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97
Chapter. 17. 여행 준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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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패, 팬입니다!”
“어머! 만나서 반가워요~”
무서울 정도로, 확연하다.
“사인? 얼마든지요! 당신 이름이?”
“케스….”
“예쁜 이름이네요! 자아, 여기?”
또각. 또각. 또각.
깨끗하지만 낡은 상가 건물에 울리는 하이힐 소리와, 래빗의 주변에 몰려든 BDSM 대원들.
“저 여자는, 무슨 서큐버스라도 되나?”
그것은, 실로 기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위기 장악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분위기란 막 ‘오오, 래빗! 오오오! 우리의 아이돌!’ 하는 광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즐거움.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손색없을 정도의 화려한 미녀와 살가운 대화를 나누고, 작은 웃음이 미풍처럼 번지며, 어느새 하나같이 떠들썩 해지는 그런 즐거운 분위기 말이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녀의 팬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어이, 메탈조.”
“왜?”
“저 여자, 어떻게 보이냐?”
“어떻냐니, 그야…. 괜찮은데? 예쁘고. 싹싹하고. 성격좋고.”
심지어 폭파조절장애를 가진 사이코 메탈조의 취향까지 섭렵할 정도였다.
간-신히, 이 박교수가 GG내부와 황무지에 얽힌 이면을 알고, 래빗이 보통 여자가 아닌 것을 확연히 인지하고 의심가득한 눈초리를 하고나서야 겨우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 래빗의 진면모.
또각. 또각. 또각.
대원들의 인파를 가르고, 이안에게 래빗과 나, 천류제 셋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물린 다음에서야, 조용히 내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 입을 열었다.
“무슨, 마녀라도 되는거냐?”
“어머~ 실례의 말씀을! 난 그저 만인의 호감형 인물일 뿐이랍니다~?”
대원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서 묻자,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래빗이었다.
“성적인 매력, 그저 대단한 인물에 대한 선망이 아닌 순수한 호감이라니…. 차라리 정신계 마법이라고 믿는게 더 합리적이겠군.”
“특별할 것도 없는, 약간의 관계 심리학이랍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매력이나 선망이 딱히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다른 것들과 교묘하게 섞여서 다가올 뿐.”
호감. 저 화려한 외모로 애정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감만 끌어내는 인물.
작은 손짓에 함축된 의도. 정교함을 넘어 완성에 가까운 살가운 웃음. 사인을 건네며 작게 속삭이는 몸짓, 발걸음, 작게 피어오르는 행복함을 관심없는 이들에게 전염시키는 활발한 행동과 말투까지.
그녀는 주변에 모여든 모든 인물이 그저 이 순간을 ‘꽤나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하게끔 완벽하게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얼마나 연습했나?”
“이렇게 살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평생. 한시도 쉬지않고.”
가스라이팅. 타인의 상황이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상대의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
래빗은 가스라이팅의 전문가, 아니 신에 가까웠다. 다만, 일반적인 가스라이팅과 달리 래빗은 그녀의 화려한 외모를 미끼로 끌어들인 이들이,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겁고 행복한 시간으로 느끼게 하는 착한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래빗의 플레이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저 여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손대면 안되는 일이 없어.’
….왜 아니겠는가? 그녀와 조금이라도 얽힌 사람은 전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성애(性愛)의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호감은, 달리 말하면 끔찍할 만큼 강력한 정치, 외교적 카드나 다름없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러한 분위기 장악력이 타고난 것이 아닌 철저한 계산과 훈련, 시뮬레이션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 말은 BDSM이 아닌 다른 성향의 집단과 마주했을 때도 그들의 성향에 맞춰 행동함으로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만인의 호감형 인물. 단 하나도 똑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그 모두를 끌어들이는 마성.
또각. 또각. 또각.
“누군가를 만나서, 즐거운 기억이 쌓이고. 그 즐거운 기억이 반복해서 쌓이면 어느새 인과가 뒤집혀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즐거운 순간으로 변하는 것. 그게 ‘친한 사람’이라는 관계가 생성되는 과정이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룰이잖아요? 나는 사람들을 연구했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 나와 있는 순간을 즐겁게 여기도록 할지 연습한거에요.”
“사람이 다 다른데, 그게 전부 계산해서 되는 일인가?”
“사람은 다르지만, 다들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잖아요? 외적인 매력, 성격. 행동언어. 래빗 프린세스라는 유명인이 가지는 위치. 선망. 부. 애정…. 다소 다루기 난해한 것들이지만, 잘 사용하면 안될 것도 없구요.”
이거,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여자였다.
천류제의 무력, 나의 기지와 임기응변처럼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
만나는 모두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만큼 강력한 분위기 장악력이 바로 래빗이 월드를 클리어한 원동력이었다. 폭력에 가까운 흡입력, 분위기 장악력.
심지어 지금 이렇게 그녀의 진면목을 터놓고 대화하는 나조차 래빗을 꽤 괜찮은 사람이라 느끼고 있었다. 계산적이고 철저하고. 개인의 야망이 있지만 그게 딱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
그녀에 대한 의심을 풀어내는 가운데, 어느새 나도 ‘이 녀석이랑 같이 일하면 편하겠는데?’ 같은 식으로 그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민 전부를 살인 미치광이로 끌어들인 아돌프 히틀러의 장악력이 이랬을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누구나 그렇듯, 나랑 얘기를 나눈 사람은 전부 ‘얘기가 좋게 끝났다’고 여기게 되니까. 난 모두에게 즐거운 존재랍니다?”
그런 내 기분을 벌써 눈치챘는지 래빗은 성큼성큼 걸어나가, 내가 안내한 방의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갔다.
벌컥!
“아.”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실제로 래빗을 만난 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당황한 얼굴.
훙-
후두둑!
보는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휘두르기. 그리고, 먼저 움직인 몸을 뒤따르듯 떨어져내리는 땀 방울.
하는 짓만 보면 도복이라도 입고있어야 할 것 같은 남자는, 면 소재 트레이닝 복을 입고 현대적인 체육관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웃음이 헤픈 여자와, 기다리던 남자로군.”
“처, 처, 천….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아, 미리 얘기 안했나? 천류제가 나 만나겠다고 여기 와 있었어. 오늘 면담은 삼자대면이다.”
“아니, 이런, 이건. 으….!”
시종일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던 래빗이 안절부절 못하는 가운데.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온 천류제는,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천류제다.”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그저 그것이면 충분하다는듯한 인사.
열기와 함께 훅 다가운 천류제라는 인물의 분위기에, 나도 마주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박교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돌처럼 빠짐없이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
그의 눈에는 무생물과 같은 무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 그럼. 이제 게임 얘기를 좀 해봅시다.”
“그러지.”
“아니, 왜 하필 이 인간을 나랑….”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 각자의 의자에 자리했다.
****
“….”
“….”
“….”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던 래빗은 어딘가 주눅든 모습으로.
천류제는 반개한 눈으로 아주 대놓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는, 그런 두 사람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하며.
“흠흠!”
아무리봐도 둘중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 같지 않아서, 호스트인 내가 억지로 분위기를 열기로 했다.
“에…. 하나씩 우선 풀어나가 봅시다. 우선, 제일 오래 기다린 천류제 당신부터. 내가 듣기로는, 나를 찾아 왔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게 있었다.”
“개인적인 질문이라…. 흥미가 좀 당기는군요.”
천류제는 래빗의 정극단에 위치한 것 같은 인물이다.
인간관계 0
알려진 정보, 거의 없음. 외형으로 남미쪽 혼혈이라는 것만 추정될 뿐.
그야말로 현대의 신비에 가까운 고독한 검사.
관리자한테 전해듣기로는 서버룸이나 그런것에 관심도 없어보였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내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다? 그것도 하루를 칼같이 정해놓고 사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설마, 진짜로 [한번 썰어보고 싶어서] 같은 그런 흥미는 아니겠지?’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개인 단련임을 떠올리며 약간 불안해하는 사이.
천류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일자로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박교수. 혹시, 한서호라는 인물을 알고있나.”
엥? 뭐?
“한….서호? 누구?”
“가족 성이 다른 것은 확인했다. 혹여, 아버지나 어머니 쪽 혼외자가 있었나.”
“예?”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넘어 한서호라는 인물과 혈연이 있을 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래빗도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이게 뭔 소리야. 그 유명하신 인류최강 신비주의 칼잡이가 오랜 칩거를 깨고 나와서는, 겨우 한다는 게 호구조사?
내가 어이가 없어셔 쳐다보자, 그걸로 대답이 됐다는 듯 천류제는 눈을 감았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물어본 것이다. 내 평생에 걸쳐 서호와 같은 인물을 찾았으나, 확인된 것은 서호와 박교수. 단 두명이었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둘 사이에 접점은 없는 듯 하군.”
“아니, 잠깐만! 도대채 한서호가 누구고, 그게 뭔데 나랑 상관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찾아왔답니까? ”
“….”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천류제에게 되묻자, 그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꾹꾹 눌러쓰듯 천천히 단어를 입에 담았다.
“완성자.”
“….완성자? 우리 셋 말고 또 다른?”
“아니. 게드로이츠의 우스꽝스러운 기준에 맞춘 것이 아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완성자에 가까운 인물. 그게 한서호다. 나는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선별기준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그가 가진 계획은 가슴 깊이 공감하고 있다.”
기준에 동의하지 않으나 계획에는 공감한다. 기준이란 완성자를 뽑는 과정인 GG를 말하는 것이고. 안드레이 게드로이츠의 계획이라면….
“예견된 미래를 통제 가능한 미래로 유도하고, 가장 합당한 자를 찾아 그에게 힘과 권력을 쥐어주는 것. 멸망이나 회복같은 것에는 관심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인물이, 마약굴의 하수도에서 허무하게 죽어가선 안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지. 나의 이름, 나의 존재. 내 모든 것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누군가의 유산이니까.”
찰칵.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엄지로 쓰다듬는 천류제.
“세상을 이끌기에 합당한 자.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이의 썩어버린 품속에서도 인간성을 틔워내는 자. 나는 그런 이를 두 눈으로 목도하였으며, 그렇기에 그런 인물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확연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건, 정련된 강철같은 천류제의 얼굴에 유일하게 감정이 비쳐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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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류제 개인 기준의 완성자라…. 래빗, 어째 알고 있었다는 눈빛인데?”
“모를 리가. 저 바보는 우리 집에도 찾아 왔었거든요. 그때도 지금이랑 똑같은 얘기를 했었고.”
천류제를 만나서부터 계속 불편해보이던 래빗은 뾰로통한 얼굴로 천류제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았다.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결국 저쪽도 흔한 황무지 사람처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린애 투정을 늘어놓는 사람이에요. 오래전 죽은 동료. 그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덕에 내면에서 신격화된 존재! 평생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쳐도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애초에 본인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속에서 확정지은 상태니까.”
“래빗 프린세스. 내가 완성자 후보라는 끔찍한 농담과 함께 황무지의 뒷이야기를 들은 다음, 진짜 완성자 후보가 있다길래 기대를 품고 찾아갔었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여자,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여자.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갔지만, 여전히 게드로이츠의 기준이 틀려먹었다는 것만 다시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잠시 틈이 생긴사이 래빗이 끼어들고, 천류제가 맞받아치며 둘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이익, 내가 어때서! 솔직히 나 정도면 세상을 이끌기에 적합한거아냐? 일 잘해! 사람 잘써! 심지어 내 목표는 만인의 행복추구란 말이에요!”
“저 여자가 사람을 쓰는 방식은 히틀러가 사람을 홀려 전쟁터에 내모는 것과 비슷하지. 강렬하지만, 현혹일 뿐이다.”
‘설마 했는데, 래빗은 진지하게 게드로이츠 식 완성자-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군?’
나중에 저쪽과도 얘기해 보겠지만, 지금의 대화나 클리어 보상의 방향을 보면 확실해보였다.
“그럼, 댁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있기나 해요! 말만 들어서는 한서호 그 사람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 같던데!”
“….나도 없는 줄 알았지. 최근까지는.”
그렇게 래빗과 천류제가 말싸움을 하던 중, 갑자기 대화의 화살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어…. 나요?”
“그래, 너 였다. 박교수. 내가 평생 추구하던 강인함. 스스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퍼져, 자리한 환경 자체를 바꾸는 자. 초인. 그날 이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대단히 희귀한 형질의 보유자.”
“어…. 어?”
“우연히 너의 영상을 봤을때는 내 눈을 의심했지. 래빗에 대해 실망한 이후로 한서호가, 어쩌면 그녀 말대로 마약에 구멍이 숭숭나버린 내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 서호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지. 으으음…. 뭔가, 만나서 해야할 이야기나, 행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천류제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군.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하거나, 기억을 오래 유지하는데 그리 소질이 없는 편이다. 매일 환청과 망상이 쌓일 무렵이 되면 쇠를 내리쳐 그것을 가라앉히는게 고작이지. 완전히 박살난 기억속에서 희미하게 뭔가 하려 했었다, 하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박교수, 네게도 분명 찾아와서 뭔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잊어버렸군.”
마약으로 인한 뇌기능 저하라. 황무지에서도 그리 드물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습관에 가까운 그의 일상과 외부활동이 없다시피한 그의 생활도 여기서 기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없이 떠오르는 것은 술술 말하지만, 무언가 계획해뒀던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그런 경우.
“….한 가지.”
“오, 기억나는게 있나?”
“앞으로 여기 살 생각으로 나왔다는게 기억나는군. 너는 서호를 닮았으니, 어쩌면 보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을까 해서. 필요하면 네 안위 정도는 지켜줄 수 있다. 서호와 같은 형질을 보유한 이는 매우 희귀하니, 죽어버리면 또 언제 찾을지 모르니까.”
음? 잠깐만. 그러고보니, 집착의 대상이 예의 그 한서호한테서 나한테 조금 번졌잖아? 이런 극단적인 성향의 인물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는거…. 조금 위험한거 아닌가?
“그…. 내가 한서호를 닮아서 지켜주겠다고?”
“그렇다. 서호와 같은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좋은 일이니까.”
“일단, 완전히 그 인간이랑 똑같이 보는건 아니지?”
“서호는 죽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
휴우. 일단 아예 나한테 그 인간을 투영하는 것은 아니고.
“만약에 내가, 댁이 생각하는 ‘천류제의 완성자’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래도, 죽이고 싶어 할 것 같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너와 같은 인물의 영향력을 그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겪어본 사람이다. 네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성장한다면, 그 영향력이 두려워서라도 죽여 없애고 싶어지겠지.”
“으윽-”
“저봐, 저봐. 천류제 저 인간은 일반적인 사람으로 상정하고 대화하면 안된다니까?”
역시나 지뢰. 그저 단순히 내가 추구하는 인간상에 적합해서 옆에서 도와준 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거기서 삔또가 상하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꽤나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절대 다루기 어려운 인물.
하지만, 지금 당장은 대단히, 아니 저 사람치고 여기서 더 우호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 말은, BDSM에 들어오겠다는 뜻입니까?”
“음.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면.”
덥썩!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이 청년 치매 노인의 손을 덥썩 붙잡은 다음, 위 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아이고~ 그런 일이었으면 진작에 말을 하시지! 우리로선 무조건 환영합니다! 연봉도 잘 챙겨줄게! 사람 패는거 좋아한다고 하셨지? 우리 집에 맞아야 정신차릴 애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하루도 쉬지않고 패도 됩니다! 잘 왔어, 잘 왔어!”
“미, 미쳤어요? 수틀리면 박교수 당신 죽인다잖아! 천류제는 사람의 기준이 없는 인간이라니까?”
“아 그거야 우리 사정이고! 어디 내가 죽인다고 쉽게 죽어줄 사람인가? 사람이 제법 털털한 구석이 있어보이니까 잘 설득하면 되겠지!”
래빗의 말대로 천류제의 행동은 정신질환에 가까웠다. 특정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 기억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니까.
더욱이, 천류제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마약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흔한 황무지 사람답게 어딘가 단단히 망가진 모습. 하지만, 자기 주관 확실하고 말귀 알아먹으면 된 거 아닌가?
더욱이, 얘는 게드로이츠 컴퍼니 공인 ‘초인화 프로그램’을 이수받은 일인 군단 같은 인간. 이미 실력은 이안의 부대와 조우했을 때 검증된 뒤였다.
그야말로 노다지. 얻어걸린 로또!
“아, 하나 더.”
“오! 뭐가 더 있어? 뭐든지-”
“연인이 있다고 들었다. 되도록, 아이는 많이 낳았으면 좋겠군.”
“-쿨럭!”
“되도록 도울테지만, 이곳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어쩌면 서호와 같은 성질이 유전에 의한 것일수도 있으니, 되도록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자손은 많을수록 좋겠지. 서호와 같은 인물이 몇 명이나 된다면, 그것도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고는, 자기 할 말은 끝났다는 듯 휘적휘적 나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까앙- 까앙- 하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호의로 말하는데, 저 인간 받아들인걸 후회할거에요. 살아움직이는 폭탄이나 다름 없다구요.”
“마냥 부정하지는 못하겠다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방에 남은 래빗과 나는, 천류제가 나간 자리를 한숨으로 채웠다.
“자, 아무튼. 클리어, 서버룸, 황무지의 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나가줬으니. 이제, 그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끼리 얘기를 좀 하도록 할까요?”
잠시 숨을 다잡은 래빗은 어떻게든 이곳에 들어올 당시의 분위기를 회복하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요. 당신의 3월드 클리어 시드, 나 한테만 팔고 공개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죠. 아, 물론 당신도 플레이 하지 않으면 좋고.”
“기각.”
이 이후로는 익숙하고 평화로운 신경전이었다.
확실히, 래빗이 천류제를 왜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같이 다른 사람을 읽는데 익숙한 사람은, 저렇게 무슨 수를 써도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불편해지거든.
그리고 래빗의 경우, 세상을 ‘즐거운 상태’로 유지하는데 모든 관심과 능력을 쏟아붓는 사람이니까. 본인이 불편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겠지.
커뮤니티 통제권한 있다며! 그걸로 여론 조작 조금만 해달라니까? 그런거 잘하잖아! 그냥 국소 변종화 환자들에게 동정여론만 좀 만들어주면 된다고! 이거 좋은 일이라니까?
“아 몰라요! 시드 독점권 줘! 나 저 멍청이가 만든 4월드 말고 제대로된 4월드로 보상 챙기러 갈거야!”
“아니, 그거 안판다고!”
“벡스한테 당신이 소리질렀다고 이를거야!”
“하! 우리 짜리몽땅이 누구 편 들지 내기할까?”
아아, 평화롭다.
날선 대화 사이에서 하나 둘 타협점이 채결되는걸 보고 있노라면, 이게 힐링이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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