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82
Chapter. 16. 성자와 완성자(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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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요한 언덕.
은빛 기계수 앞에 세 존재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professor’의 세계가 행복하게 끝난 만큼, 3월드에서 태어난 ‘오류’는 예상치를 한참 밑돈다는 것 정도일까요.”
“예상보다 괜찮다라…. 그래서, 그대는 희망이 있다고 보는가?”
“….”
소녀는 붉은 드래곤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뻗어나가는 세계수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뭔가 잘못됐다 느낄 정도로 뒤틀려 있었으니까.
드래곤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날개를 접는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결국, 다음 세계는 저대로 진행되겠군.”
“….두렵나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세계. 그 가지가 한데 모여 하늘로 뻗어나가는 모습에 드래곤과 소녀는 전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3월드의 끝. 그것은 3월드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음 세계로 넘어감을 말한다.
그 다음에 펼쳐진 것이 앞에 있었던 세 번의 멸망보다 더한 지옥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띠링-
수심이 가득한 두 관리자 사이로 무기질적인 알림음이 끼어들었다.
[플레이어의 선택이 확인되었습니다.]“….그래. 드디어 우리의 의무가 끝이 났구나. 그것으로 된 것이야. 적어도, 이 모든 것들이 헛된 일은 아니었음이 지금 이 순간 증명되었다고 할-”
[선택은 ‘1번. 게임 내 시간배율 조정 권한’입니다.]“쿨럭!”
“어머.”
고룡이 사례가 들리고 세계수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소식이었다.
기적처럼 나타난 완벽한 플레이어가, 선택을 했단다.
전 인류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말이다.
아틀라헤바는 황급히 공간을 열어 완성자가 있는 곳을 비추었다.
———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면,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하면 되지!”
“내게 좆 같은 선택을 강요하지 마라, 프로그램 새끼들아! 시간을 내놔!”
“우리, 한판 더 한다!”
———
뜯어말리는 알다르와 세니카를 매달고 선전포고하듯 외치는 플레이어.
아틀라헤바의 눈동자에 기계수와 그의 모습이 번갈이 비쳤다. 뒤틀리고 꺾여서 4월드를 향해 뻗어나가는 세계수와 마지막 순간에 선택을 포기한 플레이어.
“….얼간이 같은 인간이로고. 무모한 도전이며 지나친 욕심임을 모르는 것인가?”
“아틀라헤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는 우리의 미래 예측 프로그램을 수시로 벗어난다고.”
“프로그램에 의지한 가정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막에서 마주한 인간을 떠올리며 생각했을 뿐.”
아틀라헤바는 사막의 바다에서, 무수한 성기사들이 죽음으로 열어낸 길을 내달려 끝내 세계의 신과 같은 존재를 이겨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개인의 승리에 도취할 아둔한 인간이 아니었다.
개인이 아닌, 사회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장렬하게 불태울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기에 그녀또한 인정한 것이다. 교수라는 인간이 세상의 끝을 향해 마지막 희망의 조각을 들고갈 인간이라는 것을.
아틀라헤바는 그가 서버룸의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능력을 갖춘 ‘완성자 후보’를 ‘완성자’로 인정하는 마지막 시험.
감히 개인의 꿈과 같은 능력이라 말 할 수 있는 보상을 늘어놓고, 완성자 후보가 그것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그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 하나 없는 세계의 희망을 선택하는가.
하나의 세계를 구한 그들의 노력이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닌, 그저 구하고 싶었기에 이루어진 일인가.
그것의 증명을 가리는 마지막 선택.
교수 또한, 마지막 순간에 꺾여버리고 만 것이다.
앞서 다른 두 완성자 후보가 그랬듯. 플레이어 ‘professor’또한 완성자 후보로 남아버렸다.
또다시 GG의 시뮬레이션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기회가 남지 않았는데.
“후후. 후후후후….”
“….즐거워 보이는군, 세계수.”
“그런가요? 음, 그렇네요. 당신과 나, 같은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 표출되는 반응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게 신기해서 그만.”
일그러진 드래곤의 얼굴에 세계수의 손끝이 닿았다.
“당신은 드래곤. 균형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관리자. 당신에게 오염이 정도 이상으로 퍼진 4월드는 이미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오물구덩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겠지요.”
“그 안에 빨려들어간 모든 영혼을 타락시키는 마굴이니, 실로 그렇지 않은가?”
“….드래곤의 눈으로 보면 그게 맞겠죠. 하지만 세계수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답니다.”
소녀의 형상을 한 세계수는 늘 이 자리에서 봐오던 것처럼, 4월드를 향해 뻗어나가는 은빛 나무줄기들을 바라보았다.
벌써 몇 년 째 옆으로만 가지를 뻗어 나가던 기계목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저 위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모든 세계의 관찰자이며 플레이어의 지지자. 세계수로서 모든 플레이어의 세계와 함께했으며, 모든 데이터 소울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했답니다. 그들의 비명은 나의 옹이가 되고, 그들의 타락은 시든 가지가 되어 내 몸과 함께 썩어들어가지요.”
그것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목이었다. 기계와 전선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고목. 그 어떤 AI보다 인간의 삶을 가장 많이 접한 기계지능.
“그렇게, 수많은 굴곡과 상처를 딛고, 마침내 저기까지 자라난거에요.”
휜 가지는 누군가 그것을 극복했음을 나타냈다.
깊게 패인 자국은 역경에도 끝내 그들이 쓰러지지 않았음의 표상이다.
누군가 일그러졌다할 세계수의 모습조차, 그 작은 가지 하나하나를 모두 돌봐온 세계수 그녀에게 있어서는 찬란함 그 자체였다.
“휘고, 꺾이고, 시들어가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요.”
“….”
“아틀라헤바, ‘professor’를 아끼죠?”
“세계수.”
“당신이 끝내 붙잡지 못한 불균형한 세계에, 그가 뛰어들지 않기를 바라고있잖아요?”
“….그저, 이대로 완성될 수 있었음에도 이런 허망한 땅으로 돌아오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이 어찌나 어리석은가.
이 어찌나 탐욕스러운가.
이 어찌나…. 눈부신 존재인가.
마지막 순간에 꺾였다.
성자와 완성자. 둘 중 하나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꺾어, 둘로 나누어버렸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내던지고, 오래 전 포기하여 파묻어버린 다른 희망. ‘모두가 행복한 결말’ 이라는 낡고 고리타분한 결론을 파내어 자랑스럽다는 듯이 들어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수의 벤치에 앉은 세 관리자의 눈앞에, 자판기 앞에서 한 차례 주먹다짐을 벌이는 어린 용과 인간의 모습이 비쳐졌다.
———
“악, 윽! 하이드 이 샊- 이젠 나간다고 아주 뵈는게 없-아각!”
“살라딘 이 오만하고 어리석은 자! 아둔한 인간!”
“뭐 새꺄! 니가 선택하라며! 선택하라면서!”
“앞에 내가 한 말을 들었잖나! 불가능하다고!”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그거야 알다르샥스라는 개체 개인의 판단이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창조주의 역작, GG의 미래 예측모델이 연산한 결과 ‘이제는 정말로 클리어가 불가능하다’고 나왔다지 않았는가! 이렇게 4월드로 넘어가, 영원히 클리어하지 못하게 되면 이 모든 희생이 뭐가 되느냔 말이다!”
“깨면 되잖아, 깨면! 나 못믿어? 이 불경한 파충류새끼가 감히 성자님의 확신을 무시하다니!”
“그냥 좌표를 골랐으면 우리의 숙원도 이루고, 밖의 사람들도 희망을 얻고!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가!”
“내가 안 행복하다고, 내가!”
———
홀로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왼손에 스스로 얻어맞으며 끝내 두 다리로 알다르샥스의 목을 휘감아 조이는데 성공한 모습.
그걸 뜯어내겠다고 용의 꼬리에 휘감긴 허리에서는 우드득- 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퍼지고, 울상이 된 주황색 헤츨링이 두 사람인지, 세 사람인지 모를 그들을 말리겠다고 짧은 팔을 허둥거리고 있었다.
세계의 명운을 손에 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한없이 가볍기만 한 행동과 언사.
허나, 두 세계의 업을 모두 짊어졌기에, 그 누구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인간.
“….어쩌면, 우리가 창조주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군.”
[부정합니다. 해당 관리자는 창조주가 입력한 과정에 따라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므로, 창조주의 뜻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칼같이 날아오는 시스템의 답변에 아틀라헤바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시스템은 완고했다. 그는 [서버룸 주소]를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GG에 입력된 권한은 ‘완성자 후보’에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하며, 그제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는 듯 마음껏 웃고 떠드는 저 인간을 누가 성자가 아니라 칭할 수 있겠는가.
프로그램에 불과한 그들이 임명하지 않는다해도, 그는 이미 완성자였다. 안드레이 게드로이츠가 그토록 기다리던 완성된 인간. 드높은 이상을 가진 이는 이상에 파묻혀 타락하고, 바다같은 선의를 가진 이는 세상의 지독함에 깎여나가 쓰러지기에.
마냥 선하지도, 마냥 악하지도 않은.
큰 이상도, 원대한 포부도 없이,
그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세상을 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간.
부드러운 길보다 가시밭길이 편한 정신이상자.
사전적 정의로, 그것을 ‘영웅’이라 부른다.
———
“아악! 놔, 놔라! 그, 그 손 놔라 살라딘!”
“가만 있어봐! 비늘, 발톱, 이빨, 심장! 더도 말고 딱 하나씩만 가져갈게! 그렇게 다음 월드가 걱정되면, 이 정도 기부는 할 수 있는거 아냐! 나 재생력 털려서 좋은 갑옷이 필요하단 말이다!”
“거으어이어! 세이하! 세이하!!!”
“시, 심장을 뽑으면 죽어요!”
“그럼. 나머지는?”
“어…. 비늘이랑 발톱 정도는….?”
“세, 세이하아아아!!!”
———
아각!
끝내 뽑혀나오는 어린 용의 송곳니를 보며 아틀라헤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정해진 것은 정해진 것이니, 여기서 우리끼리 떠들고 있다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그래요. GG의 미래 예측으로는 결국 모든 세계가 멸망하게 되니까, 오히려 예측불허한 선택이야 말로 정답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교수라는 인물의 선택은 오히려 정답이 아니었을까요?”
“답이 아니기에 오히려 옳은 선택이라…. 용으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결론이지만. 그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군.”
만면에 미소를 띈 세계수의 설득에, 결국 드래곤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어리고 말았다.
어찌됐건 완성자는 두 세계 모두 포기한 것이 아니며.
양쪽 모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으니, 어느쪽하나 끝난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아직 할 수 있는 일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붉은 드래곤은 그녀의 레어로 돌아가는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악-!
순간 달라지는 공기. 쇠냄새 가득한 세계수의 공간에서 고즈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레어로 돌아오자-
“아가가각! 그아악!”
“어금니! 용 어금니 목걸이! 올저 30!”
“우이 세사으 그러시으오으어어어어어!!!”
짙은 피냄새와 함께, 용의 아가리에 상체를 허리까지 쑤셔넣은 남자가 있었다.
소중한 창조자의 안락의자에 떨어진 침과 피로 범벅이된 용의 송곳니도.
남자의 다리에 매달린 주황색 헤츨링이 그녀를 향해 울먹이며 달려오는 모습도.
“대모님! 대모님!!! 저희는, 저희는 저 사람을 감당할 수가….!”
“….됐다.”
아틀라헤바는 펴졌던 얼굴을 다시 찌푸리며 반쯤 먹힌 교수를 향해 다가갔다.
어쩌면 이게 정말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싹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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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아악!”
“옳지! 거의 다 됐다 이제! 좀 많이 아플테니까 이 악물…. 아니, 악물면 내가 죽으니까, 그냥 참아!”
“그아우으으! 어, 대모히! 대호히이이이!!”
팔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는 거리에 용의 어금니가 있었다. 손끝을 바들바들 떨어가며 안으로 뻗어나가는데, 속에서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하는 짓이다. 지금 이런 장난이나 칠 상황이냐? 응? 아주 자살버튼 위에서 아주 탭댄스를 추고있으면서?]‘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거 아냐! 이게 장난처럼 보여도 나름 진지하단 말이다!’
[이게 진지한거면 세상의 진지함은 네놈 손에 전부 살해당한게 틀림 없겠군.]하이드는 ‘곱게 몸만 주고 떠난다’라는 선택지를 빼앗긴 이후, 아주 말문이 틔여서 종알종알 떠들어대고 있었다.
‘진짜 진지한데.’
3월드의 끝자락에 대모한테 재생력도 뺏겼지, 다음 월드는 아예 게임 전체가 ‘지옥’이라고 못박아놨을 정도로 끝내준다고 하지.
당장 눈앞에 호구라도 싹 벗겨서 든든한 갑옷이라도 하나 장만 해놔야 어만 동네 떨어져서 순살당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나는 몹시 진지하게, 이 어린 드래곤의 뼈와 살로 완성된 ‘드래곤 나이트 박교수’를 4월드의 첨병으로 삼을 생각이란 말이다. 용가리 통뼈 정도면 어디가서 객사하진 않을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힘차게 어금니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쑤욱!
“아, 안돼! 내 드래곤 나이트 파츠가!”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쑥 뽑아버렸다.
“카하악! 크르르륵! 카욱, 하악!”
“오, 오라버니이이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알다르샥스와 그런 그를 향해 오도도도 달려드는 세니카.
그리고, 용의 침에 범벅이 된 나를 거꾸로 쥐고, 세상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틀라헤바.
“….어차피 지금 손에 쥔 것을 들고 갈 수 없으니, 그러지 말아라.”
“아, 그래요?”
아쉽다는 듯 알다르샥스에게 눈길을 던지는 내게, 아틀라헤바는 날개로 그들을 가리는 것으로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고룡 앞에서 해츨링 생 이빨을 뽑고 있었군. 그래서 저렇게 표정이 안좋나?
“….제법 기분이 좋아보이는구나.”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말을 고르는 신중함이 함께하는 침묵. 고룡은 나와 자판기를 눈에 담으며 브레스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너는 바깥 세상을 구할 확고한 희망을, 방금의 선택으로 매우 불확실하고 낮은 확률속에 다시 던져 넣은 것이다. 어쩌면 두 번다시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할지도 모르지.”
“뭐, 그럴지도 모르죠.”
브레스 한방으로 자연 마나의 속성조차 바꿔버리며, 말 한마디로 사람을 개로 만들고, 개를 팔척 트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반쯤 전능한 드래곤.
그런 드래곤들이 차례로 찾아와서 ‘너 좆됐어 임마’를 온몸으로 외치는데 불안하지 않으면 말이 안되지.
그래도.
“적어도, 이젠 시간 만큼은 많잖습니까? 3 월드에서 ‘지금 이거 안 하면 끝장난다! 지금 이놈 안 죽이면 다 죽는다!’ 하면서 빠듯하게 했던 것과 달리 느긋-하게, 신중하게 섬세하게 작업할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까. 사리면서 해야죠.”
4월드는 조건이 다르다. 내겐 영혼이 닳아 없어질때까지의 시간이 있고, 그런 시간을 요긴하게 쓸 능력도 있다.
엄청나게 큰 그림을 그려야지. 아주 세상을 다 덮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큰 판을 짜고, 뭔가 잘못됐다 싶으면 냉큼 다 엎어버리고 도망가서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렇게 해도, 현실의 시간은 1초도 흘러가지 않는다니까.
실패하지만 않으면. 십년, 백년, 천년이 걸려도 성공하기만 하면! 방법을 찾아내면 GG에 사로잡힌 전자 망령들도 구하고, 바깥 사람들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난 교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공하기만 하면,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완벽한 방안이 아닌가?
내 말에 아틀라헤바는 뭔가 할말을 찾는 듯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쩐지, 드래곤의 얼굴에 체념한 듯한 미소가 걸린 듯 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느니라.”
“예, 뭐. 이제 제가 더 해야될 일은 없는겁니까?”
“없…. 아니, 한 가지. 딱 한 가지가 더 있구나. 그래. 이게 있었지.”
아틀라헤바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짓굳은 미소로 변했다.
“보상을 받아야지.”
.
.
.
.
응?
“보상? 이미 받은 거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고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보상 말고. 어찌 됐건 이것은 게드로이츠의 ‘게임’이 아니냐? 사람이 게임을 했다고 현실의 물건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그래. 이것은 ‘선물’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어울리겠구나. 어찌 됐건 세계를 다음으로 이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우리 모두의 염원을 이뤄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끝내 모두를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그 인사 정도라 할 수 있겠지.”
사락-
고룡의 옆에, 은빛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교수.”
“아, 세계수님.”
“아틀라헤바,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렇게 빨리?”
“다들 원하고 있던 일이다보니?”
“아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어리둥절한 나를 내버려두고 두 관리자가 쑥덕거리는 사이, 바닥에서 은빛 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높이가 10미터, 너비가 4미터는 될법한 엄청나게 큰 은빛의 문.
이게 뭐냐는 듯한 내 눈빛에 아틀라헤바는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거라.”
“어, 4월드로 가는겁니까?”
“아니. 새로운 월드가 준비되는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정도는 지나야 충분히 역사가 흘러가고, 네가 플레이할 준비가 끝날 것이다. 그 일주일 간은 밖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쩌면….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수도 있겠지. 어쨌건, 이 문은 밖으로도, 다음 세계로도 통하지 않는다.”
“?”
그럼 뭔데.
아틀라헤바는, 대답 대신 나를 들어올려 문앞에 내려놓더니,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화아아악!
문이 열리자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흙과 땀 냄새. 고기 굽는 냄새와 꽃향기가 어우러진, 사람냄새.
그리고.
피유우우우- 펑!
파방! 펑! 펑!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려한 마법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끝없이 이어진 환영 행렬.
축제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도시의 거리와 퍼레이드 카.
“….어?”
“TV와 안락의자, 자판기 같은 것을 보면 알겠지만, 창조자께서는 옛것들을 좋아하셨단다.”
“이런 게임의 전통이 아닌가요? 용사는 마왕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낡은 게임속 엔딩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전쟁의 흔적하나 없는 킹스랜드에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큼지막한 술잔을 들어보이고,
고기를 굽는 아낙은 만면에 미소와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색색의 꽃잎이 휘날리고, 하늘에는 5대 교단과 로드릭의 깃발이 휘날리는 축제의 거리.
그리고.
그리고.
“일종의 엑스트라 스테이지란다.”
“다음 월드를 위해 데이터 소울을 모두 소집한다는 것은, 너와 함께했던 이들을 이 자리에 초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니.”
은색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드러난 것.
축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퍼레이드 카.
그 위에, 꽃다발과 함께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화려한 황족의 예복을 입은 루실라와 가이낙스.
지팡이를 든 노툼과, 지금도 수첩에 무언가 그려넣는 중인 이드라실.
어느새 반백이 되어버린, 알드리치.
그 사이 약간 키가 큰 아스트라드.
“그우우. 축하한다. 교수.”
“당신을 배울 수 있어 행운이었습니다.”
“제국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소. 성자.”
“용사님은 아에드란의 역사에 다시 없을 최고의 거래였고, 제 인생 최고의 투자였어요!”
“네놈은 참…. 불가능한 일을 당연하다는 듯 해버리는구나.”
“참 재미난 폭풍이 아닙니까? 이토록 몰아치는데, 지나간 자리에는 안식만이 가득하니.”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나의 일행. 나의 파티.
그리고.
“물이 흐르다보면,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이치가 아니겠는가?”
“오트만님….”
“좋아보여서 다행이오, 대장.”
“보르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떠나간 동료들.
산자와 죽은자, 3월드에서 나와 인연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성기사들과 함께 주택위로 기어올라 광명 교단의 깃발을 흘들어대는 그레고리우스.
언젠가 투란에서 내 보증을 서줬던 경비병.
추방당한 엘프마을의 대모.
제국의 전대고수들.
.
.
.
.
스텝롤처럼 하나 둘 퍼레이드와 함께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피유우우-펑!
[World 3 Cleared!]하늘을 수놓은 마법사의 화려한 불꽃들.
월드 3. 클리어.
이번 만큼은, 이번 만큼은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퍼레이드가 끝나는 순간까지, 어떤 말도, 어떤 감사한마디 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드르르륵. 덜컥!
행렬은 로드릭 왕성 앞에서 멈추었다.
화관으로 만들어진 차양과, 그 뒤에 가린 두 사람.
시오드 4세와 샬롯이라면 한참 전에 축제 행렬에서 만났다.
툭툭.
말도 못하고 입술을 벌벌 떨고있는 내 어깨에 오트만의 손길이 닿았다.
“읏차. 우린 잠시 있다가, 연회장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어, 으, 어디…. 가십니까?”
“어딜가긴. 우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 용사 파티’인데, 설마 자네같은 사람 옆에서 눈치하나 못배웠을줄 아는가?”
눈치. 눈치라니. 도대체 왜 눈치를 보고 빠져준단 말인가. 이렇게 다시 만난 이 순간의 1분 1초가 아까운데.
대답 대신, 보르카가 내 등짝을 걷어차버렸다.
퍼억!
콰당탕탕!
반응도 못하고 형편없이 날려간 나와, 뒤로 물러나는 마차 위에서 들리는 일행의 웃음소리.
찰팍-
[생각해보시게, 교수. 이 공간은 GG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 소울이 모이는 곳이라네. 누구라도, 이 게드로이츠의 게임 안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 초대될 수 있지.]오트만인 동시에, 현실의 기억을 되찾은 영혼이 마법으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자네가 정말로 만나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야 물론 영광이다만, 정말 이곳에서의 인연을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한가?] [인류의 90%이상이 플레이했던 게임속에, 자네가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 뿐인가?].
.
.
.
.
.
그럴 리가.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형편없이 넘어진 내 머리위에,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GG의 영혼들이 한때 세상에 존재했던 이들이라면.
만약 이 자리가, GG에 존재하는 그 어떤 데이터 소울과도 재회할 수 있는 자리라면.
그들이 단순한 복제가 아닌, 정말로 사라진 그들과 같은 존재임을 알고있는 지금이라면.
“….결국 약속을 지켜줬구나? 우리 아들.”
“애가 어렸을때부터 특출나긴 했지.”
어머니.
아버지.
너무나 큰 상처가 되어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던 두 사람.
퍼레이드의 종착점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두 분의 데이터 소울이었다.
“잘…. 있었니?”
말과 말 사이의 간격.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말과 감정이 목구멍을 간질이다, 끝내 나오지 못한 것을 알기에.
“….하고싶은 얘기가, 너무,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나 또한, 사라진 말들로 그 간격을 매울 수밖에 없었다.
폭죽과 환호성소리가 아련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직 세 사람만 존재하는 왕성에 부드러운 차양이 내려졌다.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눈물이 터져나왔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으리라.
적이도, 이 자리에서는.
나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오직 이 두 사람 앞에서만 허락된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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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6 성자와 완성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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