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398
Chapter. 17. 여행 준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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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잘 끝났어?”
“아, 미안. 기다리게 했네?”
“아냐. 나도 하다가 마무리 못 한 일이 있어서 그거 하면서 기다렸어.”
천류제가 나가고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신이 난 래빗의 하이힐 소리를 뒤따라 나오자 밖에 있던 다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음, 괜찮은 거야? 래빗의 얼굴이 조금 지나치게 행복해 보이던데.”
“음? 걔가 나오면서 뭐라 하든?”
“어…. ‘결혼하면 경제권은 다나가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아하하하하하!!!’….라던가? 아무래도 반응이 그렇다 보니 조금…. 불안하네?”
“하이고, 토끼 아가씨가 아주 신이 나셨구만. 그럴 일 없으니까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다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낄낄거리며 그녀 옆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거래라는 게 완벽하게 윈윈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래빗이 저렇게까지 신이 나서 나왔다는 건 분명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이득을 봤다는 소리고, 그건 반대편인 교수가 그만큼 손해를 보거나, 예정된 이득을 포기했다는 말인데….”
“그렇지.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야.”
래빗이 저렇게 아주 하이힐 굽이 부러지도록 통통 튀어나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쪽 조건, 다 들어줬거든.
대충 대립각을 세우다가 지는 척~ 하면서 해달라는 거 다 해줬단 말이다.
‘지, 진짜로? 진짜 [박교수 시드 4월드]를 나한테만 제공한다고요?’
‘그래! 내가 졌다! 오늘부터 딱- 일주일 뒤! 잠깐 접속해서 월드 상태 정도만 확인하고 바로 넘겨주지!’
‘아니, 고맙긴 한데…. 왜? 갑자기?’
‘나도 고생한 게 아까워서 튕기긴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바깥쪽에서 아주 공사가 다망한 사람이라서 말이지. 렙터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너도 돈이 있는 만큼 개인 정보통 정도는 있을 테니까.’
‘움직인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다는 것 정도는….’
‘돔급 도시 중앙 발전기의 핵을 통째로 은, 엄폐용 차폐막에 사용한 놈들이야. 움직이지 않으면 어디서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지. 그 말인즉슨, 우리 쪽에 제공할 필요 없는 놈들의 대략적인 위치정보를 제공하면서까지 이동해야 할 이유가 뭔가 있었다는 얘기야. 적어도 우리한테 좋은 움직임은 아니겠지.’
‘그래서, 바깥일이 바쁘니까, 나한테 넘긴다…. 이 말인가요?’
‘그래. 게드로이츠의 서버룸, 물론 대단한 장소일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서 찾아낸 구시대 기술과 설비를 적용하기 전에 큰 사달이 날 것이 분명해 보이거든. 코앞에 닥친 위협이 너무 급해서 그쪽까지 발품을 팔 시간이 안 된단 말이지.’
‘와….’
‘어때, 고맙지? 박교수 4월드 독점권의 대가로 네가 지불할 것은, 그쪽의 [GG커뮤니티 관리 권한]을 사용해 커뮤니티에 변종화 증상이 있는 사람들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는 글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것뿐이야. 이 정도면 거저다, 거저.’
‘와아아아….! 와와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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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렇게 흘러갔다는 말씀.”
물론, 약속은 지킬 생각이다. 정확히 일주일 뒤, 래빗에게만 내 3월드 클리어 시드를 공유해줄 것이다.
일주일 뒤에 말이지.
‘오늘 포함해서 6일 뒤, 휴가가 끝나면 GG에 접속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한번 GG의 데이터 소울에 섞여들었던 내 계정의 특성상, 이번에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밖에 나올 수 없게 된다고 했지.’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가진 [GG 플레이 시간배율 조정 권한]으로 현실의 찰나를 무한에 가깝게 늘려버린 뒤,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4월드 클리어할 때까지 뺑뺑이를 돌 거란 말이다.
밖에서 보기엔 ‘들어갑니다-’ 하고 접속하자마자 다시 접속기 밖으로 나오더니 ‘도, 돌아왔다! 오오오, 고, 고향 땅의 향기!’ 하면서 벌떡 튀어나온다는 말씀. 그게, 6일 뒤 내가 접속하면 현실에서 벌어질 일이다.
래빗이 약속받은 건 그 다음 날이고, 그녀의 손에 내 3월드 클리어 시드가 들어갈 때쯤 이미 나는 4월드를 클리어하고 나온 상태라는 말씀.
이번에야말로 저 안쪽 세계의 문제를 모조리 정리해버릴 각오를 다졌으니, 내가 성공적으로 돌아온다면…. 미안하지만 래빗에게 나머지 기회가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요약하면, 허위매물 팔아서 이득 봤다는 것.
‘구입한 상품의 가치변화야 뭐, 구매자가 져야 할 리스크니까. 어쨌든 서로 원하는 물건을 얻었으니 윈윈 아니겠어?’
물론 시간 배율이 어떻고, 오염과 데이터 소울이 어떻고 하는,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고난은 나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에 얘기한 것처럼 랩터 쪽 일이 바빠서 넘겼다고 설명할 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될 테니까.
다나는 내 말을 한마디 한마디 곱씹어보는 듯하더니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표했다.
“일단, 당신이 래빗에게 시드를 넘긴 이유는 이해했어. 확실히 황무지 정세도 급변하고 있고, 한 집단의 리더인 만큼 이런 시기에 게임에 투자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을 테니까 나머지 클리어의 가능성이 있는 래빗에게 호의를 사서 그녀가 확보한 보상을 공유받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
“그렇지.”
“다만, 래빗에게 요구한 나머지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래빗이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어? 커뮤니티를 관리하고, 게시판에 원하는 글을 노출시키고? 그건…. 단순히 돈이 많다고 얻을 수 있는 권한이 아닐 텐데?”
“아, 그건….”
원래 GG의 뒷얘기, 게드로이츠와 얽힌 이야기는 세간에 공표하지 않기로 래빗과 방금 합의를 봤다. 이걸 공표하면 서버룸이 도시전설처럼 여겨지는 지금보다 플레이어가 월등히 늘어날 것이고, 그만큼 데이터 소울의 오염이 엄청난 속도로 증가할 테니까.
래빗도 본인이 세이브/로드를 이용할 때마다 오염이 증가하는 걸 아는 만큼 다른 경로로의 오염증가를 경계하는 듯했다. 나도 그쪽 세계가 여기서 더 개판이 되는 건 절대 싫으니까 당연히 동의했고.
“….그건, GG의 관리자들이 월드 클리어 플레이어에게 제공한 보상 중 하나야.”
….그래도, 다나에게라면 괜찮겠지. 어디 가서 중요한 정보를 마구 퍼트릴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앞으로 내가 겪을 일들을 다 말해주진 못하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GG와 게드로이츠, 완성자와 그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관여되었는지. 래빗이나 천류제가 무엇을 얻었는지. 게드로이츠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준비하려 했는지.
다나는 정보상답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차분하게 들었으며, 어렵지 않게 내용을 분석하고 이해했다.
“그럼, 게드로이츠는 자기 기준에 합당한 사람을 선발해 그 사람에게 지금의 황무지를, 핵전쟁 이후 극단적으로 축소된 세계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쥐여주려고 했던 거구나.”
“그렇지. 천류제가 가져간 초감각 주입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실패작인 만큼 그대로 쓰면 사람 여럿 골로 보내겠지만. 돔급 기술력이 있는 집단이면 잘 가공해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일당백(一當百)은 몰라도 일당십(一當十) 정도 되는 정예 병력을 짧은 시간 내에 양산할 수 있게 되겠고. 물론 지금은, 천류제 같은 독특한 인간의 손에 넘어간 덕분에 순순히 천류제 개인이 사용하는 용도로 전락했지만.”
“커뮤니티 관리 권한. 위성이 죄다 박살난 세계에서 GG 커뮤니티는 유일한 광역 집단 통신 매체야. 커뮤니티 관리 권한은 사실상 세계의 언론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이나 마찬가지겠지. 래빗이 영 총장에 대한 거짓 날조를 마구 만들어서 올린다면 얼마 안 가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걸? 아무리 사람을 풀어서 반박하고 정정보도를 내보낸다 해도 커뮤니티의 전파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 사실상 대중에 대한 세뇌가 가능한 힘이 주어지는 거지.”
“드론 관리 권한은 황무지 위에 생활하는 만인에 대한 실질 물리적 감시, 접촉 권한의 부여나 마찬가지고.”
“서버룸의 경우 그러한 권한들로 끌어모은 인력, 재력에 기술적 우위를 더하게 해줄 장치겠지? 당장 돔이 황무지 제1 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가 구시대 기술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집단인 만큼, 전쟁 전에도 몇 세기는 앞선 기술이라 칭송받던 게드로이츠가 황무지 시대를 위해 준비한 기술이면 다른 어떤 집단도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겠지.”
“그렇게 황무지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잡게 된 다음 게드로이츠가 준비한 유인 우주기지를 통해 우주 궤도상의 거주지로 몸을 옮기면- 황무지의 다른 세력에게 암살당하거나 하는 변수조차 사라지겠지.”
GG 운송 드론 관리자.
커뮤니티 관리자.
초감각화 훈련 프로그램.
서버룸.
우주궤도 거주지 ‘넥스트-스페이스’.
이상의 다섯 권한은 게드로이츠가 선별한 ‘완성자’에게 압도적인 통치 권한과 신변의 안전을.
세이브/로드.
GG 시간배율 조정 권한.
이 두 권한은 본디 7월드까지 모두 클리어 한다음 모든 권한이 주어졌을 때를 상정한 보상이니, 아마도 그의 ‘완성자’가 게드로이츠 본인처럼 GG의 시뮬레이션으로 미래를 가정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주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관리자를 통해 상황과 조건을 설정하고, 시간 배율로 돌려서 결과를 확인하고, 세이브/로드로 되돌려서 조건을 바꾸고 다시 돌려볼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 GG의 계획 단계에서는 오류에 대한 것도, 일곱 보상을 쪼개서 제공하게 될 지금의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다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천천히 지금껏 들은 정보들을 곱씹어보는 듯했다.
“….뭔가, 스케일이 너무 커서 조금 어지러울 정도야. 그럼, 래빗은 정말 게드로이츠의 계획대로 움직일 셈이구나. 나머지 클리어를 진지하게 계획하고 있으니까.”
“과정만 따지면 그 녀석이야말로 게드로이츠의 뜻을 제일 제대로 받아들인 ‘완성자 후보’라고 볼 수 있겠지?”
“….왜? 설마, 정말 그 정도로 권력욕이 넘치는 사람이어서?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 같지는 않던데?”
“아, 그 얘기도 물어봤어.”
래빗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만큼, 당연히 이런 주제도 대화에 올라오게 되었다.
박교수는 왜 클리어에 목을 매는가? 성격이 그렇다.
래빗은 왜 클리어에 목을 매는가….?
“권력욕보다 더하고, 야망보다도 조금 더한 게 있더라고.”
“더한 거?”
“응. 이상. 종류로 따지면 세계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진영으로 갈라치기한 그런 거.”
뭣 때문에 그렇게 세를 불리고, 사업을 키우고, 힘을 모으느냐.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그렇게 막 권력욕에 타오르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설마 진짜로 월드 아이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는 거냐, 하면서 농담을 반쯤 섞어서 물어봤지.
래빗은 내가 4월드 독점권을 넘긴다고 해서 그런지, 이 질문에 대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나느은~ 사람은 즐거워지기 위해 산다고 생각해요.’
‘순수하게 생존을 위한 관점에서 본다면 매일 푸석푸석한 칼로리 바에 물 500ml 정도면 살 수 있으니, 생존 의지가 사람을 움직인다면 지하 깊숙한 곳에 칼로리바와 물만 잔뜩 쌓아놓고 평생 거기 갇혀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겠지만…. 안 그렇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황무지에서 사람을 두 번째로 많이 죽인 게 납 탄환이고, 첫 번째는 우울증이잖아요? 미친 듯이 쏴갈긴 총알보다 우울한 환경이 사람을 더 많이 죽였다고요.’
‘생사는 본능의 영역이며, 그건 사람 이전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 짐승의 영역이에요. 우리를 짐승에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생존 외적 욕구, [즐거움에 대한 추구] 라는 거에요!’
테이블 앞에서 손가락으로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거침없이 얘기해나가던 래빗.
‘즐거움, 행복, 인간에게 있어 생존을 배제한 오락적인 가치야말로 사람을 다음 단계로 이끄는 원동력이 아닐까요? 솔직히 그렇잖아! 더 나은 거주지,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삶! 전부 생존 가치를 벗어난, 다분히 개인의 오락적인 영역이잖아요!’
들어보니, 래빗은 시종일관 희희낙락한 밝은 성격 뒤에 어떤 독자적인 ‘사상’을 감춰놓은 인물이었다.
래빗은 인간이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욕구, 쾌락 등으로 대변할 수도 있다.
‘음~ 솔직히 권력이니, 세계 대통령이니 하는 것에는 막 끌리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짐승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힘이라는 것에는 아-주 관심이 가더라구요. 내가 좀 지배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있고. 사람들의 [즐거움]이 이 래빗 프린세스에게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하면…. 묘하게 오싹오싹하달까? 그래서 하는 거예요. 완성자 후보.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고.’
‘사람이 살기 위해 버르적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끔찍할 만큼 불쾌하고, 반면 즐거운 상태면 보기 좋고? 그게 나로 인한 즐거움이면 더 좋고! 어때요, 나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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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월드 아이돌 래빗님의 음흉한 속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
“….래빗이랑 얘기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겠지. 애초에 황무지에 진짜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단순하기는. 미치광이 양산 필드인 황무지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배배 꼬인 사람이다.
연극성 성격장애. 일명 관심병.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는 성격이 병적이라 일상생활을 힘겨워하는 정신병.
여기에 ‘즐거움이야말로 휴머니즘의 정수다!’ 하는 개인의 사상이 짬뽕되고, 추가로 ‘사람들이 불행하다니! 내게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고쳐야겠다!’ 하는 생각까지 섞여든 상태.
중증 연극성 성격장애 쾌락주의자. 이성적이고, 건전하며, 이타적이고, 지배적임.
세상에 이런 혼종이 있을 수가 있나.
“언제나 그렇듯, 나쁜 사람이 아니라 고장난 사람인 거지.”
눈앞에서 확인한 지식에 그녀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면 조금 더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과거 ‘GG ver.01’을 소송의 쓰나미에 휘말리게 한 ‘소녀의 토끼 해체쇼’ 주인공이 그녀였음을 생각하면, 그녀의 부모님은 소송으로 거대 기업을 들이받을 정도로 래빗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사람이었다.
현시점에서, 래빗의 양친을 모시고 산다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래빗은 사람의 ‘우울한 상태’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아무리 감춰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상태가 아닌 사람을 ‘짐승 단계의 인간’이라 표현하는 것을 보면….
지금의 화려한 래빗 프린세스로 거듭나기 전, 황무지 생존 경쟁 단계에서 그녀가 꽤나 암울한 시기를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환경은 사람을 깎아내기 마련이다. 래빗은 저런 모양으로 깎여나간 것뿐이고.
“뭐,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었어. 개인 성향이야 어쨌건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원하는 지도자 상이니까. 벡스에 대한 것도 생각보다 진심이었고. 벡스가 더 망설이면 자기 쪽에서 프러포즈 할거라던데?”
대화 끝 무렵에 벡스에 대한 얘기도 좀 했었다. 이 시점에서 막 경계해야 할 정도의 인물이 아닌 것은 어느 정도 확신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벡스의 연인이라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둘이 좀 안 어울렸어야지.
나름 야망이 있는 만큼 어수룩한 주제에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힌 벡스를 제대로 홀려버린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 녀석이 내게 소중한 사람인 만큼 어떻게 이용해먹을 생각이 아닌가…. 했는데.
‘말 잘했어요! 벡스 말인데, 그쪽에서 어떻게 좀 해봐요!’
‘뭘, 어, 어떻게?’
‘프러포즈! 내가 해버리기 전에 좀 해달라고! 안되면 다른 년이 채어가기 전에 내가 보쌈이라도 해버릴라니까!’
‘?!!’
“아아, 래빗.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얘기 좀 하지 말라니까.”
“병실에서도 그런 얘기해?”
“말도 마. 나, 노루 언니, 홀리, BDSM 사람들, 그 외 벡스를 아는 사람이다 싶으면 전부 저렇게 얘기하고 다닌 것 같아.”
“오오….”
놀랍게도, 정작 홀린 건 래빗 쪽이었다.
이유도 심플했다.
‘벡스, 그 사람은 이 황무지에서 제일 순수한 [즐거움]을 나한테 보여주니까!’
‘….광대?’
‘쓰으읍! 난 내가 예쁘다는 걸 아-주 잘 알아요. 남들이 예쁜 나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기쁘고. 그래서 더 열심히 나를 가꾸고. 내 외모는 나의 자랑이자 사람들을 내 곁에 끌어들이는 가장 훌륭한 미끼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람, 벡스는 그런 게 하나도 안 먹히는 거 있죠?’
‘확실히, 벡스가 얼빠 스타일은 좀 아니지.’
래빗은 벡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전에 우리 앞에서 납치하듯 녀석을 데려갔을 때는 솔직히 다른 의도가 있어서 접근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집단을 만드는 데 대단히 열성적이며, 당시 BDSM은 떠오르는 신예였으니까. 제일 말랑말랑해 보이는 벡스부터 꼬드겨서 BDSM 또한 그녀의 우방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는 말이었다.
‘그 사람,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게 뭔….’
‘아잇,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홀린다고! 당장 교수 당신만 해도 내게 호의적이잖아!’
‘그거야 그쪽이랑 거래도 원만하게 진행됐고, 딱히 나쁜 새끼도 아니니까-’
‘박교수! 솔직한 거 좋아함! 순수한 선인보다는 계산적이고 자기 몫 챙길 줄 아는 약삭빠른 사람 좋아함! 관능적인 여자는 부담스러워하고, 다나 때문에 이성적인 접근은 일절 거부하니까 자연스러운 스킨쉽 한번 시도하지 않았고!’
‘헐.’
‘그쪽 분석하고 맞춰서 행동했기 때문에 나 같은 수상쩍은 여자를 호의적으로 여기게 된 거거든요? 아무튼, 벡스를 만났을 때도 똑같이! 아니 지금보다 조금 더 열정적으로 끌어들였는데!’
“끌어들였는데?”
‘….세상에. 그 사람의 즐거움은…. 그냥 나라는 인물 그 자체로 표출되는 것 있죠?’
나름 벡스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달려들었는데,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결과가 나왔더란다.
그녀는, 그렇게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을 처음 봤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매번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맞춰 다른 매력을 선보이는 그녀의 알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고 했나?
“래빗이 말하길 ‘어느새 벡스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순수하게 [나]를 그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고, 그 순간 나는 벡스에게 묶여버렸다-’ 라고 하더라고. 벡스가 꽉 잡혔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어.”
래빗을 어떤 사람의 속내라도 파고드는 마녀에 비교한다면, 그녀는 생각 없이 벡스의 속내에 파고들었다가 그놈의 유리알 같은 속내에 비친 그 자신의 본모습에 반해버린 것.
즐거움이란 감정을 신봉하는 래빗이 그녀의 모든 조건을 배제하고 오롯이 ‘래빗 프린세스’라는 인물의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누군가에게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날부로 래빗은 벡스에게 묶여버렸고, 부끄러워하는 벡스를 악착같이 따라다녀 지금의 관계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저 순딩이 벡스가 월드 아이돌 래빗의 카운터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리하야, 오늘 완성자 후보 면담의 결론.
천류제는 마약 후유증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로, 나를 ‘한서호’라는 인물과 겹쳐보며 ‘보존’하려 든다. 여기서 보존이란 나를 보호함과 동시에, 그의 생각과 다른 변화를 칼로 썰어서라도 억제함을 의미한다. 마음에 들면 지켜주고, 마음에 안 들면 죽일 거라고 지 입으로 공표한 놈. +BDSM 영입됨.
래빗 프린세스는 상당히 괜찮게 미친 여자로, 아주 독특한 개인의 이상에 따라 세계를 지배/관리 하고 싶어한다. +벡스에게 홀렸다.
래빗은 3월드 클리어 시드 독점권에 대한 대가로 커뮤니티 언론플레이를 통해 국소 변종화 환자의 인식 개선에 힘써주기로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우리 옆집에 식인종 폭탄이 살고 있어?’ 같은 수준은 벗어날 것이다.
음, 결과가 나쁘지 않군. 내 목이 서늘하긴 하지만 대형 변종을 포함한 변종무리를 혼자서 칼 두 자루만 가지고 썰어버리는 놈이 아군이 됐고, 판매 즉시 가치가 떡락할 물건으로 언론조작 의뢰도 마쳤다. 덤으로, 다른 완성자 후보가 게드로이츠의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충분히 알아냈고.
“쥐새끼 대가리 놓친 것만 아니면 완벽했을 텐데 말이야.”
“음…. 교수. 그 일에 관한 것 말인데….”
아쉬워하는 내 모습에 다나가 아까부터 두드리고 있던 휴대용 단말을 들어 올리는 찰나,
빠아아앙-! 빵 빵!
“어어어이! 안에서 뭐 그리 할 말이 많으냐아아!!!! 래빗 나온 지 15분도 더 됐다! 거기서 살림 차릴 거 아니면 좀 나와라아아아!!! 놀러가자매!!!!”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함께 우렁우렁한 이안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휴. 시끄러운 자식. 다나, 아까 뭐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음…. 다음에. 이따 얘기해줄게.”
다나는 복도 쪽으로 고개를 향하더니, 그녀의 단말과 안경을 백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가자고 손짓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군말하지 않고 옆에 따라붙었다.
하긴, 일 얘기야 나중에도 할 수 있지.
남은 5일 하고 몇 시간, 이젠 정말 늘어져라 쉬기만 하다 들어가야겠다.
돈 많아.
어딜 가나 인기 있어.
예쁜 여자친구도 있어.
대충 생각해도, 남은 휴가 동안 즐거울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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