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47
Chapter. 15. 세상의 끝을 본 자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가(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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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부서진 배의 잔해를 쌓아 올린 장작더미는 하염없이, 속절없이 타들어갔다.
전투가 끝나고 승자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한들, 전장의 참상이 사라지지는 않으니.
모래 바다의 유리평원에 참으로 많은 장작더미가 쌓아 올려졌다. 성기사들을 태우고 온 배는 연기가 되어 그들의 마지막 여정까지 함께하고 있었으며.
아나야 또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그들과 같은 배를 탄 참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그저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는 사이,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골드 가이저 상단, 주류 및 예술, 귀금속류 거래 책임자, 베르게네프 아에드란입니다.”
“….예.”
아에드란. 아에드란 가문의 직계. 루실라가 말한 그녀의 피붙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슬픔에 잠긴 머리는 이 순간에도 그의 정체와 방문 목적에 대해 유추하고 있었다. 아에드란 가문 최고의 상품인 곡물 담당이 아니니 부 상단주인 큰아들은 아닐 것이며, 그래도 곡물과 관련된 주류를 취급하고 고가의 거래품목을 담당하니 계승권 2, 3위 정도는 되는 사람일 것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나, 성자님께서 대승을 거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애도하는 만큼 살아남은 이들이 승리의 기쁨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성자님께서 솔선수범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아남은 이들에게 승리를 공표하는 것 또한 영웅의 책무이지요.”
“….그렇습니까.”
다른 이들을 위해 승리를 입에 담으라. 좋게 돌려 말했지만 해석하면 ‘그만 징징대고 일어나라’ 정도의 뜻이다.
하긴. 광명 교단이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곡물에 대한 3년 독점 계약은 국가 단위 예산이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거래다. 그것을 구두로, 심지어 속사포처럼 쏘아대며 날림으로 진행했으니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겠지. 더욱이, 비공정 개발로 인해 현물 자산이 말라붙은 아에드란 가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성기사들의 장송곡이 울려 퍼지는 이 화장터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내 호의 대신, 실리를 선택했구나.’
호의라면 같이 사선을 뛰어넘은 루실라 이상으로 받아낼 수 없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오직 상인과 계약 대상으로서 최대한의 이득을 보겠다는 의미였다. 누가 봐도 슬픔에 빠져 명료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상대로 온갖 독소조항이 가득한 계약서를 내미는 것. 이 시대의 상인에겐 기본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어쩌면, 이번 거래로 반석과 같았던 아에드란 가문의 후계 구도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 서부 전선 보급 거래로 바쁜 형님이 오기 전에 제 손으로 계약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이겠지.
….현실은 슬픔을 밀어내는 파도다. 그래. 일을 하는 것도 좋겠지. 그러면, 적어도 잠깐은 그녀의 마지막을, 손끝에 선연한 감각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힘이 빠진 무릎을 일으키고, 상인의 눈가에 화색이 도는 순간.
철컥-
“아에드란 가문의 베르게네프라고 했는가.”
묵직한 금속 건틀릿이 상인의 내미는 손을 가로막았다.
“성자님께서는 신성한 제의(祭儀)에 참관 중이시니. 속세에 관한 일은 떠나갈 광명의 형제들을 모두 전송한 뒤가 될 것일세.”
부리부리한 눈빛에 체구가 장대한 성기사. 그레고리우스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갑옷과 장대한 체구는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상인과 나를 가르는 벽이 되었다.
“로하람의 성기사단장 그레고리우스 님이시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역시 광명의 성기사답게 광명을 모르는 제 눈에도 그 신앙심이-”
“모르는 자가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
“그- 음…. 사과드립지요. 외람되오나, 성자께서는 제의를 관망하실 뿐인 듯한데…. 잠시 서류에 조인하실 시간 정도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미리 다 준비해왔으니, 성자님께서는 그저 직인 정도나 준비해주시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것은 성자님이 결정하실 일이-”
“아니면.”
철그럭.
“그대, 아에드란의 베르게네프는. 감히 속세의 돈놀음 따위가 비명에 죽어간 이백예순다섯의 목숨보다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성도들의 돈으로 배를 불리겠다 왔으면서 형제들의 죽음은 돈이 안 되니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아에드란이 광명을 대하는 자세인가?”
그레고리우스와 상인의 거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베르게네프도 온갖 수라장을 건너온 아에드란의 직계였지만 살육전을 벌인지 한 시간도 안된 피투성이의 성기사와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거, 거래 얘기는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말씀드리지요.”
“고맙군. 라투라, 로 하람.”
“그, 그럼 이만….!”
베르게네프가 도망치듯 물러나고, 맹수처럼 으르릉거리던 성기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한 얼굴이 되어 나를 마주했다.
“혹여 주제넘게 성자님의 행사를 가로막았다면 처벌해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나 봅니다.”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 척추가 바스라지고, 작은 새처럼 떨던 그녀가 축 늘어지는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잃은 것만 해도 그럴진대,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손으로 가르치고, 함께 훈련한 성기사 수백 명을 이 자리에서 잃었다.
“그렇다면…. 외람되오나, 조금 더 주제를 넘도록 하겠습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지친 눈이 가라앉은 나의 눈과 마주했다. 깊고 우묵한 동공 아래에는 거울처럼 상실의 고통이 비치고 있었다.
“성자님께서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하심은, 이 범부와 다른 크나큰 그릇에 더 많은 이들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빛을 담는 그릇이며, 우리 모두의 의지를 대변하시는 바. 당신의 슬픔은 여기서 떠나간 이들을 모두 제 살처럼 여기는 광명의 마음과 같으니. 당신께서 잠시 주저앉아 휴식을 취한다 한들, 탓할 형제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잠시나마 우리가 당신의 품에 들었음에 기꺼워할 것입니다.”
아나야를 보낸 자리에서 그가 석상처럼 굳어있는 동안 남은 사람들을 지휘한 것은 그레고리우스였다. 그는 모래바다에 가라앉아가는 성기사들의 주검을 서둘러 회수할 것을 명령했으며, 부서진 배의 잔해를 모아 유리 평원 위에 장작을 쌓도록 했고, 전상자의 목록을 작성해 교단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허나, 그렇기에.”
철그럭.
성기사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주저하고 흔들리되, 사그라들어서는 안 됩니다. 새벽의 섬광과 같은 그들의 마지막을 눈에 담은 우리가 여기서 멈춰 선다면, 그들의 죽음이 가치 있었음을 누가 증명한단 말입니까? 밤을 뚫고 솟아오른 빛이 어둑한 대지에 닿기 전에 사그라든다면, 누가 새벽이 왔음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
“기도하고 나아가십시오, 형제님. 저 어둑한 하늘에 오른 우리 형제들이, 가족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의 빛을 보고 안심할 수 있도록.”
“나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믿음이요, 나를 지탱하는 것은 그 신앙의 형제로다. 형제님, 당신께서 사라져간 이들의 의지를 잇는 한, 그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음을 맞추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여정이며, 스러진 형제들의 빛이 목숨과 목숨을 이어 마침내 빛의 인도자에게 닿았으니. 그 모든 빛이 모여 위대한 뜻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을 우리는 ‘광명’이라 부르니.”
“형제님, 앞으로 당신이 나아갈 길을 함께할 이들을 위해, 기도하소서. 라투라.”
“라투라…. 로-하람.”
그것은 기도인 동시에 다짐이었다. 교단의 역사와 같은 시간을 악과 맞서 싸웠으며, 그 세월만큼 희생을 쌓아 올린 교단의 다짐. 결코 그 희생이 헛되이 되게 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성기사들의 맹세.
그 무게가, 슬픔에 표류하던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었다. 이렇게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꼴을 아나야가 봤다면 ‘그런 허약한 남자를 선택한 적 없답니다?’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 그녀를 떠올리자 의미 없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쉰 목에서 나온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와 사라진 것이 후회일지, 죄책감일지, 좌절일지는 모르지만.
교수는 손을 뻗어 그레고리우스를 일으켜주었다.
“….매번 교전 읽으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셔서 말재주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 미욱한 성기사의 모자란 충고가 성자님께 조금은 도움이 됐을지.”
“됐습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그렇다면…. 역시 교전을 읽으셔야 합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전부 교전의 구절에서 따왔으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건조한 웃음과 함께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작은 교전을 꺼내 내 품에 떠미는 그레고리우스.
“푸흐흐흐…. 사람 참….”
“불변. 흔들림 없는 모습이야말로 빛을 모시는 자의 참된 모습이겠지요.”
그 대쪽같은 모습에, 피에 반쯤 젖은 손바닥만 한 교전 사이로 보이는 얼마 안 된 잉크 자국과 누군가의 손글씨에 교수는 마주한 성기사처럼 마른 웃음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잃어버린 것들이 가슴에 남아 얕은 숨을 뱉어내는 게 고작인 웃음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다음으로 나아갈 활력 정도는 되지 않을까.
부스럭.
장작더미의 불꽃이 일어선 두 남자의 뒤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십니까.”
“예. 당신이 윽박질러 쫓아낸 아에드란의 직계도 달래주고, 시간 내서 찾아온 마법사님들한테 감사 인사도 전하고, 제 일행과 할 얘기도 있고….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잖습니까.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형제님 말대로, 먼저 간 사람들 눈치 보여서 더는 못 앉아 있겠습니다.”
“다들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이고, 성자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니 오늘 하루 정도는 쉬셔도 너그럽게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제가 담은 사람들 중에 성질 급한 사람들이 좀 많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내게 휴식을 권했지만 이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깜둥이 셰퍼드. 애아빠 루윌. ‘국왕폐하’ 체스터 킹 중령. 소대장 월리에 미스 미스터 마티. M.J . 도리스. 팔머. 리암…. 전장의 포화 속에 사라진 옛 전우들.
아버지. 어머니.
나를 믿고 쓰러져간 성기사들. 아나야.
등 뒤에 남은 이들이 너무 많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으니까.
성기사들의 중저음이 얽힌 장송곡은 낮은 허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슬픔을 삼키던 성기사들은 그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성자를 위해 길을 만들어 주었다.
말을 잘하는 게 강점인 그였지만, 그의 부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서 타오르는 수백 명의 연기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몰랐기에.
“….광명이,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
작은 인사와 작은 묵례. 그것이 교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연기는 성기사들의 노래와 섞여 먼 하늘을 향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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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라실….”
“예. 오트만.”
“교수와 나. 자네와 노툼…. 다시 넷뿐이로군.”
보르카. 알드리치. 루실라. 그리고, 락샤샤.
오트만은 그들 파티에 이름을 올렸던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관해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오트만은 한 명을 떠나보낼 때마다 교수의 내면에 흐르는 강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의 자유를 빼앗은 정체 모를 마비가 풀린 다음, 오트만과 일행은 아직 후들거리는 다리로 교수가 뛰쳐나간 길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가까스로 달의 내부에서 빠져나온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
그것은 유리 평원 위에 내려앉은 밤하늘과, 그 중심에서 락샤샤를 끌어안은 교수의 뒷모습이었다.
‘말라붙을 사람은 아니지만…. 걱정이구나. 자칫, 지나친 격류가 되진 않을는지.’
헤츨링 세니카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그녀를 품에 안은 노툼의 눈에서도 주먹만 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교수의 얼굴에 슬픔과 함께 의지가 묻어났기에 오트만은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지금 자네가 남의 몸을 신경 쓸 일인가? 어째, 조금 쉬지 않고….”
“쉬면, 자꾸 생각나요. 바쁜 게 차라리 좋습니다.”
“으음…. 그래도, 자네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많이 받았거든요.”
교수는 오면서 차례로 방문한 이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은 역시 바람 마법사들이었다. 싫증이 나면 금방 떠나가버릴 이들이니 어떻게든 가장 먼저 붙잡아야 했으니까.
반갑게도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긴 수염을 쓰다듬는 특이한 말투의 번개 마법사라거나.
———
“오옴- 홈을 박살낸 손님이로다.”
“아, 갈류드님. 갈류드님도 오셨군요. 그런데, 아스트라드는…. 안 왔습니까?”
“오오옴- 안 돼에에- 아티는 홈에서 일해야 하거든~”
“….아티? 일? 어…. 편지 업무는 잠깐 쉬고 오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안 돼에에- 무시무시한 어린 황후님이 친분을 빌미로 우릴 쥐어짜고 있단 말이지….”
“제국의 편지가 하루라도 멈추면, 홈에…. 우리 소중한 고향에, 고, 고양이 때를 풀어놓겠다고 했어!”
“히이이익!”
“펠릭스 맙소사!”
“그 무시무시한 털뭉치가 홈 구석구석을 뛰어다니고, 흩날린 털에 홈이 뒤덮이면…. 위대한 펠릭스 드릭시엘의 유해가 유사 묘족(猫族) 거인의 흔적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말 거야-!”
“오옴…. 루실라 황후님은 우릴 너무…. 너무 잘 알아….”
“저번엔 직접 찾아와서 나를 먼지털이로 때렸어….”
“….그럼 여기 계신 분이 50명은 되는 것 같은데. 지금 홈에는 누가 남아있습니까?”
“아티.”
“아스트라드 말고 또.”
“….아티는 일을 잘해.”
“아암~ 일당백이야 일당백. 우리 50명쯤 빠져도 50인분이 남는다고오~”
“걔 혼자 제국 편지 업무를 전부 부담하고 있다고?”
“너네가 언덕에서 떠날 때~ 배웅한다고 다들 나와 있었더니 집에 있던 아티가 혼자 다 처리해 놨던데? 헬쑥한 얼굴로 뭔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길래, 그때부터 우린…. 어…. 쉬엄쉬엄했지~”
“이…. 이 마법사 놈들이….”
“후흐흐히히히! 손님, 아티가 안부 전해달래.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좋은 걸 보여줬으니, 필요한 만큼은 도와줄게. 친숙한 손님.”
“비공정은 밥도 잘 나와.”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다.”
“오옴- 그래서, 우리 강아지가 어디로 갔는지는 얘기 안 해줄 거야?”
“절대. 나도 모르고, 알아도 안 됩니다. 겨우 되찾은 그의 평화에 마법사 끼얹을 일 있습니까.”
“뭐…. 안 되면 내가 찾지 뭐. 히히히히!”
———
인사 대신 아스트라드가 보낸 선물. 바람 마법사들은 설득할 필요도 없이 이미 오늘 이후에 이어질 전쟁까지 도와줄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바람 마법사는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지만, 그만큼 호의적인 대상을 위해서는 다소 사회적 생리에서 벗어난 친절을 베풀 줄도 아는 이들이었다.
가령, 비공정 위에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다시 찾아온 아에드란 가문의 삼남, 베르게네프 아에드란과 제대로 계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다.
그자의 계약서는 꼼꼼하게 살펴본 뒤 먼지가 되도록 찢어서 내버렸다.
아마도, 실의에 빠진 과부 보험금 훔쳐먹듯 얼이 빠진 나를 등쳐먹을 생각이었겠지. 아에드란의 가주가 이 위험한 전쟁터에 직계를 보낸 것이 나름의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죽어도 대체 가능할 정도의 모자란 놈이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념이고 상도의고 죄다 말아먹은 계약서였다.
생각해보면 비공정의 첫 시운전이 아닌가.
로만 그 친구의 성격을 생각하면 죽어도 저거 타고 사막으로 오겠다고 했을 텐데, 정작 온 것은 진짜 큰 거래, 숫자 이상의 것이 오가는 거래라곤 하나도 모르는 병신 나부랭이였다.
비공정이 공개된 이상 로만은 다른 상단 및 국가의 최우선 영입 대상이자 암살 대상이며, 로만의 기술력에 가문의 기둥뿌리까지 털어 넣은 아에드란 가문으로서는 로만에게 털끝만큼의 위험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로만을 비롯해 가문의 진짜 중요한 인재를 전쟁터에 내보낼 수 없었겠지. 그래서 이런 쭉정이나 태워 보내게 된 것이고.
아마, 그게 배를 만든 장본인인 로만이 엔진실 한 켠의 비밀 공간에 틀어박혀 밀항한 이유일 것이다.
당연히 이제 막 배에 오른 내가 로만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 리가 있나.
모두 바람 마법사들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
“오옴- 상인 친구, 우리랑 같이 구름 여행 한번 갔다 오지 않을래?”
“크….흐음! 마법사님들의 성의는 감사하나, 평범한 상인에 불과한 나는-”
“히히히! 그러지 말고 가자!”
“그래! 멋진 장난감에 태워줬는데, 보답해줘야지!”
“마법사의 성의를 무시하면 죽어!”
“이, 이것 놔! 이 무슨….”
피유웅-
“으아아아아아아아-”
“난다! 날아!”
“이 배는 구름 위로 다니니까, 구름 아래가 어떤지는 우리가 가르쳐줄게!”
“-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마법사들은 베르게네프를 비행기 밖으로 내던져 로켓처럼 쏘아 올린 뒤, 온갖 요상한 몸집(딴에는 은밀한 신호)로 비공정 안쪽을 가리켰다.
선원들도 그런 모습을 눈치챘지만 먼 하늘의 점이 된 베르게네프와 이쪽을 번갈아 살피며 못 본 척 눈을 감아주는 게 아무래도 로만의 밀항을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
그렇게, 모두의 암묵적인 묵인하에 들어간 비공정의 내부에서.
수염쟁이가 다된 로만과 만날 수 있었다.
———
“….로만? 로만 가치아 멘슨?”
“핫핫핫핫핫핫핫핫! 간만이군, 벗이여! 잘 지내….지는! 못한 것 같군! 얼굴이 말이 아닌데!”
“여긴 어떻게…. 베르게네프는 분명 네가 가문의 심처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는데….”
“핫핫핫핫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야, 내가 마침내 그 독사 같은 가주 늙은이를 속여 넘기고 아에드란 가문의 담장을 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지! 감히 내 자식 같은 비공정, 그것도 수많은 자식들 중 유일한 성공작인 ‘정품 비공정 148호’의 진천식(進天式)에 나를 태우지 않겠다니, 마도공학자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 물론 그것도 있지만 공동 개발자인 자네에게 죽도록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네!! 핫핫핫핫핫핫 자네가 보내준 연금술사 친구들은 잘 쓰고 있네! 유능하더군! 핫핫핫핫핫핫핫핫!”
“‘148호’에 유일한 성공작이라니…. 그럼 앞선 147개 비공정은…. 실험작이나 뼈대만 만든 건가?”
“아니? 전부 추락했네! 다들 위대한 발전을 위해 장렬히 산화했지! 덕분에 비공정 선원은 비공정의 관리보다 먼저 고공낙하 훈련을 받는다네! 핫핫핫핫핫핫!”
“볼테르 아에드란 가주가 세 번은 쓰러졌다는 소문이 진짜였군….”
“두 번일세! 마지막 한 번은 앞선 경험으로 학습한 내가 쓰러지기 전에 받아들였거든! 127호 때였나, 그분 앞에서 엔진과 함께 배가 화염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는데, 괜찮냐고 물었더니 마도엔진 뺨치게 우렁찬 목소리로 텔드랏 고어까지 섞어가며 온갖 욕설을 내지르시던데? 나이치고 참 정정하신 분이라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여전히 정신 사납고, 항상 입에 웃음이 걸려있으며, 참 많이도 흔들리는 나와 달리 제 의지를 관철하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는 친구.
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비공정을 완성해낸 로만.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난 다음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과였다.
———
“핫핫핫핫핫! 내 생각보다 아에드란 가주님의 통이 작아서 좀 늦었지! 미안하네! 내 삶을 구원해준 자네가 이렇게 몇 번이나 사선을 넘고 있었는데, 나는 뒷정리나 도와준 게 고작이라니!!”
“늦기는. 네 덕분에 이렇게 잘 마무리가 됐는데….”
“아니, 분명히 늦었어! 내가 더 빨리 왔다면, 저기 피어오르는 연기가 축제의 연기로, 구슬픈 장송곡은 승전의 찬가로, 수심 어린 자네 얼굴이 평소의 교수로, 그리하여 온전히 친우를 만난 기쁨으로 물들 수도 있었겠지! 미안하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손으로는 제 가슴을 치듯, 비공정의 벽면을 두드리던 로만.
녀석도 저 위에서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교수는 저렇게 웃는 얼굴로도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로만은 이런 사람이었지.
———
“….고맙다. 로만.”
“핫핫핫핫! 괜찮아! 자넨 괜찮을 거야!”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네. 진짜 고맙다.”
“핫핫핫핫핫핫핫! 정 고마우면 나중에 손발이나 몇 개 더 잘라주면 고맙겠는데! 아무래도 그때 그 흑마법사처럼 솜씨 좋은 영혼술사는 쉽게 찾을 수가 없는지라, 재료라도 좀 괜찮은 걸 써야겠거든! 대영웅이자 100년 만에 돌아온 광명의 추기경 교수의 손발이라면 음지에 틀어박힌 의심쟁이 흑마법사들도 뛰쳐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지금 이 비공정에 장착된 것도 그때 자네가 만들어 준 초대 ‘치킨센서’ 라네!”
———
터억.
그의 열정만큼이나 뜨거운 손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친우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완성된 비공정. 그것을 몰고 와 더 빨리 오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로만.
….새삼, 이 세상이 나 하나에 국한된 세계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제국에서 날뛰는 동안 로만 가치아 멘슨은 아에드란의 압도적인 금력과 인력을 바탕으로 그 짧은 시간에 147개나 되는 실패작을(돈 많다고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모조리 실험한) 만들었으며, 끝내 다음 월드쯤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비공정을 내 눈앞으로 가지고 왔다.
아스트라드는 구심점 없던 펠릭스 홈의 구심점으로…. 홈의 일부 비스무리한 것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며, 루실라 또한 내가 알던 왈가닥 상인 루실라 아에드란이 아니라 황후 루실라 아그단으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내가 비극의 주인공처럼 실의에 빠져있다 한들, 세상은 그딴 거 신경도 안 쓰고 돌아갑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자네가 무사히 극복한 것 같아서 다행일세, 교수.”
“극복이라…. 그건, 앞으로 만날 분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후우욱-
펄럭!
오트만과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잠시 사라져 있던 거대한 존재감이 날갯짓 소리와 함께 그들 앞에 내려앉았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에인션트, 아틀라헤바님.”
『필멸자는 섬세하니까. 준비가 됐으면…. 자리를 옮기자꾸나. 해야 할 이야기가 아주. 아주 많단다.』
“….저는 아직 ‘자격’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리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텐데요?”
『거의 다가왔지. 그 딱딱한 ‘시스템’도 반쯤 인정했으니, 이젠 정말 시간문제일 뿐이란다. 해야 할 얘기는 충분히 나눌 수 있을 거야.』
드래곤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이제는 제법 익숙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시간이 굳어가듯, 세계와 유리되어가는 느낌.
“다녀오겠습니다, 오트만.”
“드래곤과 대담이라…. 다녀와서, 같이 목욕이라도 하면서 듣도록 하지.”
“….거 좋네요.”
파밧-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부신 섬광과 함께 교수도, 드래곤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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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사각.
치이익!
이드라실은 자신의 기록을 살펴보더니, 그대로 앞의 몇 장과 함께 부욱 찢어버렸다. 교수가 사라진 자리에 못박혀 있던 오트만은 그런 그녀의 기행에 고개를 돌렸다.
“….기록이 마음에 들지 않나?”
“사실에 기반한 기록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해했을 뿐입니다.”
이해라. 오트만은 저 배움을 갈구하는 엘프가 이번엔 무엇을 배웠을지 궁금했다. 그녀의 입으로 ‘어머니 나무를 뵙고 왔다.’고 말한 뒤부터 이드라실의 눈빛이 이상하긴 했다.
“무엇을…. 이해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리 대단한 사실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아무리 오늘을 적어 남긴다 한들. 이 순간을 직접 느끼지 않은 이들은 이런 기록을 통해 ‘인간’을 배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자의 제한된 표현력으로 이것을 이해했다 착각하고, 지식으로 받아들이며, 지금의 오만한 엘프와 다름없는 이가 되겠지요.”
치이익-
찌이이익-
이드라실은 그 이후로도 몇 장을, 그녀가 기록한 것들을 찢어낸 다음 머리카락을 뽑아 따로 엮었다.
“이것은 제 종족을 위한 기록이 아닌,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일기로서 소장할 생각입니다.”
“그럼…. 수첩에 몇 장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직접 밖으로 나와 배워야겠지요. 인간과 함께 살고 싶다면 지식이 아니라 피부로 그들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 제 기록은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제가 겪은 인간사를 전달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수첩의 겉장. 그 안에는 글로 된 기록이 아니라, 이드라실이 지금껏 취미로 그렸던 그림들만 남아있었다.
밤하늘 속에 홀로 남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끝난 수첩.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숲을 나온 엘프의 깨달음에 오트만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참 빨리 배우는군?”
“….반은 인간이다 보니.”
마지막 스케치와 함께 둘로 분할된 수첩을 손에 쥔 이드라실은 일기 쪽을 소중히 품에 넣은 뒤, 그림이 담긴 쪽을 들고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
고향에 있는 동족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좋겠지만, 카네란의 엘프들에게 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동족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것을 눈에 담을 방법을 이드라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림이 담긴 수첩을 쥐고 ‘그레고리우스’라고 불린 성기사에게 향하며, 빛의 사제들이 이 그림을 얼마나 빨리 세계에 확산시킬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
-파앗!
세계수 때와 비슷한 이질적인 공간.
다만, 세계수의 공간은 뭔가 대단한 장엄함이 있다면….
이곳은, 정신 나갈 것 같은 흰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용 세 마리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알다르샥스랑…. 그럼 옆에 계신 분이 아틀라헤바 님이겠고. 세니카까지?”
눈앞을 가득 채운 푸른 용. 그 옆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핑크색 도마뱀 한 마리.
『살라딘. 이 자리에서 그대를 맞이하게 되어 영광이로군.』
“오라버니에게 선조의 힘을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라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두 남매를 보며, 교수는 괴팍하기로 소문난 에인션트 앞에서 드래곤의 인사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의 인사가 무색할 정도로 요란한 큰절이라도 올려야 하는지 심각하게 숙고해야 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거라. 지금 저 사내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것으로 가득 들어차 있을 테니.”
『예. 대모님.』
“끼루룩.”
저 둘에게 대모님 소리를 들을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니, 지금 입을 연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아틀라헤바일 것이다.
그녀는 둘의 앞으로 걸어나와 손 위에 작은 빛 한줌을 띄워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잘 갔습니까?”
“그래. 무사히. 팔카투스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한 세대를 거듭할수록 영혼의 ‘오류’도 조심해야 하지. 다행히 락샤샤의 영혼은 원한도,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도착했구나. 아마 다음 세계에서도 지금처럼 생명력 넘치는 여인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무얼. 네가 잘 보내준 덕분이지. 아무래도, 이번 ‘세계’에서는 그리 많은 오류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기쁘구나.”
파아앗-
아틀라헤바의 손에서 락샤샤의 영혼. 그녀의 데이터 소울에 해당하는 것이 사라졌다.
“그래…. 내 너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팔카투스를 통해 들어야 할 이야기는 대부분 들었습니다.”
“팔카투스…. 참, 너는 여러모로 특별한 플레이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구나. 너도 그렇고. 팔카투스가 도달한 결론도 그렇고. 그리고…. 하이드라는 존재도 그렇고.”
[….히끅!]‘….하이드?’
[아이고오오! 부르지 마! 나 여기 없다고 해! 무, 무서운 아줌마한테 잡혀갈 거라고!]“후후후. 안 잡아갈 테니 거기 앉아서 듣기나 하거라. 사실 지금 이 대화도, 교수라는 플레이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니. 당연히 그대 또한 자리하는 게 맞겠지.”
“….생각도 듣고, 그러십니까?”
“그럼. 드래곤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어쩐지, 한참 전부터 이 녀석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했더니. 아틀라헤바와 눈이라도 마주친 모양이다. 내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직접.
“자아. 이제 손님들이 자리에 모였으니. 내 오래된 의무를 수행해야겠구나.”
“의무….요?”
“그래. 의무. 우선, 이것을 보여줘야겠구나. 알다르샥스.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할 수 있겠느냐?”
『그…. 죄송합니다, 대모님. 아직 마법을 다루는 것까지는….』
“그래. 그럼 네 누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렴. 영상을 용의 눈높이에 맞출 수는 없으니.”
『예.』
알다르샥스는 즉시 과거의 ‘알다르’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나란히 나와 헤츨링 남매의 뒤로 푹신한 소파가 생기고, 그 앞에 작은 상자 같은 것이 스르륵 자라났다.
자세히 보니, 상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오래된,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배가 볼록한 브라운관 TV다.
“화질이 좋지 않은 것은 이해해주렴. 그분의 손길에서 탄생한 곳인 만큼, 대미를 장식할 이 순간에는 그분의 취향이 많이 묻어났으니 말이다.”
“그 분이라면….”
아틀라헤바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구형 TV 아래의 비디오 플레이어에 검은 책처럼 생긴 비디오를 집어넣었다. 언뜻 본 비디오의 몸에는 싸인펜으로 휘갈긴 듯 ‘창세’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치직- 치지직-
회색 노이즈로 가득한 화면이 지나가고, 오래된 화면 속에 기름에 찌든 수염과 머리칼을 한 중늙은이가 나타났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이나, 부리부리한 눈 만큼은 맹수처럼 치켜뜬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카메라 앞을 서성이길 몇 차례.
“저, 저거?”
“집중하거라. 이것은 창조주께서 직접 후대를 위해 만든 기록이니.”
노인의 생김새도, 아틀라헤바의 대답도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 그가 알던 것보다 조금 젊은 모습의 안드레이 게드로이츠는 카메라 앞에서 교수를 향해 얘기하듯 혼잣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하고 서성이길 반복하던 게드로이츠는, 신경질적으로 카메라 옆의 술병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반쯤 남아있던 병을 비워버리고는 카메라를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 엿 같은 엉덩이 무거운 신에게 살해당하지 않겠다. 살해당하게 두지 않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호모 새끼같은 신에게 두 눈 뜨고 당해주진 않겠다! 반드시!!!]광기 어린 충혈된 눈이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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