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84
Chapter. 17. 여행 준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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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내줬느냐.”
“제가 잘할 게 뭐 있습니까. 가는 건 하이드인데.”
눈을 떠보니 세계수와 아틀라헤바, 헤츨링 남매까지 관리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뭐랄까. 기분이 참 묘하다.
뭔가 허- 하다고 해야 하나? 내 생각이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게 이렇게 생소할 줄이야.
지난 2년 동안 내 생각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보내는 의견이 되었으며, 내가 도저히 답이 없다고 떠올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나름의 조언이 찾아오곤 하였다.
하이드 없이 혼자 하는 생각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왜 이러고 있지? 할 정도로.
“익숙해지겠죠, 뭐. 평생 없이 살아왔는데, 없다고 뭔 일 있겠습니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고생했느니라. 여러모로.”
“예, 뭐. 아무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아까 말했다시피, 지금부터 너의 3월드가 끝난 시점에서 역사를 흘려보낼 것이다. 오류가 많아진 만큼 다소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겠지.”
역사가 흘러간다. 2월드와 3월드가 70여 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4월드도 지금 시점에서 한참 지난 시간이 될 것이다.
“….얼마나 지났는지 지금 알 수 있습니까?”
“아니. 앞으로의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우리도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알 수 있지. 아마 네가 4월드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쭉 둘러볼 시간은 가질 수 있을 게다.”
“편리하네요.”
“편리하다라…. 글쎄.”
내 옆에 앉아 있던 세계수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 끝내 말을 삼키고는 작은 손으로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런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아틀라헤바가 말했다.
“일주일.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정도면 준비가 끝나있을 테니, 그동안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면 될 것이다. 오랫동안 바깥의 공기를 마시지 못하지 않았느냐? 일주일이 빠듯하다면 조금 더 있다 와도 좋다.”
“그래. 되도록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고 왔으면 좋겠구나. 앞으로, 음…. 너의 나날들을 위해.”
“일주일이라…. 밖에서 더 놀다 오면, 그만큼 서버룸의 데이터 소울이 오염되는 정도도 늘어나겠죠?”
“하루 이틀 정도로 치명적이진 않겠지만, 아니라고는 못 하겠구나.”
“그렇다면야 뭐.”
“….준비가 됐으면, 평범하게 로그아웃을 하면 된다.”
“아, 그래요? 그럼 일주일 뒤에 봅시다! 로그아-”
“물론 바깥의 네 ‘몸’은 기존의 것과 많이 다를 테니, 다소 충격에는 대비해야겠지.”
“아….”
맞네.
현실로 못 돌아간 지가 한참 되어서 잊고 있었는데, 지금 접속기에 붙어있는 내 몸은 그 예술가 놈들과 비슷한 상태, 2.5형 언저리였다.
데이터 소울로 어찌어찌 의식을 살렸을 때 사진으로 봤던 모습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는데. 거무튀튀하고, 뭔가 좀 뾰족뾰족하고, 얼굴은 뒤로 잡아당긴 것처럼 눈꼬리며 입꼬리며 사납게 치솟아 있고….
사이즈가 얼마나 됐더라? 무슨 건담 같은 거 거치해놓는 틀에 안착되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간중간 소식으로 뇌가 회복되면서 사이즈가 많이 줄었다고는 들었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인간 박교수로 돌아가고 싶은 거지, 비밀병기 ‘디스트로이어 박 MK-2’ 같은 꼴로 되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거든.
‘이거 확 와닿네.’
하이드가 딱 바깥의 내 모습을 형상화했었지. 그놈이 내 낡은 소파에 딱 맞을 정도였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현실. 현실이라….’
막연하게 나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진짜로 나갈 때가 되니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가 없는 사이 사람들이 변종 고기를 뜯어 먹고 변종 껍데기로 갑빠를 만들어 입고 다닌다지 않나.
38구역 사태 이후로 1,2형보다 독자적인 디자인을 가진 변종이 더 많아졌다고들 하지 않나.
BDSM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 일곱 살짜리 꼬맹이가 ‘나도 커서 BDSM이 될 거야!’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하질 않나.
‘아, BDSM. 그러고 보니…. 천류제가 지금 나 만나러 와있다고 했지?’
제기랄. 벌써부터 잃어버린 내 듀얼코어 메모장이 그립다.
하이드가 있었으면 지금쯤 ‘현실? 어디 보자…. 뭐 있었고, 누가 만나러 왔고, 누가 메시지 보냈고, 천류제도 만나야 하고….’를 줄줄 읊어줬을 텐데.
천류제. 래빗 프린세스. 둘 다 지금 내가 있는 ‘관리자의 공간’에 도착한 월드 클리어 플레이어이며, ‘완성자 후보’로서 보상을 타간 사람이다.
지금도 내 눈앞에 있는 보상 자판기. 이제는 [SOLD OUT] 이 붙은 칸이 네 개가 된, 반쯤 비어버린 보상목록.
“세계수. 뭣 좀 물어봐도 됩니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래빗이랑 천류제는 뭐 받아갔습니까?”
지금 남아있는 것만 해도 ‘게드로이츠 드론 통제권’ / ‘50인 규모 우주기지 이주권’ / ‘인류의 희망, 서버룸 좌표’ 등 기라성 같은 보상이 줄줄 늘어서 있었다. 앞서 팔려간 세 개가 이것보다 못하다고는 볼 수 없겠지.
‘현실에서 그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놈들이라면,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그만큼 큰 힘을 가지고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암중에 무언가를 꾸몄다는 이야기이며.
더욱이 그 둘 모두가 지금 돔에 있다고 하지, 최소한의 정보는 알고 가야겠지 싶었다.
“나가서 쉬고 오라고 말한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어째, 나가기도 전에 전의를 불태우는 것 같구나?”
“에…. 뒤가 켕기면 편히 쉴 수 없잖습니까?”
“하아아. 그대는 정말….”
당장 초 단위로 목구멍이 바짝 타는 세계에서 막 전쟁 끝낸 인간한테 뭘 바래.
세계수는 나를 못 말리는 아이 보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천류제 그 아이는, 고행하는 수도승 같은 아이였지. 스스로의 완성에 대한 집착이 아주 높았기에 우리도 많이 기대했단다. 정작 우리가 ‘완성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멸을 표했지만.”
“천류제라. 기억이 나는구나. 내가 드래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검을 뽑아 달려들었지. 삶의 모든 것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에만 집중되어있는 사내였느니라.”
검을 다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검을 다루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두드려 어떠한 도달점에 이르는 것을 완성으로 삼았던 남자.
“‘강함’에 대한 어떤 분명한 목표가 있는 듯했지. 물리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으나, 이미 그 또한 뒤틀릴 대로 뒤틀린 사람이라 정신적 성숙과 육체적 강함 사이의 구분이 어그러진 지 오래였어. 그런 자가 선택할 것은 정해져 있었지. 3번, [군사 프로젝트 T-42 / 초감각화 훈련 프로그램]을 선택했단다.”
“군사 프로젝트면…. 렙터에서 약탈해간 ‘사이보그화 시술’이나, 돔의 ‘메이어 제우스’만 남기고 전부 파괴된 ‘도시 요새화 프로젝트’, 38구역의 ‘오르페우스’랑 같은 종류인 것 같은데…. 그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총의 격발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감각을 키워준단다.”
“….격발을 보고?”
“그래. 단순히 총구와 직선상의 경로를 피하는 게 아니라, 점 단위 탄착지점을 포착하고 피할 수 있을 정도지.”
시발. 먼저 와서 그거 달라고 할걸. 재고 남아있는 거 없냐고 물어보기나 할걸!
저번에 이안이 ‘십자 포화를 맨몸으로 뚫고 장갑차를 레이저 전기톱 한 자루로 털었다!’ 할 때는 그냥 우스갯소리로 듣고 흘려넘겼는데, 보상을 확인한 지금은 그게 다큐로 다가왔다.
‘군사력. 그쪽 보상은 실질적인 군사력에 해당하는 보상이었군. 개인 세력을 초인으로 만들 수 있는 보상.’
천류제는 이미 2월드 플레이에서부터 초인적인 반응속도와 전투 센스를 보여주던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현실에서 그런 감각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을 손에 넣었다고?
‘이거 밖에서 천류제가 [나의 4월드는 이 황무지다] 하면서 또 무쌍 찍는 거 아냐? 가능하겠는데? 설마, 날 찾아왔다는 게 예전에 그놈 3월드 할 때처럼 [강자로군. 죽인다.] 하면서 찾아온 건가?’
밖에서의 내 이미지를 살펴보자.
38구역의 비극을 홀로 막아낸 영웅.
변종의 육체를 가지고 아직 인간의 의식을 놓지 않은 초인.
사실상 인간 쪽 아군인 2.5형 변종, 적응자.
….누가 봐도 천류제가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만한 ‘강자’가 아닌가!
어느덧 회복 축하 퍼레이드 중,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이저 쏘우(razor saw)인가 뭔가 하는 독문병기를 슬그머니 뽑아드는 놈의 모습이 제법 디테일하게 상상될 무렵, 뭔가 이상한 점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저 기술이 실존했다면, 왜 나는 전쟁터에서 캡틴 아메리카나 캡틴 유럽, 캡틴 이스탄불 같은 초인을 만나지 못했지? 핵 비축량이 모자랄 정도로 날려대는 상황에서 윤리나 인권 같은 걸 따지는 사령관은 남아있지도 않았을 텐데? 대전차 총검술도 마이너 천류제 수백 명이 쓰면 융단폭격급 대재앙이 아닌가?
“….혹시 그거, 하자 있습니까?”
“물론.”
혹시나 하는 질문에, 역시나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GG의 플레이에서, 오직 감각과 관련된 부분만 남겨서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프로그램이니. 실험자의 80% 이상이 초감각화 훈련 시작 직후 1분 안에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나머지 20%는 긴급 중지된 훈련 이후 10단계 이상의 환각통을 24시간 겪다가 쇼크사하거나, 자살해버렸지. 말이 초감각화 훈련이지, 전신의 신경을 날로 발라내어서 그것에 가해질 수 있는 모든 자극을 때려 넣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란다.”
“와우.”
훈련이 아니라 유사 이래 최고의 고문이로군. 천류제는 그걸 버텼다는 소리겠고.
“천류제. 그 아이는…. 어찌 보면 교수 너보다 더 일찍 너와 같은 단계로 접어든 사람이니까.”
“나와 같은 단계요? 뭐, 변종?”
“글쎄. 그건 나가서 직접 물어보려무나. 개인사에 해당하니.”
거 사람 간질간질하게 해놓고, 딱 아쉬운 부분에서 끊으신다. 같은 완성자 후보끼리의 정보라 어느 정도는 락이 걸려있는 모양이다.
‘어디 보자…. [천류제는 현실에 만들어진 초인이다.] 함부로 깝치면 안 되겠군.’
당장 나가서 만나야 될 상황에 좋은 정보를 얻었고.
다음.
“그럼, 나머지 두 개는 뭡니까? 1, 2월드 클리어한 래빗이 가져갔죠?”
“영리한 아이였지. 밝고, 재치있고, 야망도 있고. 그 아이도 분명히 서버룸의 좌표를 원했단다. ‘저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면, 좌표를 공개하는 순간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이벤트가 될 거다’ 라면서 말이지.”
“어…. 평소 방송하는 꼴을 보면 그 여자답다고는 할 수 있겠는데…. 그럼 왜 아직 남아있는 겁니까?”
“그게, 래빗은 우리 생각보다 더 꿈이 컸지 뭐니.”
타고난 관찰력과 센스.
단순히 이성에 국한된 매력이 아닌, 사람을 끌어들이는 빛나는 매력.
래빗은 관리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완성자 후보였다.
그런 그녀가 1월드를 클리어하자 관리자들은 기대를 한껏 품고 그녀를 이 공간으로 초대했으며, 인류 최초로 보상 자판기를 마주한 래빗은 이렇게 말했다.
‘와! 정말,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걸요?’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정말,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다 가지기로.
전부 다. 오롯이 그녀의 손에 넣기로.
“….지나치게 영리했지. 어찌 보면, 창조주께서 바라던 완성자에 가장 가까운 아이였단다. 영민하고, 능력 있으며, 많은 상처를 극복하여…. 무뎌진 영웅.”
“플레이어 래빗 프린세스가 고른 첫 번째 보상은, 5번. [세이브/로드 권한]이란다.”
“….뭐?”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네가 아는 그 권한. 게이머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지.”
“그딴 걸…. 넣어 놨다고? 게드로이츠가?”
전세계 물류 유통 권한.
우주 거주권.
초인화 프로그램에 개인 시간 무한, 인류의 희망까지 온갖 권한을 미리 확인한 터라, 웬만한 권한은 ‘오, 그거 좋겠네’ 수준으로 반응할 자신이 있었는데.
맹세코! 저건 정말로 예상 못 했다.
로드? 세이브 로드? 게드로이츠의 게임에서, 플레이어한테 그걸? 게드로이츠 본인이?
“사기 아닙니까?”
“래빗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현실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없는 그것을 첫 번째 보상으로 선택했지. 그 아이도 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앞으로의 월드는 더욱 험난해질 것이라고. 우리는 그게 서버룸 좌표 선택을 부추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아이의 생각은 달랐던 거야.”
1월드는 아직 오염이 지금처럼 심하던 때가 아니라 3월드에 비해 난이도가 쉬웠다고 한다. 플레이어의 부족이 있고, 적대하는 부족도 있지만 중립 부족도 많았던 원시의 세계.
래빗은 보상이 전부 가지고 싶었고, 앞으로 이런 기회를 얻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에 [세이브 로드 권한]을 고른 것이다. 게이머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나머지 보상을 얻기 위한, 일종의 선투자 개념으로.
나의 플레이에서 찰나의 선택이 무수한 희망과 비극으로 갈리는 것을 봐왔다. 래빗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확인한 뒤, 가장 이상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 ‘로드’를 하며 2 월드를 클리어 한 것이다.
타고난 능력이 이미 한 월드를 클리어할 정도로 있었음에도. 그녀는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래빗 프린세스는 그것으로, 월드 클리어 보상 일곱 개를 전부 차지하고자 했다.
“….방송은. 그렇게 로드를 해댔다면, 방송은 어떻게 한 겁니까?”
“잊었니? 최초의 월드 클리어 이후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돈이 쏟아졌던 것을. 래빗의 2월드 방송은 전부 녹화, 편집된 영상이었단다. 실제로 방송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 그녀는 방송 없이 플레이하며 결과를 확정 지은 뒤, 편집된 영상을 틀어놓고 실시간으로 목소리만 내보냈단다. 정말 티 하나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말이야. 재주라면 재주지.”
‘그래서 개인 거주용 쉘터를 그렇게나 크게 짓고, 그렇게 많은 스태프들을 고용한 건가.’
야망이 있는 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스케일이 어마무시하게 크고, 그 허무맹랑한 꿈이 현실적이라 놀라웠다.
래빗의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의 비밀.
세이브 로드. 정상급 플레이어가, GG를 오롯이 게임으로만 대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
3월드를 왜 클리어하지 못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래빗은…. 끝내 GG 속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한 겁니까?”
“단 일고의 가치조차 생각하지 않았지. 선한 아이였고, 재기 넘치고 영특하며 능력 있는 아이이기도 했어. 그저, 완성자가 아니었을 뿐.”
세이브 로드란 결국 게임 내적 능력. 이미 오염에 의해 클리어 불가 단계가 되어버린 GG에서는, 이 무대에 준비된 것을 100% 활용한다고 해서 클리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기적. 어떤 성장.
어떠한, 게임 외적 성장과 영향이 분명히 필요했고, 순수하게 게이머로서 GG를 대한 래빗은 오염에 점철된 3월드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겠지.
“2월드 클리어 보상은?”
“3번 보상. [게드로이츠 커뮤니티 관리자 권한]”
“언론 통제라…. 확실히 지향점이 있는 여자는 맞네.”
래빗의 2월드 클리어가 현실 시간으로 3개월쯤 걸렸으니, 티끌만큼의 흠을 발견한 시청자가 나올 때도 됐을 것이다.
커뮤니티 관리자 권한이라면 모든 의혹을 제멋대로 무마하고, 그녀의 영상이 더 큰 인기를 누릴 수 있도록 조작할 수도 있겠지.
아마 커뮤니티에 ‘래빗 방송 저거 이상하지 않냐?’ 같은 글을 올리면 순식간에 지워지지 않을까? 어쩌면, 그걸 올린 사람의 주소를 추적해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지 않았을까?
“월드 스타의 비밀이라. 씁쓸하군요.”
“우리는 어땠겠니. 그렇게나 기대했던 인물이, 완성자와 정반대에 가까운 인물임이 밝혀졌는데.”
세계수의 얼굴에도, 아틀라헤바의 얼굴에도 씁쓸한 미소가 드리웠다. 하긴, 고작 일곱 개뿐인 보상을 두 개나 처먹은 인물이 GG를 단물만 빨아먹고 버릴 생각만 가득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그렇다고 창조자가 정해둔 과정을 밟아 보상 타먹은 플레이어한테 사적 제재를 가할 수도 없고.
래빗을 탓할 수도 없는 게, 선악의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면 순수하게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해봐야 게임인데. 해봐야 데이터 쪼가리인데 닳으면 뭐 어때. 사장되기 전에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래빗은 지극히 황무지 사람다운 플레이를 했네요.”
좋은 걸 들었다. 래빗 프린세스가 앞으로의 월드를 클리어하긴 힘들다 쳐도, 가지고 있는 ‘커뮤니티 관리자 권한’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언론 통제라. 이 녀석과도 나가서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네가 밖으로 나가면, 아마 두 완성자 후보가 너를 찾아올 거란다. 둘 다 월드 클리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테니, 네가 어떤 보상을 선택했는지 알고 싶어 하겠지.”
“모쪼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수많은 기다림과 실망 끝에 겨우 찾아낸 네가 아니더냐? 밖에서 허무하게 사라진다면 그런 비극이 또 있을 수 없으니.”
“께르륵! 살라딘, 기다리고 있을게요!”
“잘 쉬고, 건강하게 돌아와요! 끼룩!”
관리자들의 인사가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현실.
변종과 뒤섞인 내 몸.
두 완성자 후보.
돔. 렙터. 변종. 내 친구들….
“스읍- 후우우.”
심호흡과 함께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반투명한 상태창과, 이제는 선명하게 불이 들어온 ‘로그아웃’ 버튼.
띠링-!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Y/N]살며시 손끝을 올리자, 언제 사라졌냐는 듯 선명한 시스템의 음성이 현실로의 복귀를 물어왔다.
간다. 드디어 간다. 우여곡절 끝에, 삼도천에서 래프팅을 하다시피 한 끝에, 살아서 돌아간다! 현실로!
“그럼, 일주일 뒤에 봅시다!”
“….부디.”
세계수의 마지막 말끝이 흐려짐과 동시에 세계도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이드가 떠날 때와 같은 부유감.
잊고 있던, 로그아웃의 감각.
‘돌아간다.’
긴장과 설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천천히 검게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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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삐….
“바이탈.”
“안정됐습니다.”
“변종 바이러스는?”
“우리 샘플 중 이렇게까지 안정된 바이러스도 없었습니다. 이쪽은 다른 것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잡담은 집어치워.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까.”
커다란 연구시설.
눈이 아플 정도로 조명이 환히 밝혀진 가운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과 파란 작업복을 입은 엔지니어들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파랗고 하얀 사람들 가운데, 검은 가죽 재킷이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선글라스 남자와 그 부하로 보이는 남자 둘.
왜소하고 키가 작은 남자와, 휠체어를 탄 여자 하나, 노인 하나.
당장 전기 충격이라도 꼽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날뛰는 덩치를 부하 둘이 말리는 가운데, 기도하듯 손을 모아 쥔 나머지 사람들은 누워있는 인간형 괴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형 괴수. 놀랍게도 실험실 천장에 닿을 듯했던 몸집은 평범한 성인 남자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연구원들은 안쪽의 인격이 활성화되며 육체와 연결이 강해질수록 변이 전의 형태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추측했지만, 정확한 판단의 근거는 한참 부족한 상태.
….톡톡.
“음? 벡스, 왜요?”
“[기도/대상/기독교/광명교/선택]”
“푸훗! 그러니까, 이쪽 신한테 빌어야 할지, 로하람한테 빌어야 할지가 헷갈린다 이거죠?”
“[긍정]”
진지한 얼굴로 기도 끝에 ‘아멘’을 붙여야 할지, ‘라투라’를 붙여야 할지 묻는 벡스의 수화에 다나는 옅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장난처럼 대답하기엔 일생일대의 선택처럼 진지한 얼굴.
“둘 다 하면 되지 않을까요? 교수의 몸은 이곳에 있고, 정신은 아직 저쪽에 있으니.”
톡톡.
“[의견/수립]”
다나의 말에 확신이 들은 듯, 벡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교수의 영상에서 성기사들이 중얼거리던 기도문의 일부를 외운 것 같았다.
삑- 삑- 삑- 삑-
“심박이 급증합니다!”
“의료팀 대기! 혹시 모를 사태가 있을지도 모르니, 감찰부 요원들은 무장을-”
“필요 없어. 박교수 대신 괴물이 들어있으면, 그땐 내가 처리할 거다.”
철컥!
마지막 말끝에는 어느새 샷건을 뽑아든 이안이 끼어들었다.
빨라져가는 심박음과 담뱃불 붙이는 소리. 긴장한 사람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연구실을 누비는 가운데.
삐이이이-
거친 그래프를 그리던 녹색의 선이 침묵하고, 들썩이던 몸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울먹임이 터져 나오는 순간.
….철그럭!
교수를 실험대에 묶어둔 사슬이 요동쳤다.
사슬을 끊어질 듯 당기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존재.
철컥!
“….교수냐? 맞으면 손을 흔들어라. 만약 대답 못 하면…. 망할 변종 씨발새끼가 내 친구를 잡아먹은 것으로 간주하겠다.”
철그럭- 철그럭!
이안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발버둥 치는 실험대 위의 존재.
악물려진 어금니에 잘려나간 담배가 떨어지고, 긴장한 벡스가 총을 걷어차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 사이-
태에엥-!
기어이 끊어진 사슬 하나가 놈의 손을 해방했다.
터질 듯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들어 올려진 손은, 천천히 손가락을 접어.
“….이 새끼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생환한 것이, 그들이 알던 사람임을 알리는 신호.
“끄으으으…. 멍청한 새끼야….”
“….교수냐? 씨발, 진짜 너냐?”
“식물인간이었던 사람이 깨어났는데…. 눈을 깜빡이라든가 해야지…. 멍청한 새끼가….”
….털그럭!
“이이이, 느려 터진 새끼가! 기어이!”
“해에에에…엡, 번!”
총을 떨어트린 이안이 달려들고, 그를 말릴 준비를 하던 벡스도 달려들었다.
교수는 묘하게 겹치는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두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대놓고 펑펑 우는 벡스와, 선글라스로 눈은 가렸지만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이안.
문득, 돌아와서 이 녀석들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다시 해.”
“뭐? 해! 하고 싶은 거 다 해! 뭐가 하고 싶은데, 뭐가!”
“나 들어가기 전에 했던….거.”
손가락이 벡스를 가리킨다. 1등.
다음으로 이안. 2등.
그리고 그 자신을. 3등.
3월드에 수감되기 전, 그의 접속기 안에서 만난 이안에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다음 나눴던 이야기다.
———
‘씨발 다시 해…. 벡스 데려와….’
‘그 새끼는 나도 못 이겨. 니가 3등이다, 박교수.’
‘애미….’
———
“….지금 다시 붙어, 개새꺄.”
교수의 몸을 타고 오른 두 친구의 귀에, 변종의 무시무시한 근력으로 주먹을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 써도 되냐?”
빠아악!
슬그머니 떨어트린 샷건을 향해 손을 뻗는 이안에게 벡스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자, 잘…. 잘 복귀, 환수, 어… 귀, 귀환! 잘 돌아왔….어….”
몸 상태가 어떻든, 내가 돌아온 게 마냥 행복한 벡스.
그리고.
꼬오옥-
그들 옆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와 내 목덜미를 꼭 끌어안는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떨어진 이안이 벡스를 잡아 끌어내리고, 그렇게 자유로워진 한쪽 팔로, 나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녀왔어.”
“어서 와.”
다녀왔다.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을, 내가 입에 담게 되다니.
병원 냄새가 섞인 다나의 살내음 속에서, 마침내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나와 나는,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마냥 생각 없이 편히 있을 수 있는 곳도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왔다.
집으로.
나의 황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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