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2
Chapter.4 눈꺼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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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교수는 냉정해지기로 했다.
‘최근 내가 너무 좋은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날이 무뎌진 것 같아.’
그래, 마법사. 물론 역겹지. 나를 무슨 실험재료가 샘솟아 나오는 화수분처럼 보는 것도 그렇고, 그걸 당사자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사이코패스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만약 선한 마법사라서 나를 실험재료로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국 내 몸에 지금처럼 부상이 생기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감염인자가 전력으로 몸을 수복하게 할만한 상처가 필요하니까.
용도와 상관없이 결국 절단된 신체 말단은 필연적으로 생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내게 쓸모없는 것을 원하는 상대와 거래는 못할지언정, 적의를 보여 경계심을 심어주다니! 멍청했다 교수야, 안일했어!’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주워간다고 뭐라 하지 않는 것처럼, 손목 발목 정도는 그냥 가져가라고 하자. 어차피 마취제랑 박살 난 척추 때문에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뭐.
그 대신, 놈들의 호의를 산다.
‘실험에 협조하고, 순응하는 자세를 보여서 놈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비록 나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왕실 마법사라는, 한 국가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감염인자와 인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 분명 그 가운데, 내 몸을 치료하는데 쓸만한 지식이 있을 거야!’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규칙.
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는 것. 결국 게임은 클리어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빠져나갈 열쇠가 어딘가 분명히 숨어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찾게 될 때까지만, 네놈의 말을 따라주마, 아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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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 웨건 : 어이, 교수. 니가 물어본거 찾아봤다.
– professor : 어떻게 됐어?
– 스피드 웨건 : 없었음. 아이작 만달리우스, 6위계, 리드 플로우 학파, 이름이 알려진 NPC 중에서는 기록이 없더라고.
– professor : 오케이 땡큐.
– Jokass : 아직 거기냐?
– professor : ㅇㅇ 손발 자르고 난리 났음.
– Jokass : 어우 나 그거 안 봐. 계속 화면 꺼놔라. 다 끝나면 얘기하고.
– 간장게이바 : 아, 난 보고 싶은데 좀 켜줘.
– takealook : 넌 대가리가 어디까지 파탄 나려고 저런 걸 골라보고 그러냐.
– professor : 대화방 상단에 팝업으로 띄워놓을 테니까, 보고싶으면 시청 동의하고 들어가면 된다. 이따 부르면 좀 도와줘.
– 간장게이바 : 이예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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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기록에 없다라…..”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의외다.
물론 마법사는 기피 대상 1순위이지만, 전장에서 아군으로 만나는 건 또 다르거든.
특히나 월드 3은 뮤트와 대규모 교전이 많이 일어나는 세계관이라, 그동안 거쳐 간 플레이어들이 전장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내민 마법사는 전부 찾아서 어디서 만날 수 있고, 어떤 마법을 쓰고, 어떻게 하면 동료가 될 수 있는지 등의 데이터를 다 뽑아놨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면 전국의 모든 기사, 마법사, 병사들이 총 동원된다. 연구마법사, 수습생 상관없이 전부다. 반발? 어제 앞에있던 도시가 함락당하고, 몇 시간 전에 옆 도시가 함락되는데 반발은 무슨. 살고 싶으면 나와서 한 손 거들거나 튀어야지.
아무튼 전쟁이 시작되면 어떤 식으로든 외부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출된 마법사는 마법사 영입하려고 눈이 시뻘게진 플레이어들에게 모두 색출되어 낱낱이 까발려진 상태.
그런데 6위계 씩이나 되는, 리드플로우 학파에 소속된 고위 마법사의 데이터가 없다면? 뻔하지 뭐.
‘아이작 만달리우스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죽는다.’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죽게 되어 있는 캐릭터. 매우 주의해야할 정보다. 왜냐하면 아이작은, 6위계 마법사니까.
‘6위계 마법사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스토리 전개상 무조건 찾아온다. 이건 문제지. 그 존재가 아이작을 찾아와서 딱 그놈만 죽이고 가란 법은 없으니까.’
결국, 이 만달리우스 백작의 저택은 근시일 내에 위험지역이 된다는 뜻이다.
교수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했다.
첫 번째, 마법사들에게 잘 보여서 최대한 호감을 얻어 방심을 끌어낸다. 여유가 생기면 몸을 고칠 방법을 찾아본다.
두 번째, 6 위계 마법사를 죽일 존재가 찾아오기 전, 이곳을 탈출한다.
세 번째, 그러면서 110만 실링을 벌 방법을 찾아본다.
‘참…. 더럽게 빡빡하군.’
결국 잊지 말아야 할 목표. 남은 빚 110만 실링.
게임 시간으로 25일, 아직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따위라 얼마나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청자가 줄어서 후원을 기대하긴 힘드니, 게임속에서 큰 돈을 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하며, 곧 여기서 최대한 빨리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함을 의미했다.
***
만달리우스 백작가, 연금 4일째.
철컥철컥, 덜컹!
자물쇠가 풀리고,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교수씨, 아침….시간이에요.”
“아, 닐라. 좋은 아침~”
지난 3일간, 교수는 마법사들과 친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굳이 구속되어있지 않아도 교수는 이곳에서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뮤트가 될 테니까. 자유롭게 풀어두어도 이곳에 묶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수는 연구에 대단히 협조적으로 임하며 그 부분을 강조했고, 덕분에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여전히 마취제가 들어간 욕조에 담겨있지만, 이제 쇠사슬은 없었다.
“어머, 오늘은 기운이 넘치시네요? 음…. 혹시 모르니까, 이게 몇 개~”
아침 식사를 들고 온 마법사, 닐라는 손가락 두 개를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두 개요. 그런데 왜 자꾸 숫자를 물어보는 겁니까?”
“아아, 그거요? 혹시나 제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 교수인지, 교수의 몸을 차지한 뮤트인지 확인하는 거예요. 특히나 교수씨의 몸에 들어간 감염 인자중 일부는 그 ‘하얀 괴물’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뮤트가 된 이후에도 지능이 높을 가능성이 상당할 것으로 보이거든요.”
뮤트가 된 이후라니.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벌써 내가 완전히 감염된 뒤의 연구과제 얘기가 나오고 있는 건가.
“하얀 녀석이라…. 아, 혹시?”
[네 피는 성찬(盛饌)이로구나]‘그때, 뺨의 상처를 통해 감염 인자를 풀어둔 건가?’
놈은 내 피를 원한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 녀석이 나를 들고 다닐 성격으로는 안 보였거든.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어요?”
“아, 그게…. 놈이 제 피를 가지고 싶다고 하면서 얼굴에 상처를 냈었습니다.”
“예에에?!
닐라는 매우 놀라더니, 뒤에서 양피지 뭉치를 가져와 급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지금 말해주는 거예요!”
“어…. 안 물어봤으니까?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잖아요. 괴물이 피 좀 먹고 싶다는데 뭐.”
“중요하죠! 나이트 샤를롯의 증언에 의하면, 놈들의 여왕은 강한 인간의 신체를 먹으면 그 특징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 같으니까요!”
‘오. 제법 연구가 많이 진행됐는데? 일반적인 124년의 지식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잖아?’
아무래도 이번 월드에서는 도시가 훨씬 빨리 함락된 만큼, 사람들의 위기감을 앞당기게 되어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저희가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 부분이에요. 비록 놈을 패퇴시켰지만, 놈이 도망갈 때 나이트 샤를롯의 피를 잔뜩 머금은 그 하얀 창을 회수해 갔거든요. 만약 놈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아가트 경과 비슷한 힘을 가진 뮤트가 잔뜩 몰려올 수도….”
‘아,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지.’
저번 전투에서 투란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저쪽도 패퇴했거든. 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정화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화장처리 했을 테니, 여왕은 말 그대로 쫄쫄 굶었을 것이다.
‘유전 정보만 있으면 뭐해. 자원이 없는데.’
말하자면 지금 뮤트에게는 반쯤 완성된 설계도만 있을 뿐, 그 설계도 대로 병사들을 양산할 재료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재료가 충분하다고 해도 샬롯 정도 전투력을 가진 고등급 개체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 월드에서는 지평선을 새까맣게 채운 뮤트군단 같은건 걱정 안 해도 되겠군.’
이래서 초반에 어떻게 플레이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전투 한번 이긴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흐름을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에데오르나가 샬롯의 피도 가져갔지만, 내 피도 약간 가져갔잖아? 꽤 괜찮게 봐주고 있던 것 같은데.’
“저기, 닐라.”
“네?”
“그럼 여왕이 제 피를 토대로 뮤트를 생산할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그렇….죠? 교수씨 말대로라면 하얀 괴물이 교수씨를 눈독 들였다는 거니까, 여왕에게 피의 정보를 진상하지 않았을까요?”
“오호라.”
내 특성을 가져간 뮤트라….. 최대한 많이 양산했으면 좋겠군. 재밌겠다. 과자처럼 부서지는 뮤트군단이라니.
“아무튼 더 이상 숨기는 거 없죠? 또 뭔가 특이사항이 있다거나?”
“애초에 아무것도 숨긴 적 없는데…..”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 닐라는, 미안하다는 듯 내 발목을 들어올렸다. 이제 쓸데없는 얘깃거리도 다 떨어졌고, 할 일을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럼, 오늘치 치료도….음…. 시작할게요?”
“부담 없이 하시죠. 아프지도 않은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만들어낸 바람의 칼날로 내 허벅지 어림을 베어냈다.
서겅!
잘린쪽은 아무 생각없는데, 잘라낸 쪽이 더 무서워하고 있다. 사실 저게 정상이지만.
“으으으으….”
“됐어요. 벌써 다 아물었으니까 눈 떠도 됩니다.”
내 말에 조심스럽게 눈을 뜬 그녀는, 가져온 두꺼운 천으로 잘려 나간 내 다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다. 들어오자마자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도, 이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서 그랬겠지.
“저, 정말 괜찮은 걸까요. 아무리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하하하.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화가 많이 났지만, 이것도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애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당연히 안 괜찮지.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 혐오감의 문제라고.’
아이작은 처음 내가 정신을 차린 그 날 이후로 이곳에 잘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연구를 돕는 것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을 보냈는데, 지난 3일간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듯하며 그들과 얘기한 결과 재밌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이작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마법사가 열 둘. 거부감을 느끼지만 필요한 일이라, 혹은 강압에 의해 연구를 돕는 마법사가 일곱.’
특히 눈앞의 닐라는,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잘해주는 마법사였다. 피를 보는 것도 무서워하고, 방금 보여준 윈드커터의 시전 시간을 보니 마법에도 그리 소질이 없는 것 같고.
내가 아는 마법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선한 면이 남아있는 사람이다.
“일단 감염 억제용 상처는 끝났으니까…. 마취제를….”
“아, 그거 말인데, 오늘은 그냥 좀 넘어갑시다.”
“….예?”
“나도 사람인데,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천장만 보고 있는 건 좀 많이 힘들거든요. 방 안이라도 살짝 돌아다니게요.”
“그렇지만…. 마취제를 추가로 투여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우실텐데요?”
“음, 저기 욕조에 남아있는 용액에 충분히 들어있기도 하고, 사실 아픈 건 맞지만 정말 이대로 가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서요. 가만히 있으면 그 감염인자가 끊임없이 속삭인다구요. 뭐라도 하든가 해야지.”
잠시 갈등하던 닐라는, 한숨과 함께 잘 포장된 다리를 수레에 실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요? 혹시라도 들키면, 저는 어디까지나 피험체의 의식 유지 및 관리를 위해….”
“예,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 밥은 저 책상 위에 두고, 가서 일 보시죠.”
“휴우. 알겠어요. 혹시나 아프면 참지 말고 불러요.”
그녀는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돌아보더니, 수레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갔다.
끼이익- 철컥! 철컥!
열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 간장게이바 : 야, 갔냐?
– 노루Drug해요 : 갔다, 갔어.
촤아악!
교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욕조에서 튀어나왔다.
“시간 좀 재줘!”
– 스피드 웨건 : 타이머 5분 돌린다.
일단 마법사들과 친해지고 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떻게든 몸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었다.
내 몸에서 감염을 억제하는 방법은 세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크게보면 용액, 상처, 그리고 아이작 놈이 맨날 부숴대던 척추다.
상처는 말했다시피 감염 인자의 힘을 소모시켜 억제하기 위한 것이고, 뮤트의 피가 가득담긴 욕조는 일종의 진정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변이 자신과 같은 감염인자로 가득 차 있으면 몸에 들어있는 감염인자가 이미 감염이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활동이 잠잠해진다고 한다.
어제 실험삼아 손을 용액 밖에 빼놓고 기다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서부터 간지러운 감각이 마구 꿈틀거리다가, 확 어지러워지길래 바로 용액에 다시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척추…..는.
놀랍게도,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처음 내가 왔을 때, 혹시나 감염이 완전히 진행되어 난동을 피울까봐 미리 해뒀던 조치인데, 아이작이 그냥 계속 이대로 망가트려 놓는 게 실험체로 쓰기 편하다면서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미친 자식.
그래서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끈질기게, 눈물까지 보여가며 설득한 끝에 쓸데없이 척추를 박살 내 행동을 억제하던 행위는 생략. 상처와 마취제가 들어간 용액만 남겨뒀는데, 방금 그 마취제를 빼는데 성공한 것이다.
시간이 없다. 용액에서 나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의 감염 인자들이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우선 재빨리 문에 접근한 교수는, 손목을 살짝 물어뜯어 피를 낸 다음 철문의 경첩에 충분히 발라두었다.
‘분명 뮤트의 피가 쇠에 닿으면 녹이 잘 슨다고 했지. 어떤 이유로 산화가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은 이미 뮤트의 그것과 다름없으니 내 피로도 충분히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이런 철문은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연결부에 가해지는 부담이 많은 편이다. 조금만 약한 부분이 생겨도, 그 무게 때문에 순식간에 약해지고, 끊어질 것이다.
사실 저번에 마취제가 좀 덜 들었을 때 삐걱거리는 몸으로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들어있던 용액을 손에 담아와서 뿌리려고 했는데, 덜덜거리며 다 흘려서 난장판을 만들어버린 덕분에 쓸데없이 의심을 사고 말았다.
“몇 분 남았어!”
– 스피드 웨건 : 3분 47초
– Jokass : 무슨 방 탈출 스피드 런 보는 것 같네.
문의 부식 작업이 끝나면, 그다음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쇠톱. 도대체 내가 깨어나기 전에는 뭘 어떻게 작업했는지 몰라도 버려진 쇠톱과 수술도구의 양이 상당했다. 전부 모아서, 마찬가지로 충분히 뮤트의 피를 발라준다.
쇠톱을 가지러 움직이는 동시에 책상 위에 정리되어있는 양피지를 좌악 흩어 놓는다.
“내가 1번 읽을 테니까,알아서 번호 붙여서 좀 읽어줘. 중요한 정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 간장게이바 : 이거 치트 아님? 뭔 방송인이 시청자를 부려 먹고 있냐? 나 2번.
– 스피드 웨건 : 3번.
– 홀리 : 4번이요.
– 흥안만두 : 6번.
– 스피드 웨건 : 3번 끝. 피험체의 재생능력과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 머리카락 빨리 자라는 거 말고 별 정보 없었음. 5번 내가 한다.
– takealook :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7번 ㄱ함.
– Jokass : 8
양피지 위에 있는 것은 왕실의 브레인들이 온종일 먹고 자고 하면서 내 몸을 연구한 결과. 내게 쓸모 있을 정보가 가득할 것이다.
꿈틀, 꿈틀!
“크으윽!”
온다. 느낌이 온다! 온 몸을 쥐어짜는 고통과 동시에, 그 역겹도록 달콤한 향기가 머릿속을 휘감기 시작하고,
[….줘. 내게…몸….움직….]그와 동시에 정신쇠약이 발작을 시작하며 사고를 아예 차단해 버린다.
화악! 확!
‘살짝 내려앉은 문. 구석에 숨겨둔 녹슨 쇠톱 더미. 젖은 양피지. 젠장, 양피지 정리 못 했는데. 아직, 내 몫은 못 읽어도 내 눈으로 보고 있어야 대화방 사람들이 해석을….’
– 간장게이바 : 억지로 모가지 들어 올리지 말고 그냥 쉬셈. 스샷 다 찍어놨다.
‘….쓸데 없는 부분에서 센스있는 자식.’
뚜두둑! 으득!
“크으으으!! 으으으!”
감염 인자가 온몸을 비틀어대는 고통 속에서, 교수는 기다시피 움직여 용액이 들어있는 통 속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용액안에 들어있던 마취제가 서서히 피부를 통해 스며들고, 주변에 가득 찬 뮤트의 피가 감염인자를 진정시키기 시작한다.
“흐으으으, 개같은거…. 타이머 몇 분이냐.”
– 스피드 웨건 : 4분 43초.
“제기랄. 또 줄었네.”
용액에서 밖으로 나오고 발작이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 Jokass : 어이, 교수. 재밌는 거 찾았다. [뮤트의 전신에 퍼져있는 감염인자는 그 군집 자체가 뇌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에게 있어 점령한 뇌는 인형 사의 손에 들린 실에 가까우며, 실질적인 사고는 감염인자 군집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말은, 지성이 뛰어난 개체의 감염인자는 더 복잡하게 움직여 더 빠른 감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교수, 이거 네 얘기 같은데?
“역시. 그놈이네. 내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쫑알거리는 놈. 놈이 몸에 퍼진 감염인자에 대한 통제권을 습득하고 있는 것 같아.”
어려울 것 없다. 내 몸에 기생충이 가득 들어찼는데, 그중에 특출난 놈 한명이 다른 기생충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여왕의 명령 없이 개인 활동이 가능한 개체. 생물학적으로는 여왕과 다를 바 없는 놈의 세포라면, 충분히 다른 감염인자를 제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용액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도 놈 때문이겠지.’
점점 놈이 찾아오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그 단내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 속도로 보면….. 길면 일주일. 짧으면 3일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활동을 할 여유가 없어진다.’
약간 부족한 마취제 때문에 욱신거리는 몸을 느끼며, 교수는 눈을 감았다. 정신오염이 걱정되어 깊이 잠들지는 못하고, 살짝 조는 것처럼 드는 잠.
이게 지난 3일간의 아침 일과였다.
***
똑똑똑-
“실례합니다. 교수님? 안에 일어나 계십니까-”
“으으음…. 로만? 로만 맞아요?”
“네에~ 오늘 수업 담당은 저랍니다~”
잠결에 들려오는 부드럽게 끝을 흐리는 남자의 목소리. 실험 마법사 중 한 명, 로만이다.
벌써 점심시간이 된 모양이다.
‘오늘은 운이 좋군.’
로만. 이 녀석도 닐라처럼 내게 호의적인 마법사 중 하나다.
“하하하하! 푹 주무셨나 보네요!”
“저야 신경줄 굵은 거 빼면 시체니까요.”
“하하하하! 참 이상해요. 이렇게 재미있는 교수씨를 보고, 다른 마법사들은 왜들 그렇게 까칠하다고 하는건지.”
“글쎄요. 제가 로만씨를 만나면 유독 마음이 풀어지더라구요.”
“오오, 그것참 신기하군요! 우리는 밖에서 만난 적이 없을 텐데!”
교수는 과하게 즐거워하는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만난 적이야 없지. 그런데 GG하면서 그쪽 모르면 간첩이거든.’
아이작과 대담 후, 이를 북북 갈면서 눈을 떴는데 이 인간이 눈앞에 있는 걸 보고 헛것을 보고 있나 의심했다. 아니, 이 누추한 곳에 이렇게 귀한 분이 왜….?
– 흥안만두 : 로망 가챠맨이다! 가챠맨! 가챠맨!
– takealook : 위대하신 랜덤의 신이시여…. 교수를 구원하소서….
– 간장게이바 : 시발 내가 굴리던 캐릭터가 저 새끼 때문에 망했어! 야! 교수! 그 새끼랑 상종도 하지 마! 아주 나락 가는 수가 있어!
– 스피드 웨건 : 정보 – 랭킹 1위도 로망가챠맨은 피해 다닌다.
“….로만 가치아 맨슨.”
“음? 제가 제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나요?”
“아, 저번에 다른 마법사님한테 들었습니다.”
“아하.”
커뮤니티에서 월드 3 최종 보스 뮤테이션 퀸보다도, 공식 NPC 전투력 1위 갈라드리온 소드보다도 유명한 히어로 유닛, 로만 가치아 맨슨. 일명 로망가챠맨.
‘이놈이다. 탈출의 열쇠는 무조건 이놈밖에 없어!’
월드 3에서 가장 독특한 명성을 자랑하는 로만의 뒷모습을 보며, 교수는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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