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45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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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로 된 벽이 찢어지고, 깨진 화면의 파편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아버지다. 늘 가면처럼 쓰고다니던 여유조차 없이, 냉정한 얼굴을 한 아버지.
그의 손 끝에 피와 함께 녹색 체액이 끈적하게 묻어나는 것을 보며 팔카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였구나.’
버디.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했던 형제인 동시에 보호자였던 존재.
말은 못해도 사고능력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애초에 어설프게 쌓아올린 금속 더미 따위로 아버지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녀석이 말하던 장애물에는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도 보냈다.
잠깐의 시간. 단 몇 초라도 좋으니 아버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시간이 필요했다.
“자주뵙는군요. 아버지.”
끄극, 끼이익-
차그락 차그락 저벅 저벅
“많이 지쳐보이시는데. 전처럼 마실거리라도-”
“아니.”
쿠당탕탕!
콰악!
“널 죽이러 온 사람이, 언제까지나 신사적일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지.”
왜냐하면, 만나자마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그의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대로 테이블을 걷어차고 한 손으로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꺽, 꺼어억!”
‘이미 대화가 통할 단계는 지났다고…. 그리 생각하셨겠지.’
사무적으로. 살인에 의미를 두지 않고 필요에 의해 수행하는 냉정한 살인마의 눈.
‘하지만…. 아직은 죽어줄 수 없어…. 아직은…. 내 눈으로 아버지의 몰락을…. 이 세계의 존속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흐릿해져가는 의식속에 팔카투스의 시선이 교수의 눈으로. 그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던 화면은 모두 밖을 비추는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계 달을 뚫고 들어오는 그의 소리를 듣고 방향을 특정했다.
앉은 자리는 아버지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 마주볼 수 있는 자리였으며.
그의 등뒤에는, 아버지가 그대로 들어와 그를 공격한다면 볼 수밖에 없는 각도의 화면들이 저마다 다른 인물들을 비추고 있었다.
‘볼 수 밖에 없다. 육체적 능력이 드래곤에 비견되는 아버지라면 주변시(周邊視)만으로도 화면의 움직임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비추는 것은 아버지의 유일한 약점. 그의 동료들이었다.
동요한다. 무감각을 위장한 눈동자가 떨리고, 종횡하며, 단순한 목표에서 복잡한 사고로. ‘팔카투스의 살해’에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찾아 정보를 수집하고, 냉정에 매달리는 눈으로 변한다.
‘….저들을 버릴 각오로 내 목을 부러뜨리면 이대로 끝. 허나, 내 목숨이 떨어지기 전, 아버지의 갈등이 손끝까지 미친다면…. 다음으로. 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바이스 같은 손아귀가 목을 죄고,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머리는 천천히, 잠들 듯 죽어간다.
바위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팔카투스는 생각했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 선인과 악인의 싸움이 아닌, 각자의 선을 마주한 선인과 선인의 싸움이 전부다…. 라고 하셨습니까.’
팔카투스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나의 뜻을 확인하고도, 내 안에 나름의 선의가 있다. 그리 판단했다는 말이 아닌가.
나를. 나의 가족을. 나의 모든 것을 말살하려는 상대가 나를 선하다 평가하다니. 그것만큼 나의 불성실을 증명하는 수단이 또 있을까.
‘당신에게 만큼은. 우리 모두를 죽이고 나의 세상마저 없애려드는 당신에게 만큼은 악(惡)이라 평가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해야, 진정으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타각. 타각 타각.
팔카투스의 손가락이 허공을 두드렸다.
[캐릭터 시트 – ‘광명의 성기사 요한’ / 입력 대기] [캐릭터 시트 – ‘항사꾼 나루카’ / 입력 대기] [캐릭터 시트 – ‘오트만 보들레르’ / 입력 대기] [….대기] [….대기]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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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신 감응의 능력에 창조 AI의 권한이 부여된 힘.
게임 속 인물에 한정된 [캐릭터 시트 수정].
아버지의 눈에 비친 것은 초월적 권한을 가진 드래곤을 제외한, 달의 인근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돌처럼 굳어버린 전장이었다.
‘….이미 정형화된 실물 데이터까지 바꿀 힘은 없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은 행동 정도는, 한때 세계 전체를 관장하던 힘을 달의 주변으로 한정하여, 가진 모든 것을 쥐어짜, 단 몇 분으로 한정한다면….’
가능했다. 주변 인물들에게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많이는 쓸 수 없다. 벌써 달과 나눠가진 힘이 바스러지기 시작했어.’
힘이 부족해 드래곤에게는 명령을 입력할 수 없었다.
아버지같이 폭 넓은 영향력을 가진 개체에게 명령을 내리면 힘이 얼마나 소모될까. 30초? 모든 역량을 동원하면 1분 정도는 가능할까?
아껴야 했다. 아버지를 움직이는 것은 마지막. 그의 남은 목숨을 모두 털어넣을 순간이다.
‘동요하고 있다. 분명히, 동요하고 있어.’
목을 틀어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명석한 사람인 만큼 작금의 이변이 그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것쯤은 파악하셨겠지.
그의 망설임에 쐐개를 박았다.
타각.
[캐릭터 시트 – ‘광명의 성기사 요한’] [명령어 : 대기]타각 타각
[명령어 : 대ㄱ ]푸른 반투명한 창 위에 작은 막대가 깜빡이고, 혼자만 자유로워진 전장에서 ‘요한’이란 이름의 성기사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명령어 : – ] [명령어 : 가장 인접한 대상. 무기 공격]…탁.
새로운 명령이 입력되고,
….뻐어억!
요한의 메이스가 옆에 있던 성기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피로 물든 투구가 움푹 파이고, 돌처럼 굳어있던 성기사의 코에서 뇌수가 섞인 피가 흘러나오며 썩은 지푸라기처럼 쓰러졌다.
타각. 타각 타각.
“아, 안돼! 멈추어라, 멈추어라, 제발! 광명이시여!”
퍼억!
비명을 지르는 성기사의 입과 달리 그의 메이스는 무정하게 다음 목표를 향해 휘둘러졌다.
퍼억! 퍼억! 퍼억!
성기사와 뮤트의 구분 없이. 오직 ‘가장 인접한 대상’을 향해.
피눈물과 함께 짐승처럼 울부짖는 성기사의 모습이 교수의 망막에 그대로 담겼다.
“날…. 죽이면…. 저들은 저렇게…. 입력된 명령은….영원….히….”
졸린 목에서 나온 뱀처럼 쉭쉭대는 목소리. 그리고.
….으드득!
이빨이 부서지는 듯한 성난 소리와.
콰앙!
“쌔액, 쌔애액! 하악, 꺼허윽!”
내던져지는 그의 몸뚱이. 달디단 공기.
유예된 죽음과, 작은 승리.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 팔카투스!”
“….나쁜 짓.”
냉정을 가장한 얼굴에, 마침내 숨길 수 없는 노기가 깃드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말했던가. 분노는 절망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부서져라.’
악하게. 선하기 짝이 없는 당신이 나를 원망하고, 이 순간을 영원히 후회하며 배회할 수 밖에 없도록.
‘부서져라.’
타각. 타각타각.
[캐릭터 시트 – ‘오트만 보들레르’ ‘노툼’ ‘이드라실’ ‘락샤샤’] [명령어 : 사고 정지. 이동. 캐릭터 ‘교수’ 앞으로. 이동 후 명령 대기.]“제 장례식에…. 쿨럭! 아버지와 그 일행 분들을 초대한 것 뿐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만큼 부서져라.’
그리하여, 나의 가족이 살아갈 이 세계의 반석으로, 이지를 상실한 자아로 영원히 머물러주시길.
아버지의 동요한 눈을 보며, 팔카투스는 쉬어 터진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들었다.
****
‘….발악 패턴 수준이 아니군.’
팔카투스를 상대하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놈은 벼랑 끝에 몰릴수록 더 강하게 반발하는 타입이라는 것이다.
달을 부수고 오며, 놈이 타고다니던 그 ‘버디’라는 뮤트가 버티고있는 것을 봤을 때부터 느꼈으며. 달의 중심에 앉아있는 놈과 마주한 순간 확신했다.
‘죽을 생각이다.’
악에 받친 눈. 제 목숨을 불꽃삼아 도화선위로 뛰어드는 이들의 눈빛.
그냥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놈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의 생존. 제 가족의 보존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클리어를 막아야만 하는 것이 놈의 입장이니까.
놈이 가진 능력. 그리고 저쪽에서 한번 이용한 이력이 있는 내 약점을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어렴풋이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니.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 수정하듯, 캐릭터의 데이터 위에 직접 명령를 덧씌우다니.
화면에 비친 성기사는 다섯 번째 동료의 머리를 박살낸 다음 가까스로 혀를 깨물었고, 이후 여덟 명의 성기사와 뮤트 셋을 더 죽인 다음에야 출혈 과다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눈물로 점철된 그의 죽음은 후회와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내게 일어날 일의 암시겠지.’
이것을 보여준 다음 동료들을 내 앞으로 불러들인 의미. 달의 중심이 아니라 내 앞으로 이동시킨 것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눈앞에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커뮤니티에서 내 정보를 확인했다고 했지.’
나는 돔의 유명인이고, 유명인의 개인 정보는 공공제나 다름없으며. 돔에서 살아온 이들 중 내 이야기를 아는 이들도 제법 있으니 밖에서 비롯한 내 트라우마를 놈도 알고있을 확률이 높았다.
‘놈은 명령을 직접 입력하고 있다.’
팔카투스의 눈앞에 나타난 반투명한 창은 내게도 보였다.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시스템과 같은 형태지만, 정해진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롭게 명령을 입력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개발자 툴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형태.
직접 입력. 유일한 허점이라면 이것 밖에 없었다.
….할 수 있을까.
놈이 준비를 하고 나를 기다린 것처럼, 나 또한 모종의 안배를 끝마친 다음에 들어왔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한다.
그러니….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 팔카투스!”
동요를, 가장해라.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여기게 내버려 두는거다.
분노한 척 내던져진 놈의 연약한 몸은 부서진 뼈와 뒤엉킨 살점으로 돌아오고, 고통은 깊은 사고를 흩어내며 출혈은 의식을 몽롱하게 만든다.
‘내가 아는 허점이라면 놈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생각해 낼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매끄럽게 진행시킨다.’
목숨을 내던지는 이들. 사상범과 광신도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태워 만들어낸 불꽃을 삶의 완성이라 여기며, 그 고양감에 취하고 마니.
저놈 또한 그렇게, 제 삶의 불꽃에 취할 수 있게. 대미를 향해 나아가도록 둔다.
“하…. 하하…. 매번 그렇지만, 지금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정말 미치도록 궁금합니다.”
텅- 텅- 터겅- 텅-
“저 소리가 들리십니까. 당신이 만든 길로, 죽은 달의 유해 속으로 당신의 일행이 걸어오는 소립니다.”
“….원하는게 뭐냐.”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에 팔카투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미 서로에게 부탁할 단계는 지났기에.”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바스락.
가까워진 발소리 끝에 누군가의 발끝이 틈을 넘었다.
실을 타기 위해서인지 맨발이었던 락샤샤는 찢어진 금속 통로를 걸으며 상처투성이가 된 발로 유리 파편 위에 발을 디뎠다.
와그작!
찢어진 상처 속으로 유리 파편이 파고들었다.
‘연출이다. 자신이 쥐고 있는 힘을 내게 각인 시키기 위한 연출….!’
인형처럼 유리 조각 위를 맨발로 걸어 들어온 락샤샤 뒤로 오트만과 노툼, 이드라실이 차례로 걸어 들어왔다.
“….조문객이 전부 도착했군요.”
[캐릭터 시트 – ‘교수’ / 명령 대기]싸아악-
팔카우스 앞에 나타난 반투명한 창과 함께, 발끝부터 타고 올라온 한기에 몸이 굳었다.
쓰러져있던 팔카투스의 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허억, 나는…. 나는 당신의 상처를 봤습니다. 너무나도 깊은, 심해와도 같은 상흔을…. 그 흉터를…. 봤단 말입니다.”
타각. 타가각.
팔카투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다잡아 계획의 완성을 향하는 문장을 적어내었다.
“당신의 손으로, 여기 있는 모두를 찢어발길 것입니다. 처참하게. 가장 솜씨좋은 장의사도 이들의 시체를 짜맞 출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낸 다음….”
타각.
“당신에게 먹여드리겠습니다. 영원히 그들의 존재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캐릭터 시트 : ‘교수’ / 호감도가 높은 모든 캐릭터 공격. 형체를 구분하게 될 수 없을 때까지 빠르게 반복. 이행 후, 대상 섭취.] [캐릭터 시트 – ‘오트만 보들레르’ ‘노툼’ ‘이드라실’ ‘락샤샤’] [명령어 : 상잔(相殘)]‘….끝이다.’
이제 저들은 서로 죽이기 위해 날뛸 것이며, 아버지는 그런 그들을 하나하나, 손수 분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끝이자 완성. 아버지를, 교수라는 인물을 영원히 이 순간에 묶어둘 명령어를 완성한 팔카투스는 떨리는 손으로 입력을 향해, 엔터 키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는 치명적인 공격이다.
그 무엇보다 단단한 정신인 만큼. 깨어지면 다시는 붙지 못하리라.
바스라진 아버지의 영혼은 영원히 나의 세계에 묶여 세계를 유지할 것이며.
죽은 나의 목숨은 어머니를, 가족을, 나의 종족을 구원하는 거름이 되리라.
쿨럭!
입가에서 맑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고통스럽지만, 더없이 행복했다.
“승리…. 비로소, 완벽하게…. 내가 이겼어. 내가 당신을 뛰어넘어…. 나의 세계를 ….구원했다!”
팔카투스는, 그가 쌓아올린 탑의 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푸우욱-!
“….어?”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팔카투스의 작은 몸이 허물어졌다.
흥건한 피와 함께 그의 가슴위로 삐죽 튀어나온 유리파편.
팔카투스는 힘없이 허물어지는 몸과 함께 그의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난 탑이, 짧았던 삶을 쌓아올려 세계의 구원에 닿은 그의 탑이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벌레처럼 피웅덩이 속에 허우적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와 암살자.
승자와 패자를 극명하게 가르는 그 눈높이란, 어찌나 이다지도 지독하게 모욕적인가.
“어떻….게…. 설령…. 드래곤이라도, 이, 입력된 명령은….”
“부끄럽게도. 사막의 여인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며, 제 이름은 당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라.”
“가명…. 이라고? 그럼 지금까지의 행동은….”
“주변을 살피고 상황에 녹아드는 것은 암살자의 기본 소양이랍니다.”
“연기…. 였다고?”
“네. 알다르샥스님과 팔이 많은 괴물만 내버려둔채 모두가 멈춘 순간부터, 쭈욱.”
“….아슬아슬했지.”
교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는 팔카투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마도 그 [명령 대기]가 입력된 것은 그가 막 달을 파고들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참 깨 부수는데 갑자기 전투의 소음이 확 줄어서 의아해하던 순간.
주술에 담긴 락샤샤의 목소리가 전해진 것은 그때였다.
——–
[교수? 밖이 이상해요.]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알다르샥스가 테르마키안에게 패배했나?] [그건 아니에요. 드래곤과 팔 여섯 개 달린 괴물을 제외한, 모두가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멈췄답니다? 나만 빼구요.] [….팔카투스로군. 안에 처박힌 놈이 또 뭔가를 한거야.] [어떻게, 합류할까요?] [….아니. 우선은,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해줘.]———
“그땐 몰랐지만, 네가 명령어 입력하는 걸 본 다음에 알았지. 아, 저 놈도 처음부터 이걸 준비한게 아니라, 급조한 계획이구나. 차근차근 각각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내서 하나하나 읽어볼 시간 따위 없이, 그저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입력하고 있구나.”
달은 사막에서 있었던 대부분의 사건이 기록되어있는 듯 했으니 시간이 많았다면 락샤샤의 행동 기록에서 그녀의 본명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급하게 이곳으로 달려든 것처럼 팔카투스또한 시간이 없었고. 그렇게 놈은 세상에 알려진 락샤샤의 이름. 나와 우리 일행이 부르는 그녀의 이름을 명령 대상에 입력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렇게 조종 받는척 하던 락샤샤는 놈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실이나 단검에 손을 뻗지 않고.
발 끝에 걸린 유리조각 하나를 몰래 숨겨, 팔카투스의 모든 정신이 나를 향한 마지막 순간, 놈의 시선 밖에서 심장을 꿰뚫은 것이다.
[겨우, 겨우 그것 하나로? 그 따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고?]‘….정신 감응이라. 육성으로 말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빠졌군.’
육성이 아니라 더 잘 느껴졌다. 놈의 당황. 억울함. 길길이 날뛰는 분노와 허무함까지.
억울하겠지. 캐릭터 시트 수정 권한이라니. 세계수처럼 시간을 멈춘 것이 아닌가 짐작했던 내게 있어 상상도 하지 못한 권능을 끌어들였으니, 제 목숨과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한 결과물이 그런 사소한 실수로 허물어지다니. 억울하겠지.
하지만, 내게 놈을 동정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쓰러진 팔카투스의 앞에 떠있는 반투명한 창에서 미처 입력되지 못한 명령의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으니까.
놈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알고 한 것이라면 찢어죽여 마땅한 개자식이며, 모르고 했다면 더 소름돋는 일이다.
‘세계수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뭐, 그런 모양이니까.’
어찌 됐든. 이것으로. 정말 끝이겠지.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비록 마지막 명령은 입력되지 못했지만, 이미 입력된 ‘명령 대기’ 상태는 유지될 거다! 마법사도, 트롤도, 엘프도! 암살자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물론, 밖에 가득한 성기사들 전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그렇게 석상처럼 굳은 몸으로 말라 죽겠지요! 당신은 이들 모두를 잃게 되는거야! 전부, 죽는다고!]머릿속에 발악하듯 외치는 팔카투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줌 정도 남은 신성력으로 교단에 연락해놨다. 내 신성력이라 그런지 얼추 신성마법 비슷한 게 되더라고. 해결책이 생길 때까지는 교단에서 이 사람들을 보살펴 줄거야. 그 다음에는, 세계수와 드래곤, 5대 선신에게 부탁해봐야지.”
[고작, 자체 발생한 하위 권한으로 근본적인 프로그램 데이터를 수정할 수는-]“있어. 창조주의 권한이라는게 막 경색된 것처럼 보여도, 내부 관리자인 드래곤들한테 폐기 될 정도로 유연한 거니까. 자신 있어. 결국 세계의 근간은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 데이터 소울의 믿음에 근거하니까. 나 대 영웅이잖아. 필요하면 대주교님이랑 같이 기도회라도 주구장창 열어서 신앙 한번 잔뜩 그러모아 보지 뭐.”
“애초에 태양과 달, 두 창조 AI가 사라진 뒤로도 세상은 잘 굴러갔잖아. 이미, GG의 세상은 그게 없어도 자체적으로 세상을 구성함에 있어 완벽해졌다는 뜻이지. 오류야 뭐. 그 둘이 있을때도 있었던 거니까 마찬가지고.”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여기서 모두 죽이겠어! 여자가 없으니 니그미는 풀려났고, 성기사들은 굳어있으니 뮤트들에게 건 명령만 해제하면-]“저기, 저거 봐라. 내 오른쪽에 있는 화면. 아, 눈 감았네? 대신 설명해주지.”
막 날뛰려던 뮤트들은 그물에 걸린 듯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움직이는 일부의 머리위로 바람의 칼날과 벼락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비공정이라고, 황금을 압축해 만든 수준의 물건이 있거든. 아마 아에드란 가주님의 피눈물이 한바가지쯤 들어갔을거다.”
화면에 비친 상공에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공존하는 배가 하늘에 떠 있었으며, 그 위에는 만세 포즈로 뛰어다니는 각양 각색의 바람 마법사가 타고 있었다.
정교하게 컨트롤된 폭풍의 그물이 살아남은 뮤트를 붙잡고 성기사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대주교님한테만 연락한게 아니지. 텔드랏에 있는 광명 신전을 통해 아에드란 가주님에게 급보를 보내고, 비슷한 방식으로 폭풍의 언덕에도 연락했다. 아에드란 가주님한테는 향후 3년간 교단에서 쓰는 곡식을 모두 골드가이저 상단을 통해 유통한다는 계약이랑 로만 그놈을 졸라서 겨우 빌렸고, 폭풍의 언덕은…. 슬쩍 얘기를 흘리니까 대답도 없이 우르르 튀어나오더라고.”
바람마법사 영감님들에게 흘린 소식은 딱 하나였다.
‘당신들이 못가본 하늘, 무풍지대 위로 날 수 있는 배에 태워드릴게요. 나 좀 도와주면.’
첫 비행에 잔뜩 긴장한 로만과 비공정 운용 인력들은 갑작스러운 바람마법사 무리의 습격을 맞이해야 했고, 덕분에 조금 늦게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지만. 어찌 됐든, 성기사의 전장은 그들의 손으로 정리가 되었다.
[….형님은, 테르마키안 형님의 힘은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쇠하지 않습니다. 어린 드래곤이 힘을 쓰고 있지만 시간 문제일 뿐, 전투가 확대 되었으니, 형님의 힘이 쇠할때까지의 기간도 연장됐어! 어, 어쩌면, 어쩌면 지금 내 권능의 일부도 나의 죽음과 함께 형님에게….]“그쪽은 세계수가 맡았다.”
녹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세계수의 인장. 그리고,
쩌거거걱-
알다르샥스와 테르마키안의 치열한 전장 위로 보랏빛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파지지직-
챙그랑!
균열은 거대한 틈으로 깨어져나가며. 그 사이로, 알다르샥스의 배는 될법한 비늘 돋은 팔이 내려와 테르마키안을 짓눌렀다.
공간을 깨고 나온 것은 주술로 만들어낸 드래곤도, 그 힘을 이어받은 용인도, 이제 막 태어난 어린 드래곤도 아닌 진짜 드래곤.
본신의 힘위에 역사위로 무수한 설화를 쌓아올려, 온갖 전설에 이름을 올린 꼬리가 뭉툭한 드래곤.
위대한 에인션트.
살아남은 레드 드래곤.
나현룡, 아틀라헤바.
테르마키안을 찍어누르며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은 나른한 듯. 흥미로운 듯 발 아래 깔린 생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건…. 억지다! 세상이, 온 세상이 당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거야! 당신이 플레이어라는 이유로, 세상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유로!]“네가 네 모든 것을 쏟아부어 나를 망가뜨릴 준비를 한 만큼. 나도 내 모든 것을 쥐어짜서,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것을 이 자리에 쏟아부은 것 뿐이다.”
[저거! 고대룡은 당신과 아무 인연도 없잖아!]“그건 네가 부른거지. 중간 관리자인 동시에 방관자. 시스템의 개입이잖아.”
[시스….템?]“멀리 볼 것도 없지. 우리 플레이어가 이 세상에 기술 혁신을 가지고 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 캐릭터 생성에서 실링을 좀 쏟아부으면 세 살에 곰을 때려잡고, 다섯 살에 소드 오러를 뽑아내는 그런 캐릭터를 만들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는 이유가 뭘까?”
플레이어의 협력자인 세계수.
그 반대로, 플레이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감시하는 감시자. 시스템.
“넌 게임 캐릭터의 경계를 넘었지. 창조 AI의 권한을 손에 넣고, 그것을 다른 캐릭터들에게 마구 투사해 GG라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마구 파괴했다. 그 반작용이다. 균형을 위해 이 세계에 쉽게 관여할 수 없는 존재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네가 먼저 거기에 손을 댔기 때문이라고.”
[안돼, 이럴순 없어. 나의 계획은, 비로소 당신을 뛰어넘은 나의 계획이 나를, 내 가족을, 안돼…. 안돼!!!!]바스락.
이지를 상실한 듯, 의미없말을 반복하는 팔카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교수는 쓰러진 그의 앞으로 발을 옮겼다.
“여기서 네가 이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팔카투스. 여기서 끝이야.”
[나는…. 살고싶었을 뿐이야! 살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당신처럼!] [어머니, 어머니는 살려줘! 당신은 착하잖아, 그정도 자비는 있잖아! 목숨만은, 제발, 제발!!!]“….기브엔 테이크다. 적이란, 그런거야.”
콰직!
조용히 들어올려진 발이, 팔카투스의 작은 머리위로 떨어졌다.
한 세계의 모든 근간이 엮인 사건의 주범. 그 최후라기엔 비참하고, 덧없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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