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71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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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에 왜 이렇게 신도들이 많이 모일 수 있었나 했더니, 다들 피난민이었군요?”
“성자님.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당신께서 우릴 존대하시면-”
“피난민 이었‘구나’! 됐냐? 됐어?”
“익숙해지셔야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우리 광명의 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주 눈에 화아아악!!!! 들어오게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아니, 그렇네. 음. 그래. 그렇지.”
교단 본단의 대신전,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방.
지금껏 비어있던 ‘성녀의 방’을 차지한 나는 대주교와 교단의 그림자들이 구해온 오크통 수십개 분량의 액체를 빨아먹으며 대주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으엑, 비려.”
“성자님께서 가시는 길이 가시밭길임을 우리가 왜 모르겠습니까? 저 또한 성직자로서 악신이 만든 피를 진상하는것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오나…. 라투라. 성자님의 건강이 곧 교단의 건강입니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옵소서.”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원래 비린 맛이 나면 안된다고.”
“그것은, 선호하는 뮤트 혈액의 종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어…. 말이 좀 이상한데. 어떻게 보면 그런건가?”
“송구하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모여든 신도들과 외부 인사의 눈을 피해 혈액을 공수하다보니, 제대로 된 것들을 잡아오지 못하여….”
“누가 들으면 흡혈귀 밥투정 하는줄 알겠네. 그런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문제라는 겁니다.”
평소같으면 역겨울 정도로 달콤하게 느껴졌을 뮤트 혈액이 비리고 역하게만 느껴지는 이유.
그건,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신성력이 흘러 넘치는 광명 교단의 본단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뮤트 피를 몰래 반입해오면 뭐해. 신전의 최심부인 여기까지 가져오는 동안 피 안에 든 감염인자들이 알콜 맞은 병균처럼 죄다 정화되어 사라진지 오랜데.
혈액이 비쩍 골은 성자님의 눈앞에 진상될 때 즈음에는 이미 그건 뮤트 혈액이 아니라 그냥 짐승 피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는 것이고, 그딴걸 백날 마셔봐야 재생력이 쥐 꼬리만큼도 오르지 않는 것이다.
“….체력이 조금만 회복되면 나가봐야겠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전장이니 근처까지만 가면 피를 흡수해서-”
“그 몸으로 신전을 나가신다니, 절대 안 될 일입니다! 혹여 성자님께서 이렇게 허약해진 때를 노려 악신의 직계들이 암습을 가해온다면 어찌 한단 말입니까! 성자님께서 쓰러지는 순간이 광명 교단이 쓰러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나가서 회복을 해야 한다구요! 회복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니까? 나 몰라요? 피의 성자, 광명의 등대! 진짜 아주 조금만 회복할 수 있으면-”
“지금은 병상에 누워계신 성자님이시지요.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신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문제라면, 그 신성력에 다 닳지 않을 정도로 진한 피를 구해 올터이니. 성자님 덕분에 여러 형제님들이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부탁, 설득, 심지어 명령에 협박까지 곁들였지만 노먼 대주교는 수염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절대 안된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악신의 직계는커녕 평범한 뮤트에게도 당할 만큼 약해진 이상 나를 보호하는 것이 교단의 최우선 목표이며, 그런고로 안전한 대신전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시하고 나가려는 순간, 호다닥 뛰어나간 대주교님이 성유 한통과 촛대를 들고와서는 제 몸에 성유를 들이붓는게 아닌가?
“미, 미치셨습니까?”
“라투라. 오직 광명과 성자님을 위할 뿐이니, 나의 영과 육은 재가 된들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 뿐이라. 정 가셔야겠다면, 이 낡은 도구의 재를 밟고 가시지요.”
“아니 노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가으아악! 성기사, 성기사아아아!!!”
….어쩌겠어. 고집피우다 대주교 셀프 화형시킨 성자님 소리 안들으려면 얌전히 있어야지.
뭐, 시성식 이후로 신전 여기저기에 찍힌 ‘손자국’을 보면 진한 뮤트 피를 구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 다시 말하지만 본단의 신전은 악적과 맞서기 위해 온갖 축성받은 암석과 금속 토대를 사용해 만들어졌으며, 손자국은 갑자기 늘어난 힘에 적응하지 못한 성직자들이 넘어지면서 벽이나 바닥을 붙잡아 만든 것이다.
“어휴. 이 나이 먹고 외출 금지는 뭔…. 알겠으니까 나가 보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침대 옆에 교전이 여러권 있으니 무료하실 때 한번 읽어 보시지요.”
결국, 노먼 대주교는 세까맣게 태워먹은 법복 끝자락을 끌며 만족스럽게 ‘성자의 방’을 나섰다.
“….신성력. ‘선언 광역화’ 대신 ‘힘’의 특성을 가진 신성력이라….”
시성을 받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던 내게있어,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전투력 상승이었다.
당장 창밖의 광경만 봐도 이게 얼마나 큰 힘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북적북적
와글와글
하루에 두 번 있는 배식시간. 식사에 앞서 원형 광장에 모여 식전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제와 사뭇 달랐다.
“그…. 형제님, 그만 좀 붙으시지요.”
“미안합니다, 나도 뒤에서 밀어서 그만….”
어제 시성식때까지만 해도 신도들을 다 수용하고도 남았던 원형 광장이 발디딜 틈 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우락부락해진 신도들 사이로 소매를 뜯어 민소매가 된 법복을 입은 이들도 다수 보였다.
“피난민용 천막은 차례로 배급될 것이니, 배급이 늦다하여 땅을 파지 마십시오! 교단 지하 시설을 건드릴 수 있으니, 차례를 기다리시오!”
부족한 천막에 바람이라도 피하고자 땅을 파던 피란민들의 손에 교단 지하감옥의 천장이 드러나자 사제들은 부랴부랴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와르르르!
쿵! 쿠웅!
“분명, 나무를 베어오면 배급을 더 주신다 하셨지요!”“크하하핫! 분명 한 짐에 한 그릇이라 하셨습니다 사제님! 이 정도면 우리 가족 사흘치 배식은 되겠지요? 예?”
“이, 이정도면 나무는 이제 그만 해오셔도 되겠습니다 형제님들….”
신체 건강한 이들을 추려 간단한 부역을 맡겼던 쪽에서는 언덕 하나를 민둥산이 되도록 베어온 나무가 우후죽순으로 쌓이고 있었다.
힘. 신성의 권능치고는 조잡할 정도로 단순하고 강력한 힘.
나의 시성식이 끝난 뒤, 믿음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광명 교도 전체에게 내려진 교단 고유의 권능.
———
– 흥안만두 :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고? 로 하람을 믿으면 40kg은 더 들 수 있다!
– Jokass : 얘가 하는 일 치고 의외가 아니었던 적은 없지만, 이건…. ‘의외’수준으로 표현할게 아닌데. 기행? 특이점?
– 남바쓰리 : 방금 봤슴까? 초딩 언저리 애가 은수저를 손가락으로 구부리고는 ‘나 마법산가봐!’ 이러고 있었슴다….
– takealook : ‘매번 똥볼이나 차는 멍청이들 대신 근육쟁이한테 일을 맡겼더니 썩 괜찮더라! 나머지 도구도 모조리 근육쟁이로 교체해야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교수 쟤가 일처리 하나는 기가 막혔잖아.
– professor : 너, 신(神)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거냐?
———
….에이 설마. 그래도 신인데. 설마 신위를 가진 존재가 진심으로 신성력을 아나볼릭한 무언가로 만들어 교도들을 죄다 헬창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을 리가 있나.
———
– professor : 신은 기본적으로 신도들의 믿음이 뭉친 공통 집단지성이라 볼 수 있으니까. 믿음이 신성을 키우고, 그 신성의 영향력이 또 믿음을 키우는 일종의 쌍무적인 관계란 말이지.
– takealook : 시발 성자님이야 말로 도대체 신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 사이비 새꺄.
– professor : 닥쳐봐 좀.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시성식은 일종의…. 총괄적인 데이터 업데이트와 비슷한 행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교전을 통해 공식화된 믿음이 광명의 신 로-하람을 탄생시켰다면, 성자는 지금 현재 신도들의 믿음에 구심점이 되는 존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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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현 시점에서 광명의 신도들이 무엇을 선망하느냐- 라는 것이다.
과거의 성녀가 세상을 밝히는 빛의 상징으로서 악의 파도와 맞섰다면. 지금의 성자님, 현 시점에서 광명교의 구심점이 된 성자님의 이미지는 어떤가?
‘성자님이 그 큼지막한 주먹으로 악신의 종자를 피떡으로 만들었다고….’
‘피의 성사는 성자님의 피가 아니라 그분 손에 터져죽은 악적의 피로 이루어졌다던데….’
‘그분이 지나가신 길에는 비참하게 으스러진 악적과 환호하는 신도들만 남았다고….’
이미 교단의 적극적인 선전을 통해 ‘무지막지하게 강한 성자님’의 일대기는 널리 퍼져나간지 오래다.
과거의 신자들은 신앙과 구원을 상징하는 빛을 추구했으나, 언데드의 준동으로 성녀를 잃고.
신과 연결이 끊긴 교단으로서 속세의 세파에 시달리고, 힘 잃은 교단으로서 갖은 수모를 겪으며.
다시 한번, 70년 전과 같은 대 전쟁을 앞둔 지금. 신도들이 희망하는 것은 상징적인 빛의 이미지가 아니라 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던 것이다.
힘. 그들의 빛이자 희망이며, 광명의 새 구심점이 되어준 성자님의 너른 어깨가 증명하는 그 육체적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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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GG의 모든 것이 ‘믿음’에 좌우된다‘ 는 이론에 입각하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지. 안 그래도 언데드 준동에서 성녀를 잃고, 신과의 연결고리를 잃어 신도 대부분이 무력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을 겪어왔던 광명교단이야. 그런 그들이 다시 한번 대전쟁을 맞이했을 때 무엇을 추구할까? 더욱이, 그들의 구심점이 된 ‘성자 교수’님의 어마무시한 일대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들의 믿음에 어떤 요소가 심어졌을지를 생각해 보라고.
– Jokass : ….저렇게 존나 쎄지고 싶다?
– professor : 그래. 풍요 교단은 배곯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졌고, 자비 교단은 바보같을 정도의 선인들이, 지혜는 학자, 용기는 전투 숭배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처럼 어느 교단이나 결국 신도 전체가 믿는 방향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해. 그런 상황에, 성녀를 잃고 스스로가 무엇을 신앙하는지 혼란에 빠져있던 이들 앞에 나타난 게- 이렇게 생겨먹은 성자님이니.
– 홀리 : 우리의 정점, 우리를 인도하는 이가 저런 존재다! 하는 마음이 모여서 지금의 우락부락 교단이 되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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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리자면, 광명교라는 집단의 믿음 공유로 만들어진 것이 그 믿음에 의한 실질적인 힘을 가진 로-하람이라 했을 때.
그 집단 지성의 롤 모델로 ‘근육빵빵한 초-마초 성자님’의 이미지가 아주 뿌리 깊게 콱콱 박혀버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시성식이라는 공식화된 루트를 통해 성자가 그들의 구심점이 됨을 공표함으로서 신도들 사이로 스멀스멀 파고든 ‘힘’의 이미지가 로-하람 이라는 집단 지성에 업로드 됐다, 대충 이런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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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fessor : 신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마법, 오러, 신성력과 같은 신비와 엮인 능력은 그들과 연관지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지만…. 육체적인 힘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밭일 할 때, 나무 벨 때, 걷고, 뛰고, 물길어오고…. 육체적인 힘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 professor : 근육빵빵 성자님 = 광명의 정점 / 그럼 나도 믿음을 갈고닦아 신성력이 높아지면…. 성자님처럼 태산같은 어깨와 대해같은 등판을 가지게 되는건가? 하는 신도들의 마인드가 광명 교단 전체의 과반을 넘어섰다는 뜻이겠지.
– Jokass : 결국 니 잘못이네.
– takealook : 그러게. 원래 광명교 발원 단계에서는 ‘빛 처럼 만민에게 평등한 은총을!’ 으로 시작해서 광역화의 권능을 가졌던 광명의 신성을, 네놈의 파괴적인 플레이와 그것의 선전을 통해 ‘우워어억! 힘! 더욱 강인한 힘! 근력으로 악적을 배제하고, 만민을 구원한드아아악!’ 으로 바꿔버렸다는거 아냐?
– professor : 어, 음…. 그, 그런가?
– 흥안만두 : 생각보다 보통 일은 아닌데? 얘가 롤 모델이면, 광명 교도들은 지금보다 더 과격하게 변할 거 아냐? 얘 막 도시 부수고 홍수 일으키고 남의 집 때려 부수고 다녔잖아?
– 홀리 : 으음…. 광명교단,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무지막지한 광신도로 발전할지도….!
———
결국 시대상이 반영됐다고 나는 보고 있었다. 뭐만 하면 전쟁, 멸망, 전쟁, 멸망을 반복하는 세계의 사람들이니까. 무력한 스스로를 보며 힘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민간인이 떠올릴 수 있는 힘이란 더 강한 근력이 고작이겠지.
어찌보면 이게 진짜 참된 신이 아닐까? 신도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원한다면, 그 권능을 내려주는 신이니까.
와르르르-
쿵! 쿠웅!
“형제님들!!!! 다시 말씀드리지만, 더 이상은 나무를 해오지 않아도 됩니다아아!!! 각자 천막으로 돌아가 차례를 기다리십시오오오-!”
창 밖에서 목이 쉰 사제가 끝없이 이어지는 목재 행렬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도 목재면 작은 전초기지를 만들어도 되겠군. 당장은, 확실히 도움이 되겠어.”
믿음이 모여 로-하람이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로-하람의 존재로 믿음이 생성됐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신도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신이라는 점에서 지구의 신들보다 괜찮은 놈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 우락부락한 광명의 형제님들이 이 전쟁에 도움이 될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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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우지끈!
“어엇! 그…. 죄송합니다! 문을 부술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형제님은 평생 기도만 하고 살아오셨으니, 힘조절 같은데 익숙해지지 않는게 당연하지. 성녀의 방은 오랫동안 공실이었으니, 관리가 안되어 문이 썩었을 수도 있고. 문이 좀 물렀나봐.”
개소리다. 성녀의 방은 성녀를 잃은 상실감만큼 철저하게 관리되었으며, 지금 사제가 부수고 들어온 문은 대장장이가 다뤄야 할 정도로 단단한 물건이었다.
물론, 성자님을 모시기 위해 배정된 상급 사제의 신성한 ‘힘’을 견딜 정도로 단단하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히 긴장했는지, 상기된 얼굴의 사제는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 정도였다.
“가, 감사합니다. 이 무례를 어찌 사죄드릴지….”
“필요 없고, 이렇게 급히 찾아온 이유나 말해봐.”
“아, 예!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성자님! 물론 성자님의 안위가 우선인 만큼 교단에서도 대부분의 방문자를 내치고 있으나, 전쟁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분이…. 아, 물론 성자님과 비교하면 티끌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되게 정신없는 형제님이지만, 사리 분별은 되는 친구 같았다. 전쟁과 관련된 손님이라니까 들여보낸 것을 보면.
확실히 신전의 향 냄새 사이로 바깥의 냄새가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피 냄새, 진흙냄새, 풀 냄새랑…. 노린내? 짐승 털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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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누구?”
“그게,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또 불경한 물건을 들여오려고 하여 성기사들과 대치 중이온데-”
벌컥-
우지끈!
“당연하지. 나의 존중은 어디까지나 이 안에 있는 자를 향할 뿐, 너희 흰둥이들 까지 존중하고 있지는 않으니 굳이 이름을 나눌 필요도 없지. 그리고 힘들게 구한 선물을 놓고 올 수야 없지 않은가.”
콰당탕탕!
“침입자다! 성자님을 지켜라!”
“빌어먹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난 인물이 끈적한 것이 묻어나오는 자루를 내려놓았다.
성자의 거처를 내어준 성기사들이 대노하여 달려오고 있었으나, 침입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달려오던 성기사들의 발소리는 전투음으로,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다수와 다수의 대치.
“성기사단, 길을 열어라.”
“….하오나, 성자님!”
“내가 아는 이들이다”
“그, 으으음…. 라투라.”
성기사들은 무언가 반박하려 했으나, 평소와 달리 진지한 성자의 눈빛에 말을 삼키고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여기서 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이군.”
“늦었다고 하지 마시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야생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침입자는 나를 마주하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킁킁거렸다. 그리고는, 확신이 섰는지 인상을 팍 구겼다.
“….같은 냄새로군. 전에 봤을 때는 조금 더…. 건장해 보였는데. 여기 흰둥이 들은 밥도 안주오?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 아니었나?”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걸어왔지.”
휘익-
철퍽!
“옛소. 아버지 말씀에 사냥물을 즐겨 드신다기에, 오면서 잡은 놈들 중 실한 놈으로 챙겨왔지. 꼴을 보아하니 퍽이나 잘 고른 선물이지 싶군.”
침입자, 늑대인간은 가지고 온 자루를 침대쪽으로 차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도 맡을 수 있을 만큼 진한 뮤트의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등에 푸른 빛 갈기가 선명한 건장한 늑대인간.
하우누만에서 딱 한번 봤던 존재.
무엇보다, 내가 뮤트를 먹는 것을 알고있는 존재를 아버지로 둔 자.
“….아버지가 당신 얘기를 참 많이도 하셨지.”
푸른 갈기의 늑대인간은 털을 가다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보르카 달룬의 아들, 투샨 달룬이 그대에게 은혜를 갚고자 하니, 허가해주시오.”
“은혜라…. 난 잘 모르겠는데. 보르카에게는 내가 준 것 이상을 받았어. 무엇에 대한 은혜를 말하지?”
“모든 것. 나의 목숨. 내 누이의 목숨. 일족의 원수를 처단한 것과, 고통 속을 헤매이던 아버지의 삶을 구원해준 것.”
투샨. 하우누만에서 힘을 모두 써버리고 쇠약해진 보르카와 함께 숲으로 떠났던 그의 아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말년을 다시 만난 가족들과 보내고자 숲으로 떠났다.
그의 아들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마도.
“….보르카는.”
“어머니와 부족이 잠든 숲에서,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편히 눈을 감으셨소. 그 누구도 아버지의 죽음이 평화로웠다는데 동의할 것이오.”
“….그래. 잘 갔구만. 잘 갔어.”
….더는, 보르카와 그의 자식들이 나눌 시간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얘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했으니, 굳이 내가 위로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옛 동료의 아들을 위로하는 대신, 고개 숙인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잘 왔다. 안 그래도 손이 부족했는데, 너 정도 전사라면 하나 하나 천금 같은 자원이지.”
“나 정도 전사 하나가 천금같다라…. 그렇다면 자루를 많이 준비하셔야겠군. 천금이 무더기로 굴러 들어왔으니.”
그 말과 함께 늑대인간 특유의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가리키는 투샨.
언제 숨어 들어왔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털뭉치들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루를 각자 하나 씩 들쳐매고는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들 모두를 구원했으니, 저들 모두의 은혜 갚음을 받아 주셔야지.”
얼핏 봤던 멧돼지 수인부터 먼 발치에서 떠나가는 뒷모습만 봤던 수인들까지.
“….귀여운 새끼들.”
“어떻게, 받아 주시겠소?”
투샨의 쭈욱 찢어진 미소에, 나는 마주 웃으며 답했다.
“대장이라 불러. 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옛 인연이, 전력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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