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33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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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혼자 가도 되겠나?”
“잠깐 보고 오는겁니다. 급하게 허둥지둥 상대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평화로워 보이지만 분명 여기도 적지라고 볼 수 있어요. 오트만이 좀 남아서 지켜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으음. 그…. 내가 저 밑으로 내려가고, 자네가 남는 것은….”
“꿈도 꾸지마시죠. 보나마나 쭈욱 내려가서는 ‘오오, 물이다 물….’ 이러면서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릴 게 뻔하니까.”
“….부정할 수가 없구먼. 그럼, 언제쯤 돌아올 생각인가? 자네가 잠수를 얼마나 할 수 있지?”
“어…. 대충 감으로, 12시간 좀 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 예전에 우물 다이브 할 때 이후로 이렇게까지 오래 물에 들어가있는게 처음이네.”
“12시간이라. ‘고작’ 한나절이라….”
“좀…. 그렇죠?”
“그렇다 뿐인가. 내 교수 자네가 우리 리드 플로우 학파와는 궤를 달리하여 마법적인 부분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래도 3위계 끝자락에 걸친 수계 마법사가 겨우 한나절 잠수한 것으로 숨을 헐떡이려 한다니. 아직 자네 뇌리에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산다.’는 생각이 돌부리처럼 박혀있어서 그런게야. 으음…. 어디가서 다른 수계마법사 만나면 내 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말게.”
드라이 오아시스 옆, 수면위에 수박처럼 동동 떠있는 오트만은 교수의 얘기를 듯고 혀를 찼다. 당장 4위계 마법사들만 해도 재주가 있다 싶은 사람들은 강 바닥이나 연못 아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건만, 고작 한나절 밖에 안 된다니.
오트만은 그래도 나름 제자인데, 그가 교수의 마법 교육에 너무 무심했음을 깨닫고 한탄했다.
“자네 마법은 이제 육체의 보조수단으로만 쓰고 있지?”
“예. 저번에 변경백 령에서 미쳐날뛰었을 때, 블러드 아머가 몸에 완전히 체화되면서 효율이 너무 좋아졌거든요.”
블러드아머는 이미 교수의 뼈와 근육 사이에 촘촘하게 자리잡아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로 상시 활성화 되어있었다.
충격을 흘려 몸 외부로 방출하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구성. 그것은 ‘유리 몸’ 이라는 전투 불가의 천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다만…. 효율이 좋다고는 해도 데미지를 100% 흘려낼 수는 없다보니 충격을 받을 때마다 블러드 아머가 마나를 빨아먹는 것.
이를테면 체력 게이지와 마나 게이지가 있을 때, 마나 게이지를 통째로 체력 게이지 위에 씌워서 실드처럼 쓰고 있다는 소리다. 그 마나가 똑 떨어지면 블러드 아머가 해제되며 다시 유리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열심히 마법 하나 만들어서 날리는 것보다 그 마나로 그냥 한 대 맞아주고 파고들어서 줘 패는게 훨씬 이득이라, 마법을 좀 등한시하게 됐다는 말씀.
“별 수 있습니까. 워낙 공사가 다망하신 몸이라 마법 수양할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으으음…. 어쩔 수 없지. 혹시 저 아래에서 힘이 부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게. 이곳에서는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메시지 마법이 닿을테니. 나는 우리 배 주변 물을 좀 잡아두고 있겠네. 아무래도 급하게 수리 하다보니 아직 물이 샌다고들 하지 뭔가. 일지에 그 사람들처럼 저 난파선의 땅위로 올라가는 것은 선원들이 무서워 해서 그러지도 못하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쏘옥-!
무슨 어인처럼 물 위에 둥둥떠서 이야기를 나누던 교수와 오트만은 그대로 물 속에 잠겨들었다. 오트만은 배 밑으로, 교수는 저 깊은 바다의 중심으로.
쿠르르르르륵-
‘확실히, 본격적으로 마법에 집중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좀 낯설긴 하군.’
이곳이 적진이라 가정한 이상 이동에 주의를 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바닷속. 특별히 은,엄폐에 유용한 지형지물도 없는데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바다생물중 어느게 뮤트쪽에서 생산한 것이고 어느게 그냥 생선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상황.
‘아마 우리 배가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 주변에 감시를 붙여뒀겠지.’
하지만 적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감시 대상이 물에 잠긴 수계 마법사라는 점이다.
쿠르르륵-
겁 많은 작은 물고기떼가 그의 옆을 지나는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교수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수계 마법사는 물과 다를게 없다 이거야.’
오래 전, 투란에서 마법사의 실험실에 붙잡혀 있을 때. 친절한 로만의 가르침 속에 예의 ‘익사체 훈련’을 당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그것 아닌가?
『하하하하하하핫핫핫핫!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니까! 어머니의 양수안에 든 아기처럼! 자네가 곧 물이야! 수계 마법사는 물과 다를 바가 없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게! 핫핫핫핫핫핫!』
그때야 ‘저 미친 사이코패스가 날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지만, 마법사가 된 지금은 그 말이 ‘마법사적 관점’에서 순수한 조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오트만을 비롯한 수계 마법사들만 해도, 몸 속에 물에서 비롯하지 않은 것이 들어오면 심상 흩어진다면서 날 생선과 수초같은 것들만 먹지 않는가?
수계 마법사는 곧 물이다. 이 말은, 지금 내 몸과 바다를 구분함에 있어 존재적 경계가 매우 희미하다는 뜻이다. 물속에 물을 한컵 넣는다고 해서 그 섞여든 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바닷속에 잠겨든 교수의 존재감은 이미 물과 동화되어 매우 흐릿해져 있었다.
또 유영 속도는 어떤가. 작은 물고기 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주제에 속도는 어뢰나 청새치를 방불케 할만큼 빨랐다.
튼튼한 두 다리의 각력이 한 몫 한 것은 물론이다. 도약 한번에 그 디딤대가 된 군선을 터트리던 다리는 물을 박차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따위로 무식하게 발장구를 쳤다간 1km 밖에서도 교수 뒤로 길게 꼬리를 남기는 하얀 포말을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여기에 마법사의 ‘물 지배력’이 끼어든다면?
슈르르륵-
매질로서 저항력이 사라진 물 사이로 몸이 스며들 듯 나아간다. 물을 박차고 가르는 소음, 거친 포말 하나없이 완벽하게 무음모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 속에서 수계 마법사를 찾는다는 것은 같은 수계 마법사 이거나, 물과 관련된 이능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며 이는 물속에 잠긴 시설에 은밀하게 잠입하는데 있어 수계 마법사보다 더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 마법사가 한때 전장에서 전설이라 불리던 게릴라 부대의 에이스라면 더욱이.
‘이건 마법사이거나, 마법에 정통한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식이지. 정확히는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잡다한 지식이다. 설사 마법사의 몸을 장악하고 기생하며 그 기억을 들춰본다 해도 [물속에 들어간 수계 마법사는 찾을 수 없다] 같은 지식은 일부러 떠올리려 애쓰지 않는 한 쉽게 들춰볼 수 없을테니까.’
뮤트 세력 유일의 마법 전문가 바즈유르는 죽었다. 팔카투스가 마법적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상대는 오직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배당한 마법사들 뿐이며, 능동적으로 문답이 불가능한 그들에게서 지식을 찾는 것은 [마법사가 평생 받아들인 지식]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단 하나의 정보를 찾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뮤트를 공략하는데 있어 너무 정석적이고 굳은 방식을 고집했던거야. 이미 전투를 통해 적의 마법 전력을 제거했는데, 그 사이를 파고들지 않다니.’
쿠르르르륵-
끝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교수의 머릿속에 팔카투스와 그 세력이 준비했을 대비와 그들이 알고있는 것, 모르는 것이 차례로 얽혀들어갔다.
놈은 쉽게 배우고, 빠르게 응용한다. 한번 쓴 수단은 다음에 먹히지 않는다.
마법 지식의 부족에서 생겨난 틈. 이것 또한 이번에 사용하고 나면 다음에 만날때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겠지.
‘그러니…. 아예 제대로 찔러서, 회생불가의 피해를 남길 수밖에.’
바즈유르가 죽어 이런 틈이 생겨난 것처럼. 다른 틈으로 이어질 커다란 피해를 주는 것.
그것만이, 나와 같은 수준의 사고를 하는 상대를 뛰어넘을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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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륵-
‘슬슬 눈에 들어오는군 그래.’
[저거랑 저거. 그리고…. 저것도 뮤트인가? 더럽게 큰데?]‘아마도.’
[제기랄. 내심 아니었으면 했는데.]‘나도.’
일반적인 심해와 달리 깊어져 갈수록 밝은 빛을 뿜어내는 바다.
그 일렁이는 빛무리 속에, 슬슬 찾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저, 저 깊은 바다의 중심. 거대한 산호군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가라앉은 달.
그 달의 산호군 속에 교묘하게 가려진 챔버 메이드 들이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대충 눈에 들어오는 것만 여덟 기가 넘는데?]‘굳이 한쪽에 몰아둘 이유가 없으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까지 20기는 족히 넘게 있다고 봐야겠지. 이 정도면 뮤트 생산이 늦어질만도 하군.’
아름다운 산호 숲 사이로 교묘하게 가려진 챔버 메이드 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가시 넝쿨이 아니라 해파리 같은 투명한 몸을 너울거리는게 바다에서 활동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개체로 보였다.
챔버 메이드 20기면 여왕이 기거하는 북부 초입에서나 볼 수 있는 물량이다. 지역단위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챔버 메이드는 한 지역당 3~4기 정도만 심어놓고 활동하는게 보통이니까.
저 챔버 메이드들이 전부 뿌리내리고 생산 개체로서 변모하는데 그동안 빨아들인 영양분을 전부 사용했겠지. 당연히 그 동안은 뮤트를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고.
호위 병력 또한 본토에 대기하는 병력은 여기 데려왔다간 죄다 익사할 판이니 따로 수생종을 기반으로한 새로운 뮤트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며, 그래서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규모 병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본토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서 땅굴 벌레로 옮겨와야 했을테니까.
‘어디보자…. 활성화된 챔버 메이드 둥지가 3개. 나머지는 아직 자리잡는 중이고….’
[아, 저기! 새로 한 마리 나온다!]‘….그냥 다랑어처럼 생긴걸 보면, 역시 배 주변에 돌아다니던 해수어 중 일부는 저놈들의 척후였다고 보는게 맞겠지.’
이미 팔카투스는 우리 일행과 배의 위치를 확인했으며, 실시간으로 감시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우선 적 생산거점 확인. 저 정도면 주요 타격 대상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겠어.’
확실히 놈들은 이곳에 자리잡았으며,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이 바다에 담긴 무궁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병력을 마구 쏟아낼 것이다. 보통 사람은 들어오기조차 힘든 모래 바다 밑에 난공 불락의 생산 거점이 생기는 것.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산호층 위로 마치 부표처럼 둥둥 떠있는 구조물 같은 것들이었다.
딱히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충 봐도 한눈에 들어왔으니까.
‘집인데?’
[그러게. 저 위에 있는거랑 비슷한 것들이네.]부서진 배의 일부. 혹은 사암 가옥. 심지어, 이런 곳까지 가라앉기도 힘든 두터운 천막까지.
온갖 잡다한 구조물이 산호에 둘러싸인 달 주변에 위성처럼 떠 있었다.
난파선. 혹은 천막. 더러는 사막의 누군가가 살았을 사암으로 된 집까지.
바닷속에 가라앉은 부표처럼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고 둥둥 떠있는 그것은 마치 달을 둘러싼 위성처럼 보였다.
‘이걸…. 가라앉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떠 있는 거라고 해야하나?’
[중성부력? 아니, 물리적으로 생각할게 아닌 것 같은데?]‘애초에 가라앉을 수 있다면 지금 수면 위에있는 난파선 잔해들도 모조리 가라앉아야 맞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거운 것들은 물 위에 떠 있는데. 어떤 것은 가라앉고 어떤 것은 위에 뜬다…. 꼭 바다가 편식하는 것 같군.’
마치 달이 제 품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선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유사와 함께 쏟아진 모래는 거짓말처럼 다시 천장의 모래 바다로 돌아간다. 몇 백년 가까이 유사가 집어삼킨 난파선과 사막의 집들은 바다 위에 둥둥 떠있고, 그 일부만 이렇게 가라앉다 만 것처럼 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몸은 속절없이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슬슬 챔버 메이드의 이목구비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고, 그만큼 주변에 감도는 뮤트의 빈도도 증가하고 있었다.
쿠르르륵-
‘….!읍! 으읍!’
[찌, 찍소리도 내지마! 입 막아!]바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위험 천만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해양생물로서 순수하게 전투적인 모습만 부각된 생물들. 면도날 같은 이빨이 입안에 몇 겹으로 돋아나 있다거나, 위험해 보이는 녹색광이 기다란 몸의 줄무니 위로 지나 다니는 장어라거나….
눈알만 수십 개 달린 아귀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을 땐 정말 입을 틀어막지 않았으면 소리를 지를뻔 했다.
‘여기서 걸리면…. 뒈지겠지?’
[최선을 다해서 튀면 상반신 정도는 수면에 닿을지도 모르겠지.]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급이 높은 개체가 있었고, 이는 수계 마법사로서 바다와 최대한 동화된다고 해도 감지될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쿠르르륵- 턱.
‘닿았다!’
그렇게 심장 쫄리는 잠수가 이어지던 중. 드디어 달 주변에 둥실둥실 떠있는 집들 중 하나에 발이 닿은 교수는 폭격중 방공호를 찾는 보병처럼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쿠드드득.
집 문을 가로막은 산호들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서 물이끼를 뜯어먹던 해수어들이 화들짝 놀라 작은 창문으로 도망치는게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것 없는 사막의 사암 가옥의 일부.의 집기들.
‘어이구, 진짜 심장 떨려서….’
[심박수 조절 안했으면 그 소리에 걸렸겠다. 그나저나, 여긴 뭐지?]‘….그냥 집인데?’
수면에 떠있는 다른 집과 난파선과는 달리 달 주변에 있길래 뭐라도 있는가 했는데, 그냥 집이었다.
그런 식으로 비슷한 높이에 떠있는 집과 천막을 몇 개 뒤졌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끼와 해조류, 따개비 따위에 둘러싸인 집. 천막. 난파선의 선실로 보이는 일부. 그리고,
‘어, 이거….’
[뭐가 있는데?]집은 집인데,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는 집.
‘이건…. 단검으로 새겼군.’
[보통 정성이 아니야. 벽이며, 천장이며…. 바닥까지 아주 빼곡하게도 새겨 놓으셨군.]해저의 뮤트들 사이를 숨죽여 다니며 방문한 네 번째 가라앉은 집.
여타 다른 집과 다르게 누군가 관리한 것처럼 내부가 아주 깔끔했다.
덕분에, 사암으로 만들어진 집의 벽과 천장, 바닥까지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아주 선명하게 잘 보였다.
[어디보자…. 기억이, 기억이…. 아, 여깄다! 전에 로드릭 수도에서 용사 회의인가 뭔가 했을 때. 풍요의 성녀 옷자락에 적혀있던 문자야.]‘풍요의 신성문자. 그럼…. 설마 여기가?’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일지에 나와있던 그 풍요의 사제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하니까.]일지에 적혀있던 기록. 풍요의 사제는 신자가 된 선원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써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산호의 크기나 풍화된 정도로 봤을 때, 일지에 기록된 시기와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사제와 그 신도들을 집어삼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이 머물던 집까지 제 품에 끌어들였다….’
신성한 것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얼추 짐작이 갔다. 영락한 신이니까, 부족한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약간이라도 신성이 담긴 것을 마구 끌어담을 수는 있겠지. 성직자, 신도, 성물, 뭐 그런거. 분명 약간이라도 신성을 담고 있으니까.
‘하지만…. 풍요의 신성은 이런 식으로 깃들진 않을텐데?’
풍요의 교단에게 있어서 신전은 너른 밀밭이나 윤택한 대지정도면 충분하다. 이렇게 발악하듯 벽에 교전을 필사한다고 해서 신성력이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말이다. 이 집은 그냥 어느 사제의 발악이 담긴 집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가라앉은 달은 신성력 하나 담기지 않은 이 집을 따로 선별해 제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하이드. 전에 봤던 다른 가라앉은 집들, 차례로 떠올려봐.’
[그래.]촤르르륵-
지나오면서 확인한 천막과 집이 차례로 눈앞에 펼쳐지며 의심은 확신으로 자리잡았다. 자세히 보면 일렁이는 물 그림자 속에 유난히 깔끔한 자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마치, 그 자리만 누군가 관리하기라도 한 듯 해조류와 산호, 물이끼 사이에 깔끔하게 유지된 어떤 것들의 흔적.
‘제단 위, 둥글게 난 흔적. 보통 제기(祭器)나 성상을 놓는 자리지.’
‘침대 위. 저건 볼 것도 없군. 사람이 누웠던 자리야.’
‘이건….깃털 모양? 아, 깃펜과 잉크! 그럼 옆에 사각형 빈자리는 책이군. 누군가 성서의 필사라도 한 모양이지.’
성상과 제기가 있던 자리부터 신성했을 누군가의 흔적, 필사된 성서에 심지어 그 성서를 필사한 깃펜과 잉크까지.
‘이건 뭐 아이돌 굿즈 모으는 열성 팬도 아니고….’
이 정도면 신성 자체를 수집하는게 아니라, 신성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전부 손에 넣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신성이 담기지 않은 것들도 마구잡이로 끌어들였군.’
성직자는 물론, 성직자가 기도할 때 옆에 있었던 사람까지 전부 금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신성력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거기에 얽힌 모든 것이 목표물이 된다는 뜻.
뭔가. 뭔가….
‘….집착?’
[아, 그래! 딱 뭔가 으실으실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거네 그거!]‘집착. 집착이라…. 단순히 신성을 가진 존재를 사로잡아 그 내제된 신성력을 수집하는게 아니라면….’
쿠르르륵-
가라앉은 달은 ‘신성’ 이라는 키워드 자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
한때 신성했던 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보는, 되려 신성에 무지한 존재에 가까운 행동.
‘애초에…. 신이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가라앉은 달은 저 거대한 힘을 가지고도 신이 되지 못한 존재였다는 뜻이며. 만약 신이 아니었다면, 이 바다를 붙잡고 사막을 만들어낸 그들의 힘은….
‘세계수. 세계수와 같은 종류의, 다른 존재였던거야. 부여받은 힘이었던거야! 세계관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어!’
처음부터, 신으로 내정된 존재에게 부여된 힘인 것이다. 창세의 신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일조한 도구로서.
하지만 태양과 달은 드래곤들의 ‘자정작용’에 의해 제거되다. 그 뜻은, 세계수와 같은 자리에 들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는 뜻.
그리고, 살아남은 달은 신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있었다….
콰직!
‘….아?’
날카로운 통증이 상념을 잘라내었다.
발등을 뚫고 나온 톱날같은 치아.
콰작! 콰드드득!
연이어 수십개의 이빨이 사암 가옥의 천장과 바닥을 뚫고 나오고, 집 전체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거, 걸렸다!’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니까 눈치를 깐거라고!]쑤아악-!
콰드드득!
정신을 차린 교수가 재빨리 집에서 몸을 빼는 것과 동시에, 방금전까지 그가 있던 집을 씹어먹는 아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모래 바다에서 눌락이 소환했던 그놈.
그놈보다 조금 작은, 거의 드래곤의 절반만한 생물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큼지막한 사암 가옥을 으득으득 씹어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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