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67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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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애액-
쿠웅!
“어디보자….”
그 시각. 성벽 위에서 두어번의 도약만으로 성에 도착한 교수는 쾨른 영주성의 아성 중 하나의 지붕에 착륙해 도시 전경을 둘러보고 있었다.
“….잘하면 진짜 뚫겠는데?”
성기사들에게 내 템포 맞춰서 후딱 따라붙으라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진짜 정문에서부터 영주성까지 만 명 단위의 쾨른 병력을 뚫고 올라오리라 기대는 안했다. 서부전선 최고의 요충지, 온갖 히어로 유닛과 마스터나이트, 기사급으로 숙련된 베테랑 병사들이 개미때처럼 바글바글 몰려올 텐데 아무리 교단 최고의 성기사 들이라고 해도 그걸 비살상으로 뚫고 올라올 수 가 있나.
중요한 것은 소란. 차례로 흩어놓고 하나씩 요리할 생각이었던 성자 측 인원들이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밥상을 뒤엎고 ‘무력 시위’를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필요했다. 갑옷도 하얀색에다 광명답게 번쩍거리는 기사들이 [계도하라! 계도하라!] 같은 소리를 외치며 달려드는데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고. 당장 병사 수천명이 성기사 두들기는 소리가 꽹과리 소리마냥 온 성안에 울리고 있는데.
아마 지금쯤 쾨른 성의 사령관들은 ‘이, 이게 아니지 않았소!’ 같은 소리를 하며 저들끼리 뭘 어떻게 해야할지 한참 떠들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럼 어차피 못 뚫는다고 생각 하면서 따라오라고 한거야? 소란이나 일으키다 의미없이 죽으라고?]‘내가 미쳤다고 저 귀한 전력을 그렇게 소모하겠냐? 쟤들 어차피 안 죽어. 뚫지 못한다 뿐이지, 고작 마스터 나이트랑 병사 몇만 정도로 죽일 수 있는 놈들이 아냐.’
저들에게 따라붙으라 명령한 것은, 어디까지나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대사막에서, 정예 뮤트만 바글거리는 그 모래 바다에서 고작 몇 백명으로 전선을 밀리지 않고 오히려 밀어내던 저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나.
강철을 썩은 무처럼 숭덩숭덩 썰어버리는 3급 뮤트의 발톱을 그냥 투구로 들이받으면서 메이스를 휘두르기도 하고, 대형 뮤트의 입에 잘근잘근 씹히면서도 왁왁 거리면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겨우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싶으면 누군가 외치는 ‘라투라!’ ‘광명이여!’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서 또 달려들기 일쑤였다.
애초에, 직격이 아니라곤 해도 드래곤 브레스의 여파를 맞고도 살아나온 사람들이다. 드래곤 브레스가 어떤 기술인가? 한번 떨어지면 그 근처 마나의 구조 자체를 뒤틀어 영구적인 환경 변화마저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닌가?
아마 그때 대사막의 전장이 되었던 곳은 지금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불길이 치솟는 무시무시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가 끌고 온 성기사들은 그런 지옥에도 적을 상대하며 살아나온 초인이란 말이다.
‘사람을 산채로 튀겨버리는 모래바다에 뛰어들어서는, 존나 멋들어진 접영으로 푸왁푸왁 하더니 내 앞에서 무슨 연어처럼 모래 위로 튀어 오르더라고. 갑옷에 막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데 ‘괜찮으십니까, 성자님!’ 하는 그레고리우스를 보고 아, 이 새끼들은 어디 내놔도 그냥은 안죽겠구나! 싶더라고.’
[아, 그거 기억난다. 풀 플레이트 메일에 통짜 타워실드까지 등에 맨 상태였지? 그 사람 수영 잘하더라. 아니, 사영(沙泳)인가?]‘뭐가 됐든 저 성기사들이 공격력은 몰라도 방어력 만큼은 나랑 비빌만한 놈들인 건 확실해. 그래서 저 인간들을 쾨른 성에 던져놓으면 아주 오~래, 시끄럽고 눈에 띄게 소란을 일으켜 줄 거라고 생각해서 따라오라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잘 뚫고 올라오는 게 아닌가?
“….새끼들. 어지간히 해쳐먹은 게 아니었구만?”
잠깐 이게 뭔가- 싶었는데, 지금 우르르 몰려가는 병사들 갑옷만 봐도 딱 답이 나왔다.
고래고래 윽박을 질러대는 기사들과 몰려가는 병사들. 그들의 새것처럼 반짝이는 갑옷.
반면,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기사를 마주했으나 시큰둥한 병사들. 우그러지고 긁힌 자국 투성이인 그들의 갑옷.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가 어디 출신 병사들인지 훤히 보였다.
‘심지어 같은 갑옷이라…. 저거, 대충 갑옷도 없는 농노병 끌고 와서는 보급으로 나온 번쩍번쩍한 새 갑옷으로 전부 무장시켰군.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알뜰살뜰하게 제 잇속만 챙길 생각이었던 거야.’
그 결과가 지금 이런 모습이다. 같은 도시 내에서조차 분열된 군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로드릭 병사들의 모습에 기사 하나가 칼을 뽑아들자 영웅으로 보이는 이가 그 앞을 막아서는게 보였다. 왜 안그러겠는가.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오지 않는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자주 동원된다는 뜻이고. 이는 마찬가지로 매 전투마다 참여하는 영웅들과
‘자네 아직 살아있었나?’
‘헤헤, 저어-기 높은 성에 계시는 분들과 달리 이 쓰레기통에서 나뒹굴어 주신 용사님들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할 정도로 얼굴을 자주 보게 된다는 뜻이다. 더욱이 매번 전장에서 피 뒤집어쓰며 죽네 사네 하던 사람과,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 보급 호위니, 요인 경호니 같은 헛소리를 하며 성 안에 틀어박혀 잠이나 자던 놈들이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병사들에 이어 이곳에 모여든 히어로 유닛의 마음도 연합군 사령관들에게서 떠나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성으로 향하는 관도를 꽉꽉 매우다 못해 미어 터졌어야 할 수만명의 전쟁 기계 대신, 전쟁터에 1년이나 있었음에도 신병과 다를 바 없는 새 갑옷을 입은 귀족의 사병들. 그리고 엉거주춤한 그들을 윽박지르는 귀족의 기사들.
저거, 성기사들이 따로 무기를 휘두를 필요도 없어보였다. 대충 앞에 놈 힘껏 밀어주면 제 무기와 갑옷 무게도 못 이겨서 도미노처럼 우르르 넘어질 걸? 나머지 기사들도 뭐. 저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쌓아올린 오러라면 광명의 맹신으로 무장한 성기사들에게 흠집 하나도 못 낼 것이다.
쾅! 쿠과과과과광!
“어이쿠. 이거 넋놓고 있으면 저쪽이 나보다 먼저 성에 입성하겠구만. 성자님으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음.”
아예 타워실드로 쐐기 대형을 갖춰 마구 뚫고 들어오는 성기사들을 보니, 나도 이렇게 여유나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아 성을 향해 돌아섰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지금쯤 성에 계실 우리 귀족님들의 불안이 아주 탐스럽게 잘 익었을 터.
끝자락에 약간 피가 튄 새하얀 법복을 정돈하고, 주먹 마디 사이에 박힌 누군가의 부러진 치아를 뽑으며 ‘나름 성자 같은’ 매무세를 가다듬은 교수는, 아성 꼭대기에서도 들리는 사령관들의 고함소리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탁!
헤델른 성과 비슷하게 높은 곳에 위치한 귀족들의 회의장. 그곳의 발코니에 내려앉으니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훤히 보였다. 커다란 원탁에 빙 둘러앉은 각양각색의 귀족들의 모습은 헤델른에서의 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시끄럽고, 화가 나 있고, 서로 남탓이나 하고.
조금 차이가 있다면…. 시끄럽게 떠드는 놈들 말고 딱 봐도 군계일학 같은 늙은이 몇이 차가운 눈으로 귀족들을 관망하고 있는 정도?
‘아, 찾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들 중 찾던 얼굴을 확인한 교수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발코니 앞에도 귀족 여럿이 있긴 했지만 뭐. 굳이 신경써줄 필요는 없겠지.
콰앙!
콰장창창!
대충 걷어차인 발코니 문이 산산조각나며 그 앞에서 휩쓸린 귀족 몇이 피를 뿌리며 나동그라지는게 보였다.
벌떡!
“퐁파두 백작! 볼네리에 남작!”
“꽤애애액! 아, 아파! 아프다! 나 죽어! 죽어어어어!!!!”
“내, 내 가슴에 나뭇조각이 박혔잖아! 사제를 불러, 당장 고위 사제를 부르란 말이다!”
음~ 약간의 피 냄새에 돼지 멱따는 소리라. 오늘 내 역할에 참 잘 어울리는 시작이로군.
“사제! 사제를 데려와! 사제에에에!!!”
잠시 좌중의 시선을 만끽하던 나는 차마 그 애타는 부름을 무시할 수가 없어 허우적거리는 두 귀족을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마!”
“왜, 사제 불러달라면서? 이 옷 보면 모릅니까, 내가 이래뵈도 사제중에 사제. 광명 교단의 모든 성직자를 통틀어 가장 대단한 사제라니까? 거 가만히좀 있어봐요. 깔끔하게 치료해주게.”
“저, 정말이오….?”
“그러엄~? 존경하는 로 하람님의 존함앞에 맹세코.”
푸확!
“꽤애애애애애애애액-!!!!”
다만, 그 치료는 전장에서 야매로 배운 내 의료 지식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 뿐이지.
뱃가죽에 틀어박힌 나무 파편을 쑥 뽑아낸 다음 입고있던 비단 내의로 콱콱 쑤셔막아주었다. 원래 저정도 상처는 다 저렇게 처치한다고. 전장에서는.
타앙!
“이이…. 미친 자가! 겨우 우리가 동행해주기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전쟁중인 도시를 습격하고, 사령관들을 암습하는 것인가! 아무리 광명의 위세가 대단하다 한들 여기 모인 귀족들의 모든 국가를 적대하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파편과 함께 생살이 뜯겨나간 귀족의 비명소리가 회장을 울리는 가운데, 수염을 멋들어지게 말아 올린 귀족 하나가 원탁을 내리치며 나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짱 좋네.’
저저 눈알 굴러가는 것 봐라. 귀족은 이게 문제다. 세상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 정치적 계산을 배제하는게 불가능한 생물이거든.
아마 첫 등장은 공격적인 스텐스를 나타내기 위한 보여주기 정도이며, 당한 귀족의 소속 국가에 대한 강압적인 자세인 동시에 그렇지 않은 쪽 국가와는 얘기를 할 의향이 있다, 이 정도 계산을 하고 나섰을 것이다. 내가 내 뜻을 충분히 펼쳐보였으니 이제 공격성이 누그러들었겠거니- 하고 생각했겠지.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 먼저 목소리를 내어주면 높으신 분이 좋게 봐주시기도 하니까.
그런데 어쩌나. 나는 저쪽이 ‘귀족의 언어’를 말한다고 해서 ‘귀족의 귀’로 들어줄 생각이 없는데.
“이야아, 그것 참 큰 일이네요. 과연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광명 교단의 교세가 역대 최고라 한들, 이곳에 모인 모든 귀족분들과 그 국가를 적대한다면 참으로 암울한 미래가 펼쳐지겠지요.”
“크흠! 그렇지. 이제야 상황파악을 한 모양인데, 당신이 제 아무리 유명한 성자라고 해도-”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죽이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헤델른에서 그랬던 것처럼.”
“뭐, 뭣이?”
“그렇잖아요? 이미 난 일을 벌였는데, 그게 퍼지면 우리 광명의 형제님들이 고난을 겪게 된다잖아. 성자로서 어찌 그걸 보고만 있어서야 쓰겠습니까? 뭐라도 해야지.”
여기 있는 모든 귀족들은 각 국가의 명가라 할 수 있는 곳의 귀족들이며. 제아무리 내가 언변에 재주가 있다 한들 귀족 사교계에서 평생을 구른 노괴 십수명의 다굴을 맞고 말빨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말로 안 하면 되지.’
본디 외교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 외교(外交)의 근간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힘’이다.
힘. 파워. 권력, 경재력, 군사력 등등 뭐든 상관 없이, 상대와 마주한 자리에서 그것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힘. 이를태면 핵 미사일 같은 거.
힘의 논리. 저들이 귀족의 방식으로 나를 대하려 했다면, 나는 가장 원초적인 외교인 힘의 논리로 이들을 상대하면 되는게 아닌가.
“겨, 경비병! 기사들을- 커억!”
“자아, 이 전쟁통에서 그렇-게 관리가 힘들다는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가꾼 귀족님? 잘 들으세요.”
찌이익-
“으그악! 으와, 으와으어어!”
커다란 손아귀에 볼을 잡힌 귀족은, 그의 수염을 생으로 잡아뜯는 손길에 발버둥쳤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첫째로, 우린 미친놈이 맞습니다. 광명 교도라면, 로 하람을 위한 일에 세간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지 않는게 당연하지요. 신앙이란 잘 정형화된 공동의 광기와 같으니, 우린 미쳤습니다.”
찌이익, 찌지직
“아으으으으! 으와아아아아!!!”
“둘째로, 내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일단 본인은 교단 공인 성자입니다. 광명의 뜻을 가장 앞서 받아드는 존재로 그분의 손길이 닿았으며, 따라서 이 성자님에게는 ‘극존칭’을 써주셔야 합니다. 해라, 하오, 했소 따위가 아니라.”
찍 찌직- 뜨득 뜩 뜩 뜩
“아으에어오! 으아아! 아으! 자므해으어! 아아아아!”
“어허, 성자님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거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머리는 지금 심각할 만큼 악의 기운에 물들어 있다고 판단되기에, 본 성자는 악의 손아귀에 넘어가기 직전인 여러분의 말은 전부 무시할 생각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멋진 수염을 가진 귀족님!”
“아에으이아, 아에으이아아아아! 으으으, 으아아아….”
“음, 좋습니다! 역시 신성한 가르침의 효과가 보이는 것 같네요! 벌써 다 알아들이시고. 새 마음 새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수염은 밀어드렸습니다. 이것도 기념이니 가지세요.”
“사려, 사려주헤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염 뭉치를 돌려주자, 귀족은 한 손으로 인중을 부여잡은체 연신 살려달라는 소리만 되넬 뿐이었다.
‘그래. 그런 눈빛을 원했지.’
귀족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 그것은 ‘말이 안통하는 상대’다. 권력이고, 재산이고, 미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
그들은 이 많은 고위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피를 뿌리는 성자의 모습에서 그들의 이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빛의 맹아. 광명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들.
슬슬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분위기가 귀족들 사이로 퍼져가는 가운데, 그들의 간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는지 회의실 밖에 철컥 거리는 갑옷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금속음. 고함소리. 단단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화색이 돌아와서는 의기양양하게 내 쪽을 돌아보는 귀족들.
철컥-
후욱, 후욱, 스으으읍- 후우우우….
“라투라, 허억, 로 하람, 허억, 광명의 도구, 그레고리우스 및 성기사단! 성자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대하던 기사들 대신 핏자국이 선명한 하얀 갑옷들이 우르르 들어왔을 때. 교수는 이제야 비로소 이들이 ‘교단의 성자’와 대화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흠. 조금 늦으셨습니다? 도입부를 놓치셨군요. 그레고리우스 형제님.”
쿠웅!
“감히 성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바. 이 죄는 교단에 돌아가 가장 정명한 빛 아래 참회토록 하겠나이다.”
“참회는 무슨. 다소 어리석은 이들을 ‘계도’하느라 늦은 것인데, 그 또한 광명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아, 저기 쓰러진 사람들 좀 정리해 주시고.”
“라투라.”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성기사들은 차례로 흩어지더니, 각 귀족이 앉아있는 의자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들 중 하나가 쓰러진 귀족에게 치유 주문을 걸어주고, 몇 몇은 문앞에 쓰러진 기사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잡는 동안. 지금껏 이 소란을 관망하던 귀족 하나가 겁에 질린 귀족들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성자께서는,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대단히 서투신 것 같군요. 이렇게 요란한 수단을 동원해야 할 정도라면.”
“하하하하. 저도 평소에는 이렇지 않습니다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배려심은 성직자의 미덕이 아닙니까? 짐승 반쪼가리만도 못한 금수같은 놈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이해시키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을 곁들여야 하는 법이지요.”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정말로, 우리 모두를 적대하고서도?”
지기스 팔렘. 가장 많은 지원금과 병력을 데려왔으며, 그만큼 큰 발언권으로 연합군의 실질적 사령관 역할을 하는 자.
그 세상 병신같은 ‘포위 섬멸 작전’의 입안자. 그 작전의 수준 낮음과 달리 저 지기스라는 놈은 눈빛만 봐도 절대로 멍청한 새끼는 아니었다.
공포에 굴복하지 않는다라….
이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 무능하고 탐욕스러울지언정 이들은 지원군의 머리. 각자 사병의 월급을 주고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되는자. 이들이 죽으면 지휘체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고, 연합군의 반수 이상이 귀국할 수도 있었다. 그들까지 흡수해야 겨우 적과 맞붙을 만한 이상, 이 귀족 지휘관들의 흡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상황.
겁을 주든, 협박을 하든, 구슬리든, 어떻게든 이들의 내 수족으로 만들어야 했다.
….다소, 위험한 도박을 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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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짧고, 행동은 신속했다.
“그레고리우스.”
“예, 성자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교단의 성자이며, 내가 행하는 일이 곧 로 하람께서 원하는 일이라 했지요.”
“한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말, 믿어 의심치 마십시오.”
….믿자. 사막에서 보여준 그의 진심. 저들의 헌신적인 믿음을.
‘라투라. 애라 모르겠다.’
타닥.
작게 기도를 마친 성자가 굳어있는 귀족들의 원탁 한 가운데로 걸어 올라갔다.
“….사령관님들. 작은 기적 하나 보시렵니까?”
“….어?”
뚜둑, 으드득.
먼 협박보다는 가까운 주먹. 가까운 주먹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이에게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무지막지한 발톱이 달린 주먹을.’
우드득! 뚜둑! 으지지직!
하얗고 깨끗한 법복이 찢겨나가고, 흉물스럽게 부풀어오른 몸이 보는 것 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힘을 짐작하게 만드는 흉악한 붉은 괴물의 형태로 변해갔다.
“괴, 괴물…. 괴물이다!”
“서, 성기사! 당신들 성기사잖아! 어서 저 괴물을 쳐죽여! 죽이란 말이다!”
성자에서 뮤트로. 빛의 화신에서 악신의 정수로. 성기사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변해가는 성자의 모습에 귀족들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라투라…. 우리가 어둠의 길을 헤매일 때 주께서 내미는 손을 붙잡음에 망설이지 말것이며….”
“칠흑과 같은 밤을 헤매일 때도 그 끝에 여명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고….”
“뭐 하는게야! 괴물이 깨어나잖아!!! 성기사! 성기사아아아!!!”
“라투라, 로….하람. 광명의 뜻을 믿어 의심치 말지어다.”
“라투라.”
“라투라.”
그들은 기도를 되뇔 뿐 끝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투라. 성자님,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시여. 아직…. 우리의 빛과 함께하고 계십니까….?”
그저, 작은 흔들림을 잠재울 성자의 말 한마디를 원할 뿐.
“….그르르륵, 후우우.”
그레고리우스의 물음에, 회의장 중앙을 가득 채운 붉은 괴물은 면도날 같은 손톱을 가지런히 모아, 경건히 그의 물음에 답하였다.
“라투라.”
“라투라…. 로….하람….”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기사들은 어떠한 질문도,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기스 팔렘의 굳건하기 짝이없던 마음도, 그 악명높은 붉은 뮤트와 성기사단장이 서로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교단이었군. 헤델른의 사령관들을 죽인 것도, 모두 교단의 뜻이었어!”
헤델른에서 붉은 뮤트에게 암살당한 사령관 열 둘. 그리고, 알음알음 퍼지고 있던 이상한 소문. 붉은 뮤트가 습격하기 전날, 변장한 성자가 헤델른에 도착했다는 말.
귀족 정치가로서, 지기스 팔렘은 너무나도 끔찍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광신도…. 스스로의 신앙조차 망각할 정도의 광신도로다!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나, 스스로 악신이라 정의한 존재를 길들인 것도 모자라 그들의 성자로 추앙하여 신앙의 중심으로 삼다니! 미쳤다. 광명은…. 정말로 미쳤어!’
기도하는 붉은 뮤트. 그리고, 붉은 뮤트가 행했다고 알려진 수많은 악행들. 교단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가? 이 미쳐버린 집단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스스로를 기만하고, 세상을 기만하고, 그들의 신 조차 기만하는가?
지기스의 머리가 교단의 목적을 헤아리기 위해 혼란에 빠진 가운데, 그의 상반신 만한 괴물의 머리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두려웠다.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어디까지 미쳐버렸는지 알 수 없는 교단의 광기가 두려웠다.
“라투라, 형제님. 이제, 얘기를 좀 할 생각이 드시는지.”
쇠판을 긁는 듯 거친 목소리에, 텔드랏의 공작 지기스 팔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아야 했다. 뭐가 됐든 저들의 목적이라도 알지 못하면, 악신의 종자조차 그들의 성자로 추대하는 저 광기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의 착각 속에서 팔렘 공작은 질식해가고 있었다.
‘아, 아르갈리안 소드…. 그자가 돌아온다면, 그자만 돌아와주면….!’
지기스 팔렘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정도가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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