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00
Chapter. 17. 여행 준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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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 사박.
철그럭, 쩔그럭.
행군.
고단함을 제외하면, 단순하고 무료함밖에 남지 않는 행위다. 걷고, 헐떡이고, 가끔씩 지도를 보다가, 또 걷는 그런 단순 반복 노동.
“와, 그럼 내가 그 지하 도서관에 만나러 가기까지 거의 7년을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은 거야? 그 지하 도서관에서?”
“전쟁 중에도 그 안에 있었으니까 9년…. 정도겠지?”
“세상에. 0.1 세기를 한 자리에서? 나무라도 되는 거야?”
“어쩔 수가 없었는걸. 나도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이고 했지만 두 시간도 걷지 못하는 몸으론 무거운 방사능 차단장비를 입고 황무지를 횡단할 수 없으니까. 다행히, 장소가 장소다 보니 내겐 평생 읽어도 모자랄 것 같은 책이 있었어.”
늘 그렇듯, 그러한 단순 노동을 일상으로 바꿔주는 것은 대화다.
모판에 모를 심는 아낙들의 가십거리.
초소에 선 두 초병의 투덜거리는 소리.
먼지와 쇠, 발소리만 가득한 여로 위에 담담하게 내려앉는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
“평생은커녕, 5년도 안 돼서 다 읽어버린 거 있지.”
“5년? 설마 그 지하에 있던 책을 전부 다?”
“….외로움이나, 이대로 혼자 죽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지니가 없었으면 그 시점에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혼자라는 건 생각보다 더 무서웠어.”
“지니…. 아, 그때 그 고장 난 드론?”
“응.”
등을 맞대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지니는 내 병실에 있어. 코듀로처럼 새로운 최신형 드론으로 옮겨주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걸음을 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 하는 게 너무 어색해서….”
모래폭풍 속에서 가라앉은 모래는 발목을 붙잡고, 가라앉지 않은 모래는 눈과 입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죽음을 마주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 살아남아 보니…. 그래도 살고 싶었어.”
지게 끈에 짓눌린 등허리와 어깨가 욱신거리고, 찜통 같은 비닐 판초우의 덕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행군은 힘들고, 고단한 노동이다.
“아, 저기 보이는 저 잔해가 지도에 나와 있던 야영지 맞지?”
“….벌써 도착했네.”
어찌나 고단한지.
어찌나 빠져들었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언제 이렇게 멀리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나의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스피드 웨건’으로의 그녀가 아니라, ‘다나. A. 히아신스’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
그러고 보면, 다나랑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조금만 힘내. 가서 좀 쉬고 있으면 그동안 내가 야영 준비 정도는 해볼 테니까.”
“나머지는…. 내일 마저 들을 수 있겠지?”
고통스러운 여정이 내일을 기약할 정도로 기다려졌다.
사박. 사박.
철그럭. 철그럭.
가벼운 발걸음이, 폭격에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로 묵직한 자국을 남겼다.
****
저무는 햇빛을 받아 음산한 그늘이 내려앉은 건물의 잔해.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로, 숨죽인 두 남녀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휘적 휘적.
끄덕끄덕!
남자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여자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해뒀던 대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는 남자.
두 개.
하나-
“와아아아악!”
“?!!”
사사사삭!
“나왔다! 다나! 당겨!”
“흐으읏-!”
건물의 그늘 속에 숨어있던 무언가는 갑작스러운 괴성에 놀라 도망치다, 엉성하게 깔아둔 비닐 올무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키이익! 키이이익!”
“자, 잡았다!”
“저녁이다-!”
골조만 남은 건물 사이로 울려 퍼지는 환호성.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헐떡이면서도 매달린 사냥감의 밧줄을 꼬옥 쥐고 있는 다나의 얼굴은 성취감으로 환하게 밝아져 있었는데, 보는 내가 다 흐뭇할 정도였다.
“지도에 야영지랑 식량 표시가 되어있더라니. 이 지도를 만든 사냥꾼이 누군지는 몰라도, 돌아가면 찾아가서 인사라도 해야겠어.”
“이, 일단 잡기는 했는데…. 어떻게 먹는 생물인지는 알아?”
“이거 다나도 먹어 봤을걸? 방사능 전갈이잖아. 황무지 생존자들 주식.”
“방사능 전갈? 하지만 이건 몸 색도 조금 투명한 하얀색에, 크기도 내가 아는 방사능 전갈에 비해 한참 작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행운이라는 거야. 이건, 황무지에서도 특식으로 유명한 놈이거든!”
나는 다나가 쥐고 있던 밧줄을 넘겨받은 다음, 꼬리와 집게발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놈의 머리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생후 6개월이 넘은 방사능 전갈. 크고, 껍질도 두텁고, 사냥이 아니라 전투라고 불러야 할 만큼 초보 생존자에게는 빡쎈 녀석이지.”
똑. 트득. 뚜두둑!
“그리고 우리가 잡은 하얀 놈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방사능 전갈의 유생이야. 껍데기가 투명한 걸 보니 막 탈피를 마친 놈이군.”
방사능 전갈은 황무지 어디에나 서식할 정도로 우리 시대에 가장 잘 적응한 생물이고, 고기는 흔해 빠진 데다 외피도 그리 단단하지 않아 상품성이 없는 생물이었다.
단, 특정 지형에서 이런 하얗고 작은 유생이 드물게 발견되는데, 이 놈들은 돔의 미식가에게 제법 고가로 팔려가곤 한다.
“내가 알기론 전갈은 놈들이 파놓은 구멍 위에 물을 뿌려서 잡지 않아? 황무지의 단단한 지반 속에 산다고 알고 있는데….”
“보통은 그런데, 어린 놈들은 아직 껍데기가 여물지 않다 보니 황무지의 단단한 바닥을 파고들지 못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바위틈이나, 인적이 드문 건물 잔해에 살며 벌레나 설치류를 잡어 먹지.”
“그렇구나….”
“읏차. 이렇게 꼬리랑 가는 다리만 떼어놓고, 배를 따서 내장만 조금 덜어내면 손질 끝. 나머지는 이대로 구워 먹으면 돼. 얇은 껍질과 함께 바싹 구워서 껍질 채 먹는 게 정석이지.”
작다고는 해도 몸통 길이가 50cm는 될 정도의 생물이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고, 잘 익혀두면 상온에 일주일도 보관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맛이 좋다.
탁 탁, 화르륵!
오늘의 야영지는 무너진 건물의 한쪽 구석, 기둥을 따라 아직 남아있는 천장이 있는 곳 아래.
근처에 남아있던 말라붙은 식물 쪼가리와 얼마 되지 않는 나무토막, 플라스틱 덩어리를 모아 땔감을 쌓고, 부싯돌 대신 라이플 총신과 허리띠 쇠 버클로 불을 피우고, 우의 만들고 남은 물침대 비닐로 천장과 바닥을 잇는 경사면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땔감 없이 불 피울 때는 바람이 나가는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해. 쓰레기 태우다 나온 가스에 자다가 질식할 수도 있거든.”
“오다가 맥주 마시고 빈 캔 챙겨뒀지? 그거 저기 비닐 모서리 아래에 받쳐놔. 새벽에 비닐 위에 모인 이슬을 받아 모을 수 있을거 야.”
“그리고 또…. 외부 경계는 이쪽 구멍으로 하면 될 것 같고…. 바람이 들어와서 좀 추우려나? 다 털린 동네라 땔감으로 쓸만한 것도 모자라서 이거….”
“푸훗!”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옆에서 다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신기하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해서.”
“신기해?”
“응. 낮에도 말했잖아? 지하 도서관에 갇혀서 혼자 살 때는 이런 생활을 꿈꾸기도 했다고. 고되고 힘들지만…. 자유롭고, 내 손으로 내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삶. 우연치 않게 버킷리스트에 한 줄을 또 채워 넣게 됐어.”
“이런.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황무지 라이프에서 지극히 드문 하루에 가까워. 이동하는 동안 변종의 습격도 없고, 제법 검증된 안전한 잠자리에 초호화 식재료까지. 모든 황무지 사람이 다 이렇게 살았으면 스캐빈저는 부르주아로 취급받았을 거라고.”
“알아 나도. 그래도…. 상상하던 순간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은, 퍽 기분이 좋은 걸.”
파스스슥.
그렇게 말하며, 다나는 모닥불 아래 묻어둔 어린 방사능 전갈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모래를 털어내자 빨갛게 잘 익은 몸통이 한가득 손에 들어왔다.
와삭!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느껴지는 껍질의 바삭함. 그리고, 파고든 앞니에 느껴지는 툭툭 끊어지는 듯한 탄력 있는 살점. 모래를 열기를 이용해 쪄낸 몸통은 씹을수록 육즙이 흘러나왔으며, 입안 가득 절지류 특유의 고소한 단백질 맛을 가득 담아내었다.
“마, 맛있어…. 그야말로, 살아있는 야생 황무지의 정수….!”
“교수는 황무지에 7년을 살면서 한 번도 이걸 못 먹어본 거야?”
“세 번 정도 잡아 본 적은 있지만, 잡자마자 신선도 떨어지기 전에 커뮤니티 거래소에 올려버렸지. 아아, 이걸 이제야 먹어보다니! 진즉에 먹어 봤으면 비싼 돈 주고 우진 아저씨한테 항우울제 타 먹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확실히 이 맛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음! 음음! 돌아가면 거래소에서 찾아보자. 없으면 의뢰라도 올리던가.”
“사다 먹으면 이 맛이 안 나지 않을까?”
“음? 그런가? 그래도 돔 상류층에 미식을 즐기는 놈들이 꽤 되는데, 우리보단 잘 해먹지 않을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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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도, 다나와 나는 ‘돌아가서 어린 방사능 전갈 요리를 사 먹으면 지금보다 나을 것인가, 아닌가’ 로 한참을 떠들었으며. 어느새 검댕이 가득해진 서로의 얼굴에 바보처럼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즐거운 한때와 함께 하루가 저물었다.
플라스틱 모닥불의 끈적한 불길이 은은하게 일렁이고, 밤과 함께 순식간에 서늘해진 공기가 야영지를 스쳤다.
“교수. 아무래도…. 붙어서 자야겠지?”
“그렇지. 가뜩이나 땀을 잔뜩 흘리고 씻지도 못했는데, 찬바람에 노출되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바깥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야 건강. 붙어서 자는 쪽이 훨씬 따듯할 거야.”
“땀…. 붙어서 자면… 땀 냄새…. 음….”
….퐁!
꿀꺽, 꿀꺽!
“다, 다나? 아니 무슨 술을 그렇게…. 술 약한 것 아니었어?”
“목이 조금…. 말라서.”
잠자리는 우의와 남은 비닐 조각을 덮고 자는 비박에 가까웠다.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 살짝 풀린 눈과 나른해진 목소리.
자리에 눕자 내 쪽으로 돌아눕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다나는, 흙투성이가 되어서도 참 예쁘구나.”
“….!”
놀란 새처럼 휘둥그레진 다나의 눈과 한층 더 빨개진 얼굴.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앙다문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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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황무지를 횡단한 피로가 덮쳐오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런 그녀의 얼굴이었다.
잠결에 ‘교수…. 자? 잠들었어?’ 하는 다나의 목소리와 뺨을 때리는 가느다란 손길을 느낀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피곤하고, 배도 부르고, 체온으로 덥혀진 비닐 이불 안쪽은 제법 따듯하기도 했다.
‘정말, 완벽한 하루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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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직- 치지직-
“신호확….인 용케- 치직! 그 모래폭풍을 뚫고 오셨습니다, 박교수님.”
“하이고! 말도 맙시다! 사흘 동안 아주 고생도 그런 개 고생이…. 혹시 남는 차량 있으면 이쪽으로 한 대만 보내줄 수 있습니까?”
“어…. 렙터의 이동이 확인되어 지금 모든 차량이 작전 중에 있습니다만, 내일 아침까지 한 대 정도는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합시다! 좌표는 아시죠! [47. 943. 15. 7]! 순찰 경로상에 있는 그, 물탱크 있는 건물!”
“예. 확인됐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뚝-
“다나! 들었지! 차 보내준대! 이제 우리 집에 갈 수 있어!”
“응.”
“어우우! 진짜 돌아가기만 하면 이안 그놈을 아주 복날 개 패듯이 그냥-”
“응.”
“어…. 다나? 혹시 뭐, 안 좋은 일 있어?”
“괜찮아.”
다나와 함께한 황무지 생존기, 3일 차 저녁.
첫날이 기분 좋게 마무리됐다 한들 황무지가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여전히 몸은 고단했으며, 지도에 나와 있는 육식성 변종의 서식지를 빙 둘러가다가 걸려서 한바탕 총격전을 치르기도 하고, 그 소리에 이끌린 또 다른 변종을 피해 도망치다 야생 변종이 버리고 간 굴에서 숨죽이고 버티기도 하고….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모래폭풍이 전파를 방해하는 범위를 벗어나 구조요청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간 다나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과거,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사람이 친해지는데 같이 사선을 넘는 것만큼 빠르고 효과적인 것도 없지!’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다나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럴 텐데, 분명히 그럴 텐데…..
“저기…. 다나? 혹시 나한테 할 얘기 있어?”
“….없어.”
그런데 왜,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 양은 이렇게 까칠해지셨을까.
황무지 횡단 둘째 날, 나는 그녀가 조금 퉁명스러워진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야 특수부대 출신이 체력도 좋고, 웬만한 고문은 웃어넘길 정도로 여러 가지 고난에 익숙한 사람이지만 다나는 아직 약하고 바깥의 삶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평범한 여자니까.
사람이 체력이 떨어지면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게 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며, 나는 오히려 다나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 알게 된 것이 좋아서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 하는 느낌으로 그녀의 툴툴거림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으으음~ 잘 잤다. 다나, 좋은 아침~’
‘….잘 잤다니 다행이네.’
-오싹!
짜증을 넘어, 아주 서늘한 한기가 몰아치는 게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지? 혹시 과거사를 너무 파고들었나? 그래. 황무지 사람치고 옛 기억에 트라우마 하나 없는 사람이 없는데, 주책맞게 더 알고 싶다고 너무 파고들었나? 아니면 설마, 한 달에 한 번 찾아온다는 마법의 그날?’
아니면, 아니면…. 혹시….?
따악!
“어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머리가 맛이 갔구만. 정신차려라 박교수야, 너랑 같이 있는 건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양이지, 노루 그 망할 인간이 아니라고. 머리에 마구니가 들었구나!”
다나를 상대로 불경한 생각을 떠올린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았다.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데, 어딜! 밥이 익지도 않았는데 생쌀을 씹어먹으려 하다니!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나쁜 생각을 쥐어박고 있는데, 등 뒤에서 찹, 찹 하는 약간 물기 어린 발소리가 들렸다.
“뭐해?”
“아, 잠깐 나쁜 생각이 떠올라- 우와아악!”
쿠당탕탕!
“물이 있어서 씻고 나왔어. 교수도 씻고 와. 오는 동안 그렇게 땀 흘렸는데, 제대로 씻지도 못했잖아.”
“다나, 그, 아, 알겠는데…. 오, 옷은 어쩌고 우의만?”
“빨았어. 내일 아침에 사람들 온다며. 나도 나름 공인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아.”
“아으흐르으으-@8*#&^@#!!”
뒤를 돌아보는 순간, 쥐어박고 있던 ‘나쁜 생각’이 눈사태처럼 몸집을 불렸다.
벽이 허물어져 밖이 훤히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의 2층.
맨발로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온 다나가, 두 손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짜내며 내 뒤에 다가와 있었다.
품이 넓은 판초우의지만, 없는 재주로 비닐을 얼기설기 잘라서 만든 물건이다 보니 군데군데 드러난 부분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슬쩍 드러난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직 새하얀 살색 뿐이었다.
오 신이시여.
로 하람이시여,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빛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사락. 사락.
눈을 감아도 살이 스치는 소리가 고막을 뚫고 뇌를 찔렀다.
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작게 피워놓은 모닥불 가에 앉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뭐해. 씻고 와.”
“아, 아니, 나는 원래 이렇게 살던 사람이라-”
“씻.고.와.”
“넵.”
화다닥!
훌렁! 훌렁!
촤아악!
“크어어어!”
냉수를 머리에 끼얹자 조금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주변이 눈에 좀 들어오기 시작하자, 누군가 옥상 물탱크에 연결해놓은 수도꼭지 옆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다나의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게 빨았지만 이미 다 해진 하얀 드레스.
굽을 부러뜨려 신고 다녔던 구두.
그리고, 어…. 특정 부위를 위한 작은 옷가지들과, 입고 나오라는 듯 깔끔하게 세탁해둔 내 우의.
어…. 어어어어어어어!!!
생각해라, 생각해! 너를 이 자리에 올려준 끝내주는 그 대가리고 생각해라! 이런 상황에는 어떤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변수는 무엇이 있으며 그에 따른 리스크는….
촤아악! 푸하아악!
“가로되 빛이 나를 인도하니 어떠한 욕망과 번뇌도 신앙을 침습할 수 없으며….!”
틀렸다.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이 꼭 로하람이 ‘니 알아서 해라-’ 하는 것처럼 보여! 누, 누가, 누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좀 가르쳐 줘!
….쑤우욱-
“너 말고 이 새끼야! 으으으으…. 진정,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촤아악!
그렇게 냉수와 주기도문, 광명의 교전과 애국가가 함께하는 시간이 지난 뒤.
해가 저문 콘크리트 건물 위로, 엉거주춤한 우의 남성이 걸어 나왔다.
“왔어?”
“넵.”
“앉아.”
“옙.”
모닥불을 사이로, 비닐 우의를 입은 다나와 내가 마주했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그녀의 자리에도, 내 자리에도 이안이 준비해준 독한 술이 한 병씩 놓여 있었다.
“….이렇게 살아 나왔는데. 조촐하게 축하나 할까 해서.”
트특, 끼릭 끼릭, 퐁-
“건배-”
“거, 건배.”
병을 위로 들어 올리자, 우의의 옆부분이 벌어져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다나는 이미 취해 있어서 그런지 내색하지 않는 몸짓으로 술병을 기울여 보였다.
꿀꺽, 꿀꺽-
“콜록 콜록! 콜록, 하으으으….”
“이게 몇도 짜리 술인데 그렇게 병나발을…. 그러다 몸 상해.”
“그러는 자기는, 똑같이 마셔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나야, 몸이 다르잖아.”
“….그렇네. 당신은, 좀 이례적인 사람이지.”
벌써 취했는지, 풀린 눈으로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지도 않은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다나.
“교수. 아까 할 얘기 있냐고 물어봤지?”
“음.”
“맞아. 할 얘기 있어. 그리고, 당신도 나한테 할 얘기가 있을 거야. 분명히.”
“….나?”
“그래. 너. 박교수.”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내 속내를 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당신 친구들도 전부 바보인 줄….알아? 당신이 접속기에서 나온 그 순간부터, 조급해하고 있는 것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
“….다나, 그건-”
“서두르고 있잖아. 우리에게 얘기하지 않은 뭔가가 분명히 있잖아. 너는, 당신은 꼭, 마치 멀리 떠나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두는 사람처럼, 그렇게 서두르고…. 있잖아.”
스르륵-
차박. 차박.
털썩.
한 손에 술병을 쥔 다나가, 비틀거리며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쓰러지듯 주저앉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받쳐 들었다.
쓰러지듯 품에 안긴 그녀가, 나를 올려보았다. 풀린 눈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가지마. 그렇게 힘들게, 겨우 나왔잖아.”
“그런 게 아니야.”
“황무지가 저쪽처럼 아름답지도, 생동감 넘치는 세상도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순간도 있잖아. 지난 3일간, 우리가 겪어왔던 것처럼.”
“다나….”
그 거부할 수 없는 날것의 감정이 나를 잡아당겼다.
“지난 사흘간…. 우리, 참 많이 얘기했지? 힘들었던 날들, 부끄러웠던 순간,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꿈, 이상, 미래….”
다가오는 손끝.
“여기까지는, 벡스나 이안씨도 알고 공유한 것들이야.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소중한 기억. 약점과도 같은 것들.”
달아오른 숨결 속의 알코올 향기.
“하지만….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보다 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공유할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당신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사라락.
“알려줘. 당신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준 것보다 더. 앞으로의 당신, 앞으로 나와 함께할 박교수에 대해서.”
“….그래.”
아아,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예상했지만. 적어도 모래 바람이 부는 다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에서, 밖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마주하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초짜한테 너무 허들이 높잖아.
달아오른 입김에, 웃음기 어린 나의 숨결이 섞여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라도 한 것 같은 멘트십니다, 다나양?”
“….노루 언니가 가르쳐줬어. 이것 저것.”
“하하하, 신이시여.”
“….혹시?”
“이안씨가, 분명히 안전할 거라고 했어. 주변의 위협요소는 미리 정리해뒀다고.”
“아아, 노루, 도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신이시여. 로하람이시여.
눈앞에 이 여자마저 공범이었답니다. 세상에.
그녀의 귀여운 고백과 함께 둘의 머릿속에 그 누구보다 이쪽 방면에 빠싹한 누군가가 떠오른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몸을 밀착한 상태로 웃는 것은, 퍽 흥분되는 경험이었기에.
탁.
나는, 지금의 박교수를 만들어준 강철과 같은 이성의 스위치를 내렸다.
춥지 않은 밤이었다. 단순한 체온을 넘어, 오래도록 잊고 있던 온기를 떠올리게 하는.
품 안에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과 온기 속에,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기를 빌게 되는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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