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422
Chapter. 18. Railed (21)
****
파르다우에서 동쪽으로 쭉 가면 한창 공사중인 던전 토벌지가 나오고, 그 길로 더 가면 스트라우그 요새도시가 나온다.
“정차-! 정차하쇼~ 받침대 들어갑니다~”
철컹…. 철컹….
푸쉬익!
하지만 우리가 타고온 선로는 그보다 한참 낡은 것으로, 아주 오래전 스트라우그 요새도시도 없던 시절에 폴그라드 섬 끝자락의 오튼 힐과 파르다우 요새를 이어주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옛 선로였다.
우리가 마주한 중계 스테이션은 그렇게 사장된 옛 선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작은 중계지, ‘순례자의 등대’였다.
“하하하하! 댁들이 아직 살아있는걸 보니, 귀족 가문의 추격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구만! 별일 없었습니까 볼테우스님!”
“오랜만이군. 베다르.”
“다비. 넌 이게 별일 없는 꼴로 보이냐? 응?”
“크하하핫! 마도열차가 깨끗하게 들어오면 그게 이상한거지! 안 그렇습니까?”
“어이~ 베다르~!”
“벼락 맞은 산이시여! 게리?!”
중마력탄을 쓰는 거치형 아케인슈터에 온갖 중무장을 떡칠한 마도열차를, 그것도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우리 레일 쉽을 별도의 검사 하나없이 스테이션에 들여보낸 남자는 차례로 내리는 레일 쉽 사람들과 반가운 해후를 나눈 다음, 마지막으로 내리는 나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어…. 누님? 레일 쉽에 사람이 늘었네? 어쩌다가?”
“볼테우스가 종자로 납치해온 애야. 이름은 교수.”
“교수? 아~ 성자님 이름 쓰는거면 얘도 고아구만? 고아면 레일 쉽도 탈만하지.”
“그…. 사정이 좀 있어서. 다른 역무원들은 어디갔냐? 따로 얘기할게 좀 있어서 열차 수리에 붙여뒀음 하는데.”
작다고는 해도 열차의 중계지.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한 스테이션의 분위기에 나엘다가 날을 세우자, 베다르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례를 쳤다.
“아이고, 말도 마쇼. 지금 양쪽 도시에서 토벌지 공사한다고 아주 있는 인력, 없는 인력 쥐어짜서 다 대려갔지 뭡니까? 우리 애들도 전부 끌려가서 땅파고 소금치고 있지. 원래 나도 끌고가려는걸 ‘아무도 없으면 스테이션은 누가 관리하냐, 마법통신 중계는 누가하냐’ 면서 배째라 드러누워서 남은거요.”
“그럼 우리 빼고 아무도 없다 이거지?”
“예. 아주 조용~합디다.”
“잘됐군.”
베다르의 말에 알게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기관사들이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들어가서 쉬십시다. 응? 스테이션에 사람이 없어서 남은 물자가 좀 되니까, 좀 쉬고 배도 채운 다음에 이야기 합시다.”
“그럼, 잠시 신세 좀 지도록 하지.”
“어~ 고맙다, 다비!”
“흐흐흐흐. 알면 됐수다. 어이~ 들어들 가! 뒷정리 내가 할게!”
오랜만에 보는 동료의 얼굴과 안전한 쉼터가 다들 반가운 얼굴.
비틀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 위로, 전봇대 같은 높은 기둥이 마력광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어디보자…. 얘 이름이 교수라고?”
“교수가 아니라, 교수 브라스톨 ‘님’입니다.”
“그래그래, 열차에 보모까지 태워서 다니는 아주 대단한 귀족님이시고. 그런 주제에 반역자 집단이나 다름없는 레일 쉽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도 받으셨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는 분이구만 그래?”
잠시 쉬고, 밥먹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체력을 회복한 다음.
기관사들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레일 쉽의 정비에 달라붙었고, 그걸 옆에서 구경하던 나는 카트레아와 함께 이 수다스러운 수염쟁이한테 넘겨졌다.
하긴. 기차 바퀴와 축 사이에서 으스러진 인간이었던 것들을 빼내는 작업을 아홉 살 난 애한테 보여주고 싶진 않겠지.
베다르라고 불린 남자는 작은 수화기 같은 것을 계속 바꿔가며 귀에 대고 있었는데, 베다르는 폴그라드 여기저기서 날아온 마법 통신을 기록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새 선로가 생긴 뒤로 이곳 ‘순례자의 등대’ 스테이션은 거의 쓸 일이 없어졌지. 그래도 몇몇 중요한 역할 덕분에 폐쇄까진 안갔는데, 그 역할이 바로 마법 통신 중계지 역할을 하는거야. 밖에 커다란 쇠기둥 봤지? 막 번쩍거리는거.”
“예.”
“그게 멀리서 날아오는 마법 통신을 잡아내는 마도구란다. 마법 통신은 통신 거리가 멀어질수록 대기 마나 때문에 불안정해지거든? 그래서 일정 거리 이상이 되면 아예 이런 중계지로 통신을 보내버리지. 그럼 내가 그걸 듣고, 받아적은 다음-”
후후-
[아아, 중계마법 통신. ‘순례자의 언덕’에서 온 중계 마법통신입니다. 파르다우의 상인 푸아름으로부터, “이번에 보내준 차 버섯의 셋 중 하나가 불량품이다, 이런 식이면 다음 계약은 없던 것으로 치겠다.” 이상입니다.]“-이렇게, 마도구를 통해 다시 한번 통신을 보내는거지. 이 스테이션은 이런 역할이라도 있는 덕분에 아직 남아있는거야.”
“중계 통신이라….”
“통신 마도구의 하루 충전량도 있고, 사람이 분류하는 것이다보니 마법사가 직접 보내는 통신보다는 한참 늦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중계 스테이션이 있으면 훨씬 멀리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지. 꽤 중요한 역할이라고?”
베다르는 셋 정도 더 있던 역무원이 전부 공사현장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이 중요한 일을 혼자 떠맡게 됐다며 툴툴거렸다.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그는 레일 쉽의 역무원들과 눈이 마주칠때마다 크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일 쉽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말해 뭣해. 서로 목숨 빚을 진게 거미줄처럼 얽힌 놈들인데. 이 자리도 나엘다 누님이 연줄로 마련해준거야. 안전하고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이렇게 열차 들어오는 것 보면서 옛 추억에도 잠길 수 있는, 그야말로 은퇴 기관사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외딴 곳에 처박혀있는게 외롭고 심심하긴 하지만.”
베다르는 방금 들어온 통신 몇 개를 휙휙 넘기더니, 내쪽을 돌아보며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슬슬 레일 쉽 쪽으로 가봐도 좋을거다. 이게 남의 통신 중계하는거라 나름 비밀 유지 서약같은 걸 하거든? 마법 계약이라 함부로 어길 수도 없어요.”
“아, 예.”
“지금 쯤이면 어느 정도 흉한 건 정리됐을테니까, 나가서 짐 싣는 거라도 좀 돕고 있어라~!”
“….”
찰칵-
그렇게 나를 내보내고 중계 통신에 전념하는 베다르. 나는 조금 굳어진 얼굴로 레일 쉽을 향했다.
****
“베다르? 재밌는 놈이지. 생긴 것 답지않게 호들갑 떠는것도 그렇고.”
“다비말이냐? 쟤가 지금은 저렇게 실실거려도, 한때 ‘독사 다비’하면 기관사들 사이에서 모르는 놈이 없을 정도로 독종이었다고.”
“베다르하면 그거지. 오튼 힐이었나? 도시 출입허가 때문에 선로마을에 하루 머무를 때 재수없게 땅굴벌레가 튀어나왔거든? 그때 샤워하다 통째로 삼켜진 베다르가 쥐고있던 빵칼로 배를 째고 나왔었지. 알몸의 수염쟁이가 땅굴벌레를 째고 나오는데…. 놀래서 그만 쏴버렸어. 아직도 허벅지에 그때 내 총에 맞은 흉터가 남아있을거다.”
“베다르? 그놈이야 뭐….”
“다비는 누가 뭐래도….”
.
.
.
.
탁.
“수상해.”
“….이 마른버섯 포대가요?”
“그거 말고, 지금 상황이 전부 다! 카트레아는 뭔가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으음…. 저한텐 전부 이상한걸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헤죽거리며 돌아다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식량창고에 들어와서야 얼얼한 얼굴을 풀며 카트레아아게 털어놓았다.
지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레일 쉽 사람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베다르에 대해 물어봤다.
들려온 대답은 하나같이 좋은 얘기 뿐. 파르다우에서는 정거장 밖으로도 안 나갈 정도로 조심스럽던 기관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베다르는 재미있고 좋은 놈이란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열차에서 내렸을 뿐, 지금도 레일 쉽 소속처럼 생각한다고.
“뭐가 있는데 분명히. 뭐가….”
들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다. 무른 땅은 위험천만한 곳이며, 기관사들은 적어도 한번씩은 서로에게 목숨 빚을 지고 있었으니까.
이유도 그럴듯 하고, 딱히 눈에 띄게 의심스러운 점도 없고. 베다르는 처음 환대 이후 종일 통신 마도구가 있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별다른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도 없었다. 뭔가 기다리고있나 싶어서 옆에 붙어있기도 했지만, 휴식이 끝나고 보급물자를 싣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의심하세요 도련님?”
“감이야.”
“예?”
“그…. 어떻게 설명 못할 그런게 있다고! 뭔가 쨍- 한 느낌이라거나,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거나 그런거!”
“도련님, 혹시 영혼술에도 관심있으세요?”
“그런게 아니라….! 그…. 아무튼 뭔가 묘하다고!”
내 25년 인생에 이런 쎄함 때문에 목숨 건진게 한 두번이 아니거든? 합리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서 날아온 나라지만, 그…. 뭔가가 있긴 하단 말이다!
옛날에 하이드도 말했잖아. 나는 몰라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내가 넘겨버린 정보가 숨어있는거라고. 같은 의식을 공유하는 나와 하이드가 토의할 수 있는 것은, 하이드가 그런 무의식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뭐지? 도대체 뭣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안한거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한적함’ 그 자체였다.
기관사들은 열차 사이에 단단히 틀어박힌 옷가지 때문에 곡소리를 내고 있고, 엔진을 들어내는 볼테우스에게 나엘다가 물 아깝다, 차좀 작작 마셔라 같은 잔소리를 하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나사 조이는 소리와 기관사의 흥얼거림이 반주처럼 흐르고 있었다.
‘….왜 한적한거지?’
어쩌면 내 과민반응일 수도 있었다. 던전 토벌전 이후 몇 년이고 쫓겨온 레일 쉽 사람들에겐 어제같은 일이 일상이고, 그래서 이렇게 다들 여유로운 것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 브라스톨 가문 지하에서 본 것들을 떠올리면…. 아무리봐도 이 여유로움은 말이 안됐다.
‘3월드에서도 같은 학파 마법사를 저렇게 몇 명이나 고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4월드에서는 영혼술사 학파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세력중 하나라고 했어. 저렇게 영혼술사를 다수 고용할 경우, 그쪽과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
‘겨우 선로 좀 망가뜨렸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놓아준다고? 어차피 폴그라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뺑뺑이 신세니까 여유를 부리는건가?’
‘….아니야. 그렇다면 지난 몇 년간 나엘다의 협박으로 방치하던 레일 쉽을 갑자기 건드릴 리가 없어. 로드의 파편을 이용한 협박,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볼테우스를 잡아야 할만큼 급해진거야.’
리스크. 그래, 여전히 나엘다의 손에 로드의 파편이 있으니 레일 쉽을 공격하는 것은 분명 리스크를 감수한 위험한 행위다. 다시 말하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레일 쉽을 공격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게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우리가 모를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난 몇 년과 달리 이번에는 브라스톨도 꼭 우릴 잡아 죽여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브라스톨은 우리를 너무 쉽게 놔줬다.’
선로마을 사람들? 몇백 톤짜리 마도열차를 상대로 쇠갈고리와 낫, 싸구려 총기를 든 자살 희망자들일 뿐이다.
성벽 위의 포격? 제대로 훈련받은 브라스톨 가문의 병사 대신 파르다우 시민들이 쐈다. 그들은 이번 ‘희생제’의 수혜 대상이 될 아이들과 어머니가 숨어있는 선로마을을 포격하는데 집중했고, 덕분에 무수한 포격에도 레일 쉽에 적중한 것은 단 두 발 뿐이었다.
‘현실로 따지면 생화학 테러집단 잡는 일에 예비군 몇 소대 정도 움직인 정도야. 왜지? 나를 믿어서? 고작 아홉 살난 사생아에게 나머지 판돈 전부를 배팅했다고?’
그럴 리가. 그정도 병신이 도시를, 그냥 도시도 아니고 복잡한 이권이 얽힌 식민지를 운영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파르다우에서 레일 쉽을 그렇게 쉽게 놔준것도 말이 안된다.
영혼술 촉매와 기타등등으로 얽힌 소년 첩자 교수 브라스톨(9세)가 너무 든든해서 그냥 놔준 것도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말이 되는 방향은 딱 하나.
‘나 말고, 든든하게 믿을만한 다른 쪽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고 있을 경우!’
****
텅. 텅. 텅. 텅.
“어이! 하부 엔진 보고있을 때 복도로 걸어다니지 마! 울려서 귀아파!”
악의없는 욕설 사이로 정비가 끝난 레일 쉽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있었다.
드르륵-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머리칸 바로 뒤, 주로 기관사들이 잠을 청하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작은 서랍.
….달그락!
그 안에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 속, 뼈를 깎아낸 듯 하얗고 둥근 덩어리 몇 개.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가죽 주머니를 철제 부품이 든 상자 안에 넣은 다음 들어올렸다.
텅. 텅. 텅. 텅.
미끌-
“어이쿠야!”
“위험했군. 괜찮나, 조지?”
“볼테우스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놈의 다리가 말을 안들어서….”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무릎이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는 무거운 짐을 옮기지 말라고.”
“저도 아는데, 게리가 이 엔진 부품을 좀 나엘다님 한테 전해달라고, 자기는 어두운 복도를 못 건너가겠다고 부탁해서….”
“게리가 정신이 없었나보군. 내가 옮겨줄 테니 들어가서 쉬고 있도록.”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자신이 들고온 상자를 받아드는 볼테우스를 보며,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기관사.
‘쓸모없어 보이기 싫겠지.’
레일 쉽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남아있는지 알기에, 볼테우스는 무릎을 부여잡은 기관사를 위해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슬며시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쿵!
“아, 볼테우스? 뭐야 그거?”
“게리가 보냈다. 엔진에 필요한 부품이라던데.”
“게리가? 아니 불 없는 곳은 가지도 못하는 놈이 달라고 한적도 없는 부품은 왜….”
의아한 표정으로 상자를 뒤적이는 나엘다는 작은 가죽주머니가 눈에 스치자 마자 상자를 발로 차버렸다.
콰당탕!
“망할! 볼테우스, 떨어져!”
“….”
“볼테우스, 제기랄, 볼테우스!!!”
산산히 흩어지는 부품들과 메아리처럼 울리는 나엘다의 목소리.
순간, 볼테우스는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흩날리는 부품들 속에 섞인 가죽주머니. 어째서인지 가죽 너머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하얀조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기…. 있었구나.』
고막을 긁어내듯 불쾌한 목소리와, 그림자를 빨아들이듯 검게 물들어가는 하얀 조각들.
『자아. 그럼…. 굶주린 자에게, 성찬을.』
까득!
음산한 울림과 함께, 볼테우스의 눈앞에서 나엘다와 열차가 사라지며 한없이 넓은 검은 공간이 펼쳐졌다.
언젠가 한번 마주한 공간. 우연히 유색 파편에 손이 닿았을 때의 그 공간과,
까득, 까드득!
그날 자신의 일부를 뜯어먹은, 이빨 달린 검은 그림자.
‘벗어나야 한다.’
전과 달리 하얀 기운이 일렁이는 그림자는 그의 머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순간. 쉴새 없이 뭔가를 씹어대던 그것이 입을 연 순간, 볼테우스는 그것의 입안에서 잘게 조각난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절대로 잊고싶지 않았던 기억.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높았던 저녁. 나엘다에게 억지로 끌려온 열차 지붕에 나란히 앉아, 맛대가리 없는 버섯 차를 억지로 꾸역꾸역 마시던 순간.
스치는 바람과 저녁 놀. 파편이 앗아간 순간의 색채와, 하나의 약속.
“나엘다….”
“볼테우스, 볼테우스! 내 말 들려? 제발!”
“나엘다….”
음산한 마력이 일렁이는 엔진실과, 그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마주한 엘프. 그리고,
까드득, 까드드드드득!
그의 몸속에서 자라나듯 몸을 뚫고 나오며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파편, 새벽의 조각.
“약속. 약속을….”
볼테우스는 꺼질 것 같은 의식을 붙잡고, 나엘다의 손위에 손을 겹쳤다. 이미 장전까지 마친 라이플. 그녀가 그것을 꺼내어 둔 이유.
철컥!
“빌어먹을. 그러니까 적당히 쳐먹으라고, 애초에 샤드나이트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쫓아온 수많은 추격자와 암살자들의 손에서 나엘다를 지켜낼 수 없었을테니까.
이마에 겨눠진 총구와, 방아쇠 위의 손가락.
“미안….하다….”
끝을 예감한 볼테우스는 눈을 감았다.
“….미안해. 볼테우스.”
“나엘….다….”
“씨발.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엘프는 엘프인가봐.”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안돼.’
“엘프는 쉽게 변하지 않아. 특히나 그 내면은.”
‘안돼.’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아 변하게 되면, 죽을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한데.”
볼테우스는 굳어가는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나엘다의 눈물을 느꼈다. 기도하듯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그녀의 입술도.
“그래서, 엘프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반려자를, 절대 저버릴 수 없어. 어떤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미안해. 볼테우스.”
굳어버린 몸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볼테우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를 잡아먹은 악의어린 영혼의 의지로.
“안….돼….”
“나도, 엘프이긴 한가봐.”
새벽빛 파편으로 뒤덮인 팔은 그 순간을 음미하듯 천천히. 나엘다의 목으로 다가갔다.
어째서인지, 볼테우스는 나엘다의 목을 붙잡은 손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경련하는 피부.
헐떡이는 숨.
빼앗긴 손등으로 떨어지는 눈물과,
우득.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러지는 느낌을.
“안돼….”
어느새 빼앗긴 몸은 그의 의지하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몸에 흡수된 파편들이 저마다 개성을 틔워내며 기괴하게 뒤섞인 몸.
엔진실이 비좁도록 자라난 몸집과, 품에 안긴 누군가.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나간 그의 연인과, 손 끝에 남은 선명한 감각.
.
.
.
.
.
.
“아.”
꽈드드드드드드득!
그리고, 끔찍하게 뒤섞인 무언가가 레일 쉽을 찢어발겼다.
****
화아아악!
어둑한 식량창고의 작은 환기구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에 꼬리칸에서 볼테우스가 보여준 빛. 그때와 달리 몇 배나 밝은, 눈을 태워버릴 듯한 새벽의 빛.
‘뭔가 이변이 생겼다.’
들고있던 포대를 내려놓고 창고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긴 안가시는게 좋을겁니다, 브라스톨의 도련님.”
“베다르…!”
역무원장이자, 레일 쉽 사람들과 몇 년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베다르.
“폭주한 샤드나이트는 악령에 가까운 존재라, 제일 가까운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거든. 되도록 도련님을 살리는 쪽이 좋다니까, 웬만하면 여기 있어 달라고.”
“배신했군….”
“배신이랄 것 까지야. 나는 거기서 나온 사람이니까, 굳이 따지면 아직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매수된 조지 녀석이 배신자지. 난 그냥 협력자 수준이라고.”
철컥!
베다르는 식량창고의 문을 걸어잠그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다들 사정이 있는거니까. 아, 도련님. 파르다우에서 온 메시지 읽어줄까? 저쪽은 좀 걸릴텐데.”
꽈아앙!
식량창고가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폭음. 금속 찢어지는 소리와 비명.
‘무기. 무기로 쓸만한 게…!’
베다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동안, 발치에 걸린 나무 쐐기를 조용히 손에 들었다.
“아, 여기있군. 에에, 어디보자….”
‘….지금!’
베다르의 두 손이 메모지를 잡고, 시선도 그 위로 향한 순간.
꽈악!
“….어?”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달려들기 직전, 뒤에서 나를 안아드는 손길이 있었다.
“….카트레아?”
“여기 계셔야해요…. 도련님.”
“너 설마….”
“그게 도련님의 삶이 이어질, 유일한 방법이에요.”
꽈아아악!
‘무슨 힘이…!’
작은 몸이 으스러질 듯 꽉 껴안는 카트레아와, 내 손에서 떨어지는 나무토막에 시선을 던지는 베다르.
“카트레아, 제발!”
“….”
아무리 발버둥쳐도 카트레아는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일방적인 학살의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
때 까지.
****