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86
Chapter. 17. 여행 준비(4)
****
행정부 뒷문으로 빠져나와 감찰부원들이 이용하는 뒷길로 내달리기를 몇 분.
“다행히, 이쪽에는 없는 것 같아.”
“이런 일이 익숙해 보인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유명인사니까. 보통은 외출할 때 이안이나 벡스가 같이 나와주는데, 혼자 나올 일이 있을 때면 이런 뒷길의 도움을 받기도 했거든.”
“유명인이라…. 현실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좀 어색한데.”
“익숙해져야지. 지금 당신은 회복한 것만으로도 그 소식이 커뮤니티에 도배가 될 정도의 유명인사니까.”
끼이익-
위장된 문이 열리자 훅 끼쳐 들어오는 습기와 곰팡이 냄새. 아무래도 외부의 창고 같은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나 보다.
잠깐 사이에 지친 다나가 근처의 낡은 상자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기에, 나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아, 잠깐만 정리를 해보자고.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자칭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 사람들이다?”
밖에 나오자마자 『라투라!!!』하는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들리길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농담 아냐. 진짜로 둘 중 하나는 잠시 부르르 경련하며 멈췄을 거라고.
아닌 게 아니라, 난 저 소리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기어 나온 지 얼마 안 됐단 말이다.
어디까지 생각이 들었냐면, [알고 보니 전쟁은 비참하게 패배했고, 원한에 사무친 에데오르나는 패배한 나를 목숨만 붙여 끌고 온 다음 통속의 뇌로 만들었다.] 까지 상상했다.
그럴 수도 있잖아? 3월드 끝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해피 엔딩이었으니까. 그렇게 행복한 상상에 뇌를 절여놓은 다음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서늘한 북부의 암굴이 눈앞에 펼쳐지고, 에데오르나가 잔인한 미소와 함께 머리만 남은 내게 다가와 ‘인간, 내가 준비한 꿈은 즐거웠느냐.’ 하면서 다시 고문을 이어나가는. 뭐, 그런 전개는 아닐까….
.
.
.
.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진짜 놀랬다! 제기랄, 다음에 병원 갈 때는 심리 상담도 받아야겠어! 워낙 현실이랑 여기저기 섞인 게임이라 아직도 빠져나왔다는 실감이 안 들잖아!
“확실히, 저 사람들이 조금 극성적인 면이 있긴 해.”
그런 나의 감상을 들은 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진짜로 종교적인 제의나 그런 건 없는 놈들이지? 저 정도 규모면 GG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발현될 수도 있거든?”
“음….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어. 우선, 실질적으로 종교적인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 않은 집단이야. 애초에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의 전신은 ‘박교수 공식 팬클럽’이니까. 종교집단이라기 보다는, 팬덤의 성향이 강한 집단이지.”
“휴우우!”
한시름 놨다. 혹시나 다음에 접속했을 때 노먼 대주교가 히죽거리며 ‘성자님. 제가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드셨는지?’ 하며 음흉하게 웃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시작은 작은 소모임이었다고 해. 당신도 알다시피 돔의 영향권 내에 보호받는 사람들은 각자 부여받은 직업이 있고, 사는 게 꽤나 빡빡한 편이야. 대부분 사람들의 취미는 커뮤니티의 글을 읽거나 방송을 보는 것이 고작이지. ‘박교수 공식 팬클럽’의 소모임도 그런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 하는 의미에서 시작됐다고 해.”
발전기 노동자로 하루종일 페달을 밟아 받아온 배급용 식사 한 그릇. 밍밍한 죽도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안주 삼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했기 때문에, 하루 일과가 끝난 사람들은 난민촌 구석의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낡은 영사기로 내 방송을 보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돔 곳곳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모임과 다르지 않다. 이런 모임이 내 방송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알다시피…. 당신 방송은, 객관적으로 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칠만한 부분이 많거든.”
“내가?”
“그래, 네가. 당신은 황무지 사람들 속에서 이미 닳아 없어진 것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 방송에 나오는 장면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을 위해 피 흘리고 애쓰는 모습이고, 그걸 보고 ‘아,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고 개과천선하는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잊고 있던 것을 한 번쯤 되새기는 계기 정도는 되어주는 거야.”
난민촌. 난민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완벽하게 정부의 관리를 받지 못하는 집단이다. 애초에 수용 인원 이상이 사고로 밀려 들어온 것이니까.
인력 발전기 노동자가 하층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돔의 보호 안에는 들어가 있으며, 난민촌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47구역까지 오는 데 힘을 다 써버린 노인. 돔의 고아원이 미어터져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 고아. 장애인, 환자, 기타 등등.
고된 노동을 끝내고 오늘치 배급을 받아먹던 ‘박교수 팬클럽’ 무리의 눈에 어두운 구석에서 주린 배를 틀어쥔 빈민들이 보였다.
손에 들린 먹다 만 칼로리 바 반 토막.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 속 우상, 성자 박교수님의 모습.
‘….오늘은 속이 좀 더부룩한걸. 거기, 노인장!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쇼! 날도 추운데.’
‘나, 나 말입니까?’
‘거기 댁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그럼. 뭣 좀 드셨소?’
‘아아니, 아직….’
‘그럼 이거 드시고, 세상 살던 얘기나 좀 해주쇼. 마침 교수님이 이동하는 부분이라 조금 지루했거든.’
‘교, 교수….님? 이 세상에 아직 대학이, 남아있습니까?’
‘음? 박교수 님을 몰라? 이 사람 이거 안 되겠구만. 잠깐 기다리쇼. 어이- 제임스! [제국 결전] 녹화해둔 것 있지? 그것 좀 틀어봐!’
선망이란 그 대상을 추앙하며, 나아가 그것과 닮고자 하는 마음이다.
‘박교수 공식 팬클럽’의 사람들은 선망하는 대상의 행동과 그들의 차이 속에 어떠한 정신적 갈증이 생겨났으며, 어느새 그것에 대한 해갈을 위해 오늘 받은 배급을 나누고, 더러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누는 문화가 생겼다.
각자 품에 안고 퍼먹던 그릇은 누군가 가져온 낡은 테이블 위에 차려졌고,
식사는 조촐한 만찬이 되었으며,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들로 인해 어느덧 ‘박교수 공식 팬클럽’ 모임은 감찰부에 정기 집회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커졌다.
사람이 모이니 그만큼 ‘남은 것 나누기’의 규모도 커졌으며, 개인이 하기에 복잡해진 행사를 도맡아 할 누군가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창설된 것이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
교주, 박교수(자리 비움).
나머지 전부, 그냥 신도.
“그렇게 모인 기금은 공식적으로 ‘광명 교단’의 이름으로 행정부에 기증되어 여러 곳에 사용되고 있어. 최근에 난민촌 제일 후미진 곳에 길이 정리된 것도, 무상 배급이 조금 더 늘어난 것도 그 사람들 영향이 있지.”
“….기부금으로 길을 놓을 정도라고?”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커. 알잖아? 난세에는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는 거.”
알지. 다만,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그 사이비 종교의 신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는 게 문제지.
팬클럽으로 시작해서 종교집단 비스무리한 게 된 것이 황당하긴 하다만, 규모가 이쯤 되면 마냥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잡음이 없을 리가 없는데. 이렇게까지 선한 평판을 유지하면서 규모를 키워왔다는 건…. 대가리가 하나쯤은 있다는 거 아냐? 누구야? 나 없는 동안 사이비 종교를 여기까지 키워낸 팬클럽 회장님이?”
특별한 기치 없이 자연스럽게 모인 집단이라는 것은, 곧 그만큼 단단한 구심점이 없다는 것. 팬심 하나로 집단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누군가, 이 기회를 아주 제대로 잡아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의 통치자 자리를 반석처럼 굳혀놨다는 뜻이다. 자리를 비운 신화적 존재와 그분의 뜻을 받드는 사제. 이렇게 보니 나름 종교적 구조의 정석을 밟아나가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꽤나 머리 쓰는 놈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안 그래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지금 만나러 가려고.”
“….지금?”
“배고프다며? 부활한 성자 교수님의 첫 식사가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의 시발점인 가난한 만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
“어…. 그건 확실히 그림이 되긴 하는데…. 그럼 아까 정문에서는 왜 도망친 거야 어차피 만나러 갈 거면서. 나야 당황해서 그렇다 쳐도….”
“이렇게 뭐하는 사람들인지 설명을 듣고 만나는 거랑, 그냥 무작정 마주하는 거랑 차이가 좀 있으니까. 내 설명만 들으면 마냥 좋은 사람들 같지만…. 솔직히 조금 극성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
“극성적이라면, 아까 행정부 정문에서 본 그 사람들처럼?”
“음…. 비슷해. 당신 방송 틀어놓으면 『라투라! 라투라!!』 하다가 기절하는 그런 사람들.”
“윽. 그거 성기사급이잖아.”
걔들도 내가 옆에 지나가면 수시로 막 휘청거렸다고. 제정신 유지하겠다고 막 속사포처럼 기도문 읊어대면서 눈을 부릅뜨는데, 그런 놈들이 좌우로 도열한 길을 지나는 것도 고역이었단 말이다. 무서웠다고.
다나의 설명에 더욱 가기 싫어졌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나와 함께 거기서 밥을 먹기로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어쩐지 창고가 좀 심하게 낡았다 싶더니, 애초에 행선지를 난민촌 방향으로 잡아 뒀었군. 아무래도 한참 전부터 내가 일어나면 뭘 해야겠다, 하는 계획을 세워둔 모양이다.
“가자. 늦으면 맛있는 음식은 다 먹고 없을지도 몰라.”
“….그래. 갑시다, 가.”
다시 내 팔에 매달리며 밀어붙이는 다나의 힘에,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고 싶은 거 다 해준다고 했으니 뭐. 그게 난민촌에서 칼로리 바 잡탕찌개를 퍼먹는 일이라도 좋다면 해줘야지.
끄기기긱!
낡은 창고의 셔터를 들어 올리자 짙은 먼지 냄새와 함께 허름한 난민촌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래 표지판은 누가 톱질해서 뜯어갔는지, 쇠로 된 밑동 위에 나무를 세워 만들어진 표지판.
[난민 구역 D-3]그 표지판 너머로, 뿌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곳이 보였다.
제법 큰 규모의 인기척.
땀 냄새. 술 냄새. 음식 냄새.
저기로군.
“준비됐어?”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게 더 슬프다.”
어째 밖에 나와서도 교단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게 뭔가…. 대단히 기묘했지만.
어쨌든 돔에서 그 누구보다 이런 상황에 숙달된 것이 나라는 것도 사실이니까.
심호흡을 한번 해준 다음, 팔에 매달린 다나와 함께 난민촌의 뒷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왁자지껄한 목소리.
가정용 전열기를 뜯어 병렬로 연결한 대형 인덕션 위에 다양한 종류의 솥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런 일에 참 잘 어울리게 생긴 아주머니들이 뭔가 그 안에 쏟아부으며 휘휘 젖고 있었다.
“….종교 집회? 이게?”
“말했잖아. 다소 극성적이긴 해도, 활동 자체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지 않다고.”
길게 늘어선 줄 양옆에는 돗자리 장수들이 집에서 만들어온 장난감이나 수제 도구 같은 것을 늘어놓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물건의 가격이 아니라 [단말기 충전용 배터리랑 바꿉니다] / [의료품 일체, 뿌리채소 받습니다] 같은 원하는 물건을 적어 놨다는 것과 그것이 익숙한 듯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물물 교환을 하고 있다는 것.
개중에는 제법 퀄리티가 돋보이는 것도 있어서 슬쩍 고개를 숙였는데, 인기척을 눈치챈 돗자리 장수가 유쾌하게 말을 걸어왔다.
“좋은 저녁입니다, 형제님! 라투라!”
“아, 예, 어…. 라투라.”
“하하하하! 보아하니 이 강금필이가 가진 재주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사람들마다 타고난 재주가 다르니, 이렇게 재주를 나누다 보면 좀 더 사는 게 편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자자, 금속 가공품이 필요하시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스크랩, 잡철, 고장 난 기계 부품이나 음식으로 받습니다!”
어…. 음…. 누구라고?
“강….금필씨?”
“음? 절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린데….”
주섬주섬 가져온 물건을 꺼내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푹 눌러쓴 후드를 슬쩍 걷어 보이는 장사꾼.
탱-탱그랑!
와장창!
그리고, 막 어둑한 골목 밖으로 고개를 내민 내 얼굴을 마주한 장사꾼은 양손 가득 들어 보이던 금속 부품들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교, 교교교교…. 교수님?!”
.
.
.
.
.
탱- 탱그랑!
외마디 비명 같은 강금필씨의 외침에, 주변에 공기처럼 떠돌던 소음이 싹 사라졌다.
남은 거라곤 솥에 든 스튜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
흣, 헛, 하는 사람들 숨 집어삼키는 소리.
작은 사다리 위에서 솥을 젖던 여자가 국자 떨어트리는 소리.
“아저씨, 살아 있었어요?”
“지, 진짜 교수님이시군요! 라, 라투라!!”
의심을 종식시키듯 다시 한번 외치는 금필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골목 사이로 반쯤 내밀어진 몸.
언젠가 돔에서 지겹도록 틀어준 ‘영웅 박교수’ 헌정 영상에서 봤던 얼굴과 똑 닮은 얼굴.
난민촌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그 집단’의 가죽 재킷.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백옥 같은 얼굴. 돔에서 모르면 간첩 취급받는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 알려지기로는, 그분의 짝.
“오, 오셨다.”
“정말로, 정말로 그분이 오셨어! 이 비루한 땅으로 친히 발걸음 해주셨다고!”
“교, 교수님! 제 딸이 오르페우스 재난 이후로 몸이 좀 달라졌는데, 하, 한 번만 봐주시면….!”
“밀지 말아요! 밀지 말라니까!”
슬금.
슬금슬금.
모든 정황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그 사람임을 나타내자, 사람들은 하나둘 홀린 듯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제님들! 평정심을 유지하십시오! 교수님을 뵙는 귀한 자리에서 추한 꼴만 잔뜩 보이실 생각입니까! 그분이 우리와 같은 현세에 존재하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이성잃은 집단으로 돌변하기 전에, 재빨리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있었다.
주변에서 조금 높은 곳의 테이블. 그 앞에 있는 사람.
‘중년 여자. 곱슬머리 단말. 외팔에 녹색 눈.’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마도 저 여자가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를 통제하는 실질적인 우두머리일 것이다.
….졸지에 나를 사이비 종교의 신으로 만들어버린 생판 처음 보는 아줌마와,
38구역 사건 이후로 소식이 없어 지금껏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구[BDSM 타운]의 주민, 강금필씨.
그리고, 그 외팔이 아줌마 옆에서 폴짝 폴짝 뛰면서 손을 흔드는….
“아저씨! 아저씨이이이!!!”
….신시아. 뭔가 전보다 많이 밝아진, 명목상 내 수양딸.
“어째, 여기서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한가득인 것 같네.”
“그러니까.”
“….그래서 데려온 거야?”
“당신은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니까. 당신이 제대로 쉬려면, 완전히 달라진 돔의 사정을 두루 꿰고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 괜히 애매하게 뭔가 변했다는 이야기만 듣게 되면 안절부절못하다가 끝내 혼자 나가서 다 알아보고 올 테니까. 차라리 빨리 다 보여주고 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어….”
제기랄. 할 말 없군. 확실히 집에서 애들이랑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그런데 그거 앎? 황무지 광명교 교세가 장난 아님.’ 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놀지도 못할 것 같거든.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여자랑 같이 나와서 맛집도 찾아보고, 옷가게 같은데 들러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환상이 좀 있었는데.
“아아, 내 첫 데이트. 무드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아아, 내 첫 데이트. 오지랖 넓은 남자한테 반한 죄겠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다나의 모습에, 그만 피식 하고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차피 데이트 코스는 맡겼으니, 여기까지 온 이상 나름대로 즐겨 봐야지. 수백 명의 ‘내’ 신도들과 함께하는 데이트라….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만점이군 그래.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한걸음 다가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존자 여러분.”
‘형제님’, ‘동포’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다. 일단 내가 그런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임을 보여주고.
“….여러분이 아시는 박교수입니다.”
“배고파서 밥 먹으러 왔는데, 줄 서면 됩니까?”
그리고, 좀 비켜달라고 은근하게 부탁한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니 뭘 하면 될지 알려줘야지.
“바, 밥. 배, 배가 고프시다면….”
“성자님이 성찬을 찾아오셨다!”
“아이구 이를 어째, 이런 것을 드릴수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지금 당장 괜찮은 식사를 만들어 드릴 테니까….”
“푸짐한데요, 뭘. 저도 방사능 사마귀 잡아먹고, 쥐 달팽이 빨아먹고 다 해본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만찬이죠 뭐. 그릇은 이거 쓰면 됩니까?”
“아, 예에에에….”
“아, 한 그릇만 더 주십쇼. 일행이 있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달라붙어서, 유세 나온 정치인이 시장 국밥 얻어먹듯 허허 웃는 얼굴로 두 그릇 받아왔다.
달칵.
“의외로 냄새가 좋네요? 칼로리 바랑 감자만 잔뜩 갈아 넣은 오트밀 같은 걸 생각했는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까 사람들을 향해 외쳤던 외팔의 중년 여성 옆에 앉았다.
막상 옆에 다가오니 어색한 듯 우물쭈물하다가 다나의 곁으로 달려가는 신시아. 아무래도 나 없는 동안 둘이 좀 친해진 모양이지.
내가 그릇을 받아 자리를 잡자, 사람들도 서둘러 한 그릇씩 받아서 여기저기 둘러앉기 시작했다. 물론, 시선은 내가 있는 테이블에서 떼지 않은 상태로.
음. 뭔가 한마디 해달라는 분위기로군.
다들 어떤 신성한 역사의 한 장면을 생각하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노먼 대주교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기도 한자락 외우지 못한 사람이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어….다음에는 나도 돈 내고 먹을 테니까, 너무 뭐라고 하진 마시고.”
후루룩-
그래서, 기도문 대신 대충 인사로 때우고 넘칠 듯 아슬아슬한 그릇이 입을 댔다.
귀한 식사를 챙겨 먹는 것도 모자라, 맛있게 먹으면 그게 은총이 아니고 뭐겠어. 이 황무지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내가 그릇에 입을 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숟가락 달칵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며, 이내 처음 그랬던 것처럼 왁자지껄한 공터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잡담 내용은 대부분 나에 대한 것이었지만.
“….교수님. 저는 이곳 ‘광명교단 황무지 지부’의 신도를 이끄는-”
“먹고 합시다 먹고. 쩝쩝거리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이거 은근히 맛있네요.”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제 몫의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흠. 어디 보자.
‘딱 봐도 꽤나 황무지스러운 삶을 살아온 아줌마에. 집단 공동 배식에 물물 교환. 식물인간이 되어 자리를 비운 구-영웅을 대상으로 한 종교에, 이 정도 규모와 이 정도 통제력이라….’
마냥 선한 기치를 건 사람들에 선한 마음들이 모였다고 보기엔, 나도 좀 황무지를 굴렀지.
“호가호위(狐假虎威)? 소문이 자자한 박교수의 명성을 빌어 서로 돕는 풍조의 집단을 만들어냈다? 약자를 위한 울타리?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나? 흠….”
“아니, 저, 그것은….”
“아아아, 미안합니다. 생각하면서 혼잣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만. 마저 먹고 해요. 음음, 이거 고기도 많이 들어갔네.”
….3월드에서 정치 괴수들만 상대하다 와서 그런가, 쉽구만.
슬쩍 흘린 말에도 극명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냥 허허 웃자고 만들어진 집단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이 구역의 패자, 영 총장이 나도 바로 보고 아는 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그쪽에서도 방치했다는 뜻이 되고. 그건 돔의 사회 안전에 해가 되는 집단은 아니라는 뜻이고.
‘음. 일단 지켜보고, 아니다 싶으면 때려 부수고. 괜찮다 싶으면…. 조금 조율해주고.’
마침 사이비 교주라면, 이쪽은 또 경력직이거든.
세상에 실제 성자 출신 사이비 교주는 없으니 업계 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금 알아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쓸모 있으면 좀 굴려 봐야지. 그렇게 막 나쁜 집단 같지도 않으니까.
후루루룩-
“어때, 먹을 만하지?”
“놀라울 정도인데? 숨은 맛집이었네. 광명교단.”
그런 저런 생각을 머리로 흘리며 다나와 첫 식사를 즐겼다. 의외로, 이 집 잡탕찌개는 정말 찾아서 먹을 만한 물건이었다. 다나가 순수하게 이거 먹자고 여기 데려왔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