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46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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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있어 어떤 순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남기도 한다.
그것은 첫 살인. 소중한 이의 죽음. 또는 첫 키스와 같은 특별하고 강렬한 순간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의 놀이터. 선선한 밤의 야경. 혹은, 김밥에 오이를 빼달라고 떼를 쓰는 사소한 순간일 수도 있다.
삶을 여행이라 표현한다면 그런 순간들은 발자국이다. 걸음과 걸음 사이. 시간과 함께 흐릿해지는 다른 기억들과 달리, 세월의 풍화속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아날로그 사진같은 그런 기억들.
지금 이 순간의 감각. 향기. 고통과 온도마저 낙인처럼 기억 위로 새겨짐을 느꼈다.
부서진 기계의 날카로운 모습과 쇠냄새. 피와 악취가 섞인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깨지고 흩어진 화면들 중 일부는 여전히 밖을 비추고 있었으며. 구출된 성기사들이 팔카투스의 명령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모습을, 강인한 레드 드래곤의 불꽃과 푸른 드래곤의 낙뢰가 테르마키안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살아남은 뮤트 일부와 함께 니그미가 땅굴벌레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선명하게 내려앉는 다른 감각들과 달리. 소리는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멍하고, 흐릿하게 들렸다. 귀가 먹먹했다.
시스템 알림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언제 돌아왔지? 아니. 신경쓸 일은 아니다.
———
“이건…. 정말로 끝난 것일까요?”
“그래. 끝났어.”
“….고생많았….어요. 정말로.”
“….”
———
털썩.
힘없이 쓰러져 팔에 안기는 락샤샤의 부드러운 살결을.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실을. 그 실이 관절 마디 마디에, 힘줄 하나하나에 닿아있는 락샤샤를 느꼈다.
팔카투스는 죽었으며. 표정부터 말투, 시선처리 하나까지 의심에 눈초리를 보낼 상대는 사라졌다.
이제, 더는 승리자의 여유를 가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
“저는…. 이제 조금 힘에 부치네요?”
“도와줄게.”
“제가 원하는 도움이 그게 아니라는 것. 알고 있잖아요.”
“괜찮아. 도와줄게.”
“참….답답한 사람.”
———
내게 있어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내가 38구역에서 오르페우스를 막기 위해 디지털 세계의 수형자가 된 것처럼 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상대, 팔카투스를 죽인 지금이.
….고난과 역경 끝에,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숙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승리의 순간으로 기억될까.
———
“그웍. 몸 풀렸다. 녹색 꼬맹이 죽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군요.”
“이런…. 이보게. 이보게 교수! 자네…. 괜찮나?”
“예.”
“아니, 그…. 자네 얼굴이….”
“괜찮습니다.”
“속일 사람이 없어서 나를 속이려는가! 문제가 남아있다면 얘기를 해야 도와주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괜찮다고. 했습니다.”
———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인간 박교수의 생을 위해 발버둥치던 기억 중 하나로, 게임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는 평범한 과정으로 기억될까.
….푸우욱!
———
“….락샤샤?!”
“그우우우우우!!! 사막 여자!!! 그거 놔라! 당장!”
“락샤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왜 교수를….!”
“내버려두세요.”
“당장 떨어지게! 그 여자가 자네 심장을 찔렸어!”
“괜찮습니다. 내버려두세요.”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부탁입니다. 제발…. 내버려두세요.”
———
뚝. 뚝.
그것도 아니면. 절박하다는 이유로, 수중에 들어온 패가 그것뿐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를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던 여자의 목숨을 탄환삼아 승리를 빌어먹은 비참한 순간으로 기억될까.
———
“락샤샤.”
“쉬이이. 탓하기 전에, 이건 분명히 할거에요? 당신의 계획이 아니라 나의 계획이었고, 당신이 협조하지 않아도 나는 했을 것이며, 그렇게 당신이 협조하지 않아 팔카투스를 속이지 못했다면 나의 계획은 실패하고, 제 목숨을 비롯한 모두의 목숨이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사라졌을 거랍니다?”
“….락샤샤.”
“상대를 속이고, 기만해서 죽이는 것. 성자님보다는 암살자인 동시에 정보길드 수장인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요?”
“….락샤샤.”
“….눈물이 많은 남자도, 꽤 귀엽네요.”
———
락샤샤의 손에 들린 유리조각. 팔카투스의 심장을 꿰뚫은 유리조각은 이제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 있었으며.
마치 제 몸을 잡아 당기기라도 하듯 락샤샤의 실은 그런 자신의 몸을 억제하기 위해 바르르 떨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그녀의 몸을 파고들며 붉은 실선이 피부 위로 그어지기 시작했다.
….블러핑. 가지고 있지 않은 패를 쥐고 있는 척, 상대를 속이는 것.
락샤샤는 물속에서 흐릿하게 보일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니그미를 낚아챌 만큼 실과 주술을 다루는 실력이 정점에 이른 사람이다.
팔카투스의 ‘명령’에서. 성기사 요한은 입력된 명령대로 움직이면서도 고통과 절망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은 아마도, 최후의 장면에서 고통어린 나의 감각을 듣기 위한 팔카투스의 안배였을 것이며. 동시에 조종받는 이가 혀와 입술 정도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상급 암살자인 락샤샤가 실을 다루는데 있어,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을 몸을 실로 잡아당겨, 평범한 눈을 가진 팔카투스가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움직이는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는 지성체에게 명령을 내리는 힘이, 겨우 그런 단순한 허점으로 어긋날 리가 있나. 이름이 다르다 한들, 명령하는 팔카투스가 지칭하는 대상이 분명한데.
허나, 그 단순한 오류조차 깨닫기엔, 이미 팔카투스의 심장은 꿰뚫린 상태였으며.
속았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생명력. 그리고, 언제나 끝에 가서는 패배를 반복해온 놈의 패배 경험은, 팔카투스에게 있어 내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겨둔 비장의 수에 당했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평범한 눈을 가진 녀석은 락샤샤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가는 실이 그녀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락샤샤의 유리조각이 찌른 것은 팔카투스의 심장이었지만, 찢어진 것은 언제나 마지막에 그를 패배시켰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덮어둔 얄팍한 자기 암시였으며. 피와 함께 흘러나온 것은 그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불안이었다.
[겨우, 겨우 그것 하나로? 그 따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고?]그렇게, 팔카투스는 락샤샤의 계획에 속았다.
놈의 계획은 언제나 그렇듯 완벽했다.
완벽하지 못한 것은 팔카투스 그 자신이었을 뿐.
….부스슥.
심장에 유리 조각이 박힌 상태 그대로 락샤샤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밖으로 향했다.
텅. 텅. 텅. 텅.
금속 발판을 밟는 소리가 파괴된 통로에 울리고, 욱신거리는 가슴에서 쏟아져나온 피가 발걸음을 따라 붉은 실처럼 이어졌다.
———
“그거 알아요? 가슴을 찔린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살 하나 들 힘도 없는 손으로 그 칼을 붙잡는답니다. 그 괴물도 그랬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을 조종한 저주, 그것을 모두 풀어낸 힘이 제게 깃들었을 거에요. ”
“괜찮아. 드래곤이라면 고칠 수 있을거야. 전설과 설화속에 나오는 그런 존재라면, 당신에게 걸린 그 명령도 제거할 수 있을거야.”
“주술적으로, 단말마에는 그 삶의 무게와 필적하는 힘이 깃든다고 해요? 마법사의 라스트 스펠처럼. 죽어가는 기사의 검 끝에 생명을 불태우듯 선연한 오러가 깃드는 것처럼….다들 풀려났는데 저만 이렇다는 것은, 제 손에 죽은 그 괴물이 끝까지 살고 싶어서 발악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드래곤은 말 한마디로 사람을 개로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어. 불가능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참 좋겠는….으으윽!”
———
말을 끝맺지 못한 락샤샤가 스스로 몸을 조각내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명령. 상잔(相殘). 서로 죽일 것.
성기사와 오트만, 노툼, 이드라실에게 걸린 ‘대기’ 명령이 해제된 순간은 내가 관찰하기로 그의 죽음보다 조금 이전이었다. 팔카투스의 머리위에 내 발이 올라가기 직전에 오트만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마지막 순간,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순간에도 팔카투스는 발버둥치길 멈추지 않았으며 생의 본능은 제 심장에 틀어박힌 비수를 쥔 사람, 락샤샤의 손을 그에게서 물리기를 비원했다.
다른 명령을 써낼 힘도 없었으니, 기존에 입력된 명령 위에 회수한 힘만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으리라.
‘마지막 순간. 팔카투스는 본능적으로 의미 없어진 모든 힘을 회수해 추락하는 이가 발버둥 치듯 제 심장을 꿰뚫은 이에게 힘을 쏟아부었다.’
락샤샤의 몸은 그 명령에 따라 가장 가까운 나를 죽이려 하는 중이었다.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육체가 움직일수록, 그것을 억제하는 락샤샤의 실은 더욱 그녀의 살갗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그녀가 움직였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제 몸을 파고든 실을 당기며 연기하는 그녀 옆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본 척, 아무것도 잃지 않은 척 하고있던 내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유리 조각보다 더 한 것이 심장에 틀어박히는 기분이었다.
“다 왔어. 조금만 버텨줘. 제발.”
투확!
길었던 하루의 끝을 알리듯,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해와 함께 사막에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황혼을 등진 드래곤들은 힘이 빠진 나의 도약 한번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살라딘? 그리고 락샤샤인가?』
『살라딘이라면….‘그 인간’을 말하는 것이겠군. 세 번째 후보였나.』
용들은 그들의 브레스가 만들어낸 유리 평원 위를 날고 있었다. 교수는 그들을 향해 뛰어든 다음, 품안의 락샤샤를 조심스럽게 보였다.
진짜 드래곤들의 눈앞에서 구차한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 꿰뚫어 볼테니.
『락샤샤! 살라딘, 이것은, 이런….!』
“알다르샥스. 고칠 수 있겠지? 연약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당신들 남매를 목숨처럼 아끼고, 실제로 뮤트의 손에 제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지키던 사람이야.”
『….』
원하던 대답 대신, 드래곤이 크고 우묵한 눈을 질끈 감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려서, 이제 막 드래곤이 되어서 그럴 것이다. 겨우 테르마키안 하나를 상대로 쩔쩔 맬 정도로 어리고 약하여, 아직 그 힘을 다루지 못하는 것 뿐이다. 고룡(古龍)이라면. 제 힘을 완전히 체득하고 세계를 조율하는 존재라면 다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반드시.
교수는 알다르샥스보다 한배 반은 더 큰 드래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청이 있습니다. 위대한 에인션트, 나현룡(懶賢龍) 아틀라헤바여.”
으드득-
품에서 이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차라리 저 실을 풀고 명령에 따라 마음껏 움직였다면. 나라면 수십번을 찔러도 괜찮으니 락샤샤가 제 몸을 묶은 실을 풀고 스스로를 천천히 조각내는 것을 멈춰주면 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절박한 눈이 드래곤의 깊은 눈과 마주하자, 대답대신 흘러나온 것은 불꽃을 닮은 긴 한숨이었다.
『….어째. 내 마음에 조금 들었다 싶은 인간들은 전부 만나자마자 제 요구부터 늘어놓는지. 너와는 해야 할 얘기가 많지만, 보아하니 지금은 아무 얘기도 귀에 들어가지 않겠지.』
오랜 세월을 담은 듯 깊이 있는 붉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 아틀라헤바의 몸이 내려앉고, 용의 긴 주둥이가 품에 안긴 락샤샤를 향해 다가왔다.
긴 속눈썹을 가진 용의 숨결에서는 재와 같은 냄새가 났다.
『….고칠 수 있다. 나라면.』
“역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용의 보호자로, 당신 옆에 있는 드래곤이 해츨링이던 시절부터 대를 이어 보살펴온-”
『하지만, 불가능해.』
가능하지만, 불가능하다.
첫 번째 대답은, 기능적인 가능성을.
그렇다면 두 번째 대답은…. 거절이다.
아틀라헤바는, 락샤샤에게 걸린 팔카투스의 명령을 지워내는 것을 거절했다.
놈의 모순된 대답에 반박하기 위해 거칠어진 숨을 집어 삼켜야 했다.
“….펠릭스 드릭시엘은 당신의 꼬리를 얻기 위해 눈과 다리를 바쳤지. 만약, 대가가 필요하다면 전부 주겠어. 필요한게 있다면 얼마든지. 설령, 당신의 꼬리가 자라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계약의 대가로 인한 영구적인 상실이라 해도 좋으니, 얼마든지-”
『대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나의 능력과는 별개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비록 작은 조각이라고는 하나, 세계를 만들어낸 존재의 힘이 담긴 명령. 그것을 풀어내는데는 긴 시간이. 긴 시간이 필요하지. 더욱이, 이렇게 뿌리 끝까지 쥐어짜낸 힘으로 아주 깊숙이 박아넣었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
『그리고. 그런 높은 차원의 명령이 입력된 의식은 행동 뿐만이 아니라 정신과 생각, 사고방식 또한 그 명령을 따라가게 된단다. 본디 그것은 누군가를 당장 조종하기 위한 힘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캐릭터 시트’. 대상이 어떤 캐릭터로, 어떤 성격과 사고방식, 어떤 직업과 능력, 과거를 가졌는지를 결정하는 창조주의 힘이니.』
『그녀에게 내려진 명령은 상잔(相殘). 아마 내 능력으로 그 명령을 완전히 지워낼 때 쯤…. 그녀는 이미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인간을 기어코 죽이고 마는 살인귀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능력으로 명령을 지우는 것은 가능하나, 네게 그녀를 되돌려 줄 수는 없는 것이야.』
나현룡. 나태하고 지혜롭다는 그 이름처럼, 유희를 위해 사막을 빠져나와 그 생명을 보존한 마지막 남은 에인션트.
세계의 일부와도 같은 그녀의 말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정의인 동시에 사형선고였다.
『이대로 두면, 아마 그녀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야. 다음 세계에도, 다다음 세계에도 락샤샤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영혼은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생의 목표로 하는 살인귀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그 여자를 구하고 싶다면…. 아직 그 정신이 온전한 시점에서 ‘정지’시켜 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겠지. 그 명령이 남은 그녀의 모든 것을 파고들기 전에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것. 그렇게 해서 명령의 진행을 멈춘다면 내가 그 영혼을 품어 원래대로 돌려줄 것은 약속하마. 그렇게 되면 다음 세계로 그 살육의 명령이 넘어갈 일은 없을 것이야.』
락샤샤가 붙잡고 있는 것은 고작 제 몸이 아니었다. 이대로 손을 놔버리면, 명령에 몸을 맡기면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사라져갈 그녀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이었다.
쿠우웅-
아틀라헤바의 옆에 내려앉은 알다르샥스의 코 끝이 락샤샤에게 닿았다.
『에인션트시여.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 인간은, 락샤샤는…. 저와 제 누이에게 부모와도 같은 자입니다. 정말, 당신조차 그녀를….』
『아이야.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를 피해주는 것. 그뿐이란다.』
『드래곤의 힘을 얻었다 한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군요.』
『….어린 네가 그것을 빨리 깨달아서 기쁘구나.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결국 우리도 세계 안에 속하는 존재일 뿐이니. 무언가 변화시키고 만들어낸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함은 변함이 없지. 그게 조율이고. 그게 세계란다.』
후우우우-
아틀라헤바의 입김이 락샤샤에게 내려앉고,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작은 유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교수. 세 번째 후보여. 네가 할 일을 마치고, 나와 얘기할 준비가 된다면 그때 돌아오도록 하마.』
『….살라딘. 락샤샤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펄럭-!
붉은 드래곤의 날개가 펼쳐지고. 푸른 드래곤의 몸이 그 뒤를 따라 하늘을 오르기 시작했다.
『콰우우우우우우우-』
먼 울음.
하늘을 가르는 비통한 울음은 저물어가는 태양을 지나 달의 위로 스치우고.
용이 남기고 간 슬픔의 끝자락이, 밤의 어둠을 그들 위에 덮었다.
“으으음….해가 졌나요.”
“그래. 이제 막.”
“드디어, 이 길었던 하루가…. 끝났네요….”
밤과 함께 내려앉는 사막의 한기에, 교수는 그녀를 더욱 깊이 안았다. 심장을 찌른 유리 조각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심어진 명령, 상잔(相殘)의 행위가 진행 중이니 그녀의 의식이 사그라드는 속도가 더뎌지리라는, 그런 기대어린 행동이었다.
“….해줄거죠?”
대답 대신, 교수는 희망을 입에 담았다.
“드래곤이 말했잖아. 그들도 겨우 피조물일 뿐이라고. 아직 로 하람, 세계수, 그것 말고도 이 넓은 세상에 무수한 방법이, 분명, 분명….”
“….어쩌면 이렇게까지 순수한 사람이. 그렇게 냉정하고, 강인하고,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됐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설득력 없는 말은 그의 뺨을 쓰다듬는 락샤샤의 손길에 힘없이 바스라지며, 눈물과 함께 내려앉았다.
나도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락샤샤는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음을. 아틀라헤바의 도움으로 잠시 숨을 돌렸을 뿐.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해맬 시간은커녕 여기서 더 움직일 시간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두려워, 입에 올릴 수 조차 없었다.
“….와. 여기. 이 자리는…. 당신, 나 좀 일으켜 줘요?”
“….”
“얼른.”
죽어가는 그녀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우물…. 기억나요? 당신에게 해줬던, 내가 받은 예언.”
“그래. 기억나.”
사실 기억나지 않았다. 슬픔과 두려움이 강물처럼 내 안에 흐르고 있었다.
“정 동쪽으로. 시안과 도플론의 별 사이를 향해 걷다가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우물에서, 나의 표식을 남겨라. 그리하면, 정인을 찾아 별을 헤매며 사막을 건너온 남자와,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알을 세듯 님을 그리던 여인이 만나게 될지니. 사막의 여인, 아나야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짝을 찾게 되리라.”
노래하듯 읇조리는 락샤샤의 목소리에, 교수는 그녀가 볼 수 없게 눈물을 훔치며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안과 도플론의 별 사이로, 정 동쪽. 첫 번째 우물은, 당신과 내가 다시 만난 그 작은 오아시스. 두 번째는, 카울라디의 오아시스. 그리고, 여기. 우리 앞에 세 번째.”
그래. 우물이었다. 달의 바다는 힘을 잃고 떨어졌으며. 그 물이 가득찬 구멍. 가라앉은 달이 올라온 구멍은 그 모든 바닷물을 담은 우물과 같았다.
“달그림자의 수장을 위한 표식으로, 진짜 달 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그 세 번째 우물 위에 모든 힘을 잃고 추락한 달이 떨어져 있었다. 사막을 향해, 세 번 째로 만나는 우물에 표식을 남길 것. 그곳에서, 아나야는 그녀의 정인을 만나리라.
“….내 마음을 진정으로 얻기 전까지는 락샤샤라고…. 불러달라면서?”
“한번 드린 마음을 어찌 다시 받아오리까. 별을 헤매는, 별처럼 하늘에 매달린 수많은 삶을 헤매는 나의 님이여.”
“….”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 잘 알잖아요? 몸은 죽어 모래가 되고, 영은 저 하늘의 별이 되어 당신과 세상을 내려다 보게 될테니. 두려워 말아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다문 어금니가 바르르 떨렸다.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이 세어나오자 락샤샤의 팔이 더욱 깊이 내 목에 안겨 들어왔다.
슬픔과 함께 말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었다.
모두가 성자라 부르지만, 끝끝내 스스로는 불신자라 칭하는 이의 두려움.
“….죽은 사람은 별이 되지 않아.”
“그런가요.”
“저 하늘은 차가운 서리와 먼지뿐인 세상이야. 별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담긴 보석이 아니라 말라붙은 돌덩이일 뿐.”
“저런. 광명 교단은 새 교리를 만들어야겠네요.”
“죽은 사람에게 다음은 없어.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잃게 돼. 여기가, 이 대화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야.”
그녀의 데이터 소울은 드래곤이 회복시켜 준다 했으니, 다른 세계의 다른 인물로 그녀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지금까지 함께한 락샤샤는 이 자리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영원히. 지금껏, 내가 잃어왔던 나의 사람들처럼.
견딜 수 있다는 것이, 그것에 무감각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쌓여만 가는 상실속에. 어느 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버릴지도 몰랐다.
나와 같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사라져가는 것. 그것은 익숙해지지 못할 고통이며, 이 시대에 끝없이 반복될 고통이었다.
“….삶이 그리 차갑게 정의된다면, 이다지도 어렵진 않았을텐데. 당신과 나도, 우리 세상도.”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겁에 질린 눈가를 스쳐, 나를 파고들었다. 품에 안긴 그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가슴을 통해 전해지듯 몸을 울렸다.
“당신은, 저 아름다운 은하수를 보면 무엇을 느끼나요.”
“….”
“차가운 공허를 느낄까. 아니면 먼 하늘의 별무리에 취해, 뜻 모를 설렘을 느낄까. 당신의 하늘이 차갑다 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이 차가워지던가요.”
“락샤샤. 나는….”
“쉬이이. 내가 선택한 남자는 그 누구보다 강인한, 그 누구 앞에서라도 불굴이라 칭할 수 있는 남자에요. 당신이 그리 느낀다면, 그런 것이랍니다. 당신의 진실을 따르세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내 눈을 마주했다. 락샤샤는 내게서 무엇을 읽었을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나는 왜 저 말에 위로받고 있는가.
트득. 트드득-
다시 그녀의 실이 당겨지는 소리. 잠깐의 유예가 끝나고, 팔카투스가 새긴 낙인이 그녀의 의지를 갉아먹기 시작함을 알리는 소리였다.
실이 살갗을 파고드는 와중에도, 그녀는 고통의 내색 하나 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로 남게 해주리라 믿어도 되겠죠?”
밤의 그늘이 드리운 차가운 모래의 땅. 모래 먼지가 가득한,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그날처럼. 나를 사랑하는 여자가 내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내 손으로 그 마지막을 장식해주길 기다리며.
“….보고싶을거야.”
“내가 당신을 기다렸던 만큼만 그리워하고, 잊어줘요.”
잊는다. 머리를 열고 표백제를 들이 붓는다 한들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교수는. 이 순간을 오래토록 그의 가슴에 담고가리라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영원히.
상처투성이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교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락샤샤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떨어졌다.
“사랑해요. 나의 살라딘.”
“….아나야.”
그 마음의 거리처럼,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마음을 담아 서로를 끌어안았다.
깊이.
더 깊이.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우드득.
그녀의 순수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가슴 깊이.
작은 새처럼 떨던 그녀가 부서지고, 품안에 허물어지는 순간.
살라딘은 그의 눈물이 그녀를 배웅할 만큼 충분하길 바랬다.
홀로 남은 남자의 머리 위에 티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녹아내린 유리 평원 위로 은하수가 내려앉은 모습은, 그곳에서 마지막을 함께한 연인이 별들의 품에 안긴 듯 보였으며.
남자는, 연인을 떠나보낸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한참동안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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