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5
Chapter.4 눈꺼풀(7)
***
쿵, 쿵, 쿵
‘대형종. 두꺼운 돌로 된 바닥이 울릴 정도니 꽤나 묵직한 놈.’
타닥, 타다닥! 타닥!
‘중형. 절 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가벼운 소리. 곤충형. 아까 사마귀도 그렇고, 이번 습격에는 곤충형 개체가 많이 온 모양이군.’
사실 이 시기에는 그냥 감염만 된 8급이나 이렇게 곤충이나 설치류 같은 것을 주형으로 삼은 7급 개체가 주를 이루는 것이 맞다. 가장 구하기 쉬운 유전자인 만큼 여왕이 완전히 소화한 지 오래일 테니까. 그런데 땅굴을 뚫었다면······.
‘페일페이스. 6급. 특수종. 아무래도 이번 월드의 뮤트는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모양이군.’
거대한 지렁이가 하얀 가면을 쓴 것처럼 생긴 녀석이다. 하얀 가면은 앞턱이 발달한 것인데, 그 커다란 두 턱을 이용해서 땅을 파고 다니는 게 전부인 개체. 가끔 이렇게 땅굴을 파고들어 올 때 종종 보이지만, 큰 위협은 되지 않는 녀석이다.
그냥 땅을 팔 줄만 알아서 그 굴로 들어오다가 굴이 무너지며 생매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렇게 쓸모없는 주제에 또 자원은 드럽게 많이 먹어서 뮤트 쪽에 지능이 높은 지휘형 개체가 나올 때까지는 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다.
‘자원, 그러니까 여왕에게 제공되는 사냥물이 충분했다면 그냥 때로 몰려왔겠지. 하지만 에데오르나의 사냥 실패로 여왕은 굶주리게 되었고, 병력의 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그 상황에서 둥지의 인공 자궁을 늘릴 자원도 모자랄 판에, 저 왕지렁이 같은 특수개체를 늘리다니.’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여왕은 지금 병력을 매우 아껴쓰고 있는 것이다. 언제 무너져도 모를 굴이라고 해도, 적은 병력이 살살 지나가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으니까. 도시에 침투시키고, 여차하면 다시 후퇴하게 하려고 저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막 성장 중인 여왕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닌데······. 위기감이 지능의 발달을 촉진 시켰나?’
아직 거기까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쿵! 쿵! 쿵!!
큰놈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끼익- 콰앙!
‘철문이 넘어가는 소리. 내 방이다.’
욕조 안에서 교수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가라….. 제발 그냥 가라….
“킁킁킁, 그륵 그륵, 우우.”
넘어진 문 앞에서 냄새를 맡던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쿵! 쿵!
“그르륵.”
덜컹!
욕조의 뚜껑이 열렸다. 교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체처럼 가만히 욕조 안에 누워있었다.
“킁킁킁킁- 그륵? 거어어. 우우.”
털그렁.
쿵! 쿵. 쿵….
잠시 욕조의 냄새를 맡던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욕조 뚜껑을 놓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살아있는 놈한테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어!’
뮤트의 피가 가득 든 욕조. 뮤트의 피안에 잠겨있으면 내 몸 안의 감염 인자도 잠잠해지곤 했다.
‘온갖 생물을 다 끌어모아서 생긴 것도 다르고, 체취나 기타 등등 전부 각양각색인 뮤트가 아군을 구분할 방법이라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염인자뿐일 테니까!’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욕조로 뛰어든 것이다. 어물쩍거리며 도망갈 각 재다가 밖에 탐색에 특화된 녀석이라도 되면 그대로 골로가는 거니까.
‘아무 소리도 안 들릴 때까지, 이 안에서 죽치고 있는다.’
깨끗한 물이 아니라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수계 마나 친화 덕분인지 숨을 참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이대로 상황을 지켜보다, 조용해지면-
[넌 어렸을 때부터 숨는걸 참 좋아했었지.]‘!!!’
뇌에 직접 주입되는듯한 달콤한 향기. 비웃는 듯, 조롱하듯 속삭이는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놈이다.
[문제가 많은 아이였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물론 그 또래 남자아이라면 비밀기지 같은 것에 환장하지만, 너는 정도가 심했지.]전보다 한층 선명해진 목소리. 이제 놈은 말을 더듬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지도 않았다. 정말 머릿속에 있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듯했다.
교수는 놈과의 첫 조우 이후, 이 상황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다. 머리만 제외하고 몸 전체가 감염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특수한 상황, 거기에 개인행동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에데오르나의 감염 인자. 처음에는 악몽으로, 그다음에는 무의식으로 찾아와 끊임없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들추는 놈의 행동.
‘이 대화 자체가 정신 오염의 진행과정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왜 이런 것을 게임 안에 넣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현실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GG안의 덫이, 바로 이것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그렇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놈은 내 의식을 약화시키고, 파고들 틈을 찾고 있으니.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의연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가리 파이트는 또 내 전공이지’
[오, 무서워라. 그런데 뭔가 착각한 게 있는데, 나는 딱히 너를 적대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농담이었다면 3자리다. 물론 100점 만점이지. 내 머릿속에서 농담과 관련된 부분은 대충 본 모양이야?’
키득키득.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쁜 웃음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놈은 지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니, 진심이야. 나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거든. 어머니라는 존재에 종식되어있는 동안은 뭐랄까, 자백제에 취해 흑역사를 털어내는 느낌이었달까? 어머니는 정말…. 아, 미안. 내가 섬세하지 못했네. 너는 엄마가 없구나?]….이 새끼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그런가, 정말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군.’
[음···. 예의라는건 타인과 관계유지를 위해 여러 행위에 제약을 만들어 둔 것이잖아? 너랑 나는 타인이 아닌걸? 교수. 편하게 대하라고. 집에서 속옷만 입고 있는 것처럼.]제기랄.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대라니. 어떻게 말해도 저쪽 분위기에 끌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좋아, 네가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고 치자고. 그럼 지난 며칠간 나를 공격한 것은 뭐지? 이미 머리 아래쪽 감염인자는 네 통제를 따르잖아. 네가 마음만 먹으면 그것들을 진정시키고, 네가 정육점 주인의 보물단지처럼 마구 썰려 나갈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아이작 영감탱이한테 슬립 맞고 잠들었을 때, 그 이상한 악몽도 너였지? 그딴 식으로 개수작을 부려대면서 뭐? 나를 적대하지 않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아아, 그거?]킥킥킥….키득키득키득-
감은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가늘게 호선을 그리는 붉은 눈. 새하얀 치아. 놈이다. 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물론 다 설명할 만한 이유가 있긴 하지. 자, 봐봐?]꿈틀!
‘이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움직인다. 어디 걸린 것처럼 힘겹지만, 천천히. 검지와 중지가 구부려진다.
[감염 인자는 기본적으로 단세포 생물 비슷한 거야. 내가 아무리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에데오르나에 의해 넘겨진, 교수의 머릿속에서 자란 의식이라고 해도, 직접 어머니의 명령이 의식 한가운데에 단단히 박힌 감염 인자를 조종할 수는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녀석들이 원래 움직이려던 방향으로 살짝 부추기는 정도랑, 네 머릿속에서 이 손가락 두 개를 움직이는 정도?]살랑살랑~
교수는 불투명한 용액 속에서 인사를 건네듯 까딱거리는 오른쪽 손가락을 보며,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손에 힘을 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손가락은 다시 교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음, 아아, 못 참겠다. 더 뜸 들이고 싶었는데. 비밀이란 참 재미있는 거구나.]‘뭐가?’
키득키득.
붉은 눈의 환상이, 놈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다가왔다. 언제부터인지, 검은 연기에 팔과 다리가 자라있었다.
[사실, 다 변명이야. 그냥 즐거워서 그랬어.]‘….뭐?’
[단단한, 아니 스스로 단단하다고 여기는 자의식이 말 한마디, 회상 한 번에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느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내가 알고,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느낌! 너무 재미있었어! 아기처럼 웅크린 네 의식이! 무너진 감정을 주워담아 다시 예전처럼 튼튼하게 쌓아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어찌나 애달프던지!]희열. 정말 순수한 희열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놈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내가 무너지는 것을 기뻐하는 놈의 울림이.
악이다. 놈은 정말 순수하게 악한 생물이었다.
뚝-
순간, 날뛰던 감정들이 칼로 끊어낸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래서 그런 거야. 오늘도, 그래서 왔고.]부그르륵-
갑자기 몸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려워졌다. 마치, 처음 감염 인자가 몸을 침식해 들어올 때의 그 고통처럼.
[아래쪽에 있는 녀석들을 최대한 부추겨놨어. 이 안에 있는 동안은 괜찮겠지만, 나가는 순간 순식간에 네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와, 너를 멍청이로 만들어버리겠지.]‘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그런 게 가능했다면, 왜 나를 지금까지….’
키득키득.
[말했잖아? 재미있었다니까?]치직, 치지직-
놈과 나, 둘밖에 없던 새까만 의식 속 공간에 작고 낡은 TV 한대가 나타났다.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은 게임 속이니, 나랑도 게임 한 판 하자고.]‘무슨….’
[‘오래 버티기’. 별거 아냐. 이 화면에, 내가 네 기억 속에서 심사숙고해서 뽑은 기억들이 나타날 거야. 그걸 전-부 보고 난 다음에도 네가 지금과 같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네 승리.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감염 인자를 억제해주지. 원한다면 닥쳐줄게.]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고개를 돌려도 그 화면은 눈앞에 고정된 것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버텨내지 못한다면?’
[벌써 약해지다니! 1점 감점. 음~ 네가 못 버텨낸다고 해서, 딱히 내가 뭘 하진 않을 거야.]키득키득
드르륵-
어디선가 작은 나무의자를 끌고 온 놈은, 화면 앞에 앉아 머리 뒤로 손을 기대며 말했다.
[굳이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그때부터 이 몸은 내 것일 테니까.]피잇-
낡은 TV의 화면이 켜지더니, 오래된 필름으로 찍은듯한 영상이 나타났다.
교수는 그 화면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의 안에서 곪아온, 그의 죄의 연대기였으니까.
***
전쟁은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끝났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전장에 있는 지휘관들이 깨달은 것이 아닌가 싶다. 더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고고한 이상이나 더 큰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쌓인 증오를 해소하기 위한 것들뿐이라는 것을.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명령만 해도 현 위치를 고수하고, 현장의 상황에 맞게 적을 말살하라는 것뿐이었으니까. 그것도 연속해서 세 번이나 같은 내용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물건이 가스마스크 하나 남았으니, 집에 가면 어머니를 기억할 물건도 남아있겠지, 유행따라 우후죽순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그래도 쉘터이니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겠지,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들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도 못 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털썩.
“어머…니?”
“….2년 사이에 많이 컸구나. 어머니라고 부를 줄도 알고, 아들.”
“어,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차례로 징집되고 홀로 남은 어머니. 전장에서 장난감처럼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보며, 난자된 민간인 거주구역을 보며, 이미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가, 전보다 훨씬 야윈, 하지만 단단해진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다.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무지의 쉘터 한가운데.
전쟁 전에는 빵집을 운영하시던 어머니는 2년 사이에, 녹인 구리를 틀에 부어 탄피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세상을 멸망시킨 환란 속에서,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는지,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좋은 시절이었지. 으음~ 그리운 느낌이야.]그렇게, 어머니와 둘이 삶을 꾸려나갔다. 쉘터를 요새화하고, 주변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해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을 때 별말 없던 어머니가 밤에 몰래 아버지의 옷을 끌어안고 우는 것을 봤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14 특작대에서 배워온 기술은 황무지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대단히 유용했다.
특히, 사람을 죽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
“엄마,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돔은 지금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법과 정의의 기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집단이야!”
“아들,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런 겉만 번드르르한 소리를 내뱉는 놈들치고 뒤가 안 구린 놈들이 없다니깐? 네가 황무지에 온 지 한 달밖에 안돼서 모르나 본데, 그놈들은······.”
“나도 군에서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왔어! 다 안다고! 이렇게 우리 둘이 평생 살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둘이 살아가면 어떠니….”
나는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칼로 살점을 헤집고 피를 뒤집어 쓸 때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이미 죽어버린 그들도 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불안 증세는 심해졌다.
돔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과거의 문명을 재건하겠다는 그들의 말, 그리고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안정감, 소속감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안전한 그곳으로 간다면, 다시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될 텐데.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하며 그렇게, 옛날처럼······.
그래서 어느 날, 밖에서 상처를 입은 어머니가 패혈증으로 쓰러지셨고, 나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돔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내 군 경력을 알고 있었고, 나와 어머니를 환대해주었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퍼돔의 시가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지만 깔끔한 오피스텔. 전쟁 전 실험단계에 있던 도시단위 반투과성 실드 발생기 덕분에 먼지 한 점 없이 상쾌한 공기.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딱 한 가지. 어머니만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 요청에 돔에서 직접 보내준 의사들이 어머니께 항생제를 주사하고 여러 가지 조처를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다.
“저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습니다. 아무래도…. 변종 바이러스가 뭔가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챙그랑!
“그럼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립니까!”
“아니,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다만, 언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서······. 앞으로도 항생제를 계속 투여하며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항생제는 과거의 문명을 어느 정도 간직한 돔에서도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다시 총과 칼을 들어야 했으며, 그렇게 무수한 사람의 핏값으로 받아온 약으로 어머니의 삶을 연장해 나갔다.
[키득키득, 이 훌륭한 서사를 보라고. 이걸 어떻게 혼자 보고 있을 수 있겠어······.]돔으로 아주 한지 두 달 이 다 되어가던 날. 늦은 밤, 창문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동안 하던 ‘일’로 날이 바짝 서 있던 나는, 놈이 접근하기도 전에 창문을 넘어온 침입자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고 있었다.
“….솜씨가 많이 늘었군, 밥통.”
“이 목소리는…. 루윌? 14 특작대 루윌 맞아?”
내 물음에, 루윌은 천천히 총구를 밀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이군. 전역 이후로 석 달, 아니 넉 달쯤 인가.”
“우린 워낙 적을 많이 만들었으니까. 뭉쳐있는 것 보다, 흩어져있는 게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작았지. 만나서 반갑군, 루윌. 낮에 노크를 하고 찾아왔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말이야.”
반가움과는 별개로, 아무도 없는 밤에 몰래 집을 찾아온 녀석이었다. 무턱대고 반가워하기엔 내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았으며, 전장에서 만난 루윌은…. 침투와 암살의 대가였다.
하아아.
칙,칙.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루윌의 담뱃불이 조준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교수. 돔의 위력부대 소속으로 활약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해야 했으니까.”
“약…. 약이라….”
투욱.
루윌은 품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 하나를 꺼내놓았다.
“내 용건은 이걸 네게 전해주는 것뿐이었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달칵.
집의 뒤쪽 창문으로 몸을 내밀던 루윌은, 잠시 망설이더니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는 내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네 어머니라는 것을 몰랐어. 나는 이곳에…. 딸과 아내가 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루윌! 기다려! 루윌 바르토스!”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창밖을 살폈지만, 루윌은 벌써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남기고 간 서류철만 덩그러니 테이블 위에 남아있을 뿐.
나는 다시 전장에 선 것과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그만, 제발 그만…..’
[이런, 껍데기? 우리 몇 분 전에 예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화장실을 가다니, 예의가 아니지. 끝까지 봐. 네 인생을.]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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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박교수
특이사항 : 14 특수 섬멸 작전 부대 복무. 십 대의 나이로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 주특기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동한 것이 특징. 모든 종류의 보급을 책임졌으며 공병으로서도, 전투원으로서도 우수했다고 기록됨. 밥교수, 밥통, 보급병 등으로 불림.
아버지는 작전 중 사망한 것으로 확인. 패혈증에 걸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돔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 대면 상담에서 모친이 돔에 대단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
조치 : 다방면으로 돔에 필요한 인재로 확인됨. D-36을 주입해 모친 쪽을 잠재워 두었음. 의약품의 구매를 유도하여 경제적으로 붙들어둔 후, 옆에 사람을 붙여 긍정적인 관계를 맺도록 유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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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덜덜-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D-36이라는 약물에 관한 설명. 그 다음장, 내 주변에 접근시킬 인물들의 사진과 신상명세, 집에서 감청한 내용이 기록된 것, 그 다음, 그 다음, 그 다음…..!
팔락, 팔락, 팔락,
“뭐가 정의고…. 뭐가 법이라는거냐….!”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길 때마다 몸의 떨림이 점점 심해져 왔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반드시 어머니가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도, 내가 세상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도, 술집에서 만난 친구, 쓰러진 어머니의 옆에서 나를 위로해준 여자, 이 집까지 모두! 모조리 다 !!
그날 밤, 나는 어머니를 업고 몰래 돔을 빠져나왔다. 철통 같은 보안을 자랑하던 돔의 출입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열려있었다. 황무지의 바람에 눈물 자국이 모래가 되어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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