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28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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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란 미지에 대한 상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낭떠러지에 섰을 때는 거기서 추락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어두운 길을 걷는 자는 어둠 속에 있을 무언가를 상상하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포에 떠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상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마주했을 때 사람은 쉬이 공포를 느낄 수 없다. 마치 은하수를 보고 감탄하듯, 끝없는 바다를 보고 경탄하듯 미지와의 조우에 가슴 떨려할 뿐.
그 외경의 순간이 피부에 와닿는 것은 감히 그 간극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나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자연물 속에 나타난 두 개의 눈은 그것이 나와 같이 눈앞에 사물을 관찰할 수 있음을 뜻하며.
그 눈에 담긴 적의는 상대가 판단하고, 적대할 수 있는 생명체임을 말하며.
그렇게 미지의 존재가 상식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 오면, 지금껏 느껴왔던 떨림과 모든 경외는 그만한 크기의 공포로 치환된다.
가슴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표층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연까지 차오르는 공포.
드래곤이란 그런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경외에 가까운 공포감을 드래곤의 피어(fear)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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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샜냐?’
[약간?]‘제기랄. 커뮤니티에 또 대서특필 되겠구만.’
[괜찮아. 저 옆에 전사들은 아주 홍수가 났으니까 상대적으로 티 안 나.]교수는 이 순간 그가 순수 마법계열이 아니라 육체적 능력에 치중한 캐릭터인 것에 감사했다.
스스로의 신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전사가 아니었다면, 저기 옆에 있는 카울라디의 전사들이나 주술사들처럼 아주 흥건하게 지려버렸을 테니까.
‘그간 고생한 게 아주 헛되지는 않았군그래.’
교수가 저기 있는 흥건한 전사들과 달리 두 발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간의 경험 때문이었다.
마른 하늘에 벼락 폭풍이 치고, 망자의 영혼이 실체화된 사체가 모여 머리 위에 흉성이 만들어지는 것도 봤으니.
사막의 모래를 모두 빨아들일 기세로 모래의 산이 솟아나는 것도 있을법한 일이 아닌가. 늘 그렇듯, 이 정신 나간 GG에서 또 내 눈앞에 막무가내로 들이민 고난일 뿐이다.
….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다리가 굳어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빨려 들어가듯 한곳에 모여 솟구치는 사막을 보며 교수는 그의 주변에 널린 주술 각인과 촉매들을 둘러보았다.
생피로 그린 혈문자와 손에 피 칠갑을 한 주술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 기쁜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괴한 합장을 하는 모습.
대리석처럼 매끈한 생물의 유골이야 분해해서 쌓아놓은 터라 조립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가지 않지만, 지금도 코를 찌르는 부패한 단백질의 냄새. 그 근원에 쌓여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왕혈. 한때 드래곤이었던 일족의 영락한 후손들인가….’
상태가 지독하다 못해 차마 눈 뜨고 보기 부담스러웠다. 잔뜩 늘어난 피부와 겹겹이 쌓인 붕대, 썩은 내와 마법 시약의 냄새.
아마 오래전에 죽은 이들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한 것 같았다.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 특정 약물에 불려낸 모습.
뼈를 모두 발라내고 말린 사체를 흐물흐물하게 불려 쌓아 만든 끔찍한 탑은 망루에서 해츨링 알다르샥스가 자책하듯 하던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우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저 보호받을 뿐인 과거의 유산이라는 뜻이지.]쓸모없는 과거의 유산. 리자드맨과 비슷하나 전혀 다른 그 외형, 힘과 지혜를 잃은 육신만이 과거의 영광된 종족의 흔적임을 나타내는 종족, 왕혈.
솨아아아아아-!
솟아오른 모래가 주변을 모두 빨아들일 듯 거세게 몸집을 불려가는 가운데, 낮아져가는 사면에 카울라디의 기함 위로 모래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환희에 찬 주술사들이 끓는 모래에 제 살이 녹아붙는 것도 도외시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모래는 위대한 주군의 마지막을 알현하기 위해 부복한 상태로 움직일 수 없는 노예 전사들을 삼키고.
부패한 왕혈의 사체로 만든 탑을 삼키며,
마침내 하얗고 거대한 유골을 모두 품에 그러모아 모래 속에 파묻었다.
주술사. 생명을 도외시한 숭배는 신성의 상징을.
전사. 강제된 희생은 제물의 상징을.
사막 전역에서 끌어모은 왕혈의 사체. 힘과 지혜를 잃은, 문자 그대로 죽은 용의 살점과 다를바 없는 그들의 육신과 수백 년의 세월 속에 티끌만큼의 마모조차 없는 용의 강골(强骨). 드래곤의 뼈와 살점, 둘을 한데 모아 용의 상징을.
그리고, 사막을 사역하는 힘으로 그 모든 것을 한 대 모아 다시 일으킨 사막의 최고 지도자. 사막의 왕에 가장 근접했다 여겨지는 카울라디의 심장에서 짜낸 생혈로, 왕의 상징을.
쿠우우우우우우우-!
그 모든 것을 모아 [신성한 사막의 용왕]을 부르는 주술을.
마법사로서 의미를 하나하나 분석해본 결과.
…..이쯤 되니 오히려 허탈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야아. 그거다 그거.”
[진짜 그거네.]“사막 초입에서부터 냄새를 풀풀 풍기긴 했는데, 설마 진짜 그게 나올 줄은 몰랐지.”
그 첨단을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꺾어야 할 만큼 크고 거대한 모래 산. 모래 산이라 여겼던 것의 둔덕 하나가 갈라지며, 눈꺼풀로 추정되는 것 안에 세로로 갈라진 노란 동공이 드러났다.
푸후욱!
드러난 눈동자 아래 첫 숨을 내쉬는 비강이 드러나고.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포식자의 이빨 아래에는 그 흉험한 모습과 대비를 이루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황금의 비늘이 물결치고 있었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누구나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모습.
카울라디와 주술사들이 그렇게나 갈망하던 사막의 왕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니, 시발 진짜….’
내심 사막의 전설이 어쩌고 할 때부터 생각은 해봤지. 이 게임에서 ‘설마?’ 하던 일은 대부분 일어났으니까. 결국 한 번 만나긴 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설마 진또배기 드래곤이 나올 리는 없으니, 뭐 드래곤의 힘을 삼켰다거나 사막에 묻힌 드래곤 본으로 스컬 드래곤 같은 걸 소환해서 그걸 때려잡겠다고 쌩쇼를 해아 하는 거 아닌가, 광명 교단에 재앙급 언데드가 출몰했다고 지원 요청 미리 해놓을까 등등…. 나름 계획을 세워 보긴 했었단 말이다.
그. 런. 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을 보니 그게 얼마나 어리숙하고 허황된 가정이었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탄생의 울음을 토해내는 그 모습은 새 생명의 탄생이라기보다 화산 폭발이나 지진의 소음에 가까웠으니.
가장 높은 사구에서 오아시스의 밑바닥까지. 사막에 존재하는 모든 모래알 위에 내려앉는 그 거대한 울림은, 주인을 잃고 정처 없이 흐르던 사막에 그 주인이 되돌아 왔음을 공표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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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인가.’
카울라디의 의식은 마지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던 순간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두 해츨링 남매를 적의 손에 넘겼으며, 그로 인해 몇 년에 걸쳐 사막 전역에서 왕혈의 사체를 긁어모은 것이 허사가 될 뻔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으지 못했다는 생각은 술자의 뇌리에 ‘불완전함’으로 자리 잡았고, 카울라디는 쐐기처럼 박힌 그 불완전함의 심상을 보강하기 위해 길고 복잡한 의식을 주술에 추가해야만 했다.
쩌걱!
우지끈!
소금물에 2년이 넘도록 절여 말린 군선의 목재를 부수는 소리는 의식에 집중한 그의 귀에도 잘 들어왔다.
적이 준비한 대전사. 무기를 쓰지 않는 살라딘.
‘이미 스스로의 신체와 무구에 있어 유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겠지.’
그의 평생을 바쳐 준비한 선단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의 방어선이 뚫리고, 배와 전사를 쪼개는 폭음이 한 칸씩 그를 향해 전진할 때마다 카울라디는 더욱 이를 악물고 의식에 집중했다.
그것이 사막의 순리에 반하는 그를 벌하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운명처럼 느껴졌기에.
전쟁과 기아밖에 없는 사막을 만들어낸 그 운명에 반발하며, 카울라디는 죽음처럼 다가오는 그 검은 괴수가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까지 술식을 멈추지 않았다.
‘역천을 꾀함에 있어 목숨을 걸지 않을 리 없으니.’
의식을 마무리 짓지 않고 현현하는 것.
흑요석 단검을 뽑아드는 그의 귀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태양을 가린 기함의 그늘막을 찢어내는 순간.
푸욱-!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카울라디의 의식이 사라졌다.
긴 잠속에 꿈이 스며들 듯, 주술에 엮여 들어간 그의 혼은 마모되지 않고 굳어버린 그의 과거를 짚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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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리라.’
메마른 땅은 그 위에 살아가는 것들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부추겼다. 어린 카울라디는 그것이 싫었다. 우리도 내지의 사람들처럼 더 많은 나무를 키워내면 될 텐데. 대추야자를 더 심고, 그렇게 모두가 가진 게 많아진다면 서로 빼앗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을 텐데.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이 땅의 모든 것을 내 발아래 두리라.’
가장 유능한 주술사조차 고개를 내저었다. 비옥함이란 단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건만 오아시스의 작은 텃밭조차 새 생명을 틔워내지 못함에 카울라디는 절망했다. 내지에서 공수해온 흙 위에 선선한 바람과 필요한 햇볕만 걸러 내려보냈음에도. 하다못해 주술과 신비를 내려 생명력을 돋우어도 살아남지 못하는 씨앗의 모습에, 배부른 백성과 평화는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겨우 살아남을 정도의 양식만 내려주는 사막. 마치 싸움을 부추기는 듯한 그 모습은 카울라디에게 오래된 저주를 떠올리게 했다.
사라진 고대의 두 신과 그중 하나의 단말마에서 시작된 저주. 메마른 땅과 끝없는 싸움.
돛대를 내려 문지르는 솔에는 모래 섞인 기름이 묻어나왔다. 부서진 배와 함께 가라앉은 선원들. 그들의 지방이 열사의 모래 바다에 끓어올라 모래바람과 함께 섞여 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카울라디는, 말없이 그의 거처로 돌아와.
고대의 비사에 담긴 모든 서적을 들일 것을 명했다.
누군가는 저주를 끊어야 할 테니.
그리하고자 하는 이가 나밖에 없으니, 다소 인간의 길을 벗어나더라도.
‘내가 사막을 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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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우웅-
그리고, 카울라디는 꿈은 이제 그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나 작았던가.’
세상이 모두 그의 시선 아래 놓인 것 같았다. 용의 시선에서 찰나의 변화는 큰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사막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허나, 그렇게 훌쩍 높아진 시선 속에도 사막은 넓고 광활했다.
이제 그의 것이다.
열사의 대지가 모두 그의 것이니, 이제 오래된 저주 또한 그의 힘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본디 이 땅은 과거에 물이 너무 많아 살 곳이 부족했던 땅이라 하지 않았던가.
저주를 풀어내고, 새 생명이 움틀 것이며, 그리하여 이 말라붙은 땅에 저 내지의 푸르름이 되돌아온다면. 기아가 부른 다툼도, 다툼이 불러낸 증오도, 그 증오를 필요에 의한 것이라 속여가며 서로의 피를 흩뿌려대던 이 지옥 같은 사막도 마침내 평화를 찾을 것이다.
카울라디의 이름으로 죽여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티끌처럼 보일 만큼. 더 많은 생명이 삶을 되찾으리라.
휘청-
쿠우우우웅-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아직 용의 거체와 그의 혼이 제대로 섞여들지 못한 탓이리라. 어쩌면, 급하게 마무리한 의식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지고의 존재에 어울리는 황금빛 비늘이 갈라져 모래가 되고,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완성되지 못했다.’
지고의 존재. 완성된 생물의 상을 담아 만든 주문을 불완전한 육신에 담아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잠시 흔들렸으니, 담담해졌다. 결핍을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지금 내려다보는 전장, 용의 눈이 시릴 정도로 파괴가 몰아치는 군선 안에 미처 함께하지 못한 용의 조각이 있을 터.
지금 이 몸이라면, 용의 육신과 태양의 힘을 한몸에 담은 그라면 모래 한줄기만 내려보내도….
‘….없….다?’
분명 의식 전에 눌락의 기함에 있는 것을 확인했던 왕혈 두 마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칫,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는 마음이 카울라디의 평정을 흔들며 용의 눈이 사막을 꿰뚫어 보는 사이.
[새 몸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그의 머릿속으로 낯선 듯 익숙한 이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팔카투스. 네 놈인가….]그의 조력자. 답을 알 수 없어 제자리만 맴돌던 그의 숙원에 열쇠가 될 가장 중요한 물건을 찾아준 이.
속을 알 수 없는 이종족 책사.
드래곤의 으르렁거림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실체 없는 웃음을 내비쳤다.
[정말 잘 해주셨습니다, 카울라디. 주술이란 놀랍군요. 이만한 존재를 재림시키려면 마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신성을 이용한다면 신이라도 강림할 수준의 신성력을 그러모아야 할진대. 그 반의 반도 안 되는 힘으로 이렇게 번듯한 드래곤을 만들어내다니 말입니다.] [….흰소리하지 말라. 애초에 먼저 나의 준비를 알아보고 접근한 것이 그대가 아닌가. 사막에 깃든 힘을 축으로 주술을 쌓아 올려도 불가능하기만 했던 나의 주술에 그 구심점이 될 힘을 손에 들고 찾아왔지.]상대가 의심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찰 나온 그의 발밑에서 나타난 그 생물은 인간은커녕 쉬이 볼 수 있는 사막의 몬스터조차 아니었으며, 그런 괴물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인간의 언어 또한 불쾌감을 자아낼 뿐이었다.
허나, 그 괴물이 그에게 건넨 제안은 그 모든 의심과 불쾌감을 종식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떨어진 태양의 조각. 그 힘이 담긴 조각이 있다면, 주술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가 사막의 1인자로 군림하며 대사막 전역을 갈아엎다시피 해도 흔적조차 찾지 못한 물건이 저 괴물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고대의 전설과 역사, 그 흔적을 심도 깊게 연구한 카울라디에게 있어서 그것은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은빛 원판 위에 복잡하게 새겨진 신비.
신이 정원을 만들 듯, 반듯하게 조각낸 녹지 위에 오색의 띠로 표현된 수십 개의 상징이 심어진 그것은 과연 태양의 유물이라 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울라디는 그 힘을 축으로, 제 영혼을 촉매로 고대 드래곤 로드를 재림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신의 육신과 함께 드래곤의 몸에 스며들어 지금도 그 힘을 발하고 있었다.
[….왕혈은. 그대가 숨겼군.] [쓸 곳이 있어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의뭉스러운 것.
[보상을 바라는가. 익히 말했던 것처럼, 되살아날 이 땅에 그대의 종족을 위한 자리가 있길 바라는가? 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 두려워 이리 행동하는 것인가?]용인의 노한 음성에 그것은 또 한번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숨죽인 웃음 같은 소리.
[그런 것은…. 애초에 당신 같은 존재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가지지 못한 것을 준다는 약속에 기대를 거는 멍청이가 되기엔, 제 머리를 물려주신 분이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뭐라?] [당신의 몸을 잘 살펴보십시오. 용인 카울라디가 아니라, 주술사 카울라디로서.]팔카투스의 말에 카울라디는 익숙지 않은 그의 육체에 의식을 집중했다. 상상할 수 없는 거력을 담은 육체와, 그에 걸맞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 쉬이 섞여들지 못하는 그의 영혼까지도.
섞여들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과 육이 반발하는 모습.
[이건…. 무슨?]마침내 평정을 잃은 카울라디가 어떻게든 육신과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 위로 팔카투스의 웃음소리가 부스러져 내렸다.
[아아, 위대할 뻔했던 카울라디. 전설을 잊으셨습니까? 왕은 달을 탐해 떨어뜨렸으며, 분노한 태양은 그 최후와 함께 드래곤 왕국을 멸망시켰다.]그것이, 어째서.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태양의 힘이라 불리는 그 힘이 어째서 저 하늘의 빛과 열이 아니라 모래를 다루는 힘으로 나타난 것인지. 한때 바다라 불리던 이 땅에서, 푸른 물속을 유영하던 드래곤의 ‘해상왕국’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아직도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아직도?]팔카투스는 익숙한 답답함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자와의 대담은 그를 쉽게 지치게 했다.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일러주어도 답에 도달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답에 도달하고, 그것을 넘어 그만의 해법으로 언제나 그를 앞서 나가셨거늘.
팔카투스는 전장의 하늘에 띄워놓은 비행형 뮤트의 시선으로 비틀거리는 용과 대치한 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 미천한 저능아와 다른 그분의 모습을 보라. 귓가에 어린 물방울은 그분께서 즐겨 쓰시는 메시지 마법일 것이다. 입 모양으로 유추컨대, 해츨링과 도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그 곁을 지키는 그림자에게 두 해츨링의 피신을 지시하고 계신 것이겠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정답이다.
아버지께서 눈치챈 것처럼 이 드래곤의 몸은 살아남은 두 해츨링을 포함해 모든 왕혈을 온전히 집어삼키지 못하면 완성되지 못한다. 지금 수준만 해도 살아 움직이는 재앙에 가깝지만, 과거의 그들처럼 창공을 누비고 세계를 조율하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한번 흔들린 그의 영혼은, 시작부터 잘못된 주술로 완전히 새로운 육신과 분리되게 될 것이며. 드래곤의 압박이 사라지면 아버지는 눌락의 기함에 합류, 악전고투 중인 내 형제들을 무찌르고 이번 전투의 승리를 가져가시겠지.
‘주술에 문외한이신 아버지는 단 한순간의 관찰로 그것에 도달했거늘. 다른 이들은….모두 참담할 정도로 저능한 생물이구나.’
어떻게 한번을 의심하지 않는단 말인가? 다른 이의 육체를 이용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여줬는데도 그가 매번 호위라는 명목으로 니그미를 데리고 다니는지?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데 주술이나 마법 따위의 세뇌까지도 필요 없음을, 반복된 암시와 속삭임, 곪아가는 욕망을 간질이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아무리 니그미가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하여도 이렇게까지 쉽게 눈이 가려질 줄은 몰랐다.
‘아마, 몇 년째 답보 중인 그의 숙원이 카울라디의 눈을 가렸겠지.’
조급함. 성군의 마음으로 폭군이 되어버린 이의 조급함.
제 손에 죽고 병신이 된 인간의 숫자나 헤아리는 놈이기에 이렇게 망가지고, 쉽게 속은 것이리라.
충격에 빠진 카울라디에게 팔카투스는 동정을 담뿍 담아 말했다.
[당신이 딛고 있는 이 사막. 수백 년이 지나도 끓어오르는 이 사막이 바로 ‘태양’의 유해입니다, 카울라디.]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이니. 저능한 그에게 작은 진실을 베풀어줄 아량 정도는 있었다.
[당신이 불러낸 드래곤의 육체는 사라진 신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은 드래곤 로드의 육신이며, 그 축이 된 것이 그러한 분노에서 태어난 태양의 힘입니다. 상극이나 다름없는 두 힘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닙니까?] [네 이놈…. 나를…. 속였구나….!] [뭘 새삼스럽게. 서로 원하는 것이 있어 웃는 낯으로 마주한 게 아닌지? 당신이 인간을 잡아먹는 우리 종족을 당신의 낙원에 들이고 싶어 할 리가 없는데. 그리 쉽게 받아들인 것부터 이미 들어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겠지요.] [크으으으….] [당신은 불가능한 꿈에 다가가기 위한 힘을. 나는 예정된 실패 속에 혼과 분리되어 덩그러니 남게 될, 불완전한 용의 육신을. 자칫 완벽한 용의 육신으로 완성됐다면 당신의 혼이 튕겨나가도 그 안에 세계의 자아가 깃들 위험이 있지요. 우리 종족이 다루기엔 저런 불완전한 모습이 가장 적당합니다. 충분히 만족스럽게 잘 만들어주셨어요. 부수입치고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군요. 고맙습니다, 카울라디.] [크으으으….아아아아!]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 카울라디는 발악했다. 아직은 드래곤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용의 투명한 시야는 사막의 모래를 꿰뚫고, 저 아래 가라앉은 팔카투스의 존재를 분명하게 노려볼 수 있었다.
다 죽어가는 듯 갈라진 피부 사이로 선혈을 흘리는, 하찮을 정도로 작은 생물.
적어도, 이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동안 저놈만큼은 데려가기 위해 드래곤의 힘을 쥐어짜는 그때.
카울라디의 시선에 그를 향해 날아드는 전사가 들어왔다.
그의 의식을 방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전신에 검은 무장을 두른 전사의 모습.
[참 아쉽게 됐습니다, 카울라디. 제 생각보다 당신이 이 몸에 오래 붙어있어서, 어쩌면 저 무시무시한 모래가 제 목줄을 콱 움켜쥐는 게 아닌가, 내심 걱정했는데.] [안 된다. 이렇게 끝낼 수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려가며 달려왔거늘!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끝낼 수 없어!!!!]전사가 다가온다. 박차는 힘에 산산조각난 군선의 파편을 뒤로하고, 검은 동체 위로 이글거리는 하얀 불꽃을, 폭력을 형상화한듯한 힘을 넘실거리며, 그를 향해.
드래곤의 눈에 전사의 의문을 읽어냈다. 생각지도 못한 완벽한 기회를 잡은 전사는, 전력을 다한 공격을 펼치는 와중에도 왜 이렇게 됐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것을 보며, 박수갈채를 날리는 괴물의 목소리.
쿠웅-
전사의 주먹이 용의 골을 부수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카울라디의 혼은 그 충격에 결국 육신을 붙잡은 손을 놓고 말았다.
[모두. 그때부터 모든 것이….] [고생 많았습니다, 카울라디. 당신의 역할은 정확히 이 지점, 아버지께 의문을 남기는 이 순간까지입니다.]드래곤의 육체 또한 부수입에 지나지 않으니.
팔카투스는 사라져가는 카울라디의 혼에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그의 본신으로 의식을 옮겼다.
탁.
들고 있던 손이, 반들반들한 말을 내려 놓았다.
“….버디, 날 좀 들어주렴. 채비를 해야겠어.”
탁탁, 타각타각-
버디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팔카투스를 조심스럽게 들어 그의 체액 안에 넣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
수많은 조약돌이 어지러이 늘어선 가운데, 팔카투스가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말이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완성된 그림. 하나의 계획. 하나의 목표.
남겨진 말판을 뒤로한 팔카투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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