섬세하게 하면 되니. 누아트 자네는 열어놓은 머리 쪽을 관리하고 있게. 조작은 내가 해서 가지고 올 테니.”
“옙. 그나저나 이 친구, 볼수록 흥미롭군요. 그동안 많은 전사들의 뇌를 봐왔지만 이런 형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으음…. 어디보자. 여기는 그럼-”
쿡쿡. 꿀럭- 쭈우욱 쭈욱-
‘으악! 으아아악! 으악! 으악! 으악으악으악!!!!!!’
마취해서 고통이 없느니, 회복에 문제가 없느니 하는 지랄은 다 치워두고. 당장 ‘가만히 있어라’ 라는 명령과 이상한 마취 연기만 마시게 한 다음, 멀쩡하게 눈 뜨고 있는 내 앞에서 내 머리통에 톱질해 뚜껑을 따고 그 내용물을 주물럭거리는 이 상황이 소름 끼치게 무섭단 말이다!
신선도가 중요한지 시술 시간은 5분이 채 안 걸렸지만, 교수는 그동안 가슴 깊이 묻어둔 어머니를 수십번도 넘게 부르짖었다.
공포라는 게, 위기감과 별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실 같은 것으로 머리를 봉합하는 느낌이 들 무렵.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교수의 정신과 달리, 하이드는 아무일 없다는 듯 생생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얘들 솜씨 되게 좋은데? 전에 활 맞아서 머리에 구멍났을 때처럼 난리 날 줄 알고 기억 다 내려서 정리해놨는데, 거의 흔들리지도 않았어. 전문가 맞나봐. 되게 잘하네.]‘으으으…. 미친놈아…. 이걸 어떻게 –이집 잘하네- 수준으로 표현하냐고….’
[애초에 우리 몸은 외적 형태에 크게 구애받지 않잖아? 뇌 쪼가리 잘린 거나 손가락 잘린거나 그게 그거지 뭐. 어디보자…. 자, 이거. 대충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저쪽에서 쑤셔 넣은 기억은 이거야.]하이드가 건네준 기억의 양은 생각보다 방대했고, 내가 상상한 그런 종류의 세뇌도 아니었다. 뭔가…. 봐줄만한 그런 기억이라고 할까?
대충 정리하면-
수백 년 전에 태어난 사막의 전사. 죽어가는 왕의 부탁으로 그분의 마지막 후손을 품에 안고 도주, 그러다 사망. 기억은 환생을 거듭하며 전사로, 주술사로 그 후손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마침내 몇 백 년 만에 찾아낸 주군의 후계자가 우리 위-대하신 카울라디 님이다~ 수백년에 걸친 방황 끝에 하찮은 병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왕의 후계를 다시 찾아, 이번에야말로 지키게 됐다는 스토리- 였다.
진부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기억으로 보니 제법 심금을 울리는 부분도 있는 그런 기억.
[보니까 이 기억이 계속 꿈틀거리면서 다른 기억을 잡아먹는데, 그러면서 중간중간 빈 부분을 보충해 나가더라고. 가령, 그냥 전사라고만 표현된 부분이 어느새 시술 대상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거나. 가족이라고만 표현한 부분에 노예 전사의 진짜 아들과 아내의 기억이 삽입되어 원래 기억과 이어지게 된다거나.]‘확실히…. 그런 식이라면 그 에올라키라는 주술사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는군. 삽입된 기억 속에 원래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으니, 전사들은 충성 서약외에는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
갑작스러운 충성에 가족들이 의문을 품어도 씁쓸하게 웃으며 ‘당신은 모를, 아주 오래된 약속 때문이오.’ 이런 말이나 하면서 우수에찬 눈으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갈테니.
자연스럽고, 과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
….하지만 결국 세뇌라는 것은 변치 않고, 존재의 본질을 가공해 제멋대로 주무른 것도 변하지 않으며. 그 결과에 따라올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해할수 없었다.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이렇게 사람을 막 가공해버리면 오러는 그냥 흩어지는 것 아닌가? 존재의 정수에서 존재를 덮어쓰기 한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럼 훌륭한 전사를 수집한 의미가 없잖아?’
물론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니 사막의 전사들은 오러가 아닌 기이한 방식을 쓰며, 평생을 함께할 무기를 정해 그 안에 자신의 모든 영혼을 쏟아부어 무기와 서로를 공유하며 싸운다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투라는게 몸만 쓰는 무식한 과정이 아닌 이상 뇌의 변화에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찰나의 틈을 파고드는 본능적인 과정은 다 경험을 통에 몸과 뇌리에 새겨진 것들이니까. 사람을 기계처럼 부품하나 갈아끼울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특히나 그게 뇌라면.
[절대 배신하지 않는 고급 전력을 위해 그런 손실을 감안하는 게 아닐까?]‘감안하는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이렇게 손해를 먹고 들어가는데, 상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충성한 전사들을 데리고 있다? 시작부터 전투력 격차가 벌어진다는 뜻인데, 쉼 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사막에서 나와 대등하거나 조금 부족한 상대가 그 격차를 메워온다면, 당연히 이런 손해 보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돼. 암살은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인 방면 전투 패배는 확고한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결국, 카울라디나 인근 토호들이 이 노예 전사를 선호하는 방식이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뜻.
‘뭔가 있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 전투력 손실을 감안 하고서라도 노예 병과를 쓰는 장점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아마 카울라디 앞으로 진상되어 다른 노예전사들과 마주할 때 알 수 있겠지.
고생은 했지만, 내부 관련 인물로서 직접 겪으니 밖에서 수십 일 동안 헛짓거리해도 몰랐을 정보가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사막에 문화와 환경, 정세에 무지한 그로서는 사건의 중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샘.
짜각, 짜각!
“누아크, 와서 머리 가죽 좀 단단히 당겨보게. 카울라디님께 진상할 노예인 만큼 수술자국은 최대한 감춰야지. 치유 연고는…. 필요 없겠는데? 생각보다 [도마뱀붙이의 원한]이 체질에 맞는 전사였나?”
“몸에도 각인을 조금 더 새겨보는 건 어떻습니까?”
“음…. 카울라디님께서 용도를 정하시면 그때 더 추가하는 것으로 하지. 볼수록 괜찮은 전사 노예로군…. 몸집이 커서 각인이 들어갈 자리도 많아. 잘하면 열다섯, 상성이 좋은 것을 잘 뽑으면 열일곱 개 까지도 가능하겠군.”
“열일곱 개라니…. 왕국 시절 진짜 살라딘들도 그만한 양의 각인을 새기진 못했을 겁니다!”
“대업을 앞두고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셈이지. 역시, 사막이 그 주인으로 위대한 카울라디님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 그 힘, 그 불가사의 한 힘은 역시…..”
‘….불가사의한 힘?’
주술사들의 대화에 귀가 솔깃했던 교수는, 덕분에 상념으로 잠시 잊었던 현실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철사로 단단하게 엮어놓은 그의 두개골과, 그 위로 열심히 연고를 발라 피부를 덮으며 재생력이 남다르다고 칭찬하는 주술사들.
힘. 힘이라….
‘사막에서 토호들간 전쟁이야 늘 있다고 하지만, 이번 전쟁은 락샤샤와 달그림자가 그들이 모시는 [사막의 심장]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 생각할 정도이니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양상이 다르겠지. 달그림자는 규모가 있는 정보 집단이다. 확실한 분석을 통해 이 정복 전쟁이 카울라디쪽의 패배로 끝난다 여기고 다른 토호에게 몸을 의탁하려는 거야.’
한가지 의심이 시작되자 뿌리를 내리듯 다른 의심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하니 이상한게 하나 더.
‘분위기. 분위기가 좀…. 설명이 안 되는데?’
우리가 있는 도시. ‘세 번째 걸음’ 오아시스의 분위기. 마을은 징집병이며, 전쟁물자 준비로 제법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안으로 들어올수록 전쟁의 그림자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박쥐처럼 이 세력, 저 세력 붙어 다니며 이런 승패 계산의 전문가가 된 달그림자의 분석대로라면 카울라디는 무리한 전쟁을 계획 중이며 어떻게든 그에 대한 불안을 표출하는 이가 있어야 하는데.
주술사도, 전사들도 꽤나 평화로운 모습이 아닌가?
약간의 긴장감은 있지만,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닌 느낌. 전쟁터로 치면 전차 부대가 탈영병 무리를 짓밟기 직전의 모습?
‘….하이드. 내가 이상하다고 했던 것들, 한번 다 보여줄래?’
[안 그래도 따로 빼놨지. 자, 여기.]하이드가 뒹굴던 소파를 뒤적이더니, 흐릿한 기억 덩어리 몇 개를 던져주었다.
– 달그림자의 분석에 의하면, 카울라디의 정복 전쟁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달그림자는 다른 토호의 보호를 받기 위해 그들의 주군을 옮기고자 했는데, 달그림자의 분석과 달리 여기 사람들은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믿고 있다. 카울라디의 ‘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 전투력 손실을 먹고 들어가는 노예 전사단 구조. 사막 각지에서 모아온 훌륭한 전력을 저렇게 투박하게 사용하다니. 경쟁 구조에서 진즉에 사장되었어야 할 손해 모델이 주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상해.
– 사막에 떨어진 태양과 가라앉은 달의 전설. 해와 달이 떨어졌으면 그게 아마겟돈으로 이미 멸망한 세상이지, 겨우 끓어오르는 사막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고대 신의 전설과 함께 탄생한 환경, 금기.
– 뮤트가 이상하다. 냄새만 풍기고 활동한 흔적도, 특별한 개체도 보이지 않는 놈들. 그렇게 시간을 많이 줬는데도 제국, 로드릭 3국 어디에서도 흔적을 보이지 않았으니 딱히 뭘 할만한 곳이 사막밖에 없는데. 사막 전역에 흩어져 감시하는 달그림자가 특별한 동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얘들은 뭘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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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울라디의 힘. 노예 전사단. 전설. 뮤트. 대사막…. 수상해. 아주 수상한데….
마구잡이로 뿌려진 단서들이 슬슬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데, 뭔가 큰 게 하나 빠져서 하나로 맞춰지지 못하는 느낌.
카울라디는 힘을 얻고 자신이 사막의 왕이 될 운명임을 확신하며, 왕이 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뮤트의 세력. 제국에도, 로드릭 전선에도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남은 여력. 힘.
대사막 전체를 감도는 기이한 금기. 고대 신의 흔적에서 이어진 힘.
힘. 힘에 대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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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살라딘!”
상념 속 퍼즐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뭔가 붙잡을 듯, 말 듯 헤매던 교수의 의식은, 주술사의 외마디 고함으로 현실에 끌려오고 말았다.
“이런. 뭔가 대법에 실수가 있었나? 살라딘이 좀 멍해 보이는군.”
“야긴님, 아직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음? 아아, 이런. 살라딘. 이제 움직여도 좋다. 준비가 끝났으니 너의 진정한 주인이 되실 분, 카울라디 님을 뵈러 가자꾸나.”
‘….조금만 더 맞춰보면 뭐가 나올 것도 같았는데. 시간 나면 생각해봐야겠군.’
교수는 아쉬움에 속으로 혀를 차며 주술사의 명령에 따라 수술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질적인 것의 중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은 못했지만, 그게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확인했으니.
이제 사막의 모래 폭풍같이 흐릿한 상황에서 참고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카울라디를 만나러 가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느끼는 교수였다.
“에올라키 자네도 고생이 많았어. 시술의 끝까지 노예가 반항하지 않음으로 노예의 결백이 증명됐고, 보증인으로서 자네 의무도 끝났으니. 인제 그만 자네 천막에 돌아가 쉬어도 좋네.”
근처의 다른 시중 노예가 가져온 물그릇에 손을 씻으며 변장한 락샤샤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야긴.
그의 말에 슬쩍 눈치를 살피던 락샤샤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야긴님. 아시다시피 보통 전사 노예가 아닌 만큼, 소인에게도 카울라디님의 존안을 뵐 영광정도는 주실 수-”
-짜아악!
“….고작 노예 하나로 그렇게나 많은 보상을 원하다니. 내가 자네를…. 지나치게 편하게 다뤘나보군. 공을 봐서 한 번만 봐주지. 노예 주술사라면 노예 주술사답게, 노예를 데려오는 자네 역할에만 집중하게.”
….꾸벅.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무래도 방금 맞으며 덮어쓴 얼굴 겉가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교수.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더 따라가려 했다간 저들의 의심을 살 수 있어요?]….까딱까딱.
락샤샤의 음성에 손가락을 흔드는 것으로 대충 동의를 표해줬다.
적어도, 여기까진 계획대로 순조롭게 넘어왔으니까. 앞으로도 계획대로만 된다면 무사히 왕혈을 탈출시키고, 사막의 2인자 쯤 되는 토호의 호의와 함께 사막의 대지마법사들을 지원받으면- 사막에서의 1차적인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1차적인 목표는.
‘….만약.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사막의 상황이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는 중이라면.’
입안의 가시처럼 이질적인 상황들과,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간 ‘힘’이라는 키워드.
사막에 생긴 이변이 뮤트이며. 그 뮤트에 의해 사막의 기이한 힘을 카울라디가 손에 넣었고, 그것이 카울라디와 그 수하들의 자신감의 원천이라면….
‘뮤트와, 사막에서 가장 큰 세력이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치 공작까지 하는 놈이니 인간과 연합을 생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
….락샤샤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카울라디와 대면했을 때 그런 정황이 발견되면, 보호대상인 왕혈, ‘사막의 심장’이라 불린다는 남매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었다.
‘….끔찍한 선례가 될 수도 있어. 만약 둘이 공조했다면, 이 일이 적어도 성공 사례로 남지 않도록 여기서 카울라디 만큼은 죽여 없애야 한다.’
인질이 잡힌 상황에서의 정면충돌. 인질의 목숨을 도외시한 가장 위험한 행동이다.
교수는 주술사들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등 뒤에 매어진 묵직한 도끼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암습이라면, 주먹보단 리치가 긴 도끼가 유리하고.
원래 그렇게 쓰는 것에 익숙한 물건이었으니까.
“….다왔다. 노예 살라딘. 그분을 뵙거든 바닥에 사지를 붙이고 머리를 조아리도록.”
서늘한 사암 복도의 끝에 도달한 주술사의 명령이 떨어지고. 교수가 도끼의 무게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입이 꿰매진 노예들이 크고 화려한 문을 당겨 열었다.
“사막의 모든 모래의 주인이시며, 장차 그릇된 태양과 거짓 달을 몰아내고 과거의 빛을 되찾으실 우리의 주군, 카울라디시여! 미천한 종의 경배를 받으소서!!!”
벽과 바닥은 사암으로 이루어졌으나, 머리 위는 흐를 듯 울렁이는 모래들로 이루어진 홀에서. 그들의 왕을 마주한 주술사들은 즉시 몸을 바닥에 붙이며 가진 모든 경의를 표하였다.
“고개를 들어라, 나의 종아. 그리고 새로운 힘이 될 나의 전사야.”
사막 배의 선원들과 같은 모습에 폭군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나의 상상과 달리 거인의 열두 걸음을 지배하는 토호. 스스로 사막의 왕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카울라디는….
찰그락-
“한줄기 길조차 없는 사막에서. 헤매지 않고 제 주인을 찾아온 네 운명을 칭찬하마. 살라딘.”
얼굴의 절반 가까이를 뒤덮은 커다란 상흔을 제외하면, 그의 몸을 감싼 흰옷과 황금 장신구가 대단히 잘 어울리는 나른한 귀족상의 젊은 남성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기이할 정도로 눈을 사로잡는 미형의 얼굴.
‘씨발, 고수다!’
교수는, 그것을 눈에 담은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콱 찌푸리고 말았다.
GG에서 무조건 경계해야 할 인물 유형, 세 가지.
위험천만한 지역에 혼자 분위기 잡고 앉아있는 사람.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
예쁘고 잘생긴 놈. 전부.
믿음이 현실이 되는 이곳에서 강자는 그 힘의 강함과 업적에 따라 입소문을 타며 점차 ‘영웅적인’ 미형을 뽐내게 되니.
제법 멀리서도 후광마저 느껴질 정도라면….
‘….이거 맞고도 대가리가 안 쪼개질 가능성도 생각해야겠군.’
그리, 좋은 시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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