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37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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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선금 치고는 과하게 드렸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떻게, 정리를 해드릴까요? 아니면 스스로 생각해보시겠습니까.』
“….”
골이 울린다. 목덜미의 맥박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고, 아픈 머리와 함께 눈알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하하하. 역시 그 대단한 아버지라도 이 정도 진실 앞에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가보군요. 당연히 기다려 드려야지요. 제가 가라앉은 달로부터 이 모든 것을 알아냈을 때 충격으로 사흘을 앓아누웠으니 말입니다. 시원한 차라도 한잔 드리면 되겠습니까?』
“….술 없냐.”
『죄송합니다. 워낙 몸이 약한 터라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종류의 취식물은 가까이 두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너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
『하하하하.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빌어먹을. 한마디를 안 지는 새끼.
나름 최대한 여유로운 척을 하고있긴 한데, 암만 봐도 겉으로만 여유로운 나와 달리 저놈은 진짜 여유 만만이라는게 문제였다.
서로가 서로의 전략을 모조리 꿸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상대. 이 레벨에서는 의표를 찌르는 번뜩이는 전략이 아니라 알아도 못 막는 전술을 구사해야 상대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팔카투스가 준비한 전략, 세치 혀와 의심암궤로 사흘밤낮에 걸친 치열한 공방 대신 순수하게 진실만 토로하는 이 대화는 쉽사리 파고들 구멍이 없는 훌륭한 전략이었다. 놈은 진실을 한무더기 쥐고 그것을 살살 풀어 나를 낚으려 하고 있는데, 내 입장에선 그걸 덥썩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쪽이 헤비급 대어라 낚시대 채로 저놈을 끌어당기는 수도 있으니, 그리 불합리한 전장이라 볼 수는 없지만.’
요는, 저놈이 내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진실을 알게되면 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도대체 뭔 수작인지 짐작이 안가 혼란스러운데, 놈이 천천히 생각하라는 듯 제공한 그 ‘차 한잔’은 연쇄 추돌사고마냥 내 혼란한 머리를 들이받았다.
차가가각. 지이잉-
기계 테이블 사이로 올라온 유리컵 한 잔.
차가운 이슬이 맺힌 유리컵 안에는 파도소리처럼 기포가 올라오는 검은 음료가 담겨있었다.
그거다 그거. 등허리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지금 이 순간에 조차 사람을 혹하게 하는 그거.
『비록 달이 그 권한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는 하나, 데이터 상에 남아있는 음료 한잔 정도 만들 힘은 아직 남아있지 뭡니까. 밖에서 대단히 귀한 음료라 여겨진다기에 특별히 준비해봤습니다만, 실제 그것과 같을지는 미지수로군요. 드셔보고 평가해 주시지요.』
콜라. 이 팔카투스 망할 새끼가 내게 차랍시고 건넨 것은 시원한 콜라 한 잔이었다. 열사의 사막에서 몇 주를 구르고, 그 사막 밑바닥에 가라앉은 바다를 지나 추락한 기계 달 위에서 맞이하는 차고 검은 탄산음료라니. 이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얼마나 엿같은 아이러니란 말인가.
꿀꺽. 꿀꺽.
푸하아!
진짜다. 모양만 그럴 듯 한게 아니라 진짜 어렸을 때 먹던 그맛 그대로인 콜라는 어디 광고에 나올법한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냈는지, 각진 얼음이 달그락 거리며 잔은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 목마른 누군가가 상상할법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그 어떤 수작질보다 확실하긴 하군. 나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놈이 가라앉은 달을 완벽하게 구워 삶았다는 것. ‘바깥’의 정보를 달을 통해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는 것. 달이 이 세계의 창조에 일조했으며, 전기와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새로운 데이터 쪼가리를 추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전부 이 콜라 한잔으로 증명이 되어버렸다.
놈이 실수한 게 있다면, 방금 전까지 머리위로 스팀이 펑펑 솟아오르던 내 머리가 생각지도 못한 탄산음료 한잔으로 꽤 돌아갈 수준으로 식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조건부 무기징역수나 마찬가지라 향수병이 올락말락 한 사람한테 현대 문화의 상징이며 전쟁 전 시절의 추억마저 되새기게 할 자본주의의 단물 ‘코올-라’를 제공하다니. 그것도 바로 내 눈앞에서 그리 대단한 과정도 없이 게임안에 오브젝트 추가하듯 뿅 하고 만들어내다니.
‘게드로이츠를 도와 GG라는 세계의 창조에 있어 연산을 담당한 AI라더니. 드래곤 왕국의 손에 개작살이 나고도 이 정도 힘은 남아있다는 뜻이군.’
이 세계에 없는 물질을 창조해 내는 힘. 문자 그대로 신과 같은 힘이 아닌가? 가라앉은 달이 5대 선신의 신성력을 ‘하위 권한’이라 표현한 것이 절절하게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데이터와 프로그래밍으로 GG안에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라면 NPC들의 믿음을 기반으로 제한적인 기적을 행하는 광명이나 자비의 힘이 진짜 하찮아 보였겠지. 정말 대단한 힘인 동시에-
‘십년 감수했네. 쓰벌 거.’
참으로 마음이 놓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고? 애초에 현실에 있는 물질을 프로그래밍 만으로 쑥쑥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내 손에 들어왔으면 당장 돔의 메이어 제우스 같은 사우론 첨탑을 우후죽순으로 만들어내지, 이렇게 협상 테이블 따위를 준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가라앉은 달에게 남은 권한은 고작 콜라 한잔 정도나 만들어낼 수준이지 세계에 영향을 미칠 무언가를 새로 삽입할 수준이 안된다는 뜻이다. 놈이 의도한 바는 증명. 어디까지나 내게 보여주고, 말한 것들이 사실이라는 증명이다.
‘자, 그럼 해와 달이 창조주 게드로이츠의 분신과 같은 존재라는게 증명됐는데. 자생적 내부 관리자인 드래곤 왕국의 용들이 이 두 창조 AI를 끌어내렸단 말이지. 창조신 수준에서 콜라 디스펜서 수준이 되도록 아주 처참하게 짓밟아서.’
드래곤들은 이 창조주의 분신과 같은 놈들을 제 목숨을 바쳐가면서 까지 고꾸라뜨렸다. 마침내 그들이 한낱 데이터 쪼가리인 것을 깨달은 피조물의 반란인가? 정해진 레일에서 벗어나 ‘데이터 소울’이라는 인간, 오크, 트롤, 엘프, 기타 모든 종족의 근원과도 같은 인종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
‘….아니. 드래곤은 애초에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했지. 놈들은 순수하게 이 GG라는 세계의 조율을 위한 존재다.’
해츨링 알다르는 말했다. 드래곤은 오직 세계에 크나큰 균열이 생겼을 때,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할 때만 진심으로 움직인다고.
‘해와 달. 둘중 어떤 AI가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오류]에 대한 해결책으로 데이터 소울의 삭제를 결정했을 때 드래곤들은 확신해버린거야. 한때 세계를 만든 창조주의 도구였던 저들이 지금의 세계를 관리하는데 부적합하며, 세계의 균형을 해치는 존재라고.’
GG는 게드로이츠와 그의 AI에 의해 창조된 게임속 세상이지만, 딱 하나, 그가 완벽한 시뮬레이션 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 외부에서 하청받은 것이 있다.
데이터 소울. 중국놈들이 개인정보 빼가듯 게드로이츠 그 양반이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무허가 수집한 인간의 사상부터 행동양식, 호르몬 움직임 하나까지 모조리 카피한 데이터로 만들어진 영혼들.
‘그 대단한 게드로이츠 조차 완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NPC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 데이터를 복제하는 것이 고작이었어.’
데이터 소울은 게드로이츠 본인도 만들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며, GG라는 세계에 있어 가장 근간이 되는 자원이다. 이걸 지워버렸으니 드래곤이 ‘세계의 조율’이라는 거창한 이유로 해와 달을 조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풀린다. 주머니속 이어폰처럼 얽힌 정보들이, 지금껏 마구잡이로 습득해 기억 어딘가에 처박아뒀던 정보들이 방금 습득한 핵심적인 정보들을 중심으로 제대로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어디보자…. 해와 달이 병신도 아니고, 당장 개박살난 상태로도 아주 맛이 가진 않아보였으니, 멀쩡했던 옛날에 그 귀한 데이터 소울을 그냥 지웠을리는 없고.’
팔카투스가 보여준 기록에서 AI 널은 이렇게 말했다. ‘월드 내 오류의 확산은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배운다. 인간의 행동양식을 배우고. 권한 회복을 위해 신성 획득을 꾀한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위해 배워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연산해봐도 기계적으로 봤을 때 ‘오류’의 해결을 위해 데이터 소울의 삭제가 그 해답으로 보이며, 그렇게 했을 때 이 사달이 난 관계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다방면의 데이터를 학습할 계획이라는 뜻이다.
‘….AI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게드로이츠가 입력한 프로젝트의 수행. 가라앉은 달은 그 목표의 수행을 위해 [오류]를 제거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데이터 소울의 삭제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목표. 게드로이츠가 부여한 목표.
‘세계수는 완성자를 찾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가라앉은 달은 [프로젝트 Key-finder]의 수행을 이야기했지. 둘은 동일한 목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수는 아직 내가 클리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성자의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고 했어.’
그리고 그 다음 예시로 레빗과 천류제를 들었다. 말만 얘기 못한다 뿐이지 사실상 완성자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는 몰라도 어떻게 하면 자격이 되는지를 알려준 샘.
[AI의 목표 = 프로젝트 Key-finder 수행 = 완성자 찾기(세계수가 말해줌) = 월드 클리어 플레이어 찾기]‘오류가 발생했다. AI가 그것을 막는 다는 것은, 오류가 플레이어의 클리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창조 AI 해와 달 또한 게드로이츠가 준비한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클리어를 향해 다가가길 원했다. 그게 개발자가 부여한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정보가 압축되고, 정리된다. 압축된 정보의 빈자리는 다른 정보와 이어지는 선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준비된 배경에, 모든 일의 시발점.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의 대상은 데이터 소울. 즉,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격들 중 몇몇이 클리어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즉, 난이도를 높이는 NPC들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데이터 소울은 한정 자원이다. GG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세계를 제공하지만, 그 뿌리는 결국 어딘가 숨어있을 단 하나의 서버룸이며 수집된 데이터 소울은 그 안에 잠들어 셀 수없이 많은 그들의 분신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적게는 몇 달. 좀 치는 플레이어라면 1년이 넘도록.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삶을.
[닳겠다.]‘….뭐?’
[닳겠다고. 영혼이 아주 마르고 닳도록 부려먹어지는거 아냐. 그 뭐시냐, 데이터 마모. 뭐 그런것도 있지 않아? 인간의 정신적 수명은 150년이라는 소리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닳아? 영혼이? 데이터 소울이?
.
.
.
.
챙그랑!
그 짧은 말 한마디가 가져온 깨달음이 나를 관통했다.
세계수가 말했다. 셀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가장 적합한 플레이 배경을 골라낸 것이 GG의 월드들이라고.
그 시뮬레이션이란 하나의 세계이며, 문명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을. 10억의 인구로 이루어진 세상이라 하면 10억의 사람들이 몇 세기에 걸쳐 살아간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확인 결과 그 세계는 적합하지 않다 판단되며, 삭제된다. 사용된 데이터 소울은 다시 원형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통계학적인 단위로 계산될 만큼 무수히 반복된다. 인간의 삶도 반복되고, 사라지고. 그것을 거듭한 끝에….
“닳아버린거야.”
『저런. 그래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유리잔인데 그걸 깨버리시다니.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도 나셨습니까?』
팔카투스는 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떨어지는 유리 조각을 보며 빙그레 웃었지만, 그놈의 비웃음에 대꾸해줄 정신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플레이어에게 주어지기 전에, GG라는 세계는 게드로이츠의 입맛에 맞는 시험장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무수히 반복되는 과정에서 고장 나버린 거라고.”
연옥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삶. 심지어 그 배경은 멸망을 마주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세계.
인간의 영혼이 닳고, 마모된다. 다르게 말하면, 미친다.
그게 가능할까? 복제된 인격이, 본질을 벗어나 다른 모습으로 수정되는 것이?
오류. 플레이어 난이도에 악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변질된 NPC. 즉,
“적대 NPC. 몬스터.”
『오호.』
“게드로이츠의 목표는 플레이어가 일곱 개의 월드 모두를 클리어하게 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단 한명도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류는 지금도 확산되는 중이라고 했지.”
만약, 이 게임의 탈을 쓴 시뮬레이션이 원래부터 이런 괴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게 아니었다면.
개발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이 늘어난 오류가 GG라는 세계를 아무도 클리어할 수 없는 난공불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면.
어째서, 데이터 소울이 이 게임의 ‘인격체’를 구성하는 핵심이라 여겼으면서, 그 가능성을 지나쳤을까.
“몬스터들의 안에도…. 데이터 소울이 들어있는 건가? 전부 다?”
『가능성에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의 눈앞에, 당신의 데이터를 복제한 ‘몬스터’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실적인 세계에, 살아있는 영혼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만들어진 생명체가 있다면 대단히 티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어색함을 느껴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없다. 마을 경비병, 대장장이, 아낙은 물론. 길가의 토끼에서 동네 똥개, 숲길에서 마주하는 아울베어부터 슬라임 한 마리까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류의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완벽하게, 진짜 같았다.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드래곤은 세계의 존재 자체를 지키는 입장에서 변질되었다고는 하나 세계의 근간이나 마찬가지인 데이터 소울을 지켜야 합니다. 반면, 창조주의 목표를 대변하는 AI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변질된’ NPC를 제거해야만이 기존의 목표에 부합하는 세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류. 데이터 소울은 마모되고 변질되어갔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보필했어야 할 검사는 어느 산맥의 미치광이 살인자 혹은 데스나이트가 되어 생성되었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성녀는 타락해 마녀가 되어 당신의 앞을 가로막고. 당연히 당신의 우군이 되어야 할 국가는 부패와 탐욕에 찌들어 창끝을 들이밀기에 정신이 없어졌지요.』
그래서 고대 신들의 이야기였다. 알다르샥스의 나이가 300살이 넘은 것처럼 플레이어의 개입 한참 이전에, GG라는 세계의 제작 과정에서 벌어진 일.
그래서 데이터 소울의 삭제를 감행했다. 닳고 닳은 끝에 궤도에서 벗어난 데이터 소울들이 플레이어의 완성을 막아서지 않도록.
그래서 드래곤은 창조주의 분신을 제거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과도 같은 데이터 소울이, 대체 불가능한 세계의 인격체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하여 세계를 존속할 수 있도록.
그리고, 외부와 내부. 양측 관리자를 모두 잃은 세계는 수십 가지 방향으로 갈라져가며,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완성자’를 찾기 위한 일곱 무대를 마련했으나.
그때는 이미 버티지 못하고 스러진 영혼들이 미쳐 날뛰는, 개발자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외마경의 일곱 세계로 완성된 뒤였다.
그가 의도한 것과 달리, 11년 동안이나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할 정도의 게임으로.
그리고, 수 많은 플레이어 개인의 가능성으로. 각각의 선택이 만들어나가는 ‘월드’의 일부로 데이터 소울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게, 오류는 지금도 확산되어 가고 있다….
『….역시,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기분이 좋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에 들어와 있는 듯 하니.』
넋이 나간 중얼거림이지만 팔카투스는 그 몇마디에 아버지가 그와 같은 눈높이에 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원했다.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이 사실이 말과 정보 덩어리로 받아들여지는게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무언가로 아버지께 전해지는 것.
『우리 세계는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오로지 그들의 쾌락을 위해 세계를 즐기고 있으며, 그 경험은 단단한 영혼을 깎아내어 미쳐버린 데이터 소울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아마, 어쩌면 아버지가 이 세계에 내려온 이후 만들어진 다른 세계 속에서는 락샤샤와 오트만, 다른 동료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매력적인 여인의 영혼은 끔찍하게 일그러진 몬스터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지혜로운 마법사의 영혼은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는 끔찍한 흑마법사가 되어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교수라는 인물에 대해 열심히 연구한 팔카투스는 알고있었다.
그 본질적인 선함이.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야 말로 이 남자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아버지. 이곳의 모든 생명체들은 그저 새로운 오락거리를 즐기려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창조주의 손에 납치된 무고한 영혼들일 뿐입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인 당신과, 당신이 이곳에 들어옴으로서 만들어진 저와는 다르게. 이들은 수천년의 세월을 멸망하는 세계에서 누군가의 노리개가 되는 삶을 반복해왔다는 말입니다.』
『예, 두렵지요. 누군가의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존재라는 것. 혼이 찢어질 것처럼 무서웠습니다.』
달이 간직한 진실과 마주한 뒤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모른다. 허약한 몸이 쓰러지듯 잠이 들면 악몽이 찾아왔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 어머니와 누님. 형제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갈때마다 검은 글자 덩어리가 되어 바스라지는 꿈을. 꿈보다도 그것이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하지만 아버지, 세상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실체없는 허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다가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타각 타각 타각 타각
버디의 뾰족한 발끝이 교수 앞으로 다가왔다. 키틴질의 번들거리는 발끝은 교수의 가슴을 가리켰다.
『바로 그 두려움이었습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머니와 내 가족들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미친 듯이 두려웠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것만큼은, 그 감정만큼은 진짜로 느껴졌단 말입니다! 이제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먼지와 같은 작은 존재라는 것도, 세계가 가짜라는 것도, 누군가의 무분별한 쾌락속에 멸망을 향해 가라앉아간다는 것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저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되는겁니다. 아버지, 이게 과한 요구입니까? 당신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아끼듯, 저도 사랑하는 이들을 아끼기에 도와달라는 것이 그리 과한 요청입니까?』
….닮았다. 생긴 것도, 살아온 세상도, 가진바 능력도 달랐지만.
나와 마주한 녀석의 눈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만큼 나와 닮아있었다.
『누군가에겐 목적을 위해 수억번이 넘도록 사라져간 세계이지만, 그 먼지같은 세상에 제가 가진 전부가 담겨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것을 지켜야겠습니다. 설령 이 만들어진 세계의 주인, 플레이어를 ‘오류’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니…. 제가 존경하는 당신께 그런 패륜을 행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나아가 당신과 마주한 모든 이들이 예정된 파멸을 맞이하지 않도록. 수없이 놀아난 끝에 모두가 미쳐버린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고 했나.”
세계수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놈은 나와 닮았다. 행동, 사고방식, 성격까지.
“….거절한다. 팔카투스.”
『….어째서. 왜, 왜! 당신이라면, 다른 누구보다 당신이라면 나를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놈을 이해했고, 거절해야했다.
“닮았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게 아니잖아.”
드르륵-
팔카투스와 눈을 마주한 상태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선한 삶을 산다고 해서 선한 사람은 아니야. 30년도 못산 인생에서 쏘고 터트린 인간이 세자릿수를 넘어가고, 그걸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었다 변명해 넘길 정도로 썩어빠진지 오래고. 이게 황무지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라면서 웃어넘길 정도로 양심이 닳아 없어진 사람이 나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나의 거울과 같은 놈이지.”
『그런 위악으로 숨길 수 있을 만큼 제가 당신을 모르는 줄 아십니까? 당장 온 세상이 당신을 성자라 부르는데-!』
“너는 그런 나와 아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어. 머리도 좋고. 제 사람 좋아 죽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거짓말도 잘하지.”
거짓을 말하려거든 7할의 진실속에 3할의 거짓을 섞어라, 상대를 속이려거든, 그 7할의 진실에 마음을 담아라.
사람 속여먹는데 도가 튼 박교수씨의 금과옥조같은 명언이다.
정말 훌륭하기도 하지. 내가 덥썩 물 수밖에 없는 7할을 준비해놓고, 저렇게 진심을 다해 토로하다니.
그런데, 네가 정말 나와 똑같이 사고한다면 한가지 설명해야 할게 있단다, 얘야.
“팔카투스. 내가 사람 많이 죽여보고 알게 된건데. 세상이 생각보다 좁더라고. 어제 밥 같이 먹었던 놈이 그저께 죽인놈 지인이고. 절대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놈이 상상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그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
“있지. 그래서, 나는 진짜 적이라고, 만나면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상대가 아니면 절대 회복 불가능한 원한을 쌓지 않거든. 손발을 자르거나, 지인들 눈앞에서 죽여버리거나, 혹은…. 인질을 잡거나.”
『….아하.』
“너, 뭔 계획을 했는지 몰라도, 애초에 여기 있는 전부를 살릴 생각도 없지? 그저 네 가족. 네 동족만 고스란히 살릴 수 있으면 남들이야 미치광이가 되든, 팔다리가 다 으스러진 병신이 되든 상관 없는거야.”
지금도 인질로 잡힌 락샤샤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하고, 고통어린 신음을 참느라 물어뜯은 입술이 선명했다.
이놈은 제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아군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놈이 내게 도움을 구해야될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우리가 여기서 애쓴다 한들 우린 세계수의 작은 가지 하나에 불과하며, 그 뿌리,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 소울들은 지금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세계에서 닳아가고 있다.
결국 멸망할 세계라는 뜻이며, 녀석은 뮤테이션 블러드의 ‘완전한 생존’을 원했다.
그리고, 콜라. 박교수, professor의 이름을 놈이 알 수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것.
“밖으로 갈 생각이지?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갈 길도 있을테니까.”
『….이런. 세상에.』
팔카투스의 절박하고 애절했던 얼굴이 차갑게,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커뮤니티는 재미있는 곳이더군요. 여러 가지 정보도 많고. 당신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특히나 그 몸.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상태. 정말, 공교로운 희망이 아닙니까? 절벽에 매달린 자에게 던져진 밧줄처럼?』
“그래서. 내 몸 하나에 전부 다 우겨 넣겠다?”
『새로운 세상인 만큼 수단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제 몸을 끊임없이 같은 개체로 분열시키는 변종도 있고, 정신적인 그릇이 되는데 특화된 존재도 있었으니. 아니면 당신처럼 머리만 죽게 만든 존재를 ‘접속’시켜 그 안에 제 가족을 하나하나 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우리는 불리하고 극한의 환경에서 싸웠으며.』
“….궁리를 통해 그것을 빠져나가는게 일이었지. 그래, 그렇군.”
카드드득, 드득, 드드드득!
대화는 끝났다. 테이블과 의자가 사라지고, 마주한 팔카투스의 곁에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다른 무언가로 거듭나는 가라앉은 달이 있었다.
『슬픈 일입니다. 아버지.』
카드드득, 드득!
기우우웅-
눈동자. 달은, 거대한 눈동자가 되어 팔카투스의 뒤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는지요.』
힘이 모여든다. 거대한 해양괴수를 단숨에 압사시킨 그 힘이.
전투준비를 마친 교수의 전신 또한 그것에 맞서듯 검게 물들고, 마력에 휘감긴 물줄기가 그 흐름에 거슬러 몸을 감싸고 돌았다..
“….날 데려가겠다고 했던 것은 기억나는군.”
『맞습니다. 제 인생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당신을, 어머니가 있는 북부로 모셔 함께하자, 그리 말했지요.』
『이번에도, 같은 말씀을 드려야 겠습니다.』
한없이 깊은 바다. 오직 제 힘으로 바다를 가라앉힌 달의 힘이 한 점에 모여들었다.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영원히』
물보라가 팔카투스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바다의 한 조각을 통째로 담은 수압이 교수를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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