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59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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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같은 왕의 비처에서의 소란이 지난 뒤, 그들이 향한 곳은 발코니였다. 높은 성에서 도시의 광경을 훤히 볼 수 있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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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덜컹!
“의약품! 의약품은 어디 내려놓았습니까!”
“의약품 보다 건축 자재를 먼저! 북동쪽 성벽 일부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최소한 목책이라도 세워두지 않으면-”
히히히힝! 푸르륵!
“방금 그것은 말 울음소리가 아닌가! 보급품에 말이 있다면 당장 내어오라! 기사단에서 인계받겠다!”
“병기창에서 왔습니다! 당장 뭐가 부족한지 모르니 보급품 목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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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멀리 떨어졌음에도 난간을 넘어 성안으로 드는 소란에 성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늘에 숨어있는 왕에게 손짓했다.
“나와서 바람이라도 좀 쐬시지요?”
“돼, 됐느니라. 나낟난, 이, 이곳이 좋구나….”
“….전하께서 그러시다면야. 그럼,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시지요.”
“무, 무얼 하려고….”
콱! 콰악!
왕은 먼 발치에서 귀를 막고 이쪽을 노려보는 샬롯과 성자를 번갈아보다, 거짓말처럼 왕성 벽을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뭐. 거기가 좋다고 하시니, 그 자리에서 볼 수 있게 해드리려는 겁니다.”
“그, 그것은 로드릭의 유구한 역사가 담긴-”
“흠!”
콰드드드드득! 쿠드득! 드드드득-
….쿵.
“-여, 역사가 담긴 왕성의…. 벽인데….”
“뭐, 벽은 많지 않습니까? 하나 정도는 이렇게 탁 트여있는 것도 좋지요. 마침 방향도 딱 남향이니 날이 좋으면 여기서 티 타임이라도 가지면 되겠군요.”
어린 왕, 시오드 4세는 그의 눈앞에서 온갖 마법적 가호가 걸린 왕성 벽을 맨손으로 허물어버린 몰지각한 성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가, 탁 트인 전망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 찢어진 커튼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덜덜, 덜덜덜덜!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눈가에 남은 잔상만으로도 이 꼴이다.
기억 속 아름답고 명예로웠던 킹스랜드에 붉은 물감을 뿌리고 마구 짓밟은 듯한 그 모습을 본 순간, 겨우 끌어올렸던 티끌만한 용기가 먼지처럼 사라지며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렸다. 떨림이 멈추지 않아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왕. 이 얼마나 부끄럽고, 꼴사나우며, 치욕스럽단 말인가.
시오드 4세는 몰락한 도시를 등지고 그를 내려다볼 성자를 떠올리며 분루를 삼켰다.
‘여, 역시 성자는 짐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다. 어, 어쩌면 짐을, 이 나라 마지막 왕을 시해하기 위해 따로 끌어들였을 수도! 그, 그래서 샬롯을 내게서 떼어놓고 독대(獨對)를 청한 것이야!’
어째서 저자의 말을 믿었을까. 왕의 말이라면서 왕성 전체를 진동시키던 힘을 싹 거두어서? 아니면, 성자가 내건 미끼가 너무 달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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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독대? 그, 그대와 짐이 말인가?”
“전하, 제가 독대를 요청한 것은 왕실의 명예를 위해, 국가의 대사를 논함에 있어 외인을 들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며, 전하께 드릴 말씀만 끝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전하를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할 수 있겠는가!”
“광명의 성자의 이름을! 아니 존경하고 위대하신 로 하람의 이름을 걸고 약조 드리지요! 그럼 전하께서는 다시 평화롭고 아늑한 비처에 들어가 계실 수 있는 겁니다!”
“조, 좋다! 국가간 대사를 논함에 기밀을 요하는 것 정도는…. 나, 납득할 수 있다!”
“….전하. 적어도 저 하나 만이라도-”
“아, 샬롯이 듣고 있으면 얘기 못합니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겨, 경은 내 눈에 보일 정도로만 멀리 떨어져 귀를 막고 있으라. 내가, 짐이 왕으로서 자, 잘 풀어 보일 터이니….”
“….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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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나갔던 것이 틀림 없었다. 성자의 현란한 말과 다정한 표정에 속아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내려버린 것이다! 애초에 그런 자가 왕과 독대를 해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리석다. 나는 너무나도 어리석구나!’
결국 성자가 원하는 모든 환경이 갖추어지고 말았다. 로드릭의 왕은 먼지투성이 커튼을 뒤집어쓰고 새끼 사슴처럼 떨고 있으며, 백일하에 드러난 그 모습을 성자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위를 푸딩처럼 으스러뜨리는 저 손아귀가 그의 머리를 붙잡아 터트릴까? 코로 뇌수가 흐를 정도로 으스러뜨린 다음 성자의 신성력으로 치료하기를 반복하며 고문할까? 이제 이름만 남은 왕의 허명을 광명을 위해 쓰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야 할까?
왕은 비록 귀는 막았으나 이곳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을 그의 기사와, 바로 몇 분 전에 왕의 비처에서 있었던 성자와 샬롯의 대치를 떠올렸다.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울리는 것으로 유명한 성자.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충직한 기사 샬롯. 그리고, 보란 듯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무력시위.
에르빈은, 닥쳐오는 공포속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바스락, 툭.
저벅 저벅-
가려진 시야 대신 귀가 공포를 전달했다. 커다란 발이 부서진 벽의 잔해를 밟고, 한때 명예로웠던 복도를 걸어 그를 향해 다가왔다.
“….피가 무서우십니까. 아니면 피가 흐르는 상황이 무서우신겁니까.”
“….끅, 흡.”
“당신께선 왕이 아니십니까? 그들과 함께 전장에 설 수는 없으나, 그들이 피흘려 지켜낸 땅을 둘러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두려우시겠지요. 슬프고 답답하겠지요! 누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제가 다~ 이해합니다! 이해하지요! 그래도 힘내서 일어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왕인데!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전하가 계신 왕성을 쳐다보지 않습니까!”
예상과 달리 그의 머리위에 내려앉은 것은 가벼움을 털어낸 성자의 진지한 목소리 뿐이었으나, 그 단어들은 칼이라도 달린 것처럼 날을 세우고 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배려라고는 없는, 부탁의 탈을 쓴 날 선 질책.
꾸우욱!
정신을 잃고 날뛰는 어머니를 몇 시간이나 달랜 뒤, 지친 몸으로 조용한 비처의 구석에서 홀로 떠올렸던 말들. 이러면 안되지. 나도 로드릭 왕가의 일원인 만큼 이렇게 숨어 있어선 안 되지, 하며 떠올린 말들이 성자의 입에서 고스란히 쏟아져나왔다.
“고, 고작 나 따위가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울컥!
상상과 달리, 실체를 가지고 타인의 입에서 나타난 그 말들은 상상보다 훨씬 아프고 날카로웠으며. 그러다보니 바늘에 찔린 듯 가슴 깊숙한 곳을 차지하고 있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와 버렸다.
“….전하.”
“그, 그대 말이 맞다. 나, 나는 무능하다. 다른 누구보다 기사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던 아바마마, 그 이름을 이어받기 위해 태어난 듯 용맹하던 형님들과 달리 나는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그분들과 달리 검 하나 제대로 들 수 없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
“하, 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날 위해 피 흘리라 명령한 적이 없다! 내가 한 것이라곤, 고작 아무 일 없을 것이란 유모의 말만 믿고 잠이 든 것 뿐이란 말이다!”
너무 울어 갈라진 목에서 흘러나오는 새된 목소리. 이것이 구차한 변명임을 알지만, 말 한다고 달라지는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지만, 감히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도 못한 자가 조언이랍시고 한 말은 갈곳 잃고 속으로 맴돌던 그의 속내를 몰아세우기에 충분했다.
“새벽과 같이 아바마마의 부고가 찾아왔느니라!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큰 형님이 그 뒤를 따랐고, 작은 형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돌아가셨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갑옷 덕분에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목이 잘리고, 시체는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찾지도 못했지!”
“로드릭 왕가의 비극은 참으로-”
“모두 마지막 인사 한번 나누지 못했어!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데, 지금이라도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깰 악몽 같은데! 이젠 울부짖는 어머니 하나만 남은 내게 왕의 자리가 제 발로 걸어왔다. 마치 다음 차례는 나라는 것처럼!”
“전하!”
무엇을 안다고 내게 왕의 의무를 강요한단 말인가. 가지말라고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한 형님이, 전설 속 용사처럼 성벽 위를 종횡하던 형님의 목이 떨어지고, 몸은 추락하며, 남은 머리만 성벽위에 과일처럼 구르던 그 장면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고작 성자라는 허명 하나만 가지고 나를 이해한다는 듯, 그럼에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말하냔 말이다! 감히! 감히!!!!
“나는 단 한번도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겨우 나 따위가 무엇을 다스리고,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이냐! 나 따위가! 검 하나 들지 못하는! 나는 망국의 왕인 나를 위해 저들이 죽길 바라지 않으나, 이미 나는 그들의 왕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가, 그들 모두의 희망인 ‘시오드 4세’로! 나를 왕이라 부르는 이들의 선망 어린 시선이 두려운 나머지 성에 틀어박혀 이렇게 고개도 들지 못하는 내가! 내가, 어떻게 저들의…. 그 누구보다 명예로운 이들의 왕이 된단 말이냐….”
허억, 허억, 허억….
동화속 주인공이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본심을 우물안에 털어놓듯, 두터운 커튼 아래 웅크린 왕은 들어줄 이가 모두 사라져버린 본심을 발작하듯 털어놓고 말았다.
‘….끝이다.’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본심이 토사물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유약하고 볼썽사나운 마음. 할 수 있다면 도로 주워 담고 싶은 말 들.
저 명예로운 이들이 끝까지 목숨바쳐 지키겠다 맹세한 이가 고작 이따위 인간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제 입으로 ‘왕 따위 되고 싶은 적도 없었다!’ 라고 말하는 왕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독대를 하길 잘했구나. 샬롯은 여전히 귀를 막고 있을테니,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터.’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샬롯이다. 그녀의 얼굴이 경멸로 일그러지는 것을 상상하면, 차라리 나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랬다면, 최소한 로드릭 왕가는 마지막까지 명예로운 이들로 기억될 테니까.
“후우우우.”
깊고 낮은 한숨소리. 실망했겠지. 성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를 불렀든, 이젠 아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부끄러웠지만,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 흘러내린 눈물은 그 눈물이 수치스러워 다시 흘러내렸다.
“전하.”
“….윽, 끅! 흑….”
“….야. 에르빈.”
“….흐극?!”
“어차피 우리 둘 말고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형이 말 좀 편하게 한다?”
쫘아아악!
그리고. 에르빈이 필사적으로 매달린 두터운 커튼이 종이처럼 찢어지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우, 진짜 성격에 안 맞아서 뒈지겠어 아주 그냥. 못 해먹을 짓 이네, 이것도. 어이, 좀 괜찮아? 자극이 너무 심했나?”
“흑, 으…. 어?”
“어이구야, 일단 얼굴 좀 닦자. 뒤에 다 터놨는데 이 얼굴 한번 보여주면 바닥난 사기가 아주 땅을 파고 내려가겠어 아주.”
북 부욱 북북!
“윽? 어?? 우윽, 윽????”
어린 왕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와 그의 얼굴을 마구 문지르는 커튼에 정신을 못차리다 간신히 눈을 떴다.
찢어진 커튼 사이로 드러난 성자의 큼지막한 얼굴은, 식초라도 들이킨 것처럼 마구 찌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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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진짜 못 해먹겠네 시바.’
황무지에서 살다보면, 만나는 사람의 90%는 각자의 이유로 마음을 닫아 걸어둔 사람들이다. 당장 우리 47구역 대화방도 지금이야 허물없이 지내지만, 초창기에만 해도 뭔 말만 걸었다 하면 ‘왜, 그런 식으로 우리 집 좌표따서 털어먹게?’ 하면서 날을 세우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게 있다. 가령, 이런 식으로 혼자 속알이 하는 예비 성격파탄자들을 상대하는 법이라거나.
‘일단 다 털어내게 해야지 뭐.’
보통 이런 놈들은 상황과 개인사가 지랄맞게 엉켜서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조개처럼 입 꾹다물고 제 얘기는 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친애하는 메탈죠께서 말씀하시다시피. 폭탄은 해체하는 것보다 그냥 뻥 터트리는게 훨씬 간편하지 않은가.
‘속을 살살 긁으면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털어놓더라고.’
안 그래도 혼자 품다못해 빵 터질 지경인 놈들이니, 아예 그 기름통 같은 속에 불씨를 던져 불을 토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씨발 니가 뭘 안다고-’ 로 시작하는 장황한 개인사 레퍼토리가 끝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연소해버린 상대는 구멍난 바람인형처럼 축 늘어지고. 그 때가되면 이제 상담을 하든, 빈 속에 뭘 채워넣든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좀전에 우리 전하, 에르빈씨에게 일어난 일들도 다 그런 과정의 일환이고.
‘벡스가 이걸 보면 내 가죽을 벗기려 들겠군.’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가혹한 방법이기도 했다. 황무지에서 몇 년을 살면서 뇌와 양심이 닳아버린 놈들끼리나 좀 어떻게 되는 방식이지, 제정신 박힌 정신과 의사라면 열한 살 짜리가 제 손으로 흉터를 마구 헤집어 드러나게 만들지 않거든. 열한 살이면 초등학교 4학년이다, 4학년. 완전 꼬꼬마.
하지만. 이건 클리어에 필요한 일을 떠나, 인간 박교수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에르빈. 그거 아냐?”
“무…. 무엄하….다….”
“무엄은 너한테 남아있는 위엄이 있을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10초 전까지 콧물 짜면서 바닥에 굴러놓고 무엄(無嚴)은 얼어죽을.”
“그, 그건-”
“….너, 이제 살면서 이렇게 반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없다.”
“으, 어?”
“백성들에게는 국부로서. 귀족에게는 가장 높은 직위의 귀족. 기사에겐 주군. 다른 왕들에게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기에, 스스로가 존대받아 마땅하기에 존대할 존재. 이제, 네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거의 없다는 뜻이야.”
“그러….하구나. 나는, 아무 생각없이 대할 수 있는 이들을…. 거의 다 잃어버렸구나.”
“그러니까 많이 들어두라는 거지. 약속대로, 이번 독대가 끝나면 나도 앞으로 볼 일이 없을테니.”
알려줘야만 할 것이 있어 이렇게 몰아붙였다.
멍하니 충격에 빠진 에르빈의 얼굴이 참 익숙했다. 저 말랑말랑한 머리통 안에는 무슨 생각이 가득 차 있을까. 무섭다? 킹스랜드? 왕? 뭐 그런 것들?
“….왜 나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아버지는 왜 불합리한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형님들은 왜 저 죽음의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가야 했는가. 왜 죽어야 하나. 왜. 왜. 왜? 이거 맞지? 이런 생각 해봤지? 아니, 지금도 하고있지? 그들을 잃어버린 뒤로, 계속?”
“그으…런….”
“가르쳐줄까?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이 성자님의 공신력있는 말 한번 들어볼래?”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에르빈은, 그대로 딱 굳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 그런 생각이 안들겠어. 문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뒤집어졌는데.
왜. 도대체 왜 씨발 나의 가족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했나. 그렇게 의미없이 허무하게.
흠흠. 중요한 얘기이니 숨 한번 가다듬어주고.
“개인적인 연구와, 수년간의 자학, 자해에 가까운 사고를 통해 얻어낸 성자 교수님의 결론에 의하면-”
….꿀꺽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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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별 이유 없어. 그냥 어쩌다보니, 다들 그렇게 죽어버린 거라고.”
뭔가 거창한 해답을 기다리던 어린 왕은, 농담하듯 낄낄거리는 성자의 대답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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