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68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19)
****
붉은 뮤트. 그것의 악명은 들어보지 못한 귀족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널리 퍼져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뮤트가 그저 슬라임 아종이나 짐승 전염병으로 취급받던 시절, 로드릭의 심장부에 침투해 마탑을 부수고 마법사를 살해하며 인간의 영역에 뮤트라는 적대 종족의 깃발을 세운 선봉장.
활동 범위 또한 넓어 제국 변경백 영지를 초토화시키고, 위대한 대마법사 펠릭스 드릭시엘의 유해를 습격해 그 아름다운 마법 건물에 흉측한 흉터를 남겼으며, 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서부 전선에 침투해 헤델른의 사령관 전원을 참수하고 그 사체를 가지런히 전시하는 등 드러난 악행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혹자는 연락조차 못 하고 전멸한 부대의 80%가 저 붉은 뮤트에게 암습당한 것이라 말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괴물.
뮤트가 만들어낸 ‘귀족 잡는 칼’이라고도 불리는 악명 높은 괴물이 눈앞에 그 발톱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기절하기 직전인데, 심지어 그 칼을 손에 쥔 쪽이 뮤트가 아니라 광명 교단, 빛의 광신도들이라고 한다.
붉은 뮤트가 알고 보니 광명이 키운 괴물이다? 그들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저게 그 붉은 뮤트라면…. 토브룬, 제국, 헤델른 습격도 모두 교단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닌가?’
‘제기랄! 그 눈먼 또라이들이 판을 움직이고 있었던 거야! 이교도, 악신 하면 앞뒤 안 가리는 놈들이니까!’
‘앞뒤가 맞는군. 우리 자유 무역 연합도 그때의 토브룬 습격을 기점으로 뮤트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으니. 교단은 대륙의 그 누구도 발을 뺄 수 없는 전장을 만들고 싶었던 게야.’
귀족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명 교단의 그림자. 교단을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는 광명 교단의 비밀결사.
그 실체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엄청났던 거라고.
이해할 수 없었던 폭력이었던 것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표면과 다른 속내. 감춰진 의미. 그 아래 도사리는 ‘광명교’라는 거대 권력의 목표.
귀족으로서 목적을 위해 암중에 움직이는 것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기에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들은 교단이 사용하는 ‘가장 은밀한 해결책’의 칼 끝에 내던져진 것이다.
‘….좋지 않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흘러가고 있어.’
지기스 팔렘은 모든 것을 이해한 사령관들이 뼛속 깊이 겁에 질린 것을 보며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차라리 교단의 괴물이 이 자리에서 그들 모두를 처참하게 살해했다면 좋았으련만.
괴물은, 절대로 숨겨야 할 그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발톱을 세우긴커녕 오히려 원탁의 중심에 서서 겁에 질린 귀족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두려워할 것 없소. 비록 내가 이런 몸을 가졌으나, 나의 몸과 영혼 모두 광명과 로 하람의 도구로 사명을 바친 자이니. 언제나 육은 수단일 뿐,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밝게 빛나는 영혼이라.”
“진정 그 모습으로 신의 도구를 자처한다면…. 즈, 증명해줄 수 있겠소!”
“감히 성자님에게 신앙을 증명하라 말하다니, 이 불경한 자가….!”
“그레고리우스 형제. 불신자들은 우리와 같은 신앙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겐 눈에 보이는 증명이 필요한 법이지요.”
“….라투라. 외람되오나, 성자님께서는 배려심이 지나치십니다.”
후우우웅-
흉악함을 실물로 빚어낸 듯한 괴물의 손끝에, 불꽃처럼 희게 타오르는 신성력이 부드럽게 자리 잡았다.
작은 생채기만 나도 사제를 불러다 신성 치료를 때려 붓다시피 하는 고위 귀족들인 만큼 그들도 신성력이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오오…. 지, 진짜 신성력이다.”
“정말 저 괴…. 크흠, 흠! 뮤트의 육신을 가진 성자는 광명의 성자님이 맞으셨군!”
“각국에서 뮤트를 이용한 실험이 활발하다는 소문은 들었거늘. 광명은 그 치들보다 몇 걸음은 더 앞서있었군. 그 괴물의 힘을 가진 성기사라니….”
압도적인 공포의 존재. 검증된 힘을 가진 괴물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제는 그들과도 말이 통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탐욕. 그리고 선망.
깊은 밤, 숲속에서 마주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라 그들 옆에 드러누우며 온기를 나누기를 청할 때처럼.
압도적 공포의 존재가 호의를 보이는 순간, 그것을 향하던 공포감은 기대와 선망이 되어 되돌아온다. 벌써 귀족들은 교단과 친해질 경우 저 무시무시한 ‘귀족 잡는 칼’이 그들의 정적을 어떻게 썰어줄지, 어떻게 지켜줄지를 떠올리며 저쪽에 붙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저 괴물 성자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고 만다. 교단이 원하는 것은 신속하게 뮤트를 멸종시키는 것. 대계를 위해,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팔렘은 어느새 겁도 없이 괴물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귀족 사령관들을 보며 이곳에 온 목표를 떠올렸다.
지기스 팔렘 공작. 텔드랏의 개국 공신 팔렘 가문의 장이며, 지금 텔드랏을 다스리는 왕의 오랜 친구.
[지기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이 아니면 텔드랏 왕실에 미래는 없다네.]아에드란 영지에서 만난 그의 벗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으로 수치심을 감추며 말했다.
[….볼테르 아에드란은 이제 내게 고개도 잘 숙이지 않더군. 어찌 안 그러겠나? 황금이 곧 헌법인 이 텔드랏에서, 저 비공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띄워 올렸으니 말이야.] [전하. 그것은….] [사석에선 옛날처럼 불러줬으면 좋겠군. 지기스?] [….20년. 어쩌면 10년 안에 텔드랏 왕실의 성이 아에드란 가문의 것으로 바뀌고 말겠지. 텔드랏의 귀족만큼 돈 냄새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도 없으니 말이야.] [….이 전쟁은 우리 벨라스터 왕가의 마지막 기회라네. 전쟁은 물자를 잡아먹는 괴물이지. 확전은 곧 수요의 증가를 뜻하며, 이는 우리 텔드랏의 밀을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제아무리 아에드란 가문이라 해도 곡창지의 면적만큼은 왕실 직할령에 따라오지 못하지. 전쟁이 커질수록, 왕실은 아에드란과 차이를 벌릴 수 있어.] [전하! 아니, 시오델!] [부탁이네 지기스! 로드릭이 쓰러지면 전쟁은 자유무역 연합, 텔드랏, 그리고 블루라인 너머 제국까지 확전될 것이야!] [지금 자네는 우리 텔드랏의 영토로 전쟁의 화마를 끌어들이겠다 말하고 있어!]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저 돈귀신 아에드란이 텔드랏의 왕좌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할, 유일한 방법이니까! 우리 왕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보다 더 높은 황금의 탑을 쌓아야 해! 다른 방법은 없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시오델 벨라스터!] [왕이 아니라 벗으로서 부탁하겠네! 지기스, 텔드랏 왕실을…. 살려주게!].
.
.
.
.
과거 강대국의 속국이었으나, 황금을 쌓아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드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거듭난 텔드랏. 그런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텔드랏 고유의 문화.
‘황금이 곧 법이다.’
아에드란의 영주는 왕이 방문했음에도 영지 밖으로 뛰쳐나갈 만큼 왕실을 눈 아래 둔 지 오래였다. 텔드랏의 왕, 시오델 벨라스터 3세는 이 전쟁이 뒤바뀐 상하 관계를, 왕실과 아에드란 가문의 부의 차이를 벌릴 마지막 기회라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벗이자 텔드랏 왕가의 충복. 공신 가문의 공작 지기스 팔렘은 황금 상단의 아성에 무너지는 왕실을 볼 수 없었기에 이곳 서부 전선으로 행차한 것이다.
왕실 근위대를 포함해 바닥까지 긁어낸 병력을 토대로 연합군 내 발언권을 차지하고 귀족 사령관들을 부추겼다.
인류의 위기라지만 그 위기가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들이 대의를 위해 재산과 병력을 소모했다고 정적들이 정말로 우릴 봐줄 것 같은지. 그 누구도 보상을 줄 수 없는 전쟁에 우리 스스로가 합당한 보상을 챙겨야 하는 것이 아닌지!
탐욕은 그들 모두를 움직이기에 충분한 원동력이었으며, 지기스와 텔드랏 왕실의 뜻대로 인간 연합군은 가장 넓고, 패배하기 좋은 전선을 만들어냈다. 이제 남은 일은 로드릭이 야금야금 갉아 먹혀 멸망하고, 연합군의 후퇴 방향을 아에드란 영지 쪽으로 유도하는 것뿐. 가장 부유하고, 비공정을 가지고 있는 영지이니 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이미 넓어진 전선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오. 다행인 것은, 아직 서부 전선은 적들의 압박 속에서도 아슬아슬하게 거점 간 육로 교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우선 나와 성기사단이 이 육로 교통을 안전권까지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제국의 보병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서부전선의 방어력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할 것이오.”
“성자님, 이 방면의 길목은 저희 사병들이 지키고 있사온데….”
“성자님, 저희 병력은 궁병 위주로 편제가 되어….”
‘저놈이…. 저놈이 모든 걸 망쳐버렸어!’
성자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하대까지 하면서 사령관들을 능숙하게 통솔하고 있었으며, 사령관들도 어느새 그를 존대하며 협력하고 있었다.
성자. 명성이 자자하신 광명의 성자이며, 광명 교단의 실질적인 통수권자.
그저 겁이나 주고 잘 구슬러서 허튼짓 못 하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어 하는 사이에 귀족 정계에서는 인사치레에 불과했던 일이 어느새 광명교단 코앞에서 교단의 최고 존엄과 유혈 분쟁을 일으키는 대사건으로 자라났으며,
혼란에 빠진 귀족들 앞에 성자는 ‘붉은 뮤트’라는 압도적인 공포를 통해 그들의 배를 따고 속을 훤히 드러낸 다음,
‘온화하고 말이 통하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까발려진 그들의 속에 자신의 존재를 깊숙이 각인시켰다.
작은 파도가 해일이 되듯, 순식간에 밀려와 대응할 시간도 없이 벌어진 일.
이미 귀족 사령관들은 ‘거스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한다!’ 와 ‘잘 보이면 저 엄청난 힘이 내 뒤를 받쳐줄 수도 있다!’ 라는 공포와 탐욕의 굴레를 쓰고 길들여진 말처럼 성자의 작전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도 전쟁을 틈타 남의 영토를 홀라당 쳐먹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 딱 봐도 파투 난 것 같은 분위기에 한시라도 빨리 저쪽으로 돌아서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뭔가 해야 했다. 아직 그의 권위가 남아 있을 때 귀족 사령관들의 탐욕이든, 공포든 뭐든 자극해서 그들이 더 어리석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했으나.
“팔렘 공작. 팔렘 공작?”
“….음? 아, 예.”
“하하하하. 주눅이 든 당신 마음도 이해하오. 사령관의 실수는 수많은 생목숨을 헛되이 날리니까. 잘 해보려고 짰던 작전이 되려 아군의 피해로 돌아올 때,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
“으음…. 사실 그대의 작전대로 서부전선에 남은 여력을 집중하면, 동부에 고립된 병력을 버리는 것이 되는 게 아닌지….”
꾸울-꺽.
그의 작전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동안, 미동도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는 괴물 성자의 눈이 너무 두려웠다.
괴물이라서. 귀족 잡는 칼이라 불리는 그 정체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눈이 무서웠다. 무서울 만큼 투명하여, 마치 눈을 통해 그의 뇌 속을 헤집는 듯한 그 투명한 시선은 마치, 마치….
“팔렘 공작.”
“어, 으….”
“따로 할 이야기가 없으면, 하던 얘기 마저 하겠소.”
마치, 전부 알고 있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신에 찬 눈빛.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두 단언할 수 있는 자의 눈빛.
‘아아, 전하. 이 무능한 벗의 실패를 용서해 주시길….’
그 눈빛 속에 차가운 살기를 읽어낸 지기스는 조용히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광명의 형제들도 이곳까지 오느라 몹시 지쳤으며, 그것을 막아서던 쾨른의 병력도 수습해야 할 테니 말이오.”
일단 가장 급한 병력 재분배에 대한 이야기만 마친 뒤, 약간 상기된 귀족 지휘관들의 원탁을 빠져나와 발코니로 향했다.
중요한 비밀을 공유한 자들 특유의 기대감. 저들은 내 비밀을 화폐로, 교환 조건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풀겠지.
‘어차피 머지않아 들통날 비밀이긴 했으니, 기왕 들통날 거 누군가의 조사로 폭로되는 것보다는 내가 밝히는 쪽이 포장하기 좋겠지.’
붉은 뮤트 카드는 이미 지나칠 만큼 써버렸다.
제국의 변경백 영지에서 그쪽 영주한테도 걸렸고, 그 영지의 주교도 성자님 = 붉은 뮤트 인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감격에 찬 눈으로 괴물을 올려다보던 주교였는데 아직까지 신도들 사이에 그 얘기가 퍼지지 않은 것을 보면…. 감격에 찬 주교가 대주교에게 신성 통신으로 보고한 직후 함구령이 내려왔다는 뜻이겠지. 노먼 대주교는 이미 알고 있을 게 분명하고.
이쪽 말고도 오트만, 바람 마법사들, 뭐 기타 등등 내가 완벽하게 숨기지 못한 이들이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유명세와 함께 뒤를 캐기 시작한 자들은 언젠가 그들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고, 머지않아 한창 바쁠 전장에 ‘성자가 뮤트였다! 돔황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가 오기 전에 미리, 조금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내 비밀이 퍼지도록 수를 쓴 것이다.
[성자님은 붉은 뮤트다!] 에서 [성자님이 붉은 뮤트인데, 붉은 뮤트는 성자래! 진짜 신실한 성자] 로.따지고 보면 내재된 목적은 전부 인류를 위한 것이었잖아? 토브룬 마탑 습격은 뮤트에 대한 경각심을 빠르게 일으켜 한발 앞서 대응하게 만들었고, 거기서 죽인 마법사는 인섬니아 크랩에 감염된 뮤트의 첩자였다.
제국 변경백 영지의 언데드 웨이브 막기에서 킬 스코어 1등도 나였고.
폭풍의 언덕은 바람 마법사들이 자기들 입으로 ‘한번 봐줌’ 했으니 됐고.
내 정체에 대한 소문에 내재된 미담을 같이 퍼트리는 것이다. 마침 사령관들을 휘어잡기도 해야 하니 아직 공포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제대로 뮤밍아웃 해서 확실하게 이득도 본 것이고.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겹쳐있었지만 어떻게 잘 풀어낸 것 같았다.
“그레고리우스.”
“예. 성자님.”
“지기스 팔렘 공작. 오도어 파르발티 후작. 군다르 퐁파두 백작. 이 세 사람은 오늘 중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할 예정입니다. 혹여 형제님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얘기해두세요.”
“….라투라.”
뮤트 쪽도, 인간 쪽도. 깔끔하게.
방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던 이들을 죽인다는 내 말에, 그레고리우스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군다르 퐁파두. 사인, 무능.
이자는 순수할 만큼 대가리가 비었으며,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지와 명문 귀족 작위를 물려받은 멍청이다. 권력을 쥐고 있으면 있을수록 아군의 걸림돌이 될 인간이며 당장 어디 치울 방법이 없으니, 사형.
오도어 파르발티. 사인, 병신.
전형적인 정치귀족. 군사학에 무지하나, 파벌 형성에 매우 재능이 있으며 집단의 실세가 되는 것에 매우 관심이 많은 자. 심각한 회의 도중에도 은근슬쩍 ‘성자의 비밀을 공유한 이들’로 사령관들과 나를 묶으려 들더니, 회의 끝자락에는 자기랑 친한 놈들을 그 서클 안에 끌어들이려는 언행을 보였다. 갈라치기로 제 이득 보는 데 혈안이 된 놈. 내버려 두면 균열의 씨앗이 될 게 분명하니, 사형.
그리고…. 지기스 팔렘. 사인, 애국자.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졸라 나쁜 새끼였지.’
대충 몇 마디 나누자마자 여기 있는 대부분의 병신들과 질적으로 다른 놈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름 수완도 있어 보이고. 병신들 휘어잡는 솜씨를 보아 정치 능력은 물론 사고, 판단력도 뛰어나 보이고.
그게 한번 보이니까 도대체 왜 이런 괜찮은 인간이 ‘포위 섬멸 진’ 같은 개 쓰레기 작전을 입안해 진두지휘했는지가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
– professor : 지기스 팔렘이 텔드랏에서 괜찮은 퀘스트 준다고 했지? 그 퀘스트 뭐임?
– Jokass : 어, 잠깐만. 뭐였더라? 스타팅 텔드랏으로 잡은 플레이어들이 좀 알텐데.
– 노루Drug해요 : 나, 나 알아! 여느 텔드랏 귀족 퀘랑 다를 것 없이, 대부분 상단 퀘임. 이 상단을 왕실 직할령까지 호위, 저 물건을 왕실 상단에 인계…. 보수는 그냥저냥인데, 왕실 상단이랑 연결되는 퀘스트가 많아서 인기있었지.
– professor : ….왕실. 텔드랏은 내수 시장이 무의미할 정도로 각 영지의 자체 상단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왕실이라곤 해도 경쟁자인 타 상단과 깊은 교류가 있다라….
———
시의 적절하게 대화방에서 나온 정보.
아에드란 영지를 떠날 때 스치듯 봤던 텔드랏의 왕. 왕이 방문했음에도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대표로 비공정을 환송한 볼테르 아에드란과, 그것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린 왕의 수치스러운 얼굴.
‘개국 공신’ 팔렘 가문.
병신같은 작전과 병신일 리 없는 작전 입안자.
그리고, 널리 알려진 텔드랏 특유의 귀족문화.
‘….다른 놈은 몰라도 지기스 팔렘은 반드시 죽여둬야겠지.’
아마도, 지기스 팔렘은 골수까지 애국자가 아닐까 싶다. 텔드랏에서 돈 없는 왕실은 왕가 취급도 못 받는다. 텔드랏에 며칠 있지도 않았던 내 눈에도 들어올 정도이니 현 왕실이 얼마나 무시 받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
딴건 몰라도 땅 하나만큼은 텔드랏에서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텔드랏 왕실인 만큼, 밀 팔아먹는 텔드랏 상단 중 전쟁의 수혜를 가장 많이 본 것은 왕실 상단일 것이 틀림없었다.
비공정에, 딸내미는 제국 신황가의 황후에, 아주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겠지. 이대로면 조만간 볼테르 아에드란이 ‘이어, 왕!’ 하고 부르는 날도 머지않았으니까.
전쟁이 길어질수록 텔드랏 왕실은 부유해진다. 연합군이 승기를 잡았다는 것은, 이 황금 화수분 같은 전장의 끝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전쟁을 더 길게 끌고 싶다….
차례로 쌓여가는 정보를 종합해보니 얼추 이런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지기스 팔렘은, 남아 있는 서부전선을 축소하자는 내 의견에 성급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그 추측에 확신을 주고 말았고.
‘지원군이 아니라, 지원군을 가장한 쁘락치나 다름없는 놈이지. 제 나라, 제 왕실 살리겠다고, 전장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위해 로드릭을 곱게 갈아 사료로 주려던 놈.’
….역시, 내가 일을 너무 잘해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토브룬 난동으로 겨우 끌어올린 뮤트에 대한 경각심이 벌써 사그라들어 버렸으니. 물론 밸런스 조절하면서 상대하기엔 팔카투스가 너무 미친 새끼라 어쩔 수 없었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저만큼 대가리 굴러가고 의기 있는 사령관 NPC가 아군이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됐을 테니까.
짝!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이제 남은 일도 마저 처리해야지.”
잠시 이러한 ‘간단한 해결’ 방법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고심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발언권은 확보했으니 부동의 명분을 쥔 로드릭 왕까지 오면 군사 통제권은 완벽하고. 병사들 내부 분열 해결해야 되고….”
“….성자님.”
“사령부에 대한 불신으로 개인행동 시작한 지 한참 된 영웅들도 다시 끌어들이고, 이러는 동안 쑴풍쑴풍 태어날 뮤트 숫자도 줄이고, 또….”
“성자님. 교수 성자님!”
“또, 음…. 음? 왜 그러십니까, 형제님?”
내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레고리우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매우 단호한 얼굴로 막 발코니 밖으로 뛰어 나가려던 나를 가로막았다.
설마 ‘그래도 뮤트 성자는 못 참겠다!’ 하고 메이스 뽑는 거 아닌지 긴장했으나.
“잠시 일정을 미뤄 주십시오. 예의 ‘불의의 사고’ 또한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예?”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성자님께서 반드시 해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굵은 눈썹을 부릅뜨며 내 앞을 단단히 막아서는 그레고리우스와, 포위하듯 내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드는 성기사들.
나 이 표정 알아. 예전에, 그레고리우스가 나한테 교전 한번만 읽어보라면서 24시간 따라다닐 때 딱 이 표정이었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명 교단의 본단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본단에 가셔서 시성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지금?”
“예. 지금. 성자님께서 악의 흔적을 짊어짐을 드러냈으니, 더더욱 빨리.”
이번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눈빛.
슬쩍 틈을 찾아봤지만 성기사들은 신성력까지 끌어올리며 빈틈없는 포위망을 조여오고 있었다.
….제기랄. 확실히 거기도 한번 갔다 오긴 해야겠군.
“….좋습니다.”
내가 동의하자, 그레고리우스는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로 다가왔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성자님.”
“….좋다니까? 간다고. 아니, 왜 묶어!”
“지금 즉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풀린 얼굴에 내가 잠깐 긴장을 놓은 사이에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밧줄로 순식간에 나를 포박하는 게 아닌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저주를 걸 수 있는 흑마법사들. 그들을 포박해왔던 성기사의 포박술답게, 그레고리우스의 포박은 여간 힘으로는 꼼짝도 못 할 정도로 훌륭했다.
“형제님! 저기요! 야! 가, 갈게! 간다고! 진짜 간다고!”
“발라우그 형제, 홀우드 형제. 이곳 사제들 중에 교단의 그림자가 있을 테니 성자님의 명을 수행하십시오. 나머지는, 지금 즉시 성자님을 교단으로 모십니다.”
“라투라.”
“자, 잠깐만! 내 동료! 동료들한테 말은 하고 가야-”
“그분들께는 이미 교단제 마차를 보내 두었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멈추지 않는 형제님들.
결국, 어어 하는 사이에 잘 포장된 성자님은 광명 교단 본단행 마차에 오르고 말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기이할 만큼 나를 따라다니며 비추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