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89
Chapter. 17. 여행 준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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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사각사각-
밤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저녁이라 하기엔 늦은 한적한 시간.
고풍스러운 집무실에는 얼음깎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딸그락.
꼴꼴꼴꼴-
얼음이 정육면체에 가까워지면, 집무실 한켠에 늘어서 있는 눈에 익은 잔들 중 하나에 집어 넣은다음, 그 위로 황금빛 액체를 천천히 흘려보낸다.
중년의 남자, 알렉산더 영은 가슴을 파고드는 주향과 함께 관능적으로 얼음을 타고 흐르는 그 황금빛 액체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가치를 따지면 실제 황금을 녹여서 흘려넣는다 해도 비할 바 없는 명주.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담은 고순도의 알코올에 녹은 얼음이 흘러들어가며 아롱지는 모습은, 정말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으로 충분히 즐긴 다음, 알맞게 물이 흘러들어간 위스키의 향을 즐기고, 첫사랑에게 키스하듯 조심스럽게 한모금 입에 머금는다.
혀에서 입천장으로, 다시 비강을 타고올라 눈뿌리에 가깝게 휘몰아치는 아찔한 주향. 마시기 전에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과, 그 갈증.
그리고, 그제서야 힘이 빠지는 어깨.
“….고단하군.”
영 총장은 힘이 빠진 몸을 조금 더 의자에 깊숙이 뉘이며, 한숨 같은 탄식을 뱉어내었다.
식사는 물론 수면마저 대충 때우는 그에게 있어, 늦은 저녁의 술 한잔은 하루의 유일한 휴식이자 그만의 건강 관리법이기도 했다.
“음, 이런.”
이것 봐라. 지금도 잠깐 몸이 노곤해지자, 어느새 눈이 책상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훑어보고 있지 않은가. 책임감과 압박속에 일벌레가 되어버린 그의 뇌는 알코올에 절이지 않으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는 아직 돔의 책임질 후임을 구하지 못했고, 격동의 시기에 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영 총장 본인은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야 했으며, 스스로를 혹사하는데 익숙한 영에게 있어 휴식이야 말로 최고의 보약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음주는 건강에 좋다.
“처칠도 나와 같은 영국인이니, 그의 피가 어느정도 내게 흐른다고 볼 수 있겠지.”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에서 얻었다-』
독한 술과 시가를 입에 달고 살았으며, 격동의 시기에 그 중심에서 나라를 이끌었고, 91세까지 살았던 영국의 수상 처칠.
그의 롤 모델인 동시에 만날때마다 금주를 권하는 의사들을 무시할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는 이름이었다.
탁.
“….반 병 정도만 더 마시면 딱 좋겠군.”
영 총장은 머릿속에 어지러이 늘어선 렙터와 돔, 난민, 범죄율, 부패와 같은 단어들이 취기와 함께 흩어져 가는 느낌을 즐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실 술을 고르는 순간 또한 주당의 기쁨중 하나이니.
띠리리릭-! 띠리리릭-!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만의 휴식을 즐기려는 찰나, 갑자기 집무실을 울리는 소리가 그의 풀려가던 정신을 바짝 조였다.
일반적인 통신기의 소리가 아니다. 감찰부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제공된 보안 통신장치. 총장인 그에게 직통으로 연락될 수 있는 핫라인이, 왜 이 시간에 울린단 말인가?
돔. 렙터. 황무지. 변종. 언론. 전쟁. 희생.
송곳처럼 뾰족한 단어들이 어슴푸레한 취기의 장막을 뚫고 나왔다.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던 얼굴도 냉혹한 총장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총장 알렉산더 영이다. 어디의 누가,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말하도록.”
“….”
무거운 침묵이 영 총장의 가슴을 바짝 조여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핫라인을 사용할 정도로 중역이 저렇게 망설인단 말인가.
“저….”
그리고, 이어진 익숙한 목소리는 영 총장의 얼굴을 확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자네?”
“그, 이것 참 기분이 묘합니다 그려? 진짜 사람 몸에 기능이 생겼잖아?”
“….기왕 인사를 할 것이라면, 얼굴을 보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아니 뭐, 그냥 인사나 하려고 내 가슴에 손 넣고 막 휘적거린건 아니고. 그…. 긴히 말씀드릴게 있어서 그런데…. 혹시 이거 보안 확실합니까?”
“….그정도로 중요한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좀….”
박교수. 확실히 그에게 통신기를 지급하라고 명령해두긴 했다. 능력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가장 중요하고 확실힌 통신기’ 지급대상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벌써? 오늘 낮에 회복하고, 이제 겨우 밤인데 벌써 최상위 권력자에게 전할만한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단 말인가? 그것도 저만한 사람이, 저렇게 은밀한 목소리로 망설이기 까지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을?
확실히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인 만큼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다. 영 총장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글라스를 쥔 손에 땀이 묻어났다.
“말 하게. 이 연락처 만큼은 안전하니.”
“….나 돈 좀 빌립시다.”
챙그랑!
그리고, 그가 정말 아끼던 크리스탈 글라스를 떨어트렸다.
뭐? 방금 뭐라고?
대규모 변종의 습격이나 렙터의 기습 공세, 도시 실드 용량을 넘어서는 최악의 모래 폭풍이나 기타 온갖 재난에만 사용하도록 되어있는 핫라인으로 한다는 이야기가, 돈 빌려 달라고? 그래서 망설였다고?
“돈이라…. 내가 잘못 들은거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째째하게 그러지 말고 좀 빌려주십쇼. 한 십만…. 아니, 통 크게 백만 정도만 빌립시다. 그동안 내가 돔에 해준것도 많잖아. 좀 빌립시다 좀!”
심지어 백만 실링 정도란다. 고작 백만. 백억, 천억 단위의 자금을 지급으로 융통하겠다고 해도 핫라인까지 쓰기엔 모자람이 있는데, 고작 백만 빌리겠다고 그의 하루 중 유일한 휴식시간을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긴장감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저 망할 놈이.
“내가 신체검사 마치고 바로 나왔는데, 시장에서 결재 하려니까 실링 결제용 단말기를 안들고 왔더라고! 스크랩이나 기타 돈 될만한 물건도 하나도 없고! 진짜 부탁 좀 합시다! 나 다나랑 제우스 벨리에 있는데, 첫 데이트에 내가 사준다고 해놓고는 ‘하하, 지, 지갑이 없네? 직접 계산할 수 있지? 아, 내것도 해줘.’ 같은 소리나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니, 자네는 도대체가 돔의 총장을 뭐라고-”
“여기 감찰부 요원 많이 심어놨죠? 아무나 한명만 보내주십쇼! 계곡 상층부 ‘베나의 드레스 샵’ 이니까 최대한 빨리 좀 부탁합니다! 조만간 내 술 한잔 사드릴테니까”
뚝.
“….박교수. 박교수? 듣고있나?”
끊어졌다.
영 총장은 대답이 없는 보안 통신기를 멍한 눈으로 내려보다가, 책상위에 흩어진 서류중 하나로 눈을 돌렸다.
[궤도 자국의 깊이로 추측하건데 이 지역을 지나간 것은 약 2주 전으로 파악되며, 이동 속도는-]글을 읽는데 문제 없고. 딱히 생각이 희미하지도 않고.
“….취해서 골아떨어진 것은 아닌데.”
그러니까, 방금 가장 중요한 순간을 대비해 만들어둔 보안 연락망을 통해 듣게된 이야기가,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라는 뜻이다. 여자친구랑 쇼핑하는데 돈이 없다. 사람 시켜서 돈 좀 빌려달라. 최대한 빨리. 기가 막히다 못해 어떤 정신적 결함이 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
“….적어도 정신을 쏙 빼놓는 점에서는 술이랑 비슷한 면이 있는 놈이로군.”
총장은 깨진 잔과 녹은 얼음이 뒤엉켜 더러워진 바닥과 저 멀리 밤에도 환한 제우스 벨리를 번갈아 쳐다본 다음, 이유 모를 헛웃음을 집어삼키며 일반 연락에 사용하는 통신기를 집어들었다.
확실히, 제우스 벨리라면 거기에 있을만한 사람이 있었다.
띡. 띡. 띡- 달칵.
“총장 알렉산더 영일세. 에젤 레이든 맞나? 그래, 그쪽 생활은 할만 하던가? 아. 중요한 일은 아니고….”
이상하게 자꾸 놀리는 것처럼 능글맞아지는 목소리와, 통신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황당한 목소리.
달칵.
그렇게 대강의 사정을 알려준 총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복잡했던 머리가 묘하게 깔끔해졌으니, 휴식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샘이었다.
….그러고보니 돈 빌려준 대신 술을 산다고 했던가.
“교수 그 친구가 술을 좀 마시는 편이었나?”
총장은 오래전 죽을 상을 하고 그의 앞에서 대작하던 교수를 떠올리며 내일 있을 일정에 관해 생각했다.
그가 하는일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곤 없었지만, 몇 시간 정도 미룬다고 해서 사달이 날만한 일도 없었다.
말이 통하는 친구이니 어쩌면 술자리가 일터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총장은 마음속으로 내일 점심 이후의 일정을 모두 비워버렸다.
오랜만에 제대로 취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옅은 미소와 함께 집무실에는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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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그건, 실로 오랜만에 만난 에젤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총장님이 연락했더라. 형 시장에서 빌빌거리고 있으니까 가서 돈 좀 꿔주라고. 자, 여기.”
“고, 고맙다!”
에젤이 한심하다는 듯 던져준 물건. 휴대용 단말기는 사람들이 흔히 일하면서 방송 볼 때 사용하는 물건이다. 접속은 안되고, 채팅도 안되고, 순수하게 수신만 되는 다운그레이드 판 접속기.
돔 사람들이야 이걸 돔에서 보급해주니까 이걸로 자기 계정에 들어가서 계산하고 하는게 익숙하지만, 개인 생존자들은 이런 물건이 낯설단 말이다. 우린 오프라인 거래같은게 있으면 정련된 스크랩이나 자동차 부품같은거 들고가서 바꿔먹었다고. 내가 얼빵해서 안들고 온게 아니란 말이다. 문화 차이지.
탈의실에 들어가있는 다나를 기다리며 그렇게 말하자, 에젤의 얼굴이 더욱 답답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진짜 답답해서 뒤질 것 같다.”
“뭐가!”
터억-
“형. 우리 47구역 사람들이 참 많이 얘기하는 주제가 있잖아. 모른척 하는거야? 못 들은척 하는거야? 아니면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 단계인거야?”
“응?”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잖아. 이참에 한 번 물어보자고. 형, 지금 뭔가 상황이 잘못됐다는 게 안 보여? 진짜로? 이 시간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게?”
감찰부 요원답게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울화통이 터지는 감정을 마구 전달하는 에젤.
잘못됐다? 음…. 뭔가 잘못됐나? 뭐지?
“어….백만으로 부족한가? 쪼잔해 보이려나?”
“돈 말고 병-!!! ….신아….!”
에젤은 두건으로 반쯤 가린 얼굴을 내게 마구 들이밀더니, 탈의실 쪽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켜준거라고, 둘이 있으라고! 이해가 안돼?”
옷가게 한켠에 준비된 의자에서 손까지 마구 휘저으며 성토하는 녀석의 모습은 마치 내가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 매서웠다.
“우리라고 형이 안 반갑겠어? 당장 벡스 형은 칼끝으로 교수 형 얼굴 끄적거리던게 이제는 벽화에 가까운 수준으로 숙달됐고, 이안 형은 형 나오면 교육시켜줘야 된다고 변종 부산물 무기들을 항목별로 나눠서 정리해둔 창고도 만들어놨는데!”
“어…. 어?”
“우리도 형 나오면 하고 싶은 거 많았지! 술도 마시고! 옛날처럼 형네 쉘터에서 밤새도록 얘기도 하고! 그런데 다들 비켜줬잖아! 왜? 사실상 이제 막 눈 맞은 다음에 생 이별한 두 사람한테 시간을 좀 주자고! 다들 ‘허허, 이거 바빠서 가봐야겠네?’ 하는 어설픈 변명이나 해놓고 사삭! 하고 빠져준거잖아!”
어…. 확실히 왜 갑자기 없어졌나 싶긴 했는데. 그런거였구나. 음, 배려심 넘치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나, 지금 잘 하고 있는거 아닌가? 저녁 먹고, 나름 재미있는 곳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는데.
“아니지! 어휴 진짜! 지금 분위기는 친구랑 어디 놀러나와서 즐거운 분위기고! 연인 사이의 그…. 조금 더 경계를 허무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떨어져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힘들었던 순간, 고된 나날, 외로움, 그런 얘기를 나누다 차츰 서로의 속내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으며, 두 시간 정도 천천히 식사와 대화를 즐기고.
약간의 술기운이 곁들여진 두 사람은, 천천히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를 거닐다, 아직 몸이 약한 다나가 피로를 호소하면 ‘그럼 조금 쉴까?’ 하는 얘기가 나오고. 상당히 중의적인 표현에 서로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위기는 무르익고!
“돔에 상류층 레스토랑이라고 해봐야 하나 있거든? 내가 미리 가서 두 사람 오면 제대로 대접하라고 말도 해놨다! 이안 형은 교수 형이 쓰던 차를 아주 번쩍번쩍하게 광을 내서 그 앞에 미리 세워뒀고! 벡스 형은 BDSM그 걸뱅이 새끼들이 넝마로 만들어놓은 형내 쉘터를 아주 광이 나도록 닦아놨다고! 오직 한가지를 위해! 인간 박교수가 역사를 써낼 그 밤을 위해! 난 형내 쉘터에 향초도 사서 갔다놨다!”
“어?”
“그런데 뭐? 국밥 한 그릇 얻어먹고 시장 구경 나왔다고? 형 혹시 군생활 하다가 좀 크게 다쳤어? 약진하다가 어디 정글 한복판에 유전자 주머니를 똑 때어놓고 온거 아니야? 쓸려서 상했다거나?”
그즈음, 울화로 달아오른 에젤의 얼굴 만큼이나 내 얼굴도 새빨개져 있었다. 저 정도 말하는데 뭔 소린지 못알아 들을 리가 있나.
그러니까, 다나랑 그…. 오붓하고 끈적한 밤을 보낼 시간을 주겠다고, 자리도 비켜주고 이것저것 준비도 했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오버를 해도 정도가 있지, 이 놈들이?
“야! 다나랑 나는 아직 거기까지 갈만한 단계가….!”
“조카스랑 노루는 얼굴 본 그날 결혼 도장 찍었다더라!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속안좋다는 노루를 조카스가 툴툴거리면서 집에 업어다 던져놓는 순간, 벌떡 일어난 노루가 그대로 길로틴 초크로 조카스를 제압하면서, 어! ‘미안하게 됐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새끼 의외로 좀 생겼네-’ 하면서 그대로 막…. 어!! 뭔 소린지 알지! 얼굴 보고 일주일도 안 돼서 살림 차렸다더라!”
“아니, 그건 그 인간들이 진짜 짐승에 가깝게 추락한 인간군상이라-”
“그 추락한 인간 군상이 황무지 평균이다 인간아! 우리 눈에는 박교수-다나 커플의 진도가 아주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로 느껴져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서로 마음 있는게 훤-히 보이는데 둘다 우물쭈물 하다가 생이별해, 그렇게 해놓고 마음이나 졸여! 마! 황무지에 몇 달 진득하니 연애할 여유있는 사람이 어딨냐! 상대가 언제 뒤질지 모르는데! 어휴! 고구마도 이정도면 아주 돔 난민 전체를 3년은 먹여살리겠다! 쌀이 익어서 밥이 되다못해 누렇게 뜨고있는데 ‘아직 덜익은듯’ 하면서 기다리는 꼴이라고! 형이랑 다나는!”
달칵!
에젤의 입에서 ‘황부지 연애학개론’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려던 찰나, 탈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입을 다문 에젤은 마지막으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잘해. 형 생각보다 형수님이 마음을 정말 많이 졸였어.”
“오냐.”
“어차피 오늘 분위기는 이미 물 건너 갔으니까, 이렇게 된거 내가 가이드나 해줄게. 다른 사람들도 이 근처에 있으니까. 미리 말하지만, 상대를 만날 때마다 즐거운 기억이 쌓이면 그게 좋은 감정으로 이어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놀고 가.”
“그래.”
그렇게 말하며, 거짓말 같이 환한 얼굴로 변하는 에젤. 탈의실 밖으로 나온 다나는 조금 꽉 끼는 듯한 옷이 불편한 듯 몸을 둘러보며 걸어왔다.
“에젤? 언제왔어?”
“아이고오- 형수님! 형님이랑 형수님 두 분이 여기 계시다고 문지기가 귀띔해줘서 냉큼 달려왔지 뭡니까! 방해라는 걸 알면서도 참을수가 없더라구요! 형수님, 제우스 벨리를 막 제대로 알고 계시지는 않죠? 형수님도 수술하고 회복한다고 병원에만 있었으니까.”
“커뮤니티로 알아볼 만큼은 알아본 정도야. 그리고 그, 형수님은…. 좀 자제해주면 안될까? 조금 부담이….”
“그러시다면 옛날처럼 다나씨로 하죠! 자, 갑시다 두 분! 제우스 벨리는 노천 광산으로 시작해 암시장을 거쳐온 동네라 복잡하기가 아주 개미굴 같거든요! 행정부에만 틀어박혀 있던 두 사람을 위해 제가 아주 제대로 가이드 해드립지요! 제우스 벨리의 진짜 상점들은 암구어가 없으면 못 들어가는 곳도 많아요!”
“어어, 그래.”
“위험한 곳은 아니지? 나 지금 무기도 없는데.”
“그 몸으로 무기는 무슨. 그리고 보통 사람이면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괜찮아.”
“어디길래?”
내 물음에, 에젤은 반쯤 가려진 얼굴로 특유의 삐뚜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비-딕. 기대해.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에젤은 개구쟁이처럼 히죽거리며, 계산을 마친 나와 다나의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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