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93
Chapter. 17. 여행 준비(11)
****
“흐아암~”
“어우, 졸려 뒤지겠네.”
“아니, 돔에 와서도 안 쉬면 우린 언제 쉽니까? 예?”
“그냥 집합도 아니고 완전무장 집합이라니. 이거 부조리야 부조리.”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호출한 지 10분도 안 돼서 지정된 위치에 전부 모인 BDSM 정예 멤버들.
“어때. 이 정도면 교수 네가 말한 그 ‘계획’에 다들 쓸 만해 보이지 않아?”
“확실히. 이 정도면 다들 정예라고 말해도 무방하군.”
잠깐 사이에 모비딕 관리구역 외곽에 모인 대원들을 본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근육덩어리.
온갖 굵직한 흉터가 가득한 것도 모자라서 문신으로 도배를 해버린 얼굴.
뼈와 마른 내장, 탄피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하거나 장전된 총을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는 녀석까지.
실로 ‘뭔가 사고가 났을 때, 이유 없이 범인일 것 같은 사람’에 한없이 가까운 사람들만 잔뜩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저, 저놈은 요괴인가?”
“아아, 말 안 해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군.”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무수한 범죄형 페이스들 사이에 정점에 가까운 자가 존재했다.
“어이, 부들람! 잠깐 나와봐!”
“아니, 대장은 뭔 일만 있으면 나부터 부르쇼? 나 이번에는 진짜 착실하게 있었다니까!”
“그런 거 아니야 임마. 개인 임무다. 내 옆에 얘 알지?”
“흐흐흐흐, 알다 뿐입니까. 만나서 영광입니다 왕대장. 부들람이요. 방송은 잘 봤수다.”
“얘 호위 겸 악세사리 좀 해줘라. 둘이 같이 침투 임무야.”
“아, 진짭니까? 오오우! 잘 부탁합니다, 왕대장! 이거 영광이구만!”
“아, 그래….”
유연한 표범처럼 다가온 흑인이 내미는 손을,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주 잡았다.
검은 피부. 흑인 특유의 탄력 있는 근육 위에, 크롭티와 짧은 청반바지.
“BDSM 전투 전문대원, 부들람이요!”
주춤-
장비는 샷건에 쿠크리. 추가로 허리춤에 다용도 색에는 적,청,황 3색의 알록달록한 수류탄을 매달았으며.
주춤주춤!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함께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그 얼굴에는, 한쪽 뺨을 덮을 정도로 커다랗게 하얀색으로 ‘愛’를 새겨넣었다. 거기에 머리는 옆머리를 다 밀어버린 ‘돌격머리’에, 심지어 금발로 염색했다.
“와, 완벽해…. 이 얼굴이야말로 세기말의 상징…!”
그야말로 ‘완성형 범죄자’에 가까운 페이스였다. 근처에 불이 나면 잡혀가고, 노인이 넘어지면 욕을 먹고, 벼락이 떨어져도 당연히 이놈 짓이라고 지탄받을만한 그런 얼굴.
“매일 양로원을 약탈하고 고아원에 마약을 뿌린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만하게 생겼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인재를….?”
“인재(人才)가 아니라 인재(人災)겠지. 우리 중 그 누구도 저놈을 막을 수 없다. 하도 인상이 사나워서 머리라도 좀 길러보라고 했더니 저 꼴을 하고 왔어. 어차피 저렇게 생긴 거, 인상이라도 좀 황무지 문화에 어울리게 문신 같은 거 해볼 생각 없냐고 했더니 또 저런 걸 대문짝만하게 박아 오더군. 자극할수록 악화되기만 해서 포기한 지 오래다.”
“뭐, 문제 있는 녀석은 아니야?”
“전혀. 저렇게 생긴 주제에 채식주의자. 제법 독실한 불교인에 번 돈의 절반은 고아원에 기부, 나머지 절반은 자기 미래의 꿈을 위해 저축하고 있는 착실한 녀석이야.”
심지어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작전이 벌써 반은 성공한 것 같은데?”
외모에 편견이 없는 나조차 이 녀석이 꺼려질 정도라면.
평생 눈치 보고, 눈앞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찔러보고, 그런 판단 속에 고정관념이 생긴 범죄자들은 이 녀석을 어떻게 볼까?
“모든 사람은 그 쓰임새가 있다더니.”
“음? 뭐 할 말 있수?”
“아, 아니. 앞으로 잘 해보자고. 둘이서.”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든든함 그 자체였다.
****
“….예? 왕대장, 제정신입니까? 그냥 평범하게 들어가서 다 때려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하면 쥐 꼬리만 잔뜩 손에 들고 나온다니까. 나중에 고생하기 싫어서 지금 고생하는 거야.”
“아니 뭔….”
“넌 그냥 서서 인상이나 쓰고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작전의 개요를 확인한 부들람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만 침투조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산개해서 포위망을 조진다는 말 아냐?”
“일단은?”
큰 얼개만 보자면 그렇게 섬세할 것은 없는 작전.
둘이 들어가서, 부족한 정보를 확보하고, 가능하면 지금 잡혀있을 인질-변종화 영향을 받은 시민들을 구출한다.
안에서 들쑤셔서 입구 쪽 경계가 허물어지면 화력 돌격에 특화된 이안과 나머지 대원들이 돌입. 그 외 대원들은 렛 휴먼 관리구역 인근을 크게 포위해서 혹시나 따로 도망치는 적을 사살한다.
“아니 그러니까 왕대장, 박교수씨는 손님으로 위장이 불가능하다니까? 돔에 당신 얼굴 모르는 사람이 있겠수? 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당신인데? 뒷동네 애들은 좀 깊이 들어갈라 치면 얼굴이랑 무기부터 까고 거래합디다! 파고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누가 얼굴 가리고 들어간댔냐? 당당하게 까고 들어가면 되지.”
터벅 터벅 터벅
애초에 BDSM 가죽 재킷에 총도 권총 두 자루 정도의 가벼운 무장만 하고 온 상황이다. 놈들 근거지 입구 근처인데 발소리조차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나 오는 거 알아달라는 거지.
“야, 이거 보이냐? 내 팔이랑 손등에 막 튀어나온 거?”
“예. 유광이라 어두운데도 눈에 잘 띄는구만.”
“그렇지? 그럼 누가 봐도 그 변종화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 같겠지?”
“그렇지 않겠슴까?”
“그런 내가 이런 몸을 훤히 드러내고 저 인신매매 쥐새끼들 사이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어…. 그런 사람 잡아다 파는 놈들이라며? 잡혀간다? 잡혀가서 침투하려고?”
“아니지! 그건 너무 1차원적인 생각이고!”
흐릿한 달빛 아래 이빨과 눈, 새하얀 ‘愛’ 문신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면 잡혀가겠다만, 나는 그 유우-명하신 박교수님이란 말이지. 음…. 설명을 좀 해주고 싶은데, 벌써 다 왔구만. 여기서부터는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을 아끼자고. 어차피 가면 다 알게 돼.”
“아잇, 우라질…. 진짜 이렇게 쌩으로 들어간다고?”
“믿어 임마. 명심해, 너는 그냥 인상 팍 쓰고! 내 옆에 팔짱 끼고 서 있으면 되는 거야. 네 역할은 분위기 조성용 악성향 악세사리다. 누가 말 걸면 인상 쓰고, 귀찮게 굴면 나이프를 꺼내서 아주 천천히, 끈적하게 핥으면서 노려봐.”
“도대체 댁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투덜거리면서도 품에 있는 나이프를 확인하는 부들람.
그렇게 부들람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해준 다음, 허름한 가판대 옆의 작은 쓰레기 더미로 다가갔다.
에젤이 알려준 렛 휴먼 지하 건물의 입구. 애초에 플라스틱 쪼가리부터 나무 톱밥까지 전부 재활용하는 황무지에서 쓰레기 더미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있나.
발끝으로 쓰레기더미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 즈음에 눈만 겨우 보일 정도의 창구가 나타났다.
“찍찍.”
암구어로군. 어디 보자. 에젤이 가르쳐줬던 게….
“….쥐 인간 같은 것은 없다.”
끼이이익-
알맞은 대답을 하자, 쓰레기더미로 감쪽같이 위장한 입구가 좌우로 열리며 등이 굽은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암어를 바꿀 때가 됐나…. 딱히 그쪽한테 우리를 소개해준 녀석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이면 소개가 없어도 받아야지. 안 그런가? 렛 휴먼.”
“힉힉힉, 하긴, 이 동네에서 그쪽만큼 신원이 확실한 사람도 없지….”
천식이라도 걸린 것처럼 웃던 남자의 동공에 나와 부들람의 모습이 담겼다.
“뭐, 내 일이야 절차에 맞게 들어온 사람을 들여보내는 일이니…. 들어오시지요, 손님. 당신이 원하는 모든 물건이 이 아래에 있습니다. 없으면, 찾아서라도 팔아드리지…. 힉힉힉힉!”
곱추 문지기는 과장된 인사와 함께 우리에게 길을 비켜 보였다.
“쭈욱 내려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길이 어두울 테니 벽이라도 짚으면서 내려가시고…. 다 내려가면 눈먼 아이들이 몇 명 있을 텐데, 아무나 잡아서 ‘27번 방’으로 지정받았다고 말씀하시면 아이들이 다 안내해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버를 내리는 곱추. 바깥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는 벽을 더듬으며 깎아지른 듯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
탁.
“27번 방에 도착했습니다, 손님. 즐거운 구매 되세요.”
감정을 상실한 듯, 멍하기만 한 소년의 목소리.
광원 하나 없는 지하 건축물 속에서 나와 부들람을 안내하던 소년은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내 손을 문 손잡이 위에 올려준 다음 휭하니 가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 근처에는 맨발의 맹인 소년들이 돌바닥을 걷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괴멸적으로/철저/보안]”
“[미확인 지형/다수/퇴로/인지불가]”
“[기확보된 구조도/대단한/노력/결과물]”
“[공간/엿같음/공간/엿같음!]”
부들람과 나는 서로의 팔뚝을 찔러가며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군.’
일단, 지하 구조가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손님들은 훈련받은 맹인 소년들의 인도에 따라 각자 정해진 방으로 안내받는다.
중간중간 숨이 탁 트일 정도로 넓은 공간도 있었고, 길도 그리 좁지 않은 데다 대부분 곡선적이어서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새기기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출입해도 내부 구조를 짐작할 수 없는 방식. 거래는 수백 개의 밀실 가운데 지정된 한 곳에서, 단 한 명의 상인과 마주하며 이루어지기에 내부 인원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정도면 감찰부 요원들이 표층 구조도라도 파악한 것이 대단한 업적으로 느껴질 정도.
철컥.
좁지만 고풍스러운 책상과 안락의자가 준비된 방. 그러면서도, 뭔가 낡고 퇴폐적인 느낌을 주는 밀실.
나와 부들람이 들어섰을 때는 이미 책상 반대편에 우리를 상대하러 온 상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이번 27호에서의 거래를 맡은, 딜리 테일이라고 합니다. 이거, 큰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나름 차려 입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손님이군요? 어디 보자…. 옆에 그자는, 호위입니까?”
“이런 쥐새끼 굴 같은 곳에 들어오는데 바보처럼 혼자 걸어 들어올 생각은 없으니까.”
“좋은 태도입니다. 요즘 황무지 사람들이 참 많이 해이해졌지요. 혼자서 어둑한 골목을 돌아다니질 않나, 어디를 가든 감찰부 요원이 지켜준다고 생각하지를 않나…. 정말 옛날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살지 뭡니까. 바보 같으니라고. 마주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야말로 황무지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황무지의 귀감이라 불리는 분답게 요즘 멍청이들과는 거리가 있으시군요.”
짝. 짝. 짝. 짝.
남자의 마른 손가락이 천천히 박수를 치며 부들람을 쳐다보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나이프를 꺼내 천천히 핥아 보였다. 마치, 평생 그것만 연습해온 사람처럼 징그러운 모습에, 미묘하지만 상인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저 얼굴로는 절대 감찰부 요원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보아하니, 양지의 물건을 찾으러 오신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하필 우리 렛 휴먼을 찾아오신 것도 그렇고, 돔의 훌륭한 요원들을 제쳐두고 호위를 저런 인물로 외부에서 따로 구하신 것을 보면.”
“잘 아는군. 어디, 맞춰보겠나?”
“흐음. 가상현실 게임의 환각통이 문제라면 아주 괜찮은 전자 마약이 있지요. 물론 전통적인 화학 마약도 있습니다. 계집이 필요하시다면 닳고 닳은 것들부터 초야도 경험하지 못한 깨끗한 아이들도 있고, 조금 위험한 일에 쓰고 버릴 용병이 필요하시면 제대로 목줄을 채워놓은 놈들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눈치 본다고 만들지 못하는 ‘특별한’ 변종 부산물 장비도 있지요. 만약 이 중에 원하시는 물건이 없다면, 따로 주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뭐든지, 우리 렛 휴먼은 손님이 원하시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져다드리지요. 합당한 금액만 지불한다면 말입니다.”
“특별한 변종 부산물 장비. 그리고…. 방금 ‘뭐든지’라고 했지?”
기다렸다는 듯 상인의 말을 받으며, 나도 책상 앞으로 몸을 숙인다.
충분히 은밀한 공간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은밀했으면 하는듯한 몸짓으로.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며 천천히 장갑을 벗고 팔을 걷어 보였다.
“호오오. 이건….”
“이게 뭔지는 알겠지.”
“그런 이들이 종종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지금 밖에 돌아다니는 변종처럼 변하지도, 그렇다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 꽤나 보기 드문 증상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다 알고 왔으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지금까지의 여유 넘치던 나른한 눈빛과 달리 긴장, 혹은 어떠한 기대로 커진 상인의 동공.
그의 손이 은밀하게 책상 밑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압박하듯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있나? 없나.”
“없습니다.”
“질문을 바꾸지. ‘그걸’ 부위별로 파는 것 말고, 산채로 파는 게 있나? 아니면 따로 주문해야 하나.”
“오호라….”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굳어있던 얼굴을 풀어내는 상인. 반대로, 절박하다는 표정으로 가죽 재킷을 풀어헤치며 금속판으로 뒤덮인 가슴과 몸 이곳저곳에 솟아오른 검은 색 경질화된 돌기를 보여주는 박교수.
“‘그걸’ 취급한다면 이 국소 변종화가 계속 자란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날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알아들었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고 말 거라고. 그 지옥에서 살아나와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
“하하하하. 이거이거, 유명하신 분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접근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과연…. ‘그런’ 용도로 구매하신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겠지요.”
상인은 긴장이 역력한 내 표정을 보며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듯,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말했다.
“….실험체로 쓸 같은 병증을 가진 인간을 사러 오셨군요? 하긴, 현재로선 불치병에 가까운 증상이고, 언제 괴물이 되어 저기 정육점 돼지처럼 낱낱이 분해될지 모르니 겁이 나셨겠지요.”
“쓸데없는 소리나 주워섬기겠다면 다른 상인을 부르겠다. 물론, 내 비밀을 확인한 너는 죽여 없앤 다음에 말이야.”
“저런, 무서우셔라.”
두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가 섞인 협박. 이제 상인은 완전히 우위를 점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돔의 영웅이라 불리는 분도 사람이 아닙니까?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법이지요. 우리는 그 날것의 인간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박교수님에게 가장 필요한 곳을 잘 찾아오셨다고 할 수 있지요. 부끄러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 고객들 중에는 박교수님 말고도 높으신 분, 고결하신 분이 상당하니 말입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렛 휴먼의 VIP중 한분이 되신 것뿐입니다.”
타악!
“결론만 말해라. 있나? 없나.”
“있습니다. 충분할지는 모르겠으나, 부족하진 않을 만큼 가지고 있지요.”
“….돈은 썩어날 만큼 가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평생 다 써도 못 쓸 만큼 쌓여있더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십니다. 그 물건은 워낙 희귀하기도 하고, 취급 위험도도 높아서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니까요. 그럼, 어떤 물건을 원하시는지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실까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작은 단말기를 꺼내는 상인. 흐릿한 단말기 화면에는 저마다 한 두군데씩 변이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상품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만났던 카밀라씨의 사진도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in progress(진행중)] 라는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진행인지는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
“….이런 화면으로는 알아볼 수 없다.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에 계산을 하겠어.”
“음, 손님.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그게 안 되면 거래도 없던 것으로 한다. 어디 몇십억 단위 거래를 놓치고도 네가 렛 휴먼에 무사히 남아 있을 수 있는지 내기할까? 나는 내가 따로 손 쓸 필요도 없다는데 걸지.”
“으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으신 분.”
카탈로그 단말을 다시 집어든 상인은 그것의 자판을 몇 번 두드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선입금을 받기 전에는 절대 물건을 보여드리지 않습니다만…. 이번 거래의 경우에는 사이즈가 워낙 크기도 하고, 고객이 고객인 만큼 예외로 해도 되겠군요. 음. 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더러운 비밀이라면 충분히 선입금을 치르고도 남지요.”
“너 이 자식-”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곳에서의 대화는 모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녹화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알았다.”
“하하하하. 너무 언짢아하진 마시길. 죽을 목숨 살고자 하는 일인데, 고작 이 정도 수모가 대수겠습니까?”
“알았으니까, 빨리 안내나 해.”
“소식은 전해뒀으니, 안내할 사람이 찾아올 겁니다. 여기 올 때 안내받은 방식 기억하시죠? 똑같이 내려가시면 됩니다.”
상인이 그렇게 말하는 찰나, 내가 들어온 쪽의 반대편 문이 열리며 천으로 눈을 가린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밑으로 내려가는 손님 두 분 확인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 가시지요. 얼른 몸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셔야 하잖습니까?”
부드럽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을 가리키는 상인과, 수치심을 감내하는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박교수. 그 뒤로, 말없이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부들람.
두 사람이 맹인 소년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깡마른 상인은 손수건을 꺼내 가슴까지 축축하게 젖어든 땀을 닦았다.
“과연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우리 쪽에 숙이고 들어와야 하는 상황에도 압박감이 대단하시군그래. 여차하면…. 여기서 몇 놈 죽이고 강짜를 놓을 생각이었겠지? 저런 미치광이 사이코패스 같은 놈을 달고 온 것을 보면.”
자칫 목숨이 간당간당한 거래였지만, 어떻게든 성사시켰다는 생각에 암상인 딜리 테일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수십, 어쩌면 수백억 실링은 족히 오고 갈 거래를 성사시켰으니, 단숨에 테일 급을 넘어 ‘클로’급으로 대우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박교수라는 유명인의 약점을 잡게 되었으니 렛 휴먼 내에도 몇 없는 진짜 실세, 쥐의 머리들 중 하나로 대접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흐흐흐흐…. 이번 거래만 끝나면, 이번에 잡은 약점으로 박교수 주변 사람들도 하나씩 이쪽으로 끌어들여서….”
BDSM, 돔의 온갖 연구원과 고위 공무원, 그의 연인이라 알려진 경국지색의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를 차례로 떠올릴수록 딜리는 그의 앞에 펼쳐진 장밋빛 미래가 너무나도 확연하여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
“[작전 성공]”
“[광인!/천재!/숙련된 지휘관!]”
“[목격/학습/신입/BDSM]”
“[충격!]”
물론, 맹인 소년의 뒤를 따라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두 사람이 이런 수신호를 나누고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상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