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58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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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저벅 저벅
“선왕께서 돌아가신 것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
“그래요? 듣기로는 왕국의 멸망을 차마 눈에 담을 수 없어 기사왕답게 전장을 자신의 묘지로 삼았다고….”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왕가의 명예를 깎아내려 로드릭의 발언권을 뿌리까지 제거하려 한 다른 귀족들의 농간이었겠지.”
“적의 공세 중심부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된 뒤, 로드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총 공격을 감행했다. 선왕께서는 이번 공격의 실패가 로드릭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어떻게든 성사시키기 위해 친정을 감행한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왕을 섬기는 기사들이며-”
“아. 왕의 친정. 왕과 함께하는 기사들은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긴 하죠.”
“….그래. 캐슬나이트와 로드릭 기사들이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도 전부 폐하의 용단 덕분이다. 로드릭 왕가는 대대로 그러하였다. 그 어떤 기사보다 기사다웠으며, 용기를 가슴에 품고 약자를 보호함에 있어 등 돌리는 일이 없었지. 비록 어린 전하께서 지금은 혼란스러워 하시나, 머지않아 기운을 차리시고 일어나실 것이 틀림없음을 나는 안다.”
“예, 예. 그러시겠죠. 암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나는 샬롯의 국왕 찬양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커다란 왕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뭐, 확실히 시간이 좀 있으면 어린 시오드 4세가 그런 왕으로 자라날 수도 있겠지.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흥미가 떨어지고, 턱에 막 솟아난 부드러운 수염에 남몰래 신기해하기도 하고, 사춘기의 호르몬 칵테일이 뇌를 곤죽으로 만들고 하면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면…. 좀 봐줄 만한 왕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10년, 20년 뒤에 만들어질 성군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사령관 회의실에서 귀족놈들 얼굴에 술을 끼얹어줄 강단 있는 왕이 필요하거든. 저 하나 지키겠다고 매일 시체 산을 쌓아대는 부하들을 피 냄새가 무섭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좆만 한 애새끼가 아니라, 망할 숟가락 충 새끼들 고막에 쌍욕을 퍼부어줄 그런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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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써야 할 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왕궁은 화려하지 않으나 중후한 멋을 잘 살린 건물이었다. 이드라실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불이 다 꺼지고 흙먼지가 쌓이지만 않았다면 꽤 봐줄 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안 된 왕궁이라. 선왕과 첫째, 둘째 왕자는 사망. 그럼….’
“왕비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덜컥.
묘하게 왕비에 대한 언급만 없었던 것을 떠올린 내가 묻자, 앞서 나아가던 샬롯의 발걸음이 굳었다.
“….지아비와 헌앙한 아들 둘을 잃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나. 비단 어떤 여인이라도 버티기 힘든 충격이다.”
“쓰러지신 겁니까?”
“현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기억에 갇혀 혼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허공에 대고 말씀을 나누시시다 갑자기 고문당하듯 비명을 지르길 반복하고 계시지. 전하와 함께 하실 때는 조금 진정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애가 방에 틀어박힐 만하군.”
가족은 다 죽어. 나라는 망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제 자기만 쳐다보면서 ‘당신밖에 없습니다! 뭐라도 해주셔야 합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데 뭐가 뭔지 모를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미쳐버린 어미의 비명소리 뿐이다. 충성스러운 근위기사들과 그에게 따듯하기만 한 하인, 가족들 품에서 밝게 자란 어린 왕자의 멘탈을 박살 내기엔 차고 넘치는 환경이긴 했다.
샬롯은 눈앞에 펼쳐진 먼지투성이 대전과 텅 빈 왕좌를 잠시 눈에 담더니, 슬픔과 회한, 분노 언저리의 감정이 고인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전하께서는…. 깨지기 직전의 그릇과 같다.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세상이 그분을 짓눌렀지. 비록 나의 부족함으로 그분께 청을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긴 했으나…. 부디, 바스러지기 직전인 그분의 마음이 더는 상하지 않도록, 만민의 상처를 보듬는 성자의 모습으로 그분을 대해주었으면 한다. 이것은 그대의 전우이며, 로드릭의 사령관인 동시에 지킬 것이 얼마 남지 않은 기사의 부탁이다.”
“성자로서 대하라. ‘성자’로서…. 예, 참고합지요.”
내가 단언하자, 샬럿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먼지투성이 왕좌 뒤쪽의 장식을 돌렸다.
드륵.
그그극, 그그그그-
오래된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마법의 흔적과 돌이 갈려 나가는 소리.
“전하께서는 이 안에 계신다.”
로드릭 왕궁의 비처로 향하는 길 앞에,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안내하려는 샬롯의 어깨를 붙잡았다.
“샤를롯 데 아가트경. 좀 전에 사령관이자 기사이며 전우로서 내게 부탁하셨지요? 그럼 나도 부탁 하나만 합시다. 광명 지원군 사령관이자 구세의 성자라 불리는 사람이며, 한때 당신과 믿음을 나눈 전우로서.”
“….말하라.”
“저 안에서 내가 시오드 4세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마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예. ‘어떤’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약속해주시지 않으면 저도 로드릭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왕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관여하지 말라.
기사로서 신념과 맹세에 정면으로 반하는 부탁에, 상실과 고집을 담은 샬롯의 주황빛 눈이 내 속을 꿰뚫어 보듯 마주하였다.
‘대인기피, 공황장애, 몇 안 남은 보호자마저 거부할 정도의 심각한 혈액 공포증. 뭐가 됐든 스스로가 억제 안 될 정도의 증세로 표출되는 시점에서 부드러운 말로 어를 단계는 지났다.’
무슨 무슨 ‘증’이라 이름 붙은 순간부터 그것은 개인의 의지나 덕담, 몇 시간짜리 상담으로 쉽사리 해결되는 단계가 아니다. 정신적 외상은 그리 쉽게 치유되지도, 떨쳐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경험으로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어르고 달랜다고 낫는 것도 아니지.’
놔두면 자연스레 낫는 상처가 있는가 하면, 놔둘수록 주변 살을 파먹으며 곪아가는 상처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아는 방법이란 ‘박교수’라는 환자를 토대로 확인된 한 가지.
‘도려내고, 깨고, 부순다. 결국 알이 깨지지 않으면 새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경험에 의하면. 그 과정은 심한 충격과 고통을 동반한다.
성자답게. 나는 그녀가 부탁한 것을 충실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지금껏 내가 성자로서 행해왔던 일들처럼, 철저히 ‘성자 교수’의 행동원리에 입각하여, 부숴버릴 것이며.
시오드 4세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거나, 더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한 손은 검 손잡이 위로. 다른 손은 비밀 문의 레버 위에 올려놓고 갈등하던 샬롯은, 갈등 섞인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내가 시험에 들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시험에 들게 할 테니 참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자네는 막무가내로군.”
“방금 그 말로 ‘교수를 아는 사람’ 의 선을 넘으셨습니다? 우리 서클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샬롯. 세상이 모르는 성자의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셨군요.”
“….‘교수를 아는 사람’ 모임이라. 썩 좋은 어감은 아니군.”
“오우. 벌써 오트만을 이해하는 단계까지.”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뒤로, 로드릭 제 1기사의 푸념 섞인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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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왕의 기사, 사를롯 데 아가트와 광명의 성자 교수가 전하께 알현을 청한다.”
“죄송합니다, 아가트 경. 전하께선 지금은 그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나이트 렌다스, 나이트 발쿠르드. 설마 내가 전하의 명령을 잊어서 여기까지 다시 왔겠는가. 길을 열어라. 반드시 전하를 뵙고 할 말이 있으니.”
“안 됩니다 아가트 경. 우리는 왕의 기사이며, 그것은 왕명이 우리 삶을 정의함을 뜻합니다.”
“나이트 발쿠르드!”
“로드릭의 국기가 땅에 떨어진 지금, 그분의 기사마저 왕명을 어기게 되는 순간이 진실로 로드릭 왕가가 사라지는 순간임을 왜 모르십니까! 당신을 존경하지만, 더 접근하신다면 전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챠앙!
샬롯의 진심 어린 설득에도 꿈적도 하지 않던 기사는 등 뒤의 창까지 뽑아들며 그녀와 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 샬롯 같은 머리 좋고 전략에도 해박하고 능력도 좋은 말 통하는 기사랑 같이 있어서 잠깐 착각했는데, 저게 원래 기사다. 고집과 독선이 뭉치다 못해 그걸 힘으로 휘두르기까지 하는 돌탱이들.
샬롯이 기사의 거친 반응에 한발 물러나자, 나는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샬롯? 약속…. 기억하죠?”
“….그대도 내 부탁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아아, 그거. 성자답게. 음 그렇죠.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참, 특A급 히어로 유닛은 통찰력도 좋으시지. 어쩜 지금 제일 필요한 부분을 콕 찝어서 부탁하셨을까.
성자답게. 음, 성자답게 좋지.
“하하하하. 라투라, 형제님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광명에서 온 성자, 교수라고 하옵니다.”
샬롯이 뒤로 물러나고 내가 나섰지만 기사들의 창끝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씀은 많이 들었소. 여러 기적을 행하며 무수히 많은 민중에게 성사(聖事)를 베푸셨다지.”
“무례를 용서하시오. 설령 성자가 아니라 로 하람 본인이 강림하였다 한들, 우린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어길 생각이 없소.”
“하하하하하하. 그렇군요. 전하를 향한 형제님들의 굳은 마음, 분명히 새겨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본디 성자가 하는 일이 갈등을 풀고 평화를 전파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마 여기서도 제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이해해줘서 고맙소. 나 또한 아가트 경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
뻐어어어어어어어억!
“-하하하하하하. 라투라, 형제님.”
기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합장한 상태 그대로 뻗어 나온 성자의 주먹이 입에 틀어박혔다. 실로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었으며, 좁은 통로 벽에서 스르륵 무너지는 기사의 모습에 옆에 있던 기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광명은 로드릭 왕가를 이토록 무시하는 것인가!”
“하하하하 그 무슨 섭한 말씀을. 우리 모두의 의지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이 아닙니까? 두 분 기사님은 끝까지 왕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고. 저희는 그런 두 분을 잠시 재우고 전하를 뵙게 되고. 양쪽 모두에게 완벽한 결론이 아닙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
“이이이! 아가트 경! 이곳은 내가 어떻게든 버텨볼 터이니 바깥의 기사들을 불러주시오! 광명의 성자가 전하를 습격하려 하고 있소!”
“크, 크흠! 나, 날씨가 좋군….”
“….아가트 경?”
기사 발쿠르드가 생전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거라 여긴 샬롯의 헛소리에 당황하는 사이, 이미 마스터급 기사 따위는 한참 초월한 성자님이 그의 지근거리까지 파고들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툭 툭.
“형제님.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얼마 안 걸립니다.”
“전하!!!! 피하십시오! 전-!”
우득!!
오러의 보호를 받는 기사의 목도 그 유압장치 같은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성자의 웃는 낯과 함께 기사의 목을 감싼 성자의 팔뚝에 힘줄이 솟아오르고, 마지막까지 왕의 안위만 생각하던 기사의 몸이 차가운 비밀통로에 나뒹굴었다.
철그럭- 쿵!
이것 또한 왕을 위한 일이라,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고 있던 기사 샬롯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서, 성직자가 되었다고 들었다만….”
“음? 아, 그러고 보니 샬롯이 기억하는 저는 투란에서의 허약했던 모습이죠? 하하하하. 성자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육체적인 면이 중요하더라고요. 아, 둘 다 그냥 기절했을 뿐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성자 아닙니까, 성자! 성자가 힘 조절도 못 하면 어디 가서 성자라고 명함이나 내밀겠습니까.”
“어, 성자가, 힘을 그, 음….”
샬롯은 문장으로 성립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교수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당장 눈앞의 옛 전우는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성자였다. 광명은 물론 다른 교단의 신자들마저 인정한 이 시대 최고의 종교인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종교에 무지한 기사의 상식과 달리 광명의 성직자들은 육체적 수양에 매우 엄격한 모양이었다.
“….광명의 지원군은 내 생각 이상으로 도움이 되겠군.”
“예? 아, 뭐. 그렇죠. 아이구, 피 튀었네. 전하께서 피를 무서워하신다니 이것만 좀 닦고 들어갑시다. 어디 보자. 내 옷에 닦으면 안 되고, 어디 천으로 쓸만한 게…. 아하!”
끼기이이익! 끄그으으으윽, 끼익!
탱 탱그랑-
“…..”
쓰러진 기사의 갑옷을 맨손으로 찢어 그 안의 내의를 찢어내는 모습을 보며 샬롯은 아주 조용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시험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으으음….’
피를 닦은 뒤 흥얼거리며 문으로 향하는 교수의 뒷모습에, 샬롯은 ‘여차하면’의 기준을 조금 많이 낮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덜컥!
“으아아아! 오, 오지마! 오지마아아아!!!”
챙그랑! 텅! 후둑, 촤르르르!
교수가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유약한 소년의 음성. 그리고, 발악하듯 날아드는 그릇, 촛대, 서적과 같은 물건들.
“전하, 나이트-”
“나, 나를 죽이러 왔구나! 기어이 내 아버지와 형제들에 이어, 내 기사와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끝내 나와 어머니마저 죽이러 온 것이야! 으아아아! 사라져! 사라져! 으아아아아아!”
“….나이트 샤를롯 데 아가트, 광명의 성자 교수와 함께 전하를 뵙습니다.”
아마 바깥의 소음이 그를 자극했을 것이다. 지난번과 달라지지 않은 그의 모습에 샬롯이 침음성을 삼키며 무릎을 꿇는 사이.
“아이고, 성미도 고약하셔라. 광명에서 온 교수라고 합니다. 그…. 제가 종교적인 이유로 로 하람 외의 다른 이를 섬길 수가 없어서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왕에게 경의도 표하지 않은 채 그녀 곁을 횡 하니 지나쳐간 교수가 어린 왕에게 물었다.
“교수! 전하의 어전이다! 어서 예를-”
“아니, 나도 어전인 건 아는데 저쪽이 나를 암살자라고 하잖습니까? 로드릭의 왕께서 친히 그분을 죽일 암살자로 나를 지목하셨는데 그걸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자아, 폐하. 준비되셨습니까? 난 됐는데.”
“오, 오지마! 샬롯! 이, 이 미친 자가 가까이 오지 않느냐!”
“가까이 가길 원치 않으십니까? 그래도 왕인데 뭘 던져서 터트리는 건 좀 아닐 것 같아서 그랬는데. 아하! 이거 쓰라고 던져주셨던 거구나?”
왕의 비명과 혼란에 빠진 샬롯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교수는 발치에 흩어진 물건들 중 쓸만한 촛대를 차올린 다음,
“교, 교수! 멈춰라! 당장 멈춰!!”
“-흐으읍!”
-파아아앙!
그대로 왕의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채애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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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 티딩, 팅-
깨진 청동 촛대가 돌바닥에 나뒹구는 소리.
“허억, 허억, 도가, 지나치지 않나!”
가까스로 뛰어들어 그것을 막아낸 기사의 숨이 헐떡이는 소리.
“힉, 히끅, 흑! 피, 피가, 피가아아!”
겁에 질려 헐떡이며 파편에 스친 뺨에서 흐르는 피를 허겁지겁 닦는 어린 왕. 그리고-
“아이, 그걸 막으면 어떡합니까? 왕께서 시키신 일인데.”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한번 던질 물건을 주워드는 성자.
“못 들으셨습니까? 분명 시오드 4세께서 우릴 ‘나, 나를 죽이러 왔구나!’ 라고 말씀하신 거. 왕께서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아, 이게 좋겠네.”
“분명 나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라고 했을 텐데. 두 번은 없다. 다음 공격은, 왕의 기사로서 대응하겠다.”
“참…. 내가 이럴까 봐 밖에서 약속까지 하고 들어왔는데.”
“전하께서는 지금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다리가 부러진 환자에게 두 발로 뛸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투화악!
“얼씨구. 오러? 자신 있으십니까? 나 몇 달 전에 혼자서 에데오르나도 제꼈는데? 기억나시죠? 그 하얀놈.”
“….기사는 승패를 계산하고 칼을 들지 않는 법!”
화르륵!
샬롯의 검과 갑옷이 여명을 닮은 오러를 뿜어내고, 마주한 교수의 주먹에 신성과 뒤얽힌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드드드드드드-!
후둑, 후두두둑!
종의 정점에 가까운 두 존재의 기세가 마주한 여파에 왕의 비처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 교수가 손에 든 나무 그릇을 들어 올리고, 샬롯의 칼끝이 그의 목을 향하는 순간.
“아, 아아아알현을 허, 허하겠다아아아!!!!”
눈물, 콧물에 두 기세의 여파로 침까지 질질 흘리던 시오드 4세의 목소리가 비처에 울렸다.
“지, 짐이 착각하, 하였다! 너넏너는 서,성자다! 아암살자가 아니라, 성자! 광명의 성자 교수로서 이곳에 차, 찾아오,온 것이 맞으니, 예예예예를 갖추고 왕을 알현하,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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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으우우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어깨. 오기 전에도 한참 울었는지 퉁퉁 부어있는 눈에, 매달리듯 샬롯의 등에 바짝 붙어있는 소년 왕, 시오드 4세.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조금 전까지 성을 뒤흔들 듯 기세를 뿜어내던 성자는 왕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거두더니, 나무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두 손을 모았다.
“알현할 영광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시오드 4세 전하. 저는 광명의 신, 로 하람을 모시는 그분의 도구, 성자 교수라고 하옵니다. 하하하하.”
“그, 그래. 마,마,만나서 반갑구나. 지, 짐은 에르빈 튀르 시오드. 로, 로드릭의 왕이다.
“하하하하. 에르빈 튀르 시오드 전하. 그렇군요. 음. 과연 고귀하신 분이라 이름 한번 듣기가 참 힘듭니다. 하하하하.”
손바닥 뒤집듯 바뀐 분위기와, 선왕의 서거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성사된 적이 없던 왕의 알현.
“이거, 에르빈 전하께서 뛰진 못해도, 걸을 수는 있는 것 같은데요?”
갑작스레 일어난 일들에 검을 거두지도 못하고 있던 샬롯은,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거리는 교수의 말에 검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시간을 마, 많이 줄 수가 없구나.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를 찾아왔….느냐?”
“아이고, 이런! 국부(國父)께서 몸이 안 좋다니, 성직자 된 이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말씀이십니다. 나름 곳곳에서 치유의 성사를 펼친 의료전문가로서 말씀드리건대, 이렇게 침침하고 갑갑한 닫힌 공간에만 계시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얘기는,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시면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전하의 건강을 위해.”
“바, 밖….에 말이냐?”
“예. 지금 당장.”
툭- 데구르르!
성자가 내려놓은 나무 그릇이 그의 발끝에 채여 왕이 있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방금 그것이 성자의 손에서 어떻게 사용되려 했는지를 기억한 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며.
여전히 어린 왕의 앞을 지키고 있는 샬롯은 알현에 이어 왕을 밖으로 이끈 성자의 실력에 감탄해야 할지, 왕을 협박한 그의 수단을 비난해야 할지 종잡지 못하고 있었으나.
“….모시겠습니다. 전하.”
“그, 그래. 내 곁에서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바, 반드시!”
그녀 또한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기에,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온갖 상념을 꾹 눌러 담으며 어린 왕의 옷을 추슬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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