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4
Chapter.4 눈꺼풀(6)
뽀그륵-
수면이 점점 멀어져간다. 희미한 촛불이 밝히던 수면이 저 멀리 멀어지며,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엄청나게 깊은 우물이다.’
이제 작은 점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수면을 보며, 교수는 묶인 다리를 흔들어보았다. 위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다.
‘이러면 정말 끌어올려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몇 분이나 참아야 할까? 아니, 애초에 이렇게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게 뭐가 도움된단 말인가? 공수병이나 안 걸리면 다행이지.
뽀그륵- 그륵-
‘78, 79….’
물속에 가만히 있다 보면, 극단적인 고요함 속에서 내 맥박이 유난히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피가 유난히 세차게 흐르는 것 같고, 그걸 의식하며 천천히 심장이 느리게 뛰는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점점 느려져 가는 맥박. 명경지수와 같은 그 고요함 한가운데에서, 달콤한 향기와 함께 작고 붉은 눈이 호롱처럼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난 며칠간, 끊임없이 내 귓가에서 역겨운 노래를 부르던 ‘그 놈’이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이,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또….만났네….?’
엿 같은 자식. 짜증 나는 감염인자. 아니, 감염인자는 세포 같은 게 아니었나? 저렇게 내게 말을 거는 게 가능한 건가? 아니면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환상일까?
‘킥킥…..’
기분 나쁜 웃음이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넌…. 항상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해.’
뭐가?
‘내가 진실로 네 머릿속에 있든…. 네 환상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지? 뭐가 됐던 너는 나와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야······.’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된 마마보이 자식이 말은 잘하는군.
‘나는 네 머릿속에서 나고 자랐으니…. 너 만큼은 말을 잘하겠지….. 어머니와는······. 떨어진 지 너무 오래됐어······. 나는 원래 혼자 활동하도록 만들어진 세포라…. 이제 오랫동안 나를 채찍질하던…. 어머니의 부름이 안 느껴지는걸…. 기분이… 나쁘지 않아…’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다. 의식의 경계에서 놈의 모습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일렁이는 작고 검은 연기. 그 위에 새빨갛게 빛나는 두 눈.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좋은 일이야…. 너도…. 그렇지? 자유로워지니…. 좋았지?’
….재수 없는 소리. 그래 봤자 게임 속 데이터 덩어리 주제에 아는 척은.
‘킥킥….’
검은 덩어리가 크게 일렁였다. 더 짙은 호선을 그리는 눈. 그 연기 같은 몸체 사이에서, 작은 입이 돋아났다. 입술도 없이, 이빨을 훤히 드러낸 입이 웃고 있었다.
‘키득키득….아직도…. 그 쓸데없는 생각 중이구나…. 데이터든…. 환상이든…. 중요하지 않아…. 나는 네 의식 안에 있으니까…. 너의 저 깊숙한 기억 속…. 네 무의식…. 모든 것을 보았지….’
교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이 생각하는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기억임을.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에, 놈이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키득,
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키득
‘더러워’
그 속삭임이, 천천히 심장을 파고들었다. 새빨간 감정이 뿜어져 나왔다.
‘잘 알지….. 너보다도…. 넌 어머니의 죽음이 네 가장 깊은 어둠이라 여기지만…. 그것보다 훨씬 깊은 게 있어…. 여기까지 온 김에…. 잠시 마주하고 가는 게 어때?’
나를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 나로 인해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그 죄책감 속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을….. 나는….
‘그리웠지? 너무 그리워서 어쩔줄 몰랐지? 그래서 그랬던 거지? 거봐. 상관 없잖아. 진짜, 가짜. 그런 게 중요한게 아니라니까?’
죽여야 한다. 저놈의 눈알을 터트리고, 혀를 비틀어 뽑아,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
‘킥킥…. 그렇게 까지 고통스럽게 살면…. 뭐가 남아? 죽음이…. 안식으로 느껴지는 삶? 행복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꼬리표처럼 자괴감이 따라붙는 삶의 어디에…. 의미가 있어?’
부그르륵! 그르륵!
물이 차오른다. 의식의 공간이 비틀리고 쪼그라들며, 그 사이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다 됐네….’
죽여버리겠다. 널 죽여버리겠다고······!
‘서두르지 않아도….. 너는 결국 내게 몸을 넘기게 될 거야…. 껍데기….키득키득’
부그르르륵!
심장이 타들어 간다. 목이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폐를 쥐어짜는 고통 속에서 끌려가는 느낌과 함께 점처럼 작았던 빛이 순식간에 커져나가며-
촤아악-!
나를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커허억! 쿨럭! 케헥! 쿨럭 쿨럭!”
“3분 52초. 아슬아슬했지요? 물을 통해 전달되는 심음을 듣고 계산했으니, 후유증은 없을 겁니다. 아, 입을 막은 건 풀어드려야겠네요. 물을 토해내야 하니까.”
“쿨럭 쿨럭! 크헤엑! 우웨엑!”
“세상의 이치를 바꿀 만큼 강한 의지가 있으려면,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어둠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저 깊고, 차가운 어둠은 그런 자기 자신을 비추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죠.”
“쿨럭! 크흐, 흐으, 후우우-”
“교수님? 무엇을 보고 오셨습니까?”
무엇을 보았나. 가쁜 숨을 몰아쉬던 교수는 떠올렸다. 그래. 뭔가 보았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또 자신에게 보여주려하는 존재를.
“다시는….”
물을 다 토해낸 교수는 상처 입은 짐승이 그러하듯, 로만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다시는…. 나를 저 안에 넣을 생각 하지 마….”
그의 머릿속에 파고든 것은, 생각보다 훨씬 악질이었다.
***
만달리우스 백작가 연금 6일째.
“푸하악!”
“4분 45초. 많이 느셨군요!”
로만은 우물가에 기대어 탐욕스럽게 숨을 집어삼키는 교수를 보며, 참으로 기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교수가 눈에서 독기를 뿜으며 ‘하지 마!’ 라고 말한다고 해서 만달리우스 백작이 ‘그럼 그만하지.’ 라고 할 리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교수는 매일 점심때마다 우물에 던져넣어 졌고, 다행히 첫날 이후로 ‘그놈’이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으며······.
“우웨에엑! 크헤엑! 그,그만!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만 둬!”
덕분에 교수는 익사의 고통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하! 입수 시간이 늘었다는 것은 중요한 지표입니다! 깨달음이 오기 전에 몸이 물과 친해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훈련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훈련? 훈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 했어! 주마등이 보였다고! 이게 그 나머지 3할의 정체였냐!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엄청난 것을 보고 왔다고! 막 날개 달린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심각하게 이민자 문제 같은 걸 토의하고 있었단 말이다!”
“뭐,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저도 저 훈련을 처음 받았을 때는 마법사고 나발이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려고 했으니까요. 하하하하하!”
“지금이 벌써 3일째인데 이게 뭐냐고요! 마나? 한 개도 안 느껴지고 물에 대해서 알아낸 거라곤 차갑다, 어둡다, 무섭다! 이것밖에 없는데!”
교수의 격렬한 항의에, 오히려 잘됐다는 듯 로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거면 됐습니다. 그걸 위한 훈련이니까요. 수계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물을 자기 몸처럼 친숙하게 여겨야 한다고 했죠? 익사체 훈련을 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이 탁, 풀리며 몸에 힘이 주욱- 빠지고 편안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나요?”
교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지. 그것도 꽤 많이. 위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다 ‘아 끝인가….’ 하는 순간이.
“바로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 공포가, 그 끝에 도달해 갈 곳을 잃고 흐트러지며 생기는 현상입니다. 본디 공포란 미지에서 오는 법. 더는 모르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깊숙이 공포를 받아들이면, 공포가 있던 자리에 이해가 자리 잡기 시작하지요.”
“어…. 보통 그런 상황을 ‘죽기 직전’이라고 표현하는 거 아십니까?”
그 미지의 공포에서 미지를 담당하는 게 죽음 아니냐. 그거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바로-그겁니다! 죽기 ‘직전’! 이 훈련의 목표는 그런 죽기 직전의 상태에 한 발을 걸친 채 왔다, 갔다 하며 수행자에게서 물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제거함과 동시에 물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뭐, 상당히 위험하긴 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교수는 로만의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한번 더 들어갑시다.”
“?!!!”
“익숙해지지 않도록 조금씩 더 가혹하게 굴리는 게 이 훈련법의 핵심 이 거든요.”
“야이 시ㅂ- 으브브븝!”
“아하하하!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마탑에서도 이 훈련을 할 때 선배 마법사에게 하는 욕은 다 못 들은 척 해주는 게 규칙이랍니다!”
“으으으으….”
점점 다가오는 우물을 보며, 교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연금 8일째.
더는 실험재료가 필요 없는지, 이제 팔다리를 잘라가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회복할 시간이 익사체 훈련으로 대체되었다. 이제는 아침부터 우물에 들어간다.
“물을 거부하지 마십쇼! 인간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양수에서 몸을 만듭니다! 물은 우리의 기원이니, 당신의 몸과 물을 따로 생각하지 마십쇼! 당신의 몸에 닿는 물을 피부처럼 느끼게 되는 순간! 교수님은 훌륭한 리드플로우 학파의 수계 마법사가 되는 겁니다!”
“로만!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10분은 무리다!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산다고!”
“숨을 참지 말고 물을 받아들이라니까요!”
“자, 잠깐만! 내가 사실 막 좁고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면 손발이 떨리고 식은땀이 흐르는 병이-”
“아하! 저도 수련 마법사 때 똑같은 증상을 겪곤 했죠! 좋은 방향입니다! 골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아냐! 그런 게 아니라!”
“자, 갑시다~”
“로만! 로만마법사니-브그르르륵!”
촤르르륵-
풍덩!
밑도 끝도 없이 물에 던져넣는다. 뭐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물도 아니고, 그냥 물이 가득 찬 우물이다. 매번 죽다 살아나올 때마다 ‘사실 마법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독특한 사고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띠링-!
[특성 – 수계 마나 친화(진행 중47%)]이게 먹히니까 또 골때리는 상황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물이나 용액에 젖은 옷이 착 달라붙는 느낌이 그렇게 불쾌하지가 않단 말이지. 숨을 못 쉬는 것만 아니라면 물속에 있는 것도 시원하고, 잡념도 안 생기는 게 썩 괜찮-
‘으아아악! 내가 무슨 생각을!’
젠장. 뇌에 물이 스며들었나 보다.
***
오후 2시.
그렇게 아침부터 이어진 익사체 훈련이 무사히(기절, 어지럼증, 환각 및 구토 증상은 무사히의 범주에 속한다.)끝나면 로만과 늦은 점심을 함께한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달라미아 생선회, 민물장어의 껍질을 쥐어짜서 차게 만든 젤리, 그리고 기타 해조류다.
“저기, 로만?”
“음? 왜 그러시죠?”
“지난 나흘간 우리가 같이 밥을 먹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럼 왜 메뉴가 회, 냉채, 해조류, 생선 냉가공 식품밖에 없는지 설명 좀 해줬으면 하는데!”
처음에는 좋았지.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신선한 생선회 아냐.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삼시 세끼, 심지어 차가운 물 속에서 덜덜 떨면서 나왔는데 밥이라고 주는 게 차가운 생선이라니. 지나가면서 봤는데 다른 마법사들은 뜨끈한 수프에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딴 물고기나 처먹고 있는 거냐고!
‘물고기? 물? 잠깐만. 설마…..’
“혹시…. 이것도 수계 마법사…. 라서?”
“당연한 걸 묻는군요? 수계 마법사는 물이나 다름없는 자. 물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을 몸에 집어넣으면 좀…. 나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땅에서 나는 곡물과 육류를 입에 대지 않고, 물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로만 식사를 구성하는 겁니다. 아, 물론 화기가 닿지 않게 익히지 않은 상태로 말이죠.”
미쳤다. 이 사람은, 아니 마법사는 정말 미쳤어.
“‘나쁠 것 같지 않습니까’? 것? 혹시 증명 된 겁니까? 마법사가 자신의 속성과 다른 음식을 먹으면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는 거?”
“음….. 딱히 증명된 적은 없습니다만.”
“그럼 왜!”
“마법사니까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순간, 이미 그것은 마법사에게 지켜야 할 법칙이 되는 겁니다.
고행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요. 증명은 안 됐지만, 이런 식생활을 시작한 마법사들은 마나의 흐름이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더군요.”
“@#)(*&!$&(*)!!!!”
교수는 머릿속에서 상상할수 있는 가장 더럽고 끔찍한 욕설을 내뱉으며 다짐했다. 만약 여기서 탈출한다면, 이 훈련법을 개발한 리드플로우 학파의 마탑을 찾아갈 것이라고. 찾아가서, 이 미친 짓거리를 전파하고있는 장본인들을 모조리 탑과 함께 파묻어버릴 것이다.
***
연금 9일 차, 아침.
드르르륵-
“준비는 됐습니까?”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그냥 땡기시죠? 원래 딱밤 맞을 때도 맞기 직전이 더 무서운 거 모르십니까?”
“하하하하! 이제 제법 자신감이 붙으셨군요! 거보십쇼. 하다 보면 쉽다니깐요?”
“순응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지요.”
“음! 훌륭한 자세입니다!”
촤르르륵!
풍덩!
이게 몇 번째지? 슬슬 이 짓거리도 완전히 익숙해졌다. 하루 중 절반 가까이 물에 들어가 있어 퉁퉁 불어있는 몸도, 저 맛대가리 없는 식사도 적응되는걸 보면, 참, 사람이라는 게 생존력이 높은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이라는 게 익숙해지는 만큼 시간이 남는 법. 익사체 훈련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가 되니, 제법 주변을 살펴볼 만한 짬이 생겼다.
‘철문의 경첩은 더는 작업을 하면 안 될 정도로 부식시켜놨다. 쇠톱들도 충분히 녹이 슬었어. 양도 충분하고. 문제는 탈출을 언제 하느냐는 것인데······.’
감염 인자에 대한 대책도 어느 정도 생각해두었다. 만약 그 방법이 먹힌다면, 여기서 탈출해서도 감염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부그륵!
교수는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지난 며칠간 눈대중으로 파악한 저택 내부 구조를 상태 창에 그려 넣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물속에 있는 게 참 편했다. 이젠 물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불편할 정도로.
‘내 방이 지하 1층에 있고, 우물은 두 칸 옆. 식당은 그 옆으로 한 칸 더. 만달리우스 후작은 이 지하실 가장 안쪽에 있는 연구실에 주로 머무는 것 같고. 문제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문인데.’
어제 훈련이 끝난 뒤, 패닉에 빠진 척하며 밖으로 뛰쳐나와 나갈 길을 찾아다녔다.
‘평소 이동할 때 잠깐씩 보이던, 저녁 시간 이후에 마법사들이 이동하던 방향. 설마 여기서 잠을 자지는 않을 테니 늦은 시간에 마법사들이 움직이던 방향으로 이동하면….’
그렇게 해서 찾은 게 지하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과 철창으로 막힌 출구였다.
‘방에서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아. 나름 쓸만한 무기도 준비해뒀다. 문제는 저 철창인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건….. 아이작이겠지?’
항상 여기서 막힌다. 뭘 해도 후작을 제압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6 위계, 그것도 가장 안정적이라는 수계 마법을 익힌 마법사를, 맨몸으로 어떻게 이기지?
띠링-!
[특성 – 수계 마나 친화(진행 중95%)]‘이러다 진짜 마법사 되겠는데?’
수계 마나 친화도는 어느 순간부터 쑥쑥 오르더니, 95%에서 딱 멈춰버렸다. 아마 로만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깨달음’이 나머지 5%겠지.
‘깨달음이라….. 아직 하나도 모르겠는데? 물은 물이지 뭐.’
로만의 말로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데, 물이 내 몸처럼 친숙해진 지금에 와서도 물을 이해한다느니 하는 것은 감이 오지 않았다.
‘….쩝. 탈출하면 이런 개인과외도 못 받을 텐데. 나가면 수영이라도 하면서 해보지 뭐.’
-쿠우웅.
교수가 유영을 즐기며 계획을 확인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물 벽면을 울릴만큼 큰 소리가 들렸다.
‘음? 뭐지? 이 지하에 있는 우물이 울릴 정도의 충격이라니. 연구실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났나?’
쿠우웅!
부그르륵!
또 들렸다. 상당히 중량감 있는 충돌음. 한번이야 사고나 실수일 수 있지만, 반복이 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교수는 천천히 물 위로 떠올랐다. 물 친화가 80%가 넘은 순간부터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촤아악!
“푸우우! 로만? 밖에 뭔일 있-”
“엎드려!”
“뭐…..!”
물어볼 세도 없이, 교수는 다시 우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스겅!
사마귀를 닮은 앞발에, 우물의 윗부분이 비스듬하게 잘려나갔다.
‘뮤트! 그것도 단순히 감염된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를 조합한 7급 이상!’
뚜둑, 뚝, 오독!
로만의 손이 꺾이며 수인이 맺혔다. 수인을 맺은 손은 뮤트를 향해, 다른쪽 손은 우물에 담근 로만이 영창을 마쳤다.
“도르만 발다니스의 파고드는 물결!”
촤아악!
우물에 있던 물의 일부가 솟구치더니, 네 갈래로 갈라져 사마귀를 닮은 뮤트의 향해 쏟아져 내렸다.
“크에에엑! 키이익!”
‘저게, 진짜 마법주문.’
아이작은 슬립이라는 시동어 만으로 시전해서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 물줄기는 사납게 달려들더니, 뮤트의 몸에 구멍을 뚫고 점점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던 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화아악!
지끈!
익숙한 둔통. 그리고 정보를 억지로 쑤셔 넣는 듯한 감각.
‘문, 천장, 발소리. 수 많은 발소리. 마법사들이 전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 독특한 파열음은….. 마법? 전투가 일어났다? 이거 한마리만 들어온게 아니야!’
교수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머리에만 집중되어있던 정신쇠약이, 온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서걱!
“허억, 허억, 실전마법은, 제 특기가 아니라 힘들군요.
작은 단검으로 교수를 묶고 있던 줄을 잘라낸 로만은, 평소에는 보여준 적 없던 긴박한 얼굴로 말했다.
“교수,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뭐가 어떻게 된겁니-”
쿠우웅!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 연구동의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캬아아아악!”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땅속으로 파고들어왔어요! 도시는 지금 혼돈 그 자체입니다!”
콰아앙!
전투의 소음은 점점 로만과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로만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당신을 도와주고 싶지만, 저도 올라가 합류해야 돼서 시간이 없군요. 시설 열쇠입니다. 마취제나 뮤트의 피, 또는 그 외에 실험용으로 쓰던 약품이 보관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나가지 말고 이 안에서 감염을 억제하며 숨어 계세요. 혹여 이곳이 점령당하더라도, 밖이 정리되면 구출하러 오겠습니다.”
“이, 이봐요! 로만! 잠깐만!”
로만은 뒤에서 부르는 나를 무시하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치열한 전투의 소음 속에 물탱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추가되었다.
짤그락.
잠시 열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교수는, 곧장 우물 방에서 나와 욕조가 있는 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땅굴을 뚫었다고 했지. 가뜩이나 병력도 없는 투란으로서는 막기 힘들다. 마법사들이 분전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게 고작일거야.’
교수의 추측을 긍정하듯, 마법이 시전되는 소리는 점점 멀어지는데 뮤트들의 쇠를 긁는듯한 울음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나갈 수 없다. 아직은 감염 인자를 막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들이 필요해.’
교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용액에 뛰어든 다음, 옆에 있던 나무 뚜껑을 덮어 그 안에 완전히 잠겨 들었다.
‘다른 도시도 분전중이라고 했으니 지원군도 오기 힘들 거야. 투란은 함락된다. 일단은…. 여기 숨는 수밖에.’
점점 다가오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교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