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90
Chapter. 17. 여행 준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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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한 번 가보자.”
“갤리네 만물상? 좀스러운 물건밖에 없어. 안에서 안 받는 물건이나 파는 싸구려야 싸구려.”
“그래? 그럼 저긴 어때? 안 그래도 내가 무기를 하나도 안 들고 나와서….”
“음? 권총 한 자루 없이 나왔다고? 이야~ 전설의 HIV도 몇 달 피클처럼 푹 삭히면 도련님이 되시는구나?”
“….총 없이 나랑 한판 떠볼래? 누가 이기나?”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저기도 좀 그래. 밖에서 객사한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주인 잃은 화기도 참 많이 생겼는데, 저 집은 그런 걸 주워다 파는 집이야. 멀쩡한 부품을 뽑아서 재조립한 거라 퀄리티가 그렇게 막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진흙탕 속에 구르던 중고라는 건 다를 바 없지.”
“그럼 저긴-”
“맛없어.”
“저기는-”
“흑색 화약 섞은 시가 같은 거 피워볼래?”
안내를 맡은 에젤은 호기심에 가득찬 우리 둘을 거침없이 이끌었다.
“밖에서 보이는 면적보다 시장이 훨씬 넓거든. ‘표면’ 쪽 가게에서 시간 낭비하다 보면 오늘 저녁 안에 다 둘러 보지도 못할 거야. 다나씨도 걷다가 지쳐버릴 거고. 제일 볼만한 것만 쏙쏙 보고 나서, 나머지는 천천히, 다음에 시간 날 때 혼자 와서 봐.”
“전문가께서 그러시다면야.”
에젤의 뒤를 따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만 해도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붐볐던 시장이 제법 한적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의 환한 조명과 다른 조금 은은한 조명에, 바깥사람들의 활기 대신 조심스러움으로 무장한 손님과 상인들.
“분위기가 다르지?”
“그러게.”
“시장 ‘표면’에서 벗어나서 계곡 안으로 들어와서 그래. 여기서부터는 과거에 암시장이었던 부분이라 구조도 복잡하고 취급하는 물건의 위험도도 조금 올라가지.”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구만. 그런데, 아까부터 ‘표면’이니, ‘계곡 안’이니 하는 단어가 자꾸 들리던데. 어감상 그냥 위치를 말하는 게 아닌 건 알겠거든?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 거야?”
에젤도 그렇고, 시장 초입에 피켓 보이들도 ‘표면에 있지만 계곡으로 내려갈 만한 실력이다!’ 라거나 ‘우리 가게는 계곡 안에 있다!’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게 들렸다.
“아, 그거? 별거 아냐. 제우스 벨리는 잘하는 집일수록 이 계곡 깊은 곳에 자리 잡거든. 일종의 랭킹이라고 해야 하나?”
에젤은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더니, 옆에 있던 벽에 슥슥 그어대기 시작했다. 전체 스케치라기보다는 단면도에 가까운 간단한 그림.
“시장의 가장 깊은 곳은 암시장 시절부터 이곳을 지켜온 상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개중에는 엿 같은 놈들도 있고,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들도 있고. 원래도 꽤 독한 놈들인데, 38구역 사태 이후로 몰려온 온갖 스캐빈저와 레이더, 일반 캐러반까지 흡수해서 이제는 감찰부가 손을 대기 껄끄러울 정도의 집단이 된 녀석들도 있어. 이게, 지금 단계에서는 무력 집단화한 ‘계곡의 밑바닥’ 상점들. 유명한 것만 따지면 ‘모비-딕’ , ‘렛 휴먼’ , ‘스네일라 컴퍼니’ 3개 정도?”
“그다음은 계곡 안쪽 벽. 암시장 중계 거래하던 녀석들이 성장해서 자리 잡은 곳이지. 역시 오래된 만큼 노하우도 있고, 인맥도 있고, 실력도 있고. 이 녀석들은 계곡 밑바닥 집단이 크면서 자기 자리를 잃게 되자 계곡의 벽면에 굴을 파고 자기 사업장을 차린 경우야. 하도 굴을 많이 파다 보니 계곡이 무너질 지경이라 지금은 ‘모비-딕’에서 새로이 굴을 파는 녀석들을 단속하고 있지. 어퍼 돔에서 찾아올 정도의 유명한 뷰티 살롱도 있고, 아주 힙한 문신, 피어스 아티스트의 상점도, 그 유명한 ‘문 글로우’를 만드는 술집도 계곡 벽 상인에 속해.”
“표면은, 제우스 벨리 상권이 충분히 크고 나서 자리 잡은 사람들. 참고로 표면 상점의 70%는 마켓 플레이스와 제휴를 맺은 상점이야. 마켓 플레이스는 자기네가 독점하던 상권을 다 빼앗기게 생겼으니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이미 계곡 안 상점들이 너무 단단하게 자기들 입지를 다져놔서 침투가 쉽지 않은 거지. 대충 이해가 가지?”
“응. 생각보다 정교한데?”
“그러게. 특히나 수준에 따라 판매 위치가 달라진다는 점이. 아래쪽에 자리 잡은 사람은 당연히 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수준이 높은 상점이 내려올 기회가 있다는 것은, 이 제우스 벨리 전체를 통제하는 어떤 집단이 그들에게 강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명품관과 일반 기성품 라인을 분리하는 식의 시스템으로도 보여.”
“맞아. 아래쪽은 어중이떠중이가 들어왔다간 순식간에 탈탈 털리기도 하는 곳이거든. 이렇게 나눠 놓으면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만 솎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한순간에 이해가 갔다.
표면은 일반적인 잡화, 황무지 오일장과 비슷한 수준의 물건을 파는 시장.
계곡 안, 벽면과 위쪽은 진짜 제대로 된 물건을 팔 줄 아는 놈.
밑바닥, 심층부는 상점을 넘어 자체적인 자금과 인력으로 집단화에 성공한…. 일종의 갱(Gang)이다. 제우스 벨리라는 지역의 이권을 놓고 경쟁하며, 이 계곡만의 법칙을 운용하는 이들.
“….밑바닥 상인들은, 뭘 취급하지?”
“뭐든지. 각각 전문 분야가 나뉘어있긴 해도, 결과적으로 셋 다 합치면 이 아래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없어.”
“그으래?”
찾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눈을 돌리자, 다나도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살 수 있단다. 뭐든지.
카밀라씨는 ‘사냥’ 당한다고 했다. 그들과 같이 38구역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납치해서 파는 이들이 있다고.
만약 돔에서 그런 종류의 인신매매를 취급하는 곳이 있다면, 감찰부의 눈길조차 쉬이 닿지 않는 이곳 제우스 벨리보다 어울리는 곳도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갈수록 어두워지는 계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하나둘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골목에 둘. 벽면 굴에 하나- 아니 셋. 내가 모르는 재질의 위장용 판초 우의를 쓰고 있군. 아, 지금 지나간 상점의 상인도 상인이 아니네.’
골목마다 비반사 처리를 한 무기를 든 사람이 숨어있고, 개중에는 내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위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상인으로 보이는 이의 팔에는 베테랑 군인 이상으로 잔근육이 가득했고, 자세히 보면 파는 화기가 전부 장전된 상태인 상인도 있었다.
그야말로 요새. 전차나 대형 장비가 들어올 수 없는 계곡의 지형까지 계산하면, 돔의 정규군과도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의 무력집단.
….이런 걸 총장이 그냥 놔뒀다고? 자기네 집 바로 앞마당에?
“에젤. 다나를 데려와도 될 만큼 안전한 곳인 것은 맞지?”
“….다들 숨는다고 숨었는데, 보여? 얼마나?”
“저기랑 저기. 저 앞 상점에 염소 수염이랑, 지금 목걸이 사가는 여자 꼬맹이. 그리고, 벽에 저건 뭐냐? 진짜 바위랑 똑같이 생겼는데?”
“세상에. GG 에서 그 고생을 하더니, 진짜 슈퍼 휴먼이 되어서 돌아왔잖아? 일단 안전에 대한 것은 걱정 안 해도 돼. 47구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할걸?”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쉬지 않고 발을 놀리던 에젤의 걸음이 멈췄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발이 멈춘 곳 주변만 먼지가 좀 부자연스럽게 쌓여있었다.
텅텅-!
에젤이 발끝으로 땅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금니.”
“알주머니~”
암구어인 듯 익숙하게 답하는 에젤. 그러자,
그그그그극-
에젤 바로 옆의 돌바닥이 열리며 남자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꾸 들어왔다 나갔다 하지 마십쇼! 이게 얼마나 무거운지 아시잖습니까! 에젤!”
“캄로이~ 꼬우면 벌 받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제 며칠 남았냐?”
“12일. 아니, 도핑 좀 했기로서니 혼자 문지기 80일이라니. 솔직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여긴 밖이랑 달리 망할 찜통이라고!”
“돈 걸고 하는 케이지 격투에서 약을 빨았으니까 그런 거지. 너 임마, 영감님이 안 막아 줬으면 그대로 매달렸어. 80일짜리 노동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라고.”
“제기럴. 들어오기나 하십쇼. 오래 열어두면 또 보안에 소홀했다고 난리 나니까.”
문지기 남자와 익숙한 듯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에젤.
하지만 내 눈은 그런 두 사람보다 남자의 너머. 계단 아래쪽에 번쩍이는 간판에 못 박혀 있었다.
[모비-딕(Dick)]제우스 벨리를 암중에 움직이는 밑바닥 상인 집단, 셋 중 하나의 이름.
[우진 비뇨기과 2호점]그리고 그 아래 큼지막한 글씨로 번쩍이는, 지금은 기억에서 묻어버린 이름과,
끼릭 끼릭 끼릭 끼릭-
“망할, 염병할 놈들이, 괜히 입구를 경사로로 만들어서는, 장애인 배려도 없는 양아치 같으니라고.”
“보안이 최우선이라고 했던 건 영감 아니오? 자기가 이렇게 하면 상승 기류가 생겨서 가스 터져도 괜찮다고 해놓고선.”
“노인이 말하면 좀 져주고 해라, 턱주가리 놈아!”
“전에는 노인 취급했다고 지랄하더니.”
그 아래, 익숙한 덩치와 선글라스, 금속 턱을 가진 남자.
그리고 그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노인.
“이안….?”
“망할 모지리 새끼. 여기 있는걸 보니 오늘은 텄구만.”
“그리고, 영감님? 당신은…. 아니, 그 모습은 대체….”
우진 영감. 개인 생존자 시절, 약 타먹으러 뻔질나게 찾아다녔던 46구역의 야매 의사. 비뇨기과 전문의 주제에 안과, 내과, 정형외과, 정신과까지 죄다 봐주던 종합 전문의.
죽은 줄 알았던 우진 영감이, 이안이 미는 휠체어 위에 앉아 있었다. 텅 빈 다리와 함께.
“보다시피 난쟁이 똥자루가 되었으니 얼추 60%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왜 그리 놀라는 게야! 그때 행정부에서 봤잖아 이놈아! 일부러 찾아가 줬구만!”
분명 일어났을 때 본 것 같기는 했다. 흐릿한 눈동자에 어린, 휠체어에 탄 흐릿한 노인의 실루엣 같은 게 어른거리기는 했었지.
하지만, 설마 46구역이 렙터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로 마지막 소식이라곤 ‘병원에 끝까지 남아있었다.’뿐인 사람이 설마 이제 막 회복한 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당장 노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오트만’이다 보니, 내가 생사의 기로에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뭐냐! 환상인 줄 알았지! 좀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랬습니까! 제정신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없더만!”
“너희 놈팽이들이야 뭐 둘만의 시간이 어쩌고 하면서 사라졌지만 나는 진짜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얼굴 봤으면 됐지! 뭐, 눈물의 해후라도 기대했냐?”
세상에. 진짜다. 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직접 만든 틀니의 번쩍임은 틀림없이 우진 영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하는 사이, 휠체어를 잡고 있던 이안이 무릎으로 등받이를 툭툭 차기 시작했다.
“거 말 좀 곱게 하면 안 되나, 영감? 속으로는 자기도 좋으면서 꼭 쌍소리를 한마디씩 해요. 그런 모난 성격으로 의사는 어떻게 해먹었수?”
“그래서 너 같은 놈들만 살아나갔잖아. 잔말 말고 내기했던 거나 내놔 이 녀석아. 내가 교수 저놈은 정신적으로 성기능에 문제가 있으니 오늘 당장은 안 될 거라고 했지?
“퉤! 망할 체리한테 기대를 거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비뇨기과 전문의다 이놈아.”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둘이서 옥신각신하던 이안과 우진 영감은 내게 빨리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그그그그극-
에젤과 다나, 나까지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문지기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크랭크를 돌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 얼굴을 마주했다.
“낮에도 말했지만, 생환을 축하한다. 고자새꺄.”
“모비-딕(Dick). 우진 비뇨기과 2호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이.”
“벡스는?”
“오늘 조카 생길 거라고 했더니 인형 사러 나갔다. 니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그놈의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
“아, 제수씨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닙니다. 제수씨는 노력했잖아. 노루랑 따로 만나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막 비법이니 뭐니 하는 것도 듣고. 우리가 제수씨한테 참 면목이 없습니다 그려.”
음? 잠깐만.
“다나. 누구한테 뭘…. 배웠다고?”
“….있어. 그런 게”
그런 거? 그런 거? 그런 거? 그런 거 뭐? 노루가, 누구한테 뭘 가르쳐?
세상에서 뭘 가르치면 안 될 것 같은 인물 1위인 ‘노루Drug해요’ 씨가 다나와 접촉했다는 말에 되물었지만, 다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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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같지?”
“살인 기술의 정수를 늘어 놓고 천국이라니. 하느님한테 고소당한다 너.”
“그래서, 아냐?”
“….개쩌네. 이거, 신품이지? 생산라인이 있어?”
“공장까진 아니고. 기술자를 중심으로 한 체계화된 수공업 수준이지만. 38구역 사태 이후로 돔에 사람이 참 많이 몰렸는데, 다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보니 쓸만한 사람들도 많더라고.”
총포상. 재생탄이나 이것저것 뜯어다 조립한 모래 먹은 화기가 아니라, 무려 정교한 총기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어서(!) 탄생한 화기.
황무지 생활 8년 차에 가까웠지만 진짜 ‘신품’ 총기는 처음 봤다. 제일 상태 좋은 것도 구시대에 만들어져 상자 속에 곱게 잠자고 있던 놈인데, 여기선 정교한 화기를 직접 생산하고 있었는데….
“저거, 진짜냐?”
“임무 나갔다가 뜯어왔어. 저 총포상 주인이 아주 저런 거에 미쳐있는 사람이라 사줄 줄 알았거든. BDSM 반년 치 예산 받고 팔았다. 아직은 못쓴다는데, 열심히 고치고 있다니 기대해봐야지.”
전함에서나 쓰는 76mm 포 같은 것도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저 총포상 주인도 여기서 행복하게 장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원래는 암시장에서 우라늄 쪼가리를 사다가 별 미친 짓을 하려다가 걸려서 여기 감금된 거라고 했다. 물론, 본인은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지만.
“여기가 식당.”
“밥 장사도 하십니까?”
“장사라기보단, 여기 상주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구내식당 같은 느낌이지.”
먹자골목으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정체 모를 국물에 감자와 옥수수를 눌러 담은 병조림부터 화끈하게 불길이 치솟는 웍, 화려하게 휘날리는 밥알과 야채, 그리고 푸르딩딩한 고기.
잘못 본 게 아니라, 결 자체는 분명 고기의 형태인데 색이 파랬다. 푸르스름한 게 아니라, 물감처럼 선명한 파란색.
“….변종?”
“저래 봬도 저거 맛있다. 생긴 건 육고기인데 게 맛이 나지. 몇 안 되는 번식하는 변종 중 하나야. 개체수도 많고, 느려서 잡기도 쉽고.”
그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상점들을 지나서….
“여기가, 변종 부산물 처리 구역.”
약간 어두웠던 지금까지의 방문지와는 달리 새하얀 벽에 환하게 밝혀진 곳에 도착했다.
“랜드 고어, 다음은 랜드 고어. 저격으로 잡아 가죽에 흠 하나 없는 통짜, 뇌와 한쪽 안구가 상했고, 그 외 다른 부분은 전부 살아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BDSM 출신의 케시아 하일랜 님이 오늘 아침에 납품하셨습니다~ 500만으로 시작.”
“500”
“600”
“680”
“700!”
단상 위에서 속사포처럼 말하는 남자와, 번호가 붙은 모자를 쓰고 입찰하는 남자들.
그리고, 경매인의 등 뒤로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가 굵은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BDSM 운영비의 대부분은 여기서 나오지. 잡아온 놈을 경매로 넘기면, 바로 옆에 처리구역에서 기술자들이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쓸 수 있는 부분과 쓸 수 없는 부분, 아직 연구가 필요한 부분으로 나눠주지. 그러면, 그걸 부산물 가공업자들이 가져가서 온갖 희한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거야.”
마치 새벽 도매시장 같은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물건이 참치나 생선이 아니라 크고 작은 변종이라는 것 정도. 이곳 사람들에겐 이미 일상인지, 물건을 사고파는데 어떠한 생소함도 없어 보였다.
“뭐, 일단 크게 나누면 이 정도겠고. 따로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안내해주지. 영감님, 시간 괜찮지?”
“곧 가봐야 된다. 너도 알지 않느냐. 집 오래 비우면 그 아이들이 불안해 하는 거.”
“아아. 그거. 좀 괜찮아졌나? 어때?”
“뭐, 비슷하지. 별거 아냐. 늙어서 소일거리가 생겨서 오히려 좋아.”
넋이 나가 구경하는 나와 다나를 놓고, 둘이서 뭔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이안과 우진 영감님.
“박교수.”
“예?”
“나는 좀 바빠서 가볼 테니까, 나중에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따로 불러라. 잘 놀다 가고. 안내는 턱주가리 놈이 더 잘 해줄 거다. 이게 나이를 먹으니 나와 있는 게 힘들어서 원….”
“아, 예. 들어가 쉬십쇼. 어차피 자주 찾아올 테니까 뭐.”
“그래. 아, 혹시나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의학적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고. 내가 무슨 전문의인지는 알지?”
“헛소리할 거면 빨리 꺼지십쇼. 제발.”
“낄낄낄낄. 그래. 오랜만에 반가웠다, 이놈아. 다음에 보자.”
끼릭 끼릭 끼릭 끼릭-
우진 영감님은 히죽거리더니, 그대로 휠체어를 돌려 반대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근처 상인 중 하나가 그의 뒤에 붙어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인망이 있으시네.”
“그렇지. 이곳 모비-딕 암시장의 주인이시니까.”
“그래…. 우진 영감님이라….”
.
.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사이.
탁탁-
“저기, 교수? 정말 미안하지만, 이제는 다리가 좀 아파서….”
“음?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배려가 없었네? 확실히 좀 많이 걷기는 했지. 돌아가자 데려다줄게.”
“응.”
피로를 호소하는 다나의 말이 오늘치 그녀와의 데이트가 끝났음을 알렸다.
“업어줄까?”
“….부탁할게.”
여기까지 걸어온 만큼을 또 걸어야 했으니, 그녀도 거부하진 않았다.
제법 서늘한 밤거리를 걷는 사이. 한참을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서로의 사이를 오갔다.
난민 구역을 벗어나 돔의 영역으로 넘어올 즈음, 다나의 입이 열렸다.
“우진 할아버님은, 소중한 사람이지?”
“….뭐, 나름대로.”
“잘 참았어. 거기서 당신이 화를 냈으면, 아마 그분도 슬퍼하셨을 거야.”
“….미안. 데이트 분위기를 깨버렸네. 티 많이 났어?”
“웃는 것까지는 잘 성공했는데, 옆에서 보니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라고.”
“아아, 그거. 얼굴에 경련 오는 줄 알았다.”
은인이라면 은인이다. 평소 같으면 묻기도 전에 ‘어떤 씹새끼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이놈! 그놈들의 목을 베어서 내게 은혜를 갚아라!’ 같은 소리나 할 영감님인데.
그 강인하던 사람이, 그렇게 바람이 빠진듯한 모습이라니. 그 사람이 언급조차 피하고 싶을 정도의 기억이라니.
괜히 내색했다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들춰낼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다나의 눈에는 그게 보였나 보다.
그래서,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고 했겠지. 옆에 그녀를 데리고 있으면 위험한 일에 못 뛰어드니까, 더 이야기가 깊어지기 전에 자리를 비켜주려고.
“나한테 참 과분하지 싶다. 네가.”
“….글쎄.”
다나는 조용히 내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돔의 중심으로 향하는 걸음이 거북이처럼 느려졌다.
5분이면 지나갈 길을 30분 가까이 돌아간 다음, 행정부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쪼옥-
“어?”
“….배운 거야.”
등에 업힌 다나는 내 목에 깨물 듯 자국을 남기더니, 호다닥 내려와서는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봐!”
“….”
인사를 했지만 벌써 저만치 가버린 다나.
그 모습에 부글부글 끓던 마음의 맥이, 그만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래. 화를 내도 제대로 내야지. 이렇게 애먼 사람들 있는 데서 씩씩거리는 건 그걸 낭비하는 일이 아닌가.
“렙터.”
다나를 업고 암시장을 나오기 전, 이안이 슬쩍 보내준 수신호.
[아군 / 주적]우진 영감님의 다리를 가져간 놈들은, 그놈들이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놈들한테, 개인적인 이유가 하나 더 붙은 것뿐이야.”
그저 동기부여가 됐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라고 하자.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올라온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올 때와 달리 돌아가는 길은 얼마 걸리지 않았고, 이안은 물론 벡스도 아까 녀석이 있던 부산물 처리구역의 한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
“좋지.”
병째 던져준 술병을 받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좀 있는 눈치던데. 얘기하고 들을래? 듣고 얘기할래.”
“….듣는 것부터.”
“그럼, 나도 좀 마셔야겠군.”
먼저 말하라는 말에 이안은 냉큼 술병을 뽑더니, 그대로 한 병을 통째로 들이켜버렸다.
“안으로 들어가지. 누가 들어서 좋을 것은 없는 얘기니까.”
그리고, 이안의 입에서 우진 영감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다나 덕분에 이성을 건드릴 정도의 노기가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얘기를 듣다 보니, 나한테도 술이 좀 필요했다. 좀 많이.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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